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4

[161.6] 다시개벽의 꿈, 목숨을 걸고 새날을 열다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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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61.6] 다시개벽의 꿈, 목숨을 걸고 새날을 열다
 신인간 ・ 9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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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창간 100주년 기념

다시개벽의 꿈, 목숨을 걸고 새날을 열다

-『개벽』 창간 100주년과 우리 안의 미래

오암 박길수_서울교구


『개벽』 창간 100주년, 그리고 코로나19 시대

​2020년 6월은 월간 『개벽』의 창간 100주년이 되는 달이다. 6월 25일은 창간일이고, 그것은 1920년 7월호이다. 그러니 2020년 6월과 7월 모두 나름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개벽』 창간 100주년”에 주목하는 움직임은 많지 않다. 오는 9월에 <성균관대학교동아시아학술원>과 <강원문화교육연구소>(소장 정현숙) 공동으로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고, 천도교단 내에서도 100주년 관련 학술발표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개벽』 100주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못내 섭섭하다, 고 생각하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는다.


지금 우리(인류)가 전 지구적으로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야말로 『개벽』 창간 100주년을 기념(祈念; ‘紀念’이나 ‘記念’ 대신)하고, 기억하는 가장 ‘개벽적인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개벽』 잡지의 생명력과 그 정신의 원형적 출발점이자 귀결점인 ‘개벽’, 정확하게는 ‘다시개벽’은 한울님-수운 대신사의 만남으로부터 출발하는 기획이지만, 해월 신사의 선언적인 다음 말씀이 코로나19-이후 시대의 ‘다시개벽의 개벽적 의의’를 가장 잘 말해 준다.



“이 세상의 운수는 개벽의 운수라. 천지도 편안치 못하고, 산천초목도 편안치 못하고, 강물의 고기도 편안치 못하고, 나는 새․기는 짐승도 다 편안치 못하리니, 유독 사람만이 따스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으며 편안하게 도를 구하겠는가. 선천과 후천의 운이 서로 엇갈리어 이치와 기운이 서로 싸우는지라, 만물이 다 싸우니 어찌 사람의 싸움이 없겠는가.”


(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이러한 ‘개벽선언’은 오늘날 세계 석학들에서 필부필부에 이르기까지 ‘코로나19’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말에서 빠지지 않는 ‘인간과 자연의 불화’라는 말, 정확하게는 “‘인간이 자연에 가해 온 무자비한 폭력’에 자연이 견디다 못해 ‘정당방위 손사레’를 한 결과로 코로나19의 대유행(팬데믹)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철학적이고 문명론적으로 해명해 준다. 서커스단에 잡혀 와 길들여진 코끼리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코끼리 코’를 슬쩍 휘둘렀는데, 옆에 서 있던 조련사가 거기에 맞아 20미터쯤 날아가 나뒹구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 격이다. 객석에 있는 관객들은 ‘포악한 코끼리’가 나타났다고 난리법석이지만, 코끼리를 그곳에 데려온 것도 인간이고, 코끼리는 관객이 그 자리에 앉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여기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돌아가신 분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포괄하여 하는 말이다. 이번 재난에 돌아가신 분들은 “인류가 자초한 재난으로서의 ‘인재(人災)’”의 희생양인 셈이다.)



