2019-12-18

신채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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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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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申采浩
단재신채호.jpg
대한제국 성균관 예하 강독관
(大韓帝國 成均館 隸下 講讀官)
임기1905년 3월 ~ 1906년 1월
군주대한제국 조선 고종 이형
신상정보
출생일1880년 12월 8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리산리
(現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사망일1936년 2월 21일 (55세)
사망지만주국 펑톈 성 다롄 부 뤼순 구
(現 중화인민공화국 둥베이 지방 랴오닝 성 다롄 시 뤼순커우 구)
학력성균관 수학
경력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소설가
前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최고위원
정당무소속
부모신광식(부), 밀양 박씨 부인(모)
형제신재호(형)
배우자박자혜(재혼)
풍양 조씨 부인(이혼)
자녀신관일(장남)
신수범(차남)
신두범(삼남)
친인척신향란(조카딸)
박원순(장인)
신성우(할아버지)
신약우(큰할아버지)
신명휴(증조할아버지)
별명는 단재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가명은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종교무종교(무신론)
웹사이트단재닷컴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성장[편집]

歪曲歷史的韓國小丑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리산리(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세조 때의 재상 범옹 신숙주의 18대손이었지만 일찍이 몰락하여 그의 11대조 때부터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1728년 무신난에 연루되어 그의 가계는 한미하게 몰락했고, 증조할아버지 신명휴가 첨지중추부사에 올라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종증조부 신국휴가 184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에 진출해 가세를 일으켰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1867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 정언사헌부장령 벼슬을 역임했고, 신성우의 형 신약우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신성우는 1899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신광식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38세에 사망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1895년(16세)에 첫 번째 부인 풍양 조씨와 결혼하였으나 1909년에 어린 아들 신관일(申貫日)이 죽자 사실상 이혼하게 되었다. 형 신재호는 순흥 안씨와 결혼했지만 27세의 나이로 딸들만 남기고 요절하였다. 후에 신채호는 조카딸들을 친딸처럼 양육하였지만 의사충돌이 생긴 조카딸 신향란과는 1919년 이후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

성균관 수학[편집]

할아버지 신성우는 손자 신채호의 영특함을 보고 근처 읍내의 서당으로 보내다가 자신의 친구이자 먼 친척이며 구한말 관료였던 신기선에게 신채호를 소개해 주었고 신채호는 신기선의 서재에서 많은 서적을 읽으며 개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898년(19세)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4년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성토하는 성토문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작성되자 이에 연명하기도 했다.

애국계몽운동[편집]

언론 활동[편집]

1905년,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채호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2]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7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 것은 이런 활발한 저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독립운동[편집]

망명[편집]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들렀다가 중국 안둥을 거쳐 칭다오에 도착했다. 칭다오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자,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 1년간 머무르며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다.

언론 활동[편집]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서간도 일대의 고구려 고적을 답사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서 체류하면서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여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임시정부 참여[편집]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과거 위임통치청원 전력을 지적하며 그를 반대하였고, 8월에 시작한 6회 의정원회의에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라고 크게 성토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결별하였다.
이어서 그는 《신대한》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여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우선론, 노선의 전투성의 미흡,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쟁, 여운형의 도일 등이 비판의 이유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정면 반박하였고, 조선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부음과 함께 조선인 살상과 경제침탈을 비판하였다.[3] 이 시기에 신채호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을 취하하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1920년 《신대한》이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가서 제2회 보합단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유학 중이던 28세의 박자혜와 결혼하였다. 박자혜와는 3년간 함께 생활하였는데 1922년에 생활고 때문에 아들 신수범과 함께 귀국시켜야만 했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고 김정묵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12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한 무역회사인 동제사(同濟社)에도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후원하였다.

임정 탈퇴와 무장독립 운동 가담[편집]

5월 10일 이회영, 박용만과 함께 10여 개 무장항쟁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를 열고, 만주 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전쟁을 통일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할 '통일사령부'를 임시정부정 군무부 산하에 설치할 것인지의 여부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해 이승만과 격렬히 싸우고 법정투쟁까지 벌인 하와이 대표단의 박용만은 이승만의 미국 위임통치 문제를 공개적으로 폭로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이 실질적인 독립운동 대표들인 무장항쟁단체 앞에서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함께 활동하던 박용만에 의하여 폭로되자 대표단 전원은 이승만을 불신임하게 되어, 이승만이 사퇴하지 않은 상해 임시정부 자체를 만장일치로 불신임하였다. 임시정부 당국에게 군사통일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및 의정원을 불신임하고 무효를 선언하고 이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결정했다.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는 신채호를 주간으로 하여 《대동》(大同)이란 주간지를 발행했다.
안창호와 김규식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안을 받아들였으며, 1922년 임시정부의 쇄신을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안이 4월에 가결되었는데,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고 가족을 떠나보낸 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70개의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국민대표회의를 가졌는데, 이때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주동자로서 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반일활동 금지에 따라 활동이 중지되었고, 신채호는 자유시 참변과 소련이 창조파 임시정부를 불인정하자 공산주의에 대해서 매우 실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1924년 3월 북경 교외의 관음사에서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25년까지 6개월간 유마경, 능엄경을 연구하였고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국사 연구[편집]

그는 국사 연구를 위해 북경 중법대학(中法大學) 교장이자 중국 국민당 원로가 되는 이석증(李石曾)에게 대학 도서관 열람의 편의를 부탁하여 사고전서 등에 출입하며 중국어 역사 서적을 읽고 본격적으로 국사 연구를 시작하였다. 1922년에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 선생의 역사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조선 고대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을 게재하였고,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으로 묶여졌다. 또한 1925년 시대일보에 ‘부를 수한 차대왕’,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년대에 대하여’를 투고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무정부주의 활동[편집]

신채호는 1923년 이후에 이회영과 유자명, 그리고 중국인 이석증 교수와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하고 만나서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1927년 중국 텐진에서 무정부동맹동방연맹이 조직되었는데 신채호는 이필현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본국에서 좌우합작을 위한 신간회가 조직되자 홍명희와 안재홍의 권유로 이에도 참여하였다. 이무렵 무정부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흑호의 일석담’,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1928년 4월 그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5월 8일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위한 위조화폐를 가지러 5월 8일 타이완의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옥고와 최후[편집]

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은 “보호자가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했으나, 그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신채호는 가석방을 거절하였다. 1936년 2월 18일만주국 펑톈 성 다롄 부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인 2월 21일 감방 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뇌일혈 및 동상영양실조,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이었다. 향년이 57세였다.

사후[편집]

  • 신채호의 유족들은 1919년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을 놓고 이승만을 ‘매국노’라며 격한 반발을 했다.
  • 신채호의 아들 신수범은 일제 강점기 때 은행원으로 일했다.[4] 하지만 광복 후에는 직업을 잃었다. 신채호가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신수범은 자유당 정권 하에서 신변을 위협받았다.[4]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한다. 신수범은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신수범은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으로 하야한 이후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4]
  •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훈 2등)을 추서하였다.
  •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신채호를 비롯한 무국적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등록부’에 등재될 수 있도록 하는 관련 법률을 개정,[5] 서울가정법원이 “국가보훈처의 신청을 받아들여 신채호 선생 등 60여 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허가하였다.[6]

사상과 관념[편집]

서울대공원에 있는 신채호의 동상

역사관[편집]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신채호와 박은식을 통해 정립된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특히 역사관을 낭가사상과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논설, 시, 소설 등에서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라고 주장했고 애국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을지문덕최영이순신 3대 영웅전을 썼고, 무력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영웅이 나와서 이 나라를 구하는 데에 적극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7]
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一天年來日大事件)이라고 주장했다. 김부식의 사대적이고 중국 의존적 사관으로 인해 조선역사상에서 만주벌판이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으며,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가진 정치가이자 승려로 생각했다. 또한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역사서로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관[편집]

신채호는 각 독립, 계몽운동에 대한 평을 남겼다.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운 궁궐 내의 일시적 활극이며, 의병운동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과 운동이며[8], 민중적 각성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안중근 열사의 폭력적 행동은 열렬했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다[8] 며 비판하였다. '3.1 운동은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보였지만 폭력적 중심을 갖지 못했다고[8] 비판하였다.

