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8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9편 도대체 언제까지 노동을 갈아넣어 발전하려고 하는가? by 혁명읽는사람 -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9편 도대체 언제까지 노동을 갈아넣어 발전하려고 하는가?
https://alook.so/posts/o7t00VX
동아시아의 발전에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인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학술적으로 보자면 경제사의 차원에서 아시아적 발전경로를 설정하는 수준으로까지 논의가 진행된 적이 있다. 2000년대 후반에 동아시아 지역공동체의 형성의 물적 토대로서 동아시아 지역 경제사가 많이 활성화되었고 해양사도 그러한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이들이 주목했던 게 동아시아 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일본 자본주의가 수행한 중심적 역할과 함께 과도한 노동을 정당화하는 "근면혁명론"이었다. 근면혁명은 포메란츠, 아리기, 드브리스 등의 일련의 경제(사)학자들에게도 수용되어 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미국의 신좌파적 정치기획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일본의 전후 역사학을 비판하며 나온 '일본판 뉴라이트'들과 미국의 신좌파들 간의 기묘한 공생관계가 그렇게 형성되었는데 경제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이들이 설정한 아시아적 발전경로로서의 '근면혁명' 및 그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발전경로"는 장기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히려 노동일의 축소야말로 자유의 기반이다. 근면혁명론을 수용한 포메란츠, 드브리스 등이 오히려 일정 부분 아시아적인 근면혁명론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럽과 미국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 본다. 노동절약적인 기술을 창출해낼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중요하다.
포메란츠의 대분기론은 근면혁명의 세계에서 이탈하지 못한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가 맞이하게 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대분기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소득격차가 아니라 근면혁명의 세계와 그로부터 이탈한 산업혁명의 세계로의 "분화" 그 자체이다. 그 지점을 지적해야 하는데 하는 이들이 없어 경제사 연구사를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적어보았다. 우리는 언제까지 노동을 갈아넣을 것인가? 다시 한번 대분기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노동일의 축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제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 한번 읽어도 좋을 것이다.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9편 도대체 언제까지 노동을 갈아넣어 발전하려고 하는가?
혁명읽는사람·독서가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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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안을 두고 '80시간 노동'이라는 비판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더 이상 논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한 현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 그러한 장시간의 노동이 발전을 추동해온 것도 사실이 아닌가? 한국과 같은 나라가 장시간노동을 통한 이점을 살리지 않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인식도 사회 한켠에 분명 존재하고 있다. '노동집약적인' 발전경로는 한국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에서도 충분히 논의되었던 보편적인 발전방식이다. 경제사 연구 경향을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에 관해 한번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1.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와 포메란츠

 2000년에 출간된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김규태 외 역, 에코리브르, 2016)는 경제사 연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친 저작이다. 서유럽과 동아시아 간의 경제발전 수준의 차이가 획기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또 왜 그러했는가?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적어도 포메란츠는 이 질문을 화두로 삼아 수많은 연구를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경제사학자 앵거스 메디슨의 주요한 역사통계 정리 작업에 따르면 1990년 달러가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서유럽 및 북미 지역을 포괄하는 서구 지역과 비서구 지역(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아프리카 등으로 이뤄진) 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미 16세기 이래로 큰 격차를 보여왔다.(1500년 서구 753달러, 비서구 538달러에서 1820년 서구 1,202달러, 비서구 580달러) 메디슨의 통계 작업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미 16세기부터 두 지역 간의 거대한 분기는 이뤄지고 있었다.(Angus Maddison, Contours of the World Economy, 2007 참고) 도대체 이러한 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경제(사)학계 뿐만 아니라 역사학, 사회학 등의 수많은 학문분과들이 달려들어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았고 그 담론들은 그것을 정리하기만 해도 수백페이지 짜리의 저작을 수십권이나 묶어낼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하다.