100년 전 『개벽』은 바로 지금-여기의 이러한 전 지구적-전 인류적 재난 상황, 좀 더 정확하게는 이 ‘재난-이후’의 세계를 향한 우리의 노력을 염두에 두고 창간되어 빛나던 별이었다. 그러니 현재 ‘전 지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코로나-이후 상황은 『개벽』 창간 100주년에 맞닥뜨린 ‘100주년 이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지난 6월 4일은 독립투쟁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 100주년’이었다. 이날을 맞이하며 정부 차원의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전투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을 비롯한 기념사업을 투철하게 전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일제를 상대로 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전쟁)였으며, 더욱이 승리의 역사라는 점에서 청산리대첩과 더불어 길이 기억되어야 할 역사이다. ‘광복’이 된 지 75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 주역의 유해조차 온전히 모시지 못했다는 것은 지난 ‘75년’ 역사의 불건강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태이다. 만시지탄이라도 그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정부 차원에서 나선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인물 복권이나 복원 문제가 아니라 역사에서의 정의(正義)와 정도(正道), 정명(正名)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오동전투’만큼 ‘개벽(『개벽』)’도 소중하다. 그 100주년 또한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로 치르지 않을 사유는 없다. 오직 후학들의 불민함이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만들었다. 봉오동전투가 ‘물리적인 자주독립’을 향한 전쟁이었다면, 『개벽』은 ‘정신적, 사상적, 영성적 자주독립을 향한 혁명(개벽)’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순도-순국을 포함한 적지 않은 희생이 뒤따랐다. 봉오동전투가 온전히 빛나기 위해서라도 『개벽』의 복권과 복원, 기억과 선양은 간과할 수 없는 민족사의 과제이다. 더욱이 그것이 지향하는 ‘개벽’의 가치를 생각하면 단지 민족사의 차원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접근과 관심이 필요하다. 그 일은 ‘우리’(개벽의 후예-개벽파) 외에는 맡을 사람이 없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압수되어 임시호를 발행하였다.




『개벽』 없는 시대에 『개벽』을 말한다

그렇게, 창간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선견지명이 빛나던 『개벽』은 대부분 묻혀 있다. 『개벽』은 1926년 8월 1일자, 통권 제72호를 종간호, 일제의 강압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개벽 100년’이라는 말은 자칫 『개벽』이 지난 100년 동안 우리와 함께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개벽』이 존속했던 기간은 1920년 6월부터 1926년 8월까지 만 6년에 불과하다. ‘강제 폐간’이 『개벽』이 오늘날 ‘묻혀 있는’ 역사가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개벽』 강제 폐간은 독(毒)이기는 하지만, 『개벽』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음으로써, 다시 말해 순도(殉道=폐간: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길에서 他殺된 者는 모두 巡道者이다)함으로써 영원의 생명을 얻었다. 문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개벽』을 발견하지 못한 지금-여기에서 사는 ‘우리’의 안목이다.



이 글은 ‘지금-여기’에 ‘없지만 그러나 있는’ ‘『개벽』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1926년 8월 1일자로 폐간된, ‘그러므로 지금은 없는 『개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개벽』이 72호까지 발행되는 동안 숱한 고난을 겪었음과 그런 가운데서도 빛나는 문화적 성취를 하였다는 식의 판에 박힌 스토리 방식을 탈피하고자 한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개벽』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때 『개벽』은 잡지 『개벽』이기도 하고, ‘다시개벽’이기도 하다. 『개벽』의 순도(殉道) 덕분에 지금-여기에 ‘살아 있는’ 『개벽』(‘다시개벽’)을 ‘다시 살려 모시는 길’을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개벽』의 의의와 『개벽』의 부재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개벽』제4호(1920년 9월 25일) ‘사설(社說)’은 ‘인도정의(人道正義)의 발전사(發展史)로 본[觀한] 금일 이후 모든 문제’라는 제목으로 ‘인도정의’가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세계사조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당연히 1년여 전 ‘3.1운동’이 ‘인도정의’를 부르짖은 것을 상기(想起)시킨다.



이 글에서는 당대의 ‘인도정의’는 과거 ‘5년의 대 전쟁-1차 세계대전-’에서 인류가 수천만 명의 인명 희생 끝에 얻은 교훈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인도정의’가 소중한 까닭은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인격의 진선미(眞善美) 구현’을 위한 기본-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그들이 ‘인도정의’를 앞세웠다는 점, 그리고 종전 이후 인도정의 실현을 위한 ‘국제연맹’의 조직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설의 백미(白眉)는 마지막 대목이다.