독립운동가[편집]

무정부정의자(아나키스트)로 동방 아나키스트 연맹에 참여하였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과 민중 중심으로 민중을 혁명의 본영’으로 규정하고 테러와 폭력을 인정하였다. 말년에는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였다.

연보[편집]

가족[편집]

집안어른들의 강요로 풍양 조씨와 결혼하였으나,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신관일이 우유에 체해서 병사한 일을 계기로 이혼하였다. 북경에서 박자혜와 재혼하여 수범과 두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신두범은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후 1942년 영양실조로 죽었고, 1944년 박자혜도 병사하였다.[13]
차남 신수범은 1945년 북간도로 이주한 직후 해방이 되자 다시 평양으로 이주했다. 신수범은 1950년 남하, 거제도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 1953년 풀려났으며,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에 정착했다. 신수범의 다른 자녀들은 북한에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1991년 자신이 신수범의 아들이라고 하는 남자가 이덕남을 찾아왔으므로, 신수범의 묘에서 뼈조각을 꺼내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사기꾼임을 밝혀냈다.

저서[편집]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홍명희는 1924년 ~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 1930년 6월에 ‘조선사연구초’를 출간하였고, 조선일보의 사장 안재홍은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를 1931년 6월부터 103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또한 조선상고문화사도 이어서 연재하였다. 그는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저술[편집]

소설 창작[편집]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과 같은 환상적 기법의 우화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그밖에 조선일보와 독립신문, 동아일보 등에 기고한 몇편의 장,단편 소설이 전한다. 소설에는 주로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단재신채호전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독립기념관, 2008
  2.  김삼웅, 《단재 신채호 평전》, 시대의창, 2005
  3.  2009년, 진관사에서 《신대한》 1~3호가 발견되었다.
  4. ↑ 이동:   “독립군 할아버지 저는 배를 곯아요” 시사IN 2008년 8월 12일자
  5.  신채호 선생 등 무국적 신세 면한다 :: 네이버 뉴스
  6.  심훈 (2009년 3월 18일). “독립운동가 62명 100년 만에 '호적 생긴다'. 노컷뉴스. 2009년 3월 18일에 확인함.
  7.  "나의 권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보호할 따름이오. 나의 권리가 이미 떨어졌거든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찾아 올 따름이오..."-《을지문덕전》
  8. ↑ 이동: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330
  9. ↑ 이동:    강만길 (1990년 9월 1일). 《신채호》.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255~267쪽쪽.
  10.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11.  권립, 김성룡, 제5회 단재 신채호의 북경 유적지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중앙인민방송
  12.  계몽사에서 발행한 위인전집 《신채호》편에 따르면, 재혼한 부인 박자혜 여사와 두 아들(단범, 수범)이 다녀간 뒤, 1시간 뒤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13.  단재의 가계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14.  [Welcome to Why?] 신채호 선생은 왜 60년 넘게 무국적이었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15.  항일운동가들을 구해낸 고 최용수교수[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흑룡강신문
  16.  단재의 영어공부법 에 게재된 '단재 일화'에 따르면, 신채호는 우사 김규식과 춘원 이광수에게 배운 영어실력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토마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같은 영문서적들을 읽고 해석하였다고 한다.

참고 문헌[편집]

  • 《단재 신채호 평전》, 김삼웅 저, 시대의창, 2005
  • 《단재신채호전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독립기념관, 2008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2001)
  • 안병직, 《신채호》 (한길사, 1980)
  • 신용하,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한길사, 1984)
  •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형설출판사, 1986)

외부 링크[편집]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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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채호 (申采浩)
출생일
1880년 11월 7일
출생지
조선 충청도 회덕군 산내면 도리산리[1]
사망일
1936년 2월 21일 (향년 55세)
사망지
만주국 펑톈 성 다롄 부 뤼순 구 뤼순 감옥
직업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
가족
증조부 신명휴
백조부 신약우
조부 신성우
부친 신광식
모친 밀양 박씨
형 신재호
부인 풍양 조씨(이혼), 부인 박자혜(재혼)
장남 신관일, 차남 신수범, 삼남 신두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수상 및 서훈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통령장 (1962년)

1. 개요2. 계몽 운동과 독립 운동3. 역사 저술4. 사상과 정신5. 그 외의 부분들6. 오늘날의 신채호

1. 개요[편집]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제1장, "역사의 정의(正義)와 조선역사의 범위" 중
"역사를 쓰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되는 한 종족을 먼저 드러내어, 이것을 주제로 삼은 후에 그 정치는 어떻게 흥하고 쇠하였으며, 그 산업은 어떻게 번창하고 몰락하였으며, 그 무력(武功)은 어떻게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그 생활관습과 풍속은 어떻게 변하여 왔으며, 그 밖으로부터 들어온 각각의 종족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다른 지역의 나라들과 어떻게 교섭하였는가를 서술하여야 이것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독사신론(讀史新論)》 "서론(敍論)" 중
신채호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사학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이다. 본디 영웅주의적 민족주의 성향을 짙게 띄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영웅사관과 민족주의에서 탈피하여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성향(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으로 사상의 변화를 보였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2] 호는 단재(丹齋)·단생(丹生)·일편단생(一片丹生)이다. 충청도 회덕군 산내면(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출신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다. 특히 '한놈' 등은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서 쓴 필명이다.

그가 쓴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통하여 개항기 및 독립운동기 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체성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만주 땅이 한민족의 땅임을,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그의 사학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교조주의적이며, 부정확한 사료 분석 및 자의적이고 왜곡된 해석 등으로 비판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대부분 한국 사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신채호는 자신이 주장하는 폭력혁명론 이외에 외교론, 실력 양성론, 군사적 무장투쟁론 등 모든 의견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2. 계몽 운동과 독립 운동[편집]

1897년[3]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4]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이전부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실패에 좌절했던 그였지만,[5][6]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기 시작한다. 〈황성신문〉 언론인 및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로 활동했으며, 〈이태리 건국 삼걸전〉(가리발디, 마치니, 카보우르), 〈을지문덕전〉 등을 지어 민중에게 자주 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진회의 성토에도 앞장섰다.

국권 피탈 즈음해서 1907년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 국외로 이주해 만주연해주 등지를 다니며 독립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견문을 쌓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철의 대종교(당시는 단군교)와 연계가 있었는데, 이후 나철이 사망하고 2대 교주 김교헌이 종교 체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대종교를 운영하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하고 주필로 일했다. 이후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북경에 체류하면서 사고전서를 보기도 하고,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을 쓰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중의 힘을 자각하게 되면서[7] 이후 그간의 자신의 민족주의, 영웅중심주의 사관[8]을 버리고 아나키즘으로 본격적으로 전향하게 된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이에 극렬히 반대하며 재선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 재선출에서도 이승만이 당선되자 신채호는 임시 의정원에서 퇴장해 버린다.[9] 이후 외교론이 임시정부의 주요 방안으로 자리잡자 신채호는 임시정부 조직에서 빠지고 임시정부 집권세력의 대항세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 정면으로 맞서 〈신대한〉을 발간했다.[10]

이후 신채호는 이승만 등을 지속적으로 가열차게 비판한다. 위임 통치 청원 사건으로 촉발된 임시 정부 분열 사태 후 신채호는 임시 정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문제삼으며 창조론을 더욱 거세게 내세우며 임시 정부를 갈아 엎어버리려고 했지만, 온건세력인 안창호 세력과 김구 세력과의 대립으로 저지되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도 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의 대표 주자 역할을 하다가 국민 대표 회의 결렬 이후 임시 정부를 탈퇴한다.

