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8

김영환 [최명길, 박정희,김대중,윤석열의 길]

(2) Facebook

김영환, 충청북도 도지사, 윤석열대통령당선인 특별고문
<최명길, 박정희,김대중,윤석열의 길>

저는 요즘 김대중대통령께서 일본문화개방을 앞두고 저에게 우리 민족은 중국의 변방에 있으면서 중국에 흡수되지 않은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창조력에 있다고 하시면서 왜 문화를 개방하면 일본에 먹힌다고 생각하는가하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분의 선견지명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최근 충북 청주 시내에 저를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현수막이 붙었습니다. 제3자 변제방식으로나마 일제 강제징용피해를 배상, 답보상태의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이끌고자 경주해 온 정부의 고심에 찬 노력을 환영하는 내용으로 쓴 제 글에 대한 반감때문입니다.
문제가 된 대목은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이 친일이라면 그에 동의하는 저 또한 친일파라는 말인가' 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양국 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은 강제 징용 피해 배상이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애국심'과 '충정'의 강조였는데 많은 논란을 빚고 말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안타깝지만 모두가 제가 감당해야할 몫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1637년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이 옳았습니다.
1964년 한일협정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옳았습니다.
1998년 일본문화개방을 결정한 김대중대통령이 옳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윤석열대통령이 옳습니다.
그들은 모두 친일굴욕으로 몰렸습니다.

그 핵심은 분명합니다. 누군가의 양보입니다. 반대 주장도 이해합니다. '하필이면 그게 왜 우리냐?'라는 것인데 우리가 양보하자는 것은 장래 실익이 우리가 더 크다는 확신에 따른 것입니다.  오늘 오후 저의 입장발표를 앞두고 지금의 한일관계를 보는 시각을 정리해 두고자 합니다.

1964년 12월 서독의 수도 본.
에르하르트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이 긴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역사적 순간입니다. 대한민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경제개발계획이 여기서 탄생한 덕분입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말합니다.

"한국을 가보니 산이 많던데 이런 지형에선 산업 발전이 힘들다." "그러니 고속도로를 놓아라. 나는 나치를 혐오한다. 하지만 히틀러가 놓은 아우토반(고속도로)에겐 달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경례를 붙인다.""그 고속도로에 자동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제철소가 필요하다. 연료도 얻자면 정유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박 대통령 표정이 바뀝니다. 일본과 화해하라는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 때문인데 박 대통령의 "그럴 수 없다"는 말에 에르하르트 총리가 다독입니다.
"우리가 프랑스와 몇 번 싸웠는지 아십니까? 열여섯 번입니다. 그래도 전후에 양국은 손을 잡았습니다. 각하, 지도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패전국 독일의 부활에 프랑스의 지원이 컸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그 반년 후 한일 협정(1965년 6월)이 체결됐습니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이 결단을 두고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며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청구권자금으로 1970년 포항종합제철소가 착공됐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포항제철이 생산한 '산업의 쌀'(철강제품)로 5년 후엔 포니(현대자동차)가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합니다. 
이런 것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엔 늘 극렬한 반대가 있고, 소신이 있고, 확신에 찬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또한 그렇습니다.
당시 한일관계는 지금과 비슷했습니다.

독도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김영삼 대통령이 한 극언(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이 발단이었습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그걸 풀기 위한 외교였고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일본이 외교문서에 식민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담고, 그것도 직접 '대한민국'을 지칭해 명기해서 입니다.
저는 이런 뜻밖의 성과가 김 대통령의 '통 큰 양보'에서 왔다고 봅니다. 국민 감정에 거스르는 것을 몰랐을까요.
당시 히로히토 일왕을 '천황'이라 호칭한 김대중 대통령도 친일파인가요?
공식 만찬 석상에서 칸무 일왕(7세기)의 생모가 백제인이라는 고백으로 일왕이 화답한 것은 이런 호의가 김대중-오부지 선언을 이끌었다고 짐작합니다.
그 해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대중문화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기상조네, 문화식민지로 전락하네, 반론이 거셌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힘은 '우리 국민, 우리 문화의 저력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더 잘 압니다. 
블랙핑크와 BTS, 오징어게임. 더 글로리 같은 K-콘텐츠의 지구촌 정복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윤석열 정부가 마련한 이 해법 역시 대한민국의 저력에서 발로한 자신감 그 자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일보 양보의 이 스마트한 제안에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더 큰 문제를 떠안을 것이라는 우려에서 '일본이 않는다면 우리가 양보해 일단락 매듭을 짓자'는 해법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저의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던 발언은 바로 이런 소신과 구국의 결단이 친일로 매도된다면 애국의 길에서 친일이라는 비난이라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반어적 표현일 뿐 일본 편에 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의도와는 상관없이 도민들께 많은 부담과
분란을 가져온 것은 모두가 제 책임입니다.
오늘 모처럼 한일정상회담이 열립니다.
한일 두 정상께서 역사에 큰 발자욱을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동북아시아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111 comments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