“모 학자는 인도(人道)의 최후 도덕상 목적으로 동물학대 폐지를 중요하게 여겨 말하기를 ‘인류는 (육식을 완전히 폐지하지 못하고) 동물을 죽이고 먹을지라도 이에도 우애주의(友愛主義), 인도주의(人道主義)를 확실히 지키지 아니함이 불가(不可)하니 가급적 고통을 덜어주며, 이에 무익한 재해를 가하지 아니하게 하며, 또 저 무리를 위하여 저 무리의 행복을 중요시하여 과도의 사역(使役)을 금하며, 무리의 학대를 피함이 옳다. (중략)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사람의 품성을 거칠게 하며 감정을 상하게 하아이 이를 감히 행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품위 있는 신사적 정조(紳士的 情調)가 나지 못하는 것이요, 착한 사람의 공평한 마음이 생기지 못하는 것이라. 고로 정신적 아름다움을 맛보는 경우를 발전시키는 것이 불능할 것이며, 또한 사람 마음의 작용은 가히 놀랄 미묘한 반사작용이 있나니 이에서 동물의 고통으로 인하여 해한 신경은 드러나지 않은 중 각종의 폐해를 생겨나게 해 혹 그로 인해 불구의 몸이 되며 또 불구의 자식을 출산하며 바르지 못한 행위를 감히 하게 하는 등 실례(實例)는 과학적 이유에도 많고 많으니 고로 인도주의의 종국 목적은 동물학대 폐지까지 이르지 아니하면 완벽한 준비의 지경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였다.”


개벽 제4호(1920.9)


인용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자면, ‘동물학대 폐지’를 주장하며, 그 이유는 ‘동물의 정서적 평화와 복지’가 ‘인간의 성정과 건강한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는 ‘동물권’을 주장한 것이다. 그 깊은 이면에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진리가 녹아 있으나, 이 글에서는 그것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식용(食用)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즉 육식을 전면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동물의 심신의 건강’을 말하는 만큼, ‘식물의 건강’에까지 논리를 연장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인용문)은 물론 ‘동물학대도 폐지해야 마땅하거늘, 인류에 대한 압박과 학대는 머리카락 한 올도 더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데 중점이 있다. 그러나 이 글(위 인용문)의 최종 결론으로 “세상 사람이 항상 영리(榮利)에 얽혀서 언필칭 ‘티끌 많은 세상과 고통스러운 세상’이라 하나, 구름이 희고, 산이 푸르며, 물이 흐르고, 돌이 우뚝하며, 꽃은 새소리를 반기고 구렁이는 나무꾼의 노래를 화답하여, 뭍에는 티끌이 일지 않고, 바다에는 물결이 치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한갓 제 스스로 그 마음을 어수선케 하는도다”라고 말하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는 『개벽』을 발행하던 주체들의 ‘생태적 감수성’ ‘영성적 생태주의’의 ‘끝판왕’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인용문)은 사설의 필자가 ‘모 학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지만, 동학-천도교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말이 ‘모 학자’의 말을 빌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동학-천도교’의 시천주, 삼경 사상의 당대적 번역문-인용문이라는 점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인용문)을 ‘외래사상’의 수입이라고 생각할 여지도 없다.





‘다시개벽’,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에 빛난 21세기의 사상

21세기 들어 인류 사회는 ‘자연권’을 헌법적 권리로까지 명시하기에 이르렀다. 2008년 에콰도르가 세계 최초로 자연을 권리의 주체로 명시한 신헌법을 통과시켰고, 2009년에는 유엔이 ‘세계 어머니 지구의 날’을 선포했으며, 볼리비아는 2010년 <어머니 대지 권리법(Ley de Derechos de la Madre Tierra)>을 제정 선포하였고, 독일 등 유럽 각국에도 유사한 법들이 잇달아 제정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0년대 이후 ‘자연권’을 헌법에 반영하자는 헌법 개정 운동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삼경(三敬)의 법제화’라고 할 만한 일이다. 한마디로, 21세기의 대세는 “천지부모(天地父母)사상”을 법제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21세기에 들어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1919.7.26~) 1960년대에 ‘가이아 이론’를 주창한 이래로 ‘인간과 비인간이 공동으로 구성한 세계’라는 생각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천도교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경)천(天)-(경)인(人)-(경)물(物)’, 즉 천지인(天地人)이 이 세계를 이루는 똑 같은 주체이며, 그러므로 이 세계에 대해 똑 같은 권리(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상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의 페미니즘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44~ )는 1985년에 <사이보그선언>을, 2003년에는 <반려종선언>이 잇달아 발표한다. 그 내용을 해석하자면, 인간은 동물은 물론 사물과도 ‘더불어 존재하는 존재’이며, 그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별(가치의 차이)은 없다는 선언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다른 종이나 사물을 (일방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은 당위론적 명제가 아니라 ‘당연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려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자연)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동물-식물-자연-세계(지구)가 인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보살피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보살핌 행위’는 그들로부터 받은 것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관점은 인간이 문명화되어서 동물까지 사랑하게 된다는 식의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한다. ‘반려’라는 말 자체가 ‘동등한 두 주체’를 상정한 용어이며, 사람이 ‘반려동물’을 길들이는 만큼, 반려동물도 사람을 길들이고, 그만큼 인간도 변화(진화)한다.