같은 해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문)을 짓는다. 여기에서는 '우리 조선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씩을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일본인이 전멸할 것이며, 내가 두명을 죽이면 조선인 한명을 살리는 일이며, 내가 열명을 죽이면 조선인 아홉명을 살리는 길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이외에도 자치론,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11] 등을 차례로 매섭게 비판하며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 혁명, 즉 건설을 위한 파괴를 답으로 제시했다. 특히 뒤에보듯 자치론에 대해서는 "일본이 생불이 되어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명목상의 종주국만을 요구하더라도 생각있는 사람이면 그것이 치욕일 것임을 알 것이다" 라고 일갈했다.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 정치가 '외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으뜸 계책으로 삼아 그 말세에 더욱 심하여... 탄원서나 열강의 공관에 던지며... 민족 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렸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 조약 당시 여러 나라 공관에 빗받돋듯하던 종이 쪽지로 넘어가던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쉽게 요약하자면 우리 주권이 없는 상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외교론의 경우 자국의 운명을 외국에 맡기는 행위로 무장 투쟁을 행할 여력을 깎아먹는 행위로 보았고, 준비론은 현재 조선이 식민지 상태로 모든 부문에서 일본과 열세인데 어떻게 준비를 해서 언제 그 준비를 끝내냐면서 이 두 방법을 미몽으로 규정하고 민중에 의한 폭력혁명만이 답이라는 내용.[12]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 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짝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 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 양성소 -학교- 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스사노 노미코토의 형제'라 하여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이 다스리는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당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팔다리를 달아 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감옥 문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의 폐인이 될 뿐이라. (중략)
설혹 강도 일본이 갑자기 부처·보살이 되어 하루 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돌려주며, 내정과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이름뿐인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받든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중략)
일반민중이 굶주림·추위·피곤·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私債)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되는 강도 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며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굶어죽음'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라 하 길이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의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사·교활·잔혹·포악한 강도 일본이 마침내 구축되는(쫓겨나는) 날이라. (중략)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 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 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 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 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1927년 신간회 발족에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나 크게 마음에 둔 것은 아니었다. 홍명희와 안재홍의 권유로 해외에서 참가한 것. 이 무렵 아나키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흑호의 일석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자금 조달차 대만으로 가던 중 대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아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 통화위조죄였으나, 실제론 아나키즘과 연결이 강했다.

수감된지 8년만인 1936년 옥중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었고, 3일 간 방치되었다가[13] 사망했다. 사실 쓰러지기 직전에 건강이 좋지않아[14] 면회온 가족들이 부호였던 일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날 것을 제안받았으나, 그가 이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는 것을 알고 신채호는 거절했다. 조선일보의 취재와 (추가) 연재 요청도 능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으며, 일본 연호인 쇼와를 사용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왜놈들 발에 시체가 채이지 않게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겼으나, 주변인들 대다수가 단재의 시신을 국내로 가져가자고 주장했고 이에 국내에 안장했다. 이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3. 역사 저술[편집]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저술한다. 이는 기존의 단군 - 기자 - 위만으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고대 사관을 기자를 자르고 단군조선 - 부여 - 고구려로 이어지는 사관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전 역사 서술이 거의 일본 역사서의 번역에 그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에 비해서, 임나일본부설 비판부터 근대적 역사 연구 방법론까지 어지간한 이야기는 여기서 다 나온다. 때문에 최초의 제대로 된 근대적 역사 연구는 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1924년 ~ 1925년 동아일보에 여러 논문을 썼는데, 이를 홍명희 등의 엮어낸 것이 〈조선사연구초〉이다.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역사 글을 《조선사연구초》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게 된다. 이때 연재한 글을 1929년 조선 도서 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조선사연구초》에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法)〉,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 〈삼국지동이열전교정(三國志東夷列傳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天年來第一大事件)〉 등의 제목으로 되어있다.

이는 광복 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들로써 신채호 선생의 핵심 글중에 하나다. 「평양패수고」는 고대의 평양·패수가 오늘날의 평안도 평양·대동강이 아니라 만주 봉천성의 해성현(海城縣)과 점우락(蔪芋濼)임을 고증했다. 또한 신채호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였다. 평양에는 최씨 낙랑국이 있었고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광복 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어서 학술논쟁을 하고 있는 <패수>와 <낙랑군> 문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엇이 상고사에 있어서 쟁점이 될지를 알고 있었다.

1931년 옥중에서 쓴 글을 안재홍이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는데 이는 후에 〈조선상고사〉로 불리게 된다[15]. 〈조선사연구초〉에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 실려있고, 〈조선상고사〉 서문에 그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16][17]이 쓰여져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이자 정신인 낭가 사상을 강조했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삼국사기의 편집자 김부식을 무자비하게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당시 서경 천도 운동을 주장하였던 묘청이야말로 고려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자주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게 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이 사대주의 천하에 억눌리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18]. 또 정여립 역시 높게 평가했으나 프랑스 혁명처럼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한계를 그었다. 단순히 묘청과 정여립을 띄웠다는 사실만 흔히 알려지지만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극도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백제사와 고구려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신채호의 이런 주장 때문에 그동안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삼국사기에 대한 불신이 높았고,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오해는 한국 고대사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점을 역이용해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밀었고, 실제로 과거 한때 우리나라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믿었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이런 오해는 2000년대 이후에 와서야 상당부분 풀리게 되었다. 그동안 역사 학계에서 한중일의 모든 역사들의 교차 검증이 끝나자 삼국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정확한 사서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신라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백제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이 개인적인 감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런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상상했던 것을 마치 사실인양 저서에 적어 넣었다는 점이다. 한때 국사 교과서에 수십년 동안 실려 있었던 백제의 산동반도 진출설도 사실은 정인보와 신채호의 사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수준으로 쓴 것인데, 과거 역사학계가 신채호를 맹목적으로 높이 평가하던 시절, 신채호 선생이 이렇게 쓴 데에는 분명히 무슨 근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교과서에까지 그냥 수록해 버린 것이다. 이후 오랜 재검증 결과 아무리 찾아봐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현재는 완전히 부정되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삭제되었다.

그래서 사학도들에게는 칭송받을 위인이지만 동시에 욕을 먹는 악인이다. 물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남은 고려시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엄청난 사료가 남은 조선시대와는 다르게 사서가 거의 전무한 고대사 연구에 엄청난 족적을 남겼으니 위인이라면 위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신채호의 그늘이 엄청나서 그의 사관을 벗어나지 못한채로 역사를 답습하곤 한다[19]. 이런 민족주의 사관을 극복하는게 사학도들의 목표라면 목표.

이외에 중국 신문에 역사 관련 사설을 연재한 경력이 있으나 을 벌기 위해 쓴 글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이 글들을 쓴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글을 편집자가 약간의 자구 수정[20]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때려치운 일화도 있는데, 호구지책을 위해 글 쓴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는 이와도 연결된다.

당시 도망치듯 중국에 건너가서 집필 활동을 할 때였기 때문에 돈도 별로 없었는데, 그는 매일 중국의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서 선 자리에서 관련된 책을 모두 읽어버린 후, 통째로 암기하여 집에 가서 자신의 원고와 비교 분석하여 다시 글을 쓰는 일을 반복했다 한다. 뭐 이런 괴수가... 어느날 찾아간 집의 귀한 책이 불에 타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복원해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조선 혁명 선언문을 작성할 때는 방에 틀어박혀서 꼬박 1달을 글쓰는 데만 매진했다고도 한다.

이러다보니 황당할 정도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사설 연재를 집어치운 앞의 일화도 그렇지만, 자신이 이전에 쓴 글도 이후에 다시 봐서 마음에 안 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불살라 버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때문에 아까운 원고들 상당수가 이렇게 신채호의 손에서 사라졌다.

