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8

세계한민족문화대전 변월룡



세계한민족문화대전

변월룡

원어 항목명 Пен Верлен
한자 邊月龍
영문 Byeon Wolryo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러시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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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러시아에서 활동한 고려인 화가.
개설


변월룡(邊月龍)[1916~1990]은 1951년 레핀미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동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3년 북한으로 파견되어 1년 3개월 가량을 북한에 체류하며 평양미술대학을 설립하고 교수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54년 소련으로 돌아온 후 레핀미술대학에 복직하였고, 1990년 사망할 때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가계


변월룡의 아버지는 변창호, 어머니는 신창호이다.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누나는 변춘우, 변수남이다. 1944년 프라스코비야 제르비조바와 결혼하였고, 아들 알렉산드르와 세르게이, 딸 올랴가 있다.
활동 사항


변월룡은 1916년 9월 러시아 연해주 쉬코톱스키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변창호는 변월룡이 태어나기 전 집을 나가 생사 여부가 알려져 있지 않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가족들이 모두 타슈켄트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4년제 한인학교에 입학한 변월룡은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 8호 모범 10년제 학교로 전학하였다. 1936년 블라디보스토크 8호 모범 10년제 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 우랄 산맥 부근에 있는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194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예술아카데미’[1944년에 레핀 회화·조각·건축 예술대학으로 개명] 회화부에 합격하여 회화와 동판화, 석판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였다. 1947년 레핀 회화·조각·건축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하였으며, 소련 미술가연맹 레닌그라드 지부의 회원으로 발탁되었다. 1951년 「휴양 지역 레닌과 스탈린, 중대한 우호관계」라는 작품을 청구 그림으로 출품하여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건축 예술부 데생과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953년 부교수 승진과 함께 소련 문화성의 지시로 북한의 교육성(敎育省) 고문관으로 파견된 변월룡은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회화, 데생, 무대미술과 과장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평양미술대학의 교육 체계를 정립하고 교수들을 지도, 육성하였다. 1954년에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소련으로 돌아와 레핀미술대학에 복직하였다. 소련 예술아카데미 후원하에 유명 교수들로 구성된 『데생 회화 방법론』 서적 출판에 참여하여 글을 게재하였다. 1957년에는 ‘10월 혁명 40주년 기념 레닌그라드 미술가 작품전’에 약 300호 크기의 유화 작품 「평양의 해방 기념일」을 출품하였다. 1959년에는 북한의 ‘해외 동포 고국 방문단’에 신청서를 냈지만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변월룡은 1973년 유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완성해 ‘1973년 레닌그라드 미술과 지역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또한 타슈켄트 문학박물관의 요청으로 우즈베키스탄 작가들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타슈켄트를 다녀왔다. 1977년에는 레핀미술대학의 정교수로 승진하였고, 1985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레핀미술대학을 퇴직하였다. 변월룡은 퇴직 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90년 5월 25일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변월룡은 인물화, 풍경화, 전쟁화, 정물화, 역사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 활동을 통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인 그림으로 「조선의 어부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946년 청진항(淸津港)에서 소련 해군 마중」, 「휴양지의 V.I 레닌과 I.V 스탈린 중대한 우호 관계」, 「북한에서」, 「김일성의 초상」, 「모택동의 초상」, 「북한 해방」, 「평양의 해방 기념일」, 「우리 시대의 사람들」 등이 있다. 변월룡은 특히 인물화에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신분이나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인물화를 그렸다. 「벨로우소프 화실의 쿠쿨리예프」, 「갈리나 소코토프 초상」, 「파블롭스키」, 「근원 김용준」, 「민촌 이기영」, 「레닌」, 「레닌과 고리키」, 「레닌과 소녀」, 「예멘에서 온 학생」 등 수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변월룡은 북한으로 파견된 후 북한의 주요 명승지와 문화 유적지 등을 다니며 「개성 선죽교」, 「박연폭포」, 「개성의 인삼 농장」, 「금강산 길」, 「금강산 산중에서」, 「금강산의 다리」, 「금강산의 소나무」 등의 작품을 남겼다. 판문점을 답사한 후에는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 「1953년 9월의 판문점 휴전회담장」, 「연병장」, 「판문점에서」 등의 작품을 남겨 당시 한반도의 실상, 분단의 아픈 현실을 포착하기도 하였다. 소련으로 돌아온 후에도 고국과 관련된 「북조선 풍경」, 「북조선 어부」, 「모란봉 을밀대」, 「조선의 농민」, 「원산항의 어부들」, 「6·25 전쟁이 남긴 기근」, 「분노한 인민」, 「남북 분단의 비극」, 「남한의 기근」, 「연해주의 집단 농장」 등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묘소


변월룡의 묘소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세베르노예 클라드비셰 북부 공원묘지에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인 넵스키 대로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약 17㎞ 떨어져 있다.
상훈과 추모


미술평론가 문영대가 변월룡 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변월룡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진행 중이며, 2016년 3월 변월룡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국내 최초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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