개벽 표지들


이러한 일련의 사상들은 20세기 막바지에서 21세기 초에 걸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장되고, 금번 코로나19 사태에 즈음하여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라고 할 만하다. 아직은 당면한 코로나19 사태 해결에 급급하지만, ‘코로나 이후’를 모색하는 담론들에서는 이러한 ‘지구적 사고’(여기서 ‘지구적 사고’란 사고 범위를 전 지구적-전 세계적 인류의 삶으로 확장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구라는 생태-생명공동체’를 사고의 기본단위로 한다는 것으로, 여기서는 인간 역시 1/n의 지분을 갖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인간의 영성을 고려할 때 인간의 역할(의무)은 기본보다 더 커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우위’로 이어지지는 않도록 유의한다.)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개벽』 제4호의 ‘사설(社說)’은 100년 전에 ‘미리 도래한 21세기 미래’로서의 『개벽』의 의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글인 셈이다. 그것은 물론 동학 창도 당시부터 이미 선언된 것으로 동학-천도교의 ‘개벽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려는 바는 그보다, 그렇게 100년 전에 왔던 ‘미리 온 미래’로서의 『개벽』 이후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사회(인류 사회)가 『개벽』의 경고 내지 예언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파멸-절멸의 내리막길을 달려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지난 100년은 ‘잃어버린 100년’이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림’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개벽』 100주년-이후”의 기획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잃어버림의 자각’은 다르게는 “마음에 잊고 잃음이 많더니 이제 이 성세에 도를 선생께 깨달아, 길이 모셔 잊지 아니하”는 ‘참회’(동학-천도교 공부-수도-수양은 ‘참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로 이어진다.



‘개벽’은 19세기(1860-1898; 동학 창도에서 해월신사 순도까지)에 탄생하여 20세기에 선취된 미래로서 빛을 발하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운동할 21세기를 맞이한 사상이자 운동으로, 100년 동안 ‘잊혀지고, 잃어버렸던’ 운동이다. 『개벽』 100주년은 그렇게 맞이할 일이다.





『개벽』 ‘최고의 원고료’와 과로사(過勞死)의 산실(産室) 사이

『개벽』은 보통 ‘최초의 종합잡지’라는 이름으로 찬양된다. 그리고 『개벽』이 당한 수난은 『개벽』의 가치를 반증하는 사례로 제시된다. 『개벽』의 지면을 채워 나간 야뢰 이돈화, 소춘 김기전, 소파 방정환, 청오 차상찬, 춘파 박달성을 위시한 수많은 기자들의 주옥같은 글들은 당대 ‘언론잡지’로서 ‘저널리즘’의 최전선에서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였다. 그 결과 당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 오늘날에 이르도록, 최소한 ‘잡지’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잡지로 평가된다.



“잡지 『개벽』은 그 시기 사회 조건 속에서 여론을 선도하고 지성사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리나라 매체의 역사에서 『개벽』의 역할을 되풀이한 게 또 있을까 의문이다. 뒷날 ≪사상계≫나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이 그와 비슷한 지위를 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벽』은 (그 이후의) 잡지들이 시사, 문학, 학술 등의 방면으로 전문화하기 이전에 그런 역할을 (종합적으로) 감당했다. 지성사, 정치사, 문학사적 방면에서 전방위적 여론을 형성한 최초의 잡지였다. 그런 점에서 뒷 시기 잡지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바가 있다.”