이와 같은 어려운 사정 때문인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에 있는 한담에선 "내가 지금 3원만 있으면 무슨 책도 사고 무슨 책도 살 텐데... 아니다. 정말 1원만 있다면 이 책을 사서 공부할 수 있는데..."와 같은 안습한 글귀가 보이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高句麗人金銀財帛 盡於厚葬 環石爲封 亦種松柏)."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원이면 능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여기에 덧붙여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실증주의적인 연구자가 오늘날 실증주의라면 이를 갈며 달려드는 환빠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 할 수 밖에.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놀러가서 몰래 집구석에 매우 적은 돈(조금만 더 크면 의심하니까)을 쑤셔박아놓았고, 단재는 집을 청소하다가 이 적은 돈을 발견하고 '헐 언제 잃어버렸었지... 횡재했구만'이라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주위 사람들도 이정도밖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조금 이른 시기 만주 을 돌면서 답사를 할 때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 장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의외로 신채호는 기자(箕子)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다. 기자가 중국에서 와서 고조선에서 단군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기자의 연대를 그냥 두고 볼 것"이라던가, "그냥 3천 년 전에 기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 나라에 왔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보면 된다"는 것.(출처 : 조선사연구초)

4. 사상과 정신[편집]

생애 초기에는 성균관 박사까지 지낸 유학자였다.

1910년대까지 그의 사상의 특징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영웅주의적 민족주의 사관이었다. 그는 역사의 주체와 동력은 영웅이라고 여겼으며, 뛰어난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영웅사관(英雄史觀)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광개토대왕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외적과 맞서 싸운 군사적 영웅들의 평전 저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해외 영웅전들을 번역하기도 했는데 량치차오의 저서를 번역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 등이 있다. 신채호는 "세계는 영웅의 활동 무대이며, 영웅이야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성신(聖神)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극단적인 영웅사관에 심취했다. 그는 미국의 독립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영웅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 보았고, 이탈리아의 통일 역시 카보우르, 마치니, 가리발디라는 영웅 삼걸의 활약 덕분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통해 '왜놈들을 쳐부숴 줄 영웅'의 등장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강성한 민족주의자로서 신채호는 당시 유행했던 동양 평화론이나[21] 국제법에 의한 믿음도 부정하고[22] 한국의 자강을 강조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대 초기부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에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회 평등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즈음 아나키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음에도 군사정권 시절까지 가족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건 신채호가 평소에 이승만을 대차게 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채호는 그 올곧은 정신으로도 이름이 높다.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고 세수를 했다는 일화는 역사 공부 좀 했다면 한 번 들어봤을 만한 일화.[23] 이외에도 고기가 일본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다 토해버렸다든지 하는 일화가 많다. 또 일상 생활과 일상 상식에 관심이 없어 빨간 속옷을 빛깔이 곱길래(...) 입고 다녔다든가, 앞에서 보듯 방구석을 치우지 않아 지인들이 (그냥 주면 절대 안 받으니) 돈을 몰래 놓아두고 다녔다는 식의 이야기도 많다.

조선의 종교와 이론 수용 자세에 대해서 비판적 자세를 취했는데[24], 이런 어록이 있다.[25]
옛날(舊時)의 도덕이나 금일의 주의(主義)란 것이 그 표준이 어디서 났느냐? 이해(利害)에서 났느냐? 시비에서 났느냐? 만일 시비의 표준에서 났다 하면 청구이담집(靑丘俚談集)에 보인 것과 같이 나무의 그늘에서 삼하(三夏)의 더위를 피하고는 겨울에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인류며, 소를 부리어 농사를 짓고는 그 소를 잡아먹는 인류며, 박 연암의 호질(虎叱)문에 말한 것같이 벌과 황충이의 양식을 빼앗는 인류니, 인류보다 더 죄악 많은 동물이 없은즉, 먼저 총으로 폭탄으로 대포로 세계를 습격하여 인류의 종자를 멸절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류는 이해 문제일 뿐이다. 이해 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廣狹)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기의 이(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익과 손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
속해있는 공동체가 생존한 이후에야 사상과 도덕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러한 외부의 진리와 도덕은 각각의 공동체의 처한 상황에 맞게 바꾸어 적용시켜야 된다는 말. 식민지 시대 지성인으로서 충분히 할만한 얘기다. 비판받을 점도 더러 보일 수 있으나 신채호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올린 논설에서 조선이 망한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는데, 조선은 주변에 경쟁 국가가 없어 경쟁력이 생기지 않았고, 무력을 경시했으며,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지 못해 망했다고 주장했다.[26]

서양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며 유교의 이상이 서양에 먼저 실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7]

5. 그 외의 부분들[편집]

역사학자로서 유명한 신채호이지만, 국문학에 있어서도 한자리 걸쳐있다. 초기의 영웅전 번역 이외에도 다양한 소설을 서술했기 때문이다.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일목대왕의 철퇴'가 대표작이다. 다만 궁예에 대해서 다룬 '일목대왕의 철퇴(그나마 미완성)'을 포함해서, 문학성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단적으로 '용과 용의 대격전'은 짤막한 단편이지만, 당시 심취하였던 아나키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유명한 을지문덕을 재발굴한 인물이다. 일제 시대에는 을지문덕의 명성이 이미 시대가 오래 지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채호가 을지문덕에 대한 책을 펴내고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가정사에 있어서는 힘들게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창기에 결혼해서 아들을 보았으나, 아내가 물도 타지 않은 분유를 먹여서 아이가 죽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이때 분유통을 모두 도끼에 찍어 강물이 온통 우유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후 국외로 나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을 주면서 이혼. 이후에 중국에서 지내는 과정에서 간호사 출신의 독립 운동가 박자혜(띠동갑 차이가 난다)와 재혼(1920년)을 했으나 이 시기도 경제적인 문제로 고생했던 것은 앞서 언급된 바 있다. 박자혜는 3년만에 신채호의 권유로 조선으로 돌아갔고, 아들 신수범만 장수하여 1991년까지 살았다.

말년에는 앞서 계속 언급되었지만, 아나키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음 아나키즘과 연결된 것은 의열단 선언을 쓰는 등 의열단과 연계를 가지던 시기에 아나키스트였던 의열단원들 중 일부와 접촉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연결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신채호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하에서 유교 - 영웅 사관 - 대종교를 포함한 민족주의 - 아나키즘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던 전례가 있다. 독립이라는 목표만 제외하면 도구는 별 신경 안썼다고 보면 단순하다.

그렇다고 아나키즘이 단순히 민족 독립을 위한 도구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말년에 갈수록 신채호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되었으며, 민족 독립이라는 목표 역시 현재 상황에서 시급한 목표였지 그것을 지상 목표로 삼는 전형적 민족주의자의 태도를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사실 민족주의자로서의 신채호에 비해 사회주의자, 나아가 아나키스트로서의 신채호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이루어진 편으로, 김구처럼 무난한(제도권 입장에서) 민족주의자로서 교과서의 단골이던 신채호가 빨갱이(!)와도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대중에게 알려질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이회영도 마찬가지여서 국사책에서 이회영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독립 운동사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신채호는 여러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연하게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근본적으로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 하에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자본주의, 국가주의 등 여러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고민해 온 역사학자 겸 독립 운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재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3.1 운동 당시 봤던 민중들의 힘이었고 그 이전까지 계몽주의자였던 신채호 입장에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독립을 외친 것이 매우 신선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경에 거주하면서 이회영, 유자명 등의 거물들과 교류를 하면서 아나키즘을 수용했을 것이고 나중에는 민족보다는 민중을 더 중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일제에게 억압받던 다른 지역의 아나키스트들과 연계하기도 했다. 사실 계몽 운동을 독립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신채호에게 있어 민중 해방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아나키즘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옳기만 하다면 유연하게 수용했던 신채호의 생각과 항상 대쪽같은 모습은 전형적인 선비라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에서 쓴 글 중 하나가 "외국의 주의가 조선에 전해지면 조선의 주의가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낭객의 신년만필'인데, 이 글이 청소년 추천 서적으로 지정되어서 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애초에 이 글도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이자 러시아 혁명기에 활동한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세례를 받자'는 등 아나키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이다.