제도주의 경제학의 창시자인 더글라스 노스(Douglas North)는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는데 점차로 그로부터 멀어지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세웠고, 그것이 바로 '신新제도주의 경제학'이었다. 이 신제도주의 경제학은 정치사상사 쪽의 연구인 맥퍼슨(C.B. Macpherson)의 홉스와 로크 연구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는데, 맥퍼슨의 저작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C.B. 맥퍼슨,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 강유원 외 역, 박영사, 2010)은 배타적인 개인 소유권의 성립 과정을 사상사적으로 분석한 저작이다. 노스는 이들의 연구 결과였던 '배타적 소유권'을 제도사적으로 재구성하여 "거래비용"을 제도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줄이는 방식이 산업화에 있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자본, 노동, 토지 등의 생산요소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효율적인 생산을 해내는 과정에 있어 제도가 시장에서의 거래비용을 어떻게 줄이는지, 그리고 동시에 생산자들에게 적절한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가에 따라 경제발전의 수준이 결정되고 그것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제도주의적 해석은 이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역사이론의 맥락에서 설명하자면 이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으로까지 소급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흔히 인류사의 전개를 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제-사회주의라는 5단계론에 기초하여 세계사의 기본법칙에 따라 진행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체계 내에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여 항상 문제가 되었다. 세계사의 기본법칙에 따라 아시아 사회에서도 5단계론이 적용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 수십년에 걸쳐 격하게 충돌해왔고 신제도주의 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다시 말해서 전근대 아시아의 토지소유구조를 국가의 토지소유에 기초하여 성립한다고 보는 이론과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사로잡혀 사적 소유권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아시아 사회와 달리 유럽 사회는 사적 소유권의 발전 속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되었다는 초중기의 마르크스의 이해와 노스의 신제도주의 경제학은 접합될 지점이 많다. 그래서 제도주의 경제학은 이러한 친연성을 가리고자 의도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좀더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예컨대 오카자키 데쓰지의 <제도와 조직의 경제사>(이창민 역, 한울, 2017)를 참고하라)

포메란츠는 제도주의 경제학과 같은 요소론적 해석을 거세게 비판한다. 우선적으로 이러한 방식의 비교, 특정한 요소의 유무를 가지고 발전을 살펴보는, 는 제대로 된 '적절한' 비교를 어렵게 만든다. 비교대상에 있어서도 '제도'를 매개로 중국 전체와 영국을 비교하는 방식의 기존의 연구는 두 나라의 크기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 대등한 비교를 할 수 없게 만든다. 포메란츠의 뛰어난 점이란 바로 기존의 프레임을 효과적으로 뒤집으면서 비교사를 수행한다는데에 있다. 그에 따르면 적절한 비교가 되기 위해서는 '오렌지'와 '사과'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오렌지와 오렌지", 혹은 "사과와 사과"를 비교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대륙국가로서의 중국과 조그만 섬나라인 영국을 비교하기보다는 유럽대륙 전체와 중국대륙을 비교하든지, 반대로 영국과 중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인 양쯔강 하류의 델타 지역을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발전상이 드러나고 비교할 수 있게 된다는 게 포메란츠의 주요 논지 중 하나이다.

그 결과로 포메란츠는 18세기 서유럽의 영국과 중국의 양쯔강 델타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농업생산, 농촌공업, 시장효율성, 공중보건, 열량섭취, 기대수명 등에 이르는 다양한 지표에서 거의 대등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을 논증한다. 이 두 지역 모두 사실상 기존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이 해당 사회와 자연에 가하는 '압력'에 있어서는 거의 동등한 '한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생태학적인 한계를 두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돌파할 수 있었는가가 이후의 대분기를 결정했다는 게 포메란츠의 주요한 논지이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동아시아는 중국을 비롯한 각지에서 생태학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는데 이는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에너지 비용의 증가로 인한 것이었다. 목재를 사용하고 있는 전통적인 방식의 에너지 사용방식은 농업의 발전으로 인한 한계 속에서 생태학적인 위기로 사회를 몰고 갔고 끝내 농업적 기반마저 해체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의 소농들은 이러한 비용증가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보다 강한 수준의 노동력 투하, 달리 말하자면 "근면혁명"을 통한 무지막지한 노동력 투입으로 대응하였는데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인구증가와 노동력 투하의 증대로 인해 자연은 더욱 심하게 황폐되었고 생태학적 위기가 다시금 사회의 기반으로서의 농업을 갉아먹으면서 인구증가와 노동력 투하의 강화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버티다 버티다 끝내 사회 기반의 붕괴 속에서 자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과정을 영국은 어떻게 돌파하였던 것일까?

포메란츠는 신대륙의 자원과 무수히 많은 석탄이 매장되어 있는 영국의 지리적 이점이 이 문제를 해결시켰다고 말한다. 목재사용을 석탄사용으로 교체하고 부족한 자원을 식민지로부터 끌어쓰는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아시아 사회의 대응방식과 유럽 사회의 대응방식 간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아시아 사회의 소농들은 생태학적 위기에 대응하여 노동력을 더 많이 활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면, 유럽 사회는 자원을 보다 많이 사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한 대외확장으로 더 많은 자원을 빨아들여 소비하면서 대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자본주의적 방식에 대해 포메란츠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이를 서유럽의 자본집약적인(capital-intensive) 방식과 아시아의 노동집약적(labour-intensive) 방식이라는 분화야말로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의 진정한 핵심이다.