임경석, 차혜영 외 지음,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 모시는사람들, 2007, 7쪽.




그러나 사실 『개벽』의 위력은 잡지나 그 잡지에 수록된 기사들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여느 잡지와는 다르게 『개벽』은 <천도교청년회>(천도교청년당)라고 하는 거대한 운동 조직(나아가 천도교단)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 덕분에 사회적으로도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배경 덕분에 『개벽』의 글들은 성급한 급진주의일 수도 없었고, 섣부른 이데올로기의 향연일 수도 없었으며, ‘지적 유희’이거나 ‘공상적 이상주의’일 수가 없었다. 수천, 수만 명의 당원(회원)들의 실천을 전제로 하는 글이므로 그만큼 책임성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천도교’라는 거대 종단의 명성에 힘입은 바도 있으나, 그 무게감을 견뎌야 하는 현실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개벽’이라는 말은 태생적으로 이상적인 말이긴 하지만, 허황되지 않을 수 있던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개벽』에 실린 논설들의 많은 내용은 천도교청년당의 ‘전국 순회강연’에서 수백, 수천의 관중들 앞에서 강연하였던/강연할 내용들이었다. 한편으로 보면, ‘주권을 잃은 나라의 국민’에게 향하는 말로서는 너무도 먼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당대 인민(시민, 국민)들에게 손에 잡힐 듯한 구체성을 띠고 다가가서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나라 잃은 국민으로서의 설움과 희망 없음에 뜨겁고도 눈부신 광명을 투사하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뼈와 살’을 에이고 저미는 절절함을 자아내는 한바탕 눈물과 웃음의 향연이었다.



그러나 ‘천도교’ 또는 ‘천도교청년회(청년당)’의 뒷배는 화수분(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개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천도교의 뒷받침”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뒷받침’은 주로 재정을 염두에 둔 말로, 한마디로 ‘돈의 위력’이 있었기에 『개벽』을 위시한 개벽의 잡지들을 그처럼 열정적으로 간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벽』 등 잡지의 갈피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그 말은 극히 일부만 맞는 이야기이다. ‘한때’ <개벽사>의 원고로가 ‘당대 최고’를 기록했던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당시 신문 연재소설 1회 원고료가 1원 내외일 때, 『개벽』에서는 2백자 원고지 1매당 50전을 준 적이 있다. 이것은 당시 월간잡지 ≪조선문단≫(방인근 발행)과 더불어 당대 최고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이례적인 사건’일 뿐이고, 대부분의 시기 원고료는 거기에 훨씬 미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아예 원고료 ‘미지불’인 경우가 많았던 당시 잡지계 상황으로 보면 좀 나은 편이라 할 있으나, 아무튼 『개벽』이 ‘풍요로운’ 가운데 발행된 잡지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 내로라하는 당대 문인들의 주된 수입원은 오히려 신문 쪽이었다. ‘진실에 가까운 사실’로 <개벽사>의 자금(資金)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대부분의 시기, 매호 발행 때마다 개벽사의 재정난은 심각해져만 갔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사실 『개벽』은 창간할 때부터 ‘재정난’을 안고 시작했다.



『개벽』의 창간이 생각보다 늦어진 것은 일제 당국의 허가가 늦어진 탓도 있지만, 발행 비용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최종정, 변군항 두 분의 자금을 대고 최종정이 초대 사장이 되면서 비로소 발행될 수 있었다. 그 이후 천도교청년당이 개벽사 운영자금을 거의 전담하다시피하고, 천도교중앙총부의 일부 보조까지 받은 시기도 있었으나(한때 천도교청년당 재정의 6할 이상이 개벽사 운영에 투입되었던 결산보고 있다), 그 지원도 채 1년을 넘기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벽』을 비롯한 개벽사 발행 잡지들의 발간을 천도교단과 청년회(청년회)에서 뒷받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억해야 할 것은 개벽사 기자들의 ‘열정 페이’이다. 차상찬이 수십 개의 필명을 가졌던 것을 비롯하여 야뢰 이돈화, 소춘 김기전 등 개벽사 기자들이 누구나 최소 대여섯 개의 필명으로 여러 편의 글을 게재하였던 까닭은 바로 ‘원고료’를 절약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를 ‘언제 발생할지 모를 필화사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잡지 담당기자에 빈자리가 생겼을 때 펑크 난 원고를 외부 청탁에 의존하지 못하는 사정과 관련된다. 결국 ‘다수의 필명’의 ‘진실’은 최소한의 인건비로 잡지의 ‘분량’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기자들의 과로’를 불러 왔다.