6. 오늘날의 신채호[편집]

그의 역사관은 현재 한국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주어, 국사책에도 그의 연구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란 말은 각종 역사 관련 시험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에 하나이며, 2015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B형 지문으로까지 등장하여 국어 B형을 응시한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러나 현대에 여러번 지적되듯이 사관이 지나치게 편협, 교조적인 성격을 가졌고 자금 부족과 사료 획득의 한계로 연구가 부실했던 사례도 많으며 그가 사료로 쓴 도서나 금석문 같은 것이 현대에 와서 존재하지 않거나[28] 잘못 판독한 경우가 꽤나 있어서(대표적인 것이 삼조선설) 그의 주장은 후대의 연구 성과에 의해 대부분 사장되었다. 민족주의가 지나쳐서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부분에까지 왜곡을 한 경우도 존재한다.[29]

하지만 사론(史論), 그리고 구한 말부터 항일 투쟁 시대까지의 민족 사학의 정신은 높이 평가받아, 사학사(史學史)에서는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지며 존경받는다. 그 시대는 지금처럼 전산으로 사료들이 데이터 베이스가 되고 여러 연구가 대규모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상황은 커녕 일제의 탄압에 대놓고 연구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그의 오류를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과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채호의 연구 결과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소리를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일 것이고. 이는 모든 과거의 학자를 바라볼 때 비슷하게 적용되는 사실이다.

그가 워낙 독보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민족사학자이자 항쟁가였기 때문에 후대의 인물들은 현대의 역사관 논란을 타파하기 위해 그의 주장을 차용하는 것이 많다. 주로 재야에서, 심지어 몇몇은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을...

일례로 쥬신이라는 이름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비롯된 떡밥(그는 '주신'을 이야기했고, 쥬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그 후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로 유명한 만화가 김산호가 대쥬신제국사를 편찬하면서 나온 단어이다.).
"그러면 진서나 위서나 남제서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史官)이 매양 국치(國恥)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오직 양서나 송서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하므로, 당 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뺏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조선상고사》

이 부분은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다룬 부분인데, 이에 대한 기록이 남조의 사서에만 나오고 북조의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신채호가 추측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현대까지 학계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 대목이고, 왜 기록이 없는가도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다. 위서의 경우에는 집필진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손댄 부분이 많고, 당 태종 연간에 지어진 북제서 같은 경우도 당 태종이 직접 편찬에 참여하는 등 편파성을 강화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환빠들 중 단재의 주장 일부분만 따서 자기들 주장이 맞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체 글을 보면 그를 보완하는 설명도 많이 했다. 가장 대표할 만한 예가 세조 분서설. 세조가 고대 역사서를 태워 지금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떡밥인데 신채호 주장 전체를 보면 세조가 태운 것은 주로 역술서 같은 책들로 역사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신채호 주장은 당시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역술서 등을 태워 그것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것인데 환빠들은 이를 왜곡한다.[30]

하지만 반대로 이런 환빠들의 특성 때문에 역으로 환빠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최대 무기가 되기도 하는데, 신채호는 천부경 등을 대차게 까기도 했기 때문이다.[31]

분명 신채호는 존경받을 만한 독립 운동가고 사학자이기에 환빠들이 신채호를 방패 삼아 밀고 오면 조심스러워지는 역사학자도 있다. 하지만 비판할 점이 상당히 많은 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작정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 단재 사학의 독단성, 교조주의적인 면모는 학계에서도 비판하며, 특히 두세 번씩 본인의 추측만을 거친 이두 해석법은 정말 평이 좋지 않다. 하지만 대개는 그와 당시 시대의 환경을 감안해[32] 적어도 신채호가 역사에 대한 열정 만큼은 인정받는다.

제국주의 권력자들에게 쫓기며 도피와 망명 생활에 밥 굶으면서도 책 한 권에 목말라했던 역사학자와 등뜨습고 배부른 21세기에 살면서 밥 먹고 인터넷으로 하는 짓이 입만 열면 소위 '강단 사학의 탄압' 운운하면서 뒤로는 오히려 저들이 정치권과 결탁하려고 들는 현대의 사이비지식인, 역사왜곡장사꾼들을 결코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비평도 단재가 처했던 식민지 현실과 20세기 초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부흥이란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시대적 여건에 따른 피해의식과 민족 정체성 붕괴에 대한 위기의식을 대한민국이 엄연히, 그것도 나름 잘나가는 독립 주권 국가이며, 북한 같은 자학적 민족주의에 찌든게 아니라 개방적인 민주사회를 표방하는 현대 사회에서 무비판적으로 집착하는건 전혀 다른 문제다.

단재는 역사학자로서 한 연구 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 또한 20세기 초반 식민지 현실에서 각종 사상적 경향을 변화무쌍하게 넘나든 혁명가로서 본인 자신 또한 역사학적 연구 대상으로서 흥미진진하기 그지 없는 인물이다.

1962년 이미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여러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일제의 호적 등록을 거부한 탓에 일제의 호적법을 계승한 대한민국 국적법상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2009년 4월 14일 그가 일찌감치 탈퇴한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기념해서 겨우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신채호가 이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또한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라는 내용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근거는 없다. 실제 '조선상고사'에는 해당 문장이나 비슷한 문장이 없다.[33]

사실상 신채호의 역사관은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당시의 역학 관계에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주장했던 자주에 대한 열망은 결국 힘이 받쳐줘야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인의 지배는 이전 왕조들, 특히 서경 천도 운동에서 힘을 숭상하고 자주를 외쳤던 세력이 패배하고 사대주의자가 승리했기 때문에 이후 왕조들이 사대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족은 망국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현재 조선인들이 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시간적 흐름 속에서 고민했던 역사학자였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러한 논리 속에서 현재 그의 역사적 해석, 특히 조선 시대에 대한 해석은 비판을 받고 있다. 신채호가 강조한 자주로는 조선 시대가 사대주의에 점철된 국가였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34]