2. 일본 역사학계와 동아시아 경제사의 발흥
 
 이러한 포메란츠의 인식은 일본 경제사학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일본의 저명한 경제사학자 하야미 아키라(速水融) <근세일본의 경제사회>(<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 조성원 역, 혜안, 2006)과 스기하라 카오루(杉原薫)의 <아시아간 무역의 형성과 구조>(<アジア間貿易の形成と構造>, ミネルヴァ書房, 1996)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되었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일본 자본주의의 선진화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사회주의권이 대거 몰락하였으며, 구미 자본주의 또한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기존의 일본 근대화 과정을 새롭게 재평가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1945년 패전으로 인해 기존의 1867년 이래의 일본의 약 80여년의 근대화 과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것에서 일신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놀라운 성공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기존의 '전후 역사학'이라 불리는 것들은 근대주의적인 성격의 시민사회학파이든 마르크스주의적인 성격의 강좌파, 노농파이든 모두 스러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전후 민주주의를 구하거나 아니면 사회주의화를 대안으로 내걸었던 이들의 관점은 일본의 놀라운 성공과 그에 따른 일본인들의 자부심의 발로 앞에 여지없이 붕괴하였으며 이러한 현실을 새롭게 주워담아 해석하며 미래를 제시해야 하는 과제가 역사학에게 주어졌다. 도대체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마치 한국의 진보좌파들이 1987년 이래로 기존의 학생운동권적인 입장들을 모조리 상실하고 패퇴당하였던 것처럼 일본 또한 자본주의의 성공 속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입장들이 발언권을 상실케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진보좌파들이 별다른 논점을 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나아갔다면 일본의 진보좌파들은, 특히 경제사학계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아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 일본 자본주의가 기여한 바를 높게 평가하고 더 나아가서 아시아의 무역권 형성에 있어 일본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경사되어갔다.

이른바 경제사학계에서의 "동아시아 경제사"의 등장인데 하마시타 다케시(浜下武志), 스기하라 카오루(杉原薫), 가와카츠 헤이타(川勝平太) 등의 학자들이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1990년대 일본 자본주의가 침체를 겪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계 2위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던 때를 배경으로 하여 기존의 일본 경제사를 제국주의의 확장으로만 파악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탈피하고, 아시아 침략의 이면에는 일본 자본주의의 확장을 통한 동아시아 무역권의 형성 및 아시아 각국의 자본주의화의 진전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는 당연하게도 한국 등의 피식민 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받아들여져 격한 반발을 낳았지만 현재에 와서는 엄연한 학문 분파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 자체는 보수우파에 가까웠지만 대체로 진보좌파들에게도 담론은 널리 수용되면서 확장되어갔다. 특히 사회주의를 대체할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 곤혹스러워하던 진보좌파들에게 이들의 동아시아 경제사론은 새로운 대안모색의 근거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이들의 담론은 1990년대 이래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아시아 사회주의라는 대안을 대체하여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의 형성을 지향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낳았다. 유럽연합(EU)과 북미연합(NAFTA)이라는 지역공동체의 발흥에 대응하는 아시아적인 지역공동체의 형성을 논하기 위해 그 역사적 기원이자 지반으로서의 무역권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조선사 전공자인 미야지마 히로시는 동아시아 경제사의 전제조건으로, 전근대사를 소농사회론로 체계화하여 제시하였다. 한중일이 소농사회라는 공통의 지반으로 묶일 수 있다는 그의 이론은 정치적으로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모색과 연관되어 있었다.

유럽 및 미국과 대비되는 아시아의 독자적인 발전가능성과 경로에 대한 모색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성을 지니고 있지만, 일본의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 및 식민지근대화론과의 접합이라는 보수성 또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조는 상당히 모순적인 복합체였다 할 수 있다. 서구적 경로와 대비되는 아시아적 경로를 설정하여 아시아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하는 틀을 만들어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그 속에 내재한 일본 중심주의, 일본 내셔널리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다.