그 상황에서 개벽사에 입사했던 ‘외부 기자(비 천도교인 기자)’들은 퇴사하는 것으로 위기를 회피할 수 있었으나, 토박이 개벽사 기자들은 잇따른 ‘과로사’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1930년 5월 8일, 1년여 기간 동안 투병 중이던 개벽사의 핵심 이두성이 순도한 것을 시작으로, 방정환은 1931년 7월 23일 과로로 인해 지병이 악화되어 순도하였고, 1933년 5월 ≪신여성≫과 ≪제일선≫을 전담하던 여기자 송계월이 폐결핵으로 ‘순국’하였다. 1934년에는 방정환, 차상찬과 더불어 개벽사의 ‘에너자이저’였던 박달성이 40세를 일기로 순도(5.9)하였고, 개벽사의 든든한 기둥이던 김기전은 1930년대 초부터 지병(폐결핵)으로 전국 요양지나 수도원을 순례하며 가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만세보≫ 시절부터 천도교단의 언론 부문에 종사하던 중 『개벽』 창간의 핵심 멤버로 참여했던 민영순도 1930년대 초중반경에 순도하였고, 천도교소년회원 출신으로 개벽사에 입사하여 ≪어린이≫지를 주로 맡았으며 차상찬과 함께 <개벽사>의 최후를 막걸리 ‘몇 잔’으로 추모하였던 이정호가 1938년에 역시 33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결국 차상찬이 <개벽사>의 주간을 맡았던(방정환이 순도한 1931년 이후) 때부터는 거의 차상찬의 성력에 의존하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에 불과하였고, 실질적으로는 『개벽』이 폐간되던 1926년부터 개벽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 위에 서 있었다. 여기에는 ‘언필칭 300만 교도’를 얘기하던 천도교단의 위력도, 전국에 수만 명의 회원을 거느렸다던 천도교청년당의 위세도 1920년대 중엽 이후로는 사실상 ‘과거의 영광’에 불과했던 사정이 개재한다.



개벽 제호 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왜 그러한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개벽』 폐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개벽사의 주역들은 『개벽』의 부활을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매진하였는가?”



그것은 『개벽』을 ‘하나의 잡지’로 접근할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잡지들이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많아야 십여 호를 내고는 폐간하기를 다반사로 하던 것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게다가 『개벽』지 하나만이 아니라, ‘학생’ ‘어린이’ ‘여성’ ‘농민’ ‘취미’(≪별건곤≫) 등 거의 전방위적으로 잡지를 간행했던 까닭을 깊이 집어 보아야 한다.



직접적인 것은 개벽사의 잡지들이 ‘천도교청년당’의 운동 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데 있다. 천도교소년회 중심의 어린이 운동의 핵심 매체로서의 ≪어린이≫지를 위시하여 청년운동(≪당성≫), 학생운동(≪학생≫), 여성운동(≪부인≫≪신여성≫), 농민운동(≪조선농민≫)의 각 부문에 부문별 잡지가 연계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취미잡지 ≪별건곤≫의 위상은 두드러진다. 앞서 말한 <개벽사>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잡지로서, ‘대중(취미)잡지’라는 성격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인할 수 있는 더 중요한 사실은 개벽사에서 『개벽』을 위시한 잡지들을 끊임없이 발행한 이유가 바로 ‘개벽운동’의 일환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개벽사의 잡지 외에도 당대의 잡지들은 대개가 ‘운동성’을 띠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개벽』을 비롯한 개벽사 잡지들의 운동성은 그중에서도 ‘개벽운동’을 위한 동력원이자 선전매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개벽』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가 『개벽』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출처] [161.6] 다시개벽의 꿈, 목숨을 걸고 새날을 열다|작성자 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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