최근에는 신채호가 조선의 중화 사상을 극렬히 비판한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중화는 문명이었고 이것이 단순한 사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는 작업들이 진행 중이고 어느 정도 성과가 드러난다.[35] 그의 주장이 현재 들어서 비판을 받지만 신채호는 대한민국 사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근대 이후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큰 성과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채호는 독립 운동을 역사학과 결부지으면서 그 사상 기반을 다진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1] 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2] 26세손 '호(浩)'자 항렬이다.[3] 대한제국이 수립된 해다.[4]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다.[5] 그럼으로서 성리학을 다 배우기 전에 근대 사상을 접했고, 이는 신채호가 성리학을 탈피한 독자적 이념을 세우는 밑거름이 된다.[6] 배용일, '박은식과 신채호 사상의 비교 연구', 경인 문화사, 2002년, p41[7] 3.1 운동의 진정한 의미 중 하나가 민중의 재발견이다. 영웅과 초인의 등장을 바라던 지식인들이 이전에는 선도해야할 대상으로 취급하던 민중에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바로 3.1운동이었다. 이는 뒤이어 일어난 중국의 5.4 운동에 따라 중국 지식인들이 시각을 교정한 것과도 일치한다. 사실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도 민중 운동으로 확대가 되었더라면 동북아시아의 시민 의식을 일순간에 바꿀 수도 있었다. 그게 군국주의로 빠져서 문제지. 이후 민중을 독립 운동의 동반자로 보느냐 아니면 여전히 교화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지식인들의 행적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8] 민족주의 사학자 시절 신채호는 "세계는 영웅의 활동 무대이며, 영웅이야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성신(聖神)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극단적인 영웅주의에 심취했다. 신채호는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영웅들의 평전 저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9] 이때 회의장 밖에 있던 이봉수(1892~?, 공산주의자로 차후 북한에서 활동하다 전쟁 이전에 숙청당함)와 한위건(1896~1937,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이후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다 옌안에서 병사)에게 강제로 회의장 안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10] 이 때 독립신문은 박은식이 주도했다.[11] 신채호는 기본적으로 무장 투쟁은 긍정적으로 봤지만, 당시의 상황하에서는 독립군 활동으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12] 이 때 외교론을 비판하는 문구 중에 "국내 인민의 독립 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미일전쟁러일전쟁 등의 기회라며 천편일률적으로..."라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역사를 아는 우리로서는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13] 당시 감옥 내의 의료시설이 열악했고 뇌일혈은 딱히 치료법이 없었다.[14] 뇌일혈에 걸린것도 있으나 고문당한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생활로 인한 영양 실조와 동상에 걸려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15] 〈조선상고사〉는 1948년 출간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통사를 목표로 연재했으나 연재가 백제의 멸망에서 끊겼기에 이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16] 아와 비아의 투쟁은 아나키즘이 사회를 인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책세상에서 펴낸 조세현 씨의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를 참고할 것.[17] 원래 주체와 객체(대상)와의 투쟁, 또는 주체와 세계와의 투쟁이라는 관점은 이미 피히테셸링를 비롯해 헤겔 이전의 독일 역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독일의 민족주의 역사 철학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아와 비와의 투쟁은 관점에 따라 18세기 초 독일 민족주의 역사철학의 한국판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타국에서 빌려온 민족주의 역사 철학의 지적 기원은 신채호만이 아니라 민족주의 사학에서도 거의 지적되고 있지 않다. 근데 뭐 애초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고유의 개념인가?[18] 하지만 묘청도 비판했다.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해 묘청의 난은 실패했고 고려의 역사관은 사대주의에 머물렀기 때문에...[19] 일례로 모 대학교 사학과의 1학년 한국사 과목은 신채호가 선정한 5가지 한국사의 터닝포인트를 중심으로 강의하며 언제나 그랬듯 사대가 악이라는 투로 강의한다. 특히나 묘청의 난 강의에는 서경파인 정지상이나 묘청은 고구려의 기개를 보이는 자주성을 가졌지만 신라귀족가문 출신인 김부식은 사대를 바탕으로 신라계승 의식을 가졌다는 식의 강의를 한다. 참고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겠다고 천명한 국가이고 묘청의 난 이후 200년이 지난 공민왕이나 우왕때에도 고토를 수복하겠답시고 요동을 정벌하려든걸 생각하면..[20] 그냥 어조사만 고친 정도인데도 이렇다. 사장이 사과하러 찾아와도 그냥 '돈만 아는 사장놈이 어디서 감히...'라는 태도로 그대로 내쫓았다고.[21] 신채호,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8,10일[22] 김도형, '대한 제국기의 정치 사상 연구', 지식 산업사, 1994년, p83[23] 다만 이는 일종의 과장이란 이야기가 있다. 마당에서 세수를 하려는데 마침 일본인이 지나가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24] 실제로 단재는 이런 말을 실천했다. 독립에 필요하다고 한다면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인 주의 주장도 넘나들었다. 명분이야 뭘 내세우든 어떻냐 나라만 독립시키면 그만이지. 놀랍도록 같은 문구 같은 구조인데 배경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나.[25] 출처는 신채호 본인이 저술한 낭객의 신년만필.[26] 신채호, '엇던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조롱하여',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11일[27] 현광호, '한국 근대 사상가의 동아시아 인식', 선인, 2010년, p223[28] 예를 들어 조선상고사 후반부는 거의 그 책의 해설본이라고 할 만큼 조선상고사에서 자주 나오는 책으로 '해상잡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교차 검증도 전혀 되지 않고 현재 전하지도 않는다.[29] 조선상고사에서 택견이 일본 유술의 원류가 되었다고 적었는데 한국 무술계에 이상한 사이비 무술 가져다 놓고 고대로부터 전해왔느니 하는 식으로 역사 팔아먹는 사람이 꽤 있는지라 무술인 중에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30] 이들은 단재의 이름과 권위가 필요한 것이지 그의 저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환빠들의 거란 한민족 떡밥 - 고통받는 단재.[31]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寛永通寶(관영통보)가 箕子(기자)의 유물도 되며, 십만책의 藏書婁(장서루) 속에서 坐臥(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 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조선사연구초)[32] 당시 형편이 교차 검증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 인정받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대척점으로 훨씬 안정된 형편에서 연구했던 실증 사학의 이병도 또한 '지명의 한자가 뜻이 비슷하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지역 비정한 예가 수도 없이 많다. 발음을 통한 연원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발음의 해석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삼청동이 三淸洞으로 표기한다면 세 가지 맑은 것들이 있는 동이라고 하는 것인데 세 가지 맑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혹은 저 삼청동의 한자가 진짜 본래 뜻이 맞기는 하냐 같은 문제가 생긴다.[33] 누가 먼저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영어권에서는 비슷한 맥락의 명언이 윈스턴 처칠이 했다는 루머로 널리 알려진다.[34] 같은 시기 안확은 조선 시대를 근대 사회 정치 이론에 빗대어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고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현재 그의 연구는 조선 시대를 사회 정치 이론에 끼워맞추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결국 1960년대 ~ 1970년대 이후로 조선 시대사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조선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다.[35] 아직까지 고등학교 교과서 등에는 반영이 되지 않았다. 교과서란 게 학계 연구 성과와는 심하면 수십년 차이난다.

신채호(申采浩)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한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신채호
이칭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유맹원(劉孟源)
분야
근대사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성격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일
1880년(고종 17)
사망일
1936년
본관
고령(高靈)
영역닫기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한 학자.언론인, 독립운동가.
영역닫기개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신광식(申光植)이다.
영역닫기생애 및 활동사항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서호문답(西湖問答)」·「영웅과 세계」·「학생계의 특색」·「한국자치제의 약사」·「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독사신론(讀史新論)」·「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와 『대한협회회보』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家庭雜誌)』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崔南善)이 발행하던, 『소년(少年)』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을지문덕전」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신채호는 28세 무렵, 양기탁·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갑(李甲)·이승훈(李昇薰)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채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尹致昊)·안창호·최광옥(崔光玉)·최남선·박중화(朴重華)·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 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文一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꿈하늘(夢天)」을 집필했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신채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정한경(鄭翰景)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신채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채호는 1922년 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신채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신채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신채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대한매일신보』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소년』에 「국사사론」을 연재했으며, 최영·이순신·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신채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신채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신채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게 되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채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신채호의 한국사 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 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했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했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신채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신채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영역닫기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국가보훈처, 1997)
  •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신용하, 한길사, 1984)
  • 신채호의 민족주의사상 (최홍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83)
  •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1981)
  • 단재신채호선생탄신100주년기념논집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80)
  • 단재신채호전집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을유문화사, 1972)
  • 「단재신채호의 생애와 사상」(이종춘,『청주교육대학논문집』19,1983)
  • 「단재신채호의 민족주의」(안병직,『자유』106,1981)
  • 「단재사학의 배경과 구조」(이만렬,『창작과 비평』15-2,1980)
  • 「단재사학의 배경」(이만렬,『한국사학』1,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0)
  • 「신채호의 애국계몽사상」(신용하,『한국학보』19·20,1980)
  • 「단재사학에서의 민족주의문제」(이기백,『문예진흥』48,1979)
  • 「단재소설에 나타난 낭가사상: 단재신채호전집 소수 9편을 대상으로」(이동순,『어문논총』12,1978)
  • 「단재신채호의 고대사인식시고」(이만렬,『한국사연구』15,1977)
  •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사상: 단재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의 제삼부로서」(신일철,『한국사상』15,1977)
  • 「신채호의 자강론적국사상: 청말엄복양계초의 변법자강론의 서구수용과 관련하여」(신일철,『한국사상』10,1972)
  • 「단재의 사상: 애국계몽사상을 중심으로」(김영호,『나라사랑』3,1971)
  • 「단재사학의 일면: 반도적사관의 비판과 고구려구강론」(홍이섭,『백산학보』3,1967)
  • 「단재사학의 이념」(홍이섭,『세계』2-4,국제문화연구소,1960)
영역닫기집필자
집필 (1996년)
이만열


“신채호 일대기 만들고 평양에서 도쿄에서 ‘뜻밖의’ 단재 토론”

등록 :2018-04-22 05:01수정 :2018-04-2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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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⑮ ‘꿈하늘’ 단재 신채호 일대기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김기팔 작가와 고석만 연출은 1982년 8·15 특집극으로 만든 ‘단재 신채호 일대기-한’(2부작)으로 ‘83 ‘한국방송대상’(국무총리상)을 받는다.“한 사람의 어린 생도가 오른손에 한국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일본헌병이 검으로 그 손을 내리쳐 베어버리자 생도는 왼손으로 기를 집어들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일본병은 다시 그의 왼손을 절단하였다. 그는 여전히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헌병의 머리를 들이 받으면서 쓰러져 죽었다.”(<조선독립운동기> ‘국민’ 제1권 제4호)

1919년 정주 시장터에서의 3·1만세 운동을 보도한 이 기사는 세계만방에 퍼져나갔다. 단 네줄의 단신이었지만 베이징대학 학생구국회의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미쳤다. 베이징대학 문과학장이자 신문화운동의 최고 지도자 천두슈는 이 기사를 보고 울분에 넘쳐 밤새 통곡한 끝에 새벽녘 <조선독립운동지감상>(朝鮮獨立運動之感想)을 집필한다. “3·1운동은 세계혁명사상 신기원을 열었다”, “조선민족 활동의 광영스러움에 비추어 우리 중국민족의 자폐하고 부진함의 치욕이 더욱 두드러진다…보라! 이번 조선인의 활동을!”. 천두슈의 격문은 중국인들을 격동시켜 ‘5·4운동’을 촉발시킨다.



1982년 8·15특집극 ‘한-신채호 일대기’
작가 김기팔 한마디로 이정길 캐스팅
“어이~신파배우! 연기 좀 잘해!”
유행하던 장발까지 싹둑 자르고 ‘열연’



‘광개토대왕비’ 실물 크기 그대로 제작
서오릉 야외촬영 현장 이동작전 ‘장관’



그해 9월 일본피디협회 초청 도쿄 방문
30여명 ‘한’ 시사한 뒤 날카로운 질문



2005년 8월 남북합작 영화 협의차 방북
서울 왔던 김기남 노동당비서 ‘단재’ 관심
“인민대학습당 ‘단재 유고’ 같이 활용하자”



그 영향을 받아 인도에서도 비폭력 저항운동이 싹트며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한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훗날, 3·1운동의 감명을 잊지 않고 한국을 노래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등불의 하나이었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3·1운동의 영향은 인도지나반도와 필리핀과 아랍의 일부지역까지 퍼져 이 지역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82년 ‘단재 신채호 일대기’ 제작을 맡은 김기팔(왼쪽) 작가와 고석만(오른쪽) 연출은 단재가 자란 충북 청원의 고향 마을과 사당 등을 직접 답사하는 등 최대한 고증을 하려 애썼다.그 시대, 이 땅의 대표적 지식인 ‘단재 신채호’. 언론인이자 사학자, 독립운동가로 한평생 꼿꼿하게 살다간 단재의 삶은, 우리 근대사의 먹구름 터널을 무섭게 관통하여 그 기개를 만방에 드높였다. ‘단재 신채호’의 드라마화! 1982년 대한민국에서, 왜? 단재이고, 왜? 고대사인가.

사학자 단재는 말한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우리의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근대사학의 기초가 된 단재의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상고사> 그리고 어린 벗들을 위한 동화 <용과 용의 대격전>은 <꿈하늘>과 함께 단재의 대표적 저서이고 그의 기본철학이다. 노예로 살고자 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지배할 수 있지만,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더 많은 서민들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단재는 정확하게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문화방송>(MBC)은 1982년 ‘8·15’ 특집으로 ‘단재 신채호의 일대기’를 김기팔 극본·고석만 연출의 <한>(恨)(90분짜리·2부작)이란 제목으로 방송하였다. 이 작품은 1983년 ‘제10회 한국방송대상’(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드라마는 단재의 마지막, 뤼순감옥의 비장한 죽음에서 시작해 일대기를 편년체로 담백하게 그려나갔다.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과 밀양박씨 사이 차남으로 출생. 1898년(19살) 성균관 입학. 백암 박은식의 진보적 유학에 감화됨. 1905년(26살) 성균관 박사. 장지연의 초청으로 국한문혼용 <황성신문> 논설위원에 위촉, ‘시일야방성대곡’ 을사늑약 비판 논설로 신문 폐간. 영국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치외법권을 활용해 주필로서 필봉. 1907년(28살) 안창호와 비밀결사인 신민회 취지문 작성.’

1910년 오산학교에 들린 단재를 보고 교사였던 춘원 이광수는 훗날 잡지 <조광>에 이렇게 적고 있다. “주필이나 되는 단재는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붉은색 위아래 내의를 입고, 세수할 때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지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려하면 ‘그러면 어때요’라고 하였다. 남의 말을 듣고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주인공 단재를 누가 연기할 것인가? 정답을 못 찾고 있을 때, 탤런트실 현관에 당대 톱스타 이정길이 지나갔다. 김기팔 작가가 갑자기 “어이! 신파배우!” 부르더니 화들짝 놀라 쳐다보는 이정길에게 “연기 좀 잘해!”. 그가 겸연쩍어 하며 자리를 피한 직후 작가는 내게 말했다. “내일 말고 모레쯤 섭외해봐.” 내일이 아닌 모레 만났다. 8·15 특집극, 캐릭터부터 연출 방향, 스케줄까지…극례를 갖춰 섭외하자 그는 한 순간 고심하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곤 맹렬하게 작품에 몰입했다. 주인공 출연중이던 일일연속극의 촬영 일정도 적극 바꾸고, 단재 분장에 맞춰 장발을 과감하게 싹둑 잘라 모두들 놀랄 정도였다.



단재 신채호 역을 맡은 탤런트 이정길은 1970~80년대 ‘최고의 미남 스타’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도맡아 했다. 1980년무렵 한 잡지에 실린 남성 양복 패션 화보, 왼쪽부터 이정길, 김세윤, 노주현, 오지명. <한겨레> 자료사진‘1908년(29살)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과 금모으기 앞장. 독려의 글을 쓰고, 대구까지 내려가 계몽 연설. 윤치호·안창호·최남선과 청년학우회 발기해 실천적 계몽운동 추진. ‘역사연구가 곧 민족독립운동’이란 자각으로 민족주체사관 정립.’ 이무렵 단재는 스스로 금연을 결행하는데, 이전까지 단재의 담배 피우는 장면이 필수였고, 이정길 자신도 소문난 골초였던 까닭에 돌연한 ‘극중 금연’에 힘들어했다.

‘1910년(31살) 중국 망명과 청도회의 개최, 토지 개혁, 무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 전문기술자 확보 결의. 1913년(34살) 청소년 대상 국사교육과 <조선사> 집필. 만주 일대와 고구려·발해의 유적 답사.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 발전.’



`단채 신채호 일대기'에서 <문화방송> 미술부는 아파트 3층 높이인 광개토대왕비를 실물 크기대로 제작했고, 촬영팀은 고양시 서오릉에서 최대한 실감나는 현장감을 살리느라 밤새 대책회의를 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문화방송 제공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의 광개토대왕릉비는 서기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선친(국강상 광개토 경평안 호태왕)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국내 최대의 비석이다. 고석만과 제작진은 1910년대 단재가 답사했을 때의 위용을 재현하기 위해 애썼다. 중국은 1982년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이 시기 단재는 중국 지린성 지안에서 ‘광개토대왕비’를 만난다. 방송사 미술부 홍순창 디자이너가 ‘욕심’을 냈다. 광개토대왕비를 실물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높이 6미터에 폭 2미터, 야외 촬영을 위해 들고 나가려니 세트실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회사에 보고없이 문을 부쉈다. 미술부는 그날 밤으로 깜쪽같이 수리하기로 하고…. 트레일러형 대형트럭에 싣고 시내를 관통하여 촬영지인 고양시 서오릉까지 이동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쟁이들은 한다면 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현장이었다. 서오릉 농장 넓은 풀밭 언덕 위에 광개토대왕비를 세워놓고 카메라를 대보니 위용은커녕 초라한 바위덩이 하나에 불과했다. 온갖 앵글을 다 동원해도 기대치엔 어림없다. 결국 그날 촬영을 접고 회사로 돌아와 모든 전문가를 동원해 대책을 숙의했다. 우리는 그때 많은 걸 터득했다. 야외에서 조각품과 자연 경관의 관계, 공간감과 시간감, 나아가 역사의 무게감까지 배웠다. 다음날 온갖 장치를 동원해 겨우 촬영을 마쳤지만, 단재의 실증적 감동엔 얼마나 접근했을까 의문이다.

‘1916년(37살) 중편소설 <꿈하늘> 집필. 한국민족이 당면한 현실적 역사적 과제와 독립운동의 길을 상징적으로 극화한 작품. 1928년 <용과 용의 대격전>과 함께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의 의지를 표명한 명작.’ 이즈음부터 단재는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에 나서는데, 제작진은 영상기법을 총동원해 그 정신을 그렸다.

‘1919년(40살) 3·1운동 발발.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피선. 대한독립청년단 조직. 1919년 4월 10일 임정 수립을 위한 29인 모임 참석.’ 이때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추대하자, 단재는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반도 위임통치 청원서 제출한 사실을 들어 반대하고 퇴장한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승만은 임정 초대 대통령에서 탄핵 당하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1923년 베이징 망명 시절 단재가 의열단의 요청으로 작성해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은 무장독립투쟁의 정당성을 천명한 역사적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유행하던 장발을 짧게 자르고 단재로 변신해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는 이정길의 열연이 돋보이는 장면. <문화방송> 제공‘1920년(41살) 베이징 망명중 유학생 박자혜(엄유신)와 결혼. 1923년(44살)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 작성해 발표.’ 이정길의 열연이 ‘깊고 긴 동굴에서 퍼지는 큰울음처럼, 보는 이를 격동시키는 장면이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일본을 살벌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뒤이어 비장한 행동지침이 하달된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원들이 휴대한 필수품의 하나였으며,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 등지에 널리 뿌려졌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당국은 큰 전율과 공포에 사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상하이국민대표회의 참가, 창조파 가입, 상하이임정 해체 주장, 투쟁사관의 범위와 방법 천명.’ 이즈음 칩거에 들어간 단재는 최초로 역사방법론을 피력하며 ‘조선문화사’와 ‘조선상고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을 경고한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와도 공자의 조선이 된다. 주의도 마찬가지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1930년(51살) 5월 8일 무정부주의동방연맹 ‘국제위채(위조화폐) 사건’으로 체포, 10년형 선고받고 뤼순감옥 이송. 1936년(57살) 2월 21일 뤼순감옥에서 순국.’



1928년 단재 신채호는 비밀 결사 조직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위조화폐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다. ‘죄수 번호 411번 신채호’ 49살 때의 모습이다.



1930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된 단재 신채호(이정길)는 35년 뇌일혈로 쓰러지지만 병보석조차 거부하고 이듬해 끝내 순국한다.1982년 9월 나는 일본피디협회로부터 초청받아 2박3일 일정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공식 일정은 첫날 피디협회장 자택 만찬부터다. 협회장은 드라마피디이고 그 부인은 다큐피디였다. 통역은 약간 부족하지만 정수웅 선배가 맡아 주었다. 그날 모인 일본 피디 30여명이 한국말을 웬만큼 알아듣는 듯 했다. 몇몇은 한국 잡지 <창작과 비평> 최신판의 일본어 번역본을 들고 있다. 본격 토론에 들어갔다. 비디오 시사다. 놀랍게도 한달 전 방영한 내 작품 <단재 신채호 일대기-한>이다.

‘제1부’ 시사를 마치고 토론하는데 첫 질문이 놀랍다. “드라마 시작과 함께 묵음으로 진행된다. 한국말은 한마디도 없이 일본말만 간헐적으로 들리더니, 무려 29분 만에 처음으로 한국말이 나온다. 무슨 상징성이 있는가? 일제 압박시대를 표현한 것인가?”

그렇다. 어두운 뤼순감옥. 부인 박자혜가 면회를 왔다. 단재의 거동이 불가능하여 특별 감방면회가 허가된 것이다. 을씨년스런 복도를 지나고 또 지나 감방 앞, 처참한 남편의 모습을 본 부인의 비명같은 숨소리에 일본간수가 ‘곡소리 금지’를 주의시킨다. 아무말 못한 채 쳐다만 보다가 설음에 겨워 울음이 터지면 또 제지 당하고…또 제지 당하고…짧은 면회가 끝나 가족들이 쫓기듯 나가고, 단재는 홀로 숨을 거둔다.



1982년 8·15 특집 드라마 ‘단재 신채호 일대기-한’에서 연출 고석만은 첫 도입부와 마지막을 1936년 2월 단재의 뤼순감옥 순국 장면으로 구성했다. 단재(이정길)의 부인(엄유신)과 아들이 의료진과 함께 짧은 특별면회를 하고 있다. 단재는 곧 임종을 맞는다.

고석만 연출이 1982년 ‘단재 신채호 일대기-한’에서 뤼순감옥의 단재를 부인과 아들이 임종 직전 특별면회하는 장면을 찍고 있다.단재가 1910년 압록강을 건널 때 읊은 시 ‘한나라 생각’이 생각난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 내려 오리니/ 한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2005년 평양에서 ‘단재’를 다시 만나게 된다. 남북합작을 의논하기 위해 김영남을 비롯해 북쪽 고위관리들을 만나고 당시 서열 17위로 알려진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구체적인 사업에 대해 논의하다가 우연히 ‘단재 토론’을 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랄만큼 진지하고 명쾌한 토론이었다. 그는 잘 알려진 북쪽의 석학으로 단재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는 “남쪽에서 단재에 대해 이정도로 박식할 줄 몰랐다. 뜻밖이다. 다음에 만나 더욱 깊게 얘기하자”면서 북한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된 ‘단재 유고’를 같이 보고 활용하고 싶다고 했다. ‘꿈하늘’에 오르는 듯한 감명이었다.



2005년 8월말 문화방송 티브이제작 본부장 시절 고석만은 남북합작 영화 ‘광개토대왕’ 제작을 의논하기 위해 방문한 평양에서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만났을 때 ‘단재 토론’을 했다. 김기남은 앞서 그해 ‘8·15 민족대축전’ 북측 대표단장으로 서울을 방문해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 <한겨레> 자료사진1982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 사라지고, 독재의 야만성만 남은 방송 현실을 개탄하며, 단재의 ‘영웅론’을 통해 ‘청년정신’을 끌어내고 싶었다. 단재의 상고사는 곧 세계사다. 이제 세계사를 쓰자!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841509.html#csidx72421ccf3d9600eadc662cd54e7f6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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