이들이 아시아의 독자적인 발전가능성 및 그 경로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 하야미 아키라의 '근면혁명론'이었다. 가와카츠는 일본 자본주의의 성공의 기원을 근면혁명을 통해 형성된 근면성실한 노동정신에 구미의 노동절약적 기술력이 결합한데서 찾는다. 근면혁명을 통해 형성된 일본적 정신과 유럽 기계문명의 정수가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사상 최강의 생산기술체계"가 서구 제국주의의 압박 속에서도 일본이 "빠르게"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조선과 중국은 이러한 동력이 없었기 때문에 (반(半))식민화되었던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보기에는 오늘날의 동아시아의 성공도 이 연장에 있다. 중국의 놀라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자신의 근면성실한 근로정신과 결합시켰던 일본 자본주의가 다시금 중국으로 자본주의를 수출하면서 동아시아 전체의 발전을 끌고 가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 일본이 차지하는 이러한 주요한 역할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을 한국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동아시아 자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16세기 이래의 지난 500여년 간의 동아시아 역사를 일본을 중심으로 두고 일본이 중국을 따라잡아가는 과정과, 중국을 넘어섰다가 다시금 중국을 이끌면서도 한편으로 그에 따라잡히고 있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이들의 이론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들이 설정하고 있는 주요한 발전방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아래의 BTS의 한 멤버의 인식과도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아시아의 성공을 '근면노동'을 통한 성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서양의 산업혁명과 대비되는 일본의 근면혁명을 스기하라는 "노동집약적 발전론"으로 발전시켜서 논의를 확장한다. 앞서 다루었던 포메란츠의 논리가 중국의 경제개발의 성공을 전제로 이뤄진 논의였다면, 스기하라의 논의는 일본의 경제개발의 성공을 전제로 그것을 보편화한 논리였다. 근면혁명의 정신 및 제도적 조건이 서구기계문명과 결합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을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노동력을 고용하고 흡수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생산성의 증대를 의미하는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경로였다는 게 스기하라의 입장이다. 유럽의 산업혁명이 제국주의적 침략과 수탈, 착취 위에서 유럽인들 자신에게도 별로 좋은 영향을 못 끼쳤다면 아시아의, 더 정확하게는 일본의 근면혁명과 그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발전경로'는 무수히 많은 인구에게 경제발전의 효과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더 나은 발전경로가 아니냐는 입장인데 이쯤 되면 사실 민망스러워질 지경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가리고 있는 이런 입장은 이미 경제사학자 호리 가즈오의 식민지기 조선 연구로 많이 논파되었다.

호리 가즈오에 따르면 일본 자본주의는 식민지의 경제개발을 촉진하였음이 분명하지만 식민지 지역으로 하여금 무역의 90% 이상을 일본 제국하고"만"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구조는 당연하게도 일본의 '제국주의적 영역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 자본주의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발흥에 일정한 정도로 기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해 특정한 영역을 일본 자본주의 내부로 강제 포섭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러한 강제력이 없었더라면 식민지와 일본제국 간의 활발한 교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공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던 일본이 중화학공업화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했다. 일본제국은 식민지를 시장으로 삼아 수많은 기계제품을 수출하고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1945년 패망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경제대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생산력의 발전을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해 이뤄냈던 것이다.(호리 가즈오, <한국근대의 공업화>, 주익종 역, 전통과현대, 2003)

3. 드 브리스와 하야미 아키라의 '근면혁명'의 교차

 조반니 아리기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역, 길, 2009)에서 스기하라 카오루와 하야미 아키라의 이론을 상당부분 흡수하였다. 정치적으로 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좌파 중에서도 강경한 편에 속하는 아리기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여 일본 보수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며 유감없이 내셔널리즘을 뽐낸(?) 스기하라 및 하야미 간에 성립한 이 기묘한 공생관계는 아시아만의 특유한 발전경로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다. 아리기는 그를 통해 미제국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아시아적 질서, 중국식 질서의 도래를 엿보았다면 하야미와 스기하라는 일본 중심의 아시아, 대동아공영권의 '고차원적'(?) 재림을 엿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면혁명론이 논리적 기반으로 삼았던 '근면성실'한 일본식 정신이란 중세 농노제 말기, 즉 근세(近世)에 이르면 다소 보편화되어 있다. 오래 전에 중국 학계에서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동아시아적으로 재구성한 위잉스의 <중국근세종교윤리와 상인정신>(정인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여영시(余英時), 즉 위잉스가 1985년 대만 청화대학의 졸업식에서 행한 강연을 정리하고 수정, 보완하여 발간한 것으로 중국사상사와 경제사를 통합적으로 파악하여 중국 근세의 상인윤리를 체계화한 저작이다.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의 입장에서 유교를 문화적 베이스로 갖고 있는 동아시아가 어떻게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쓰인 저작인데 기존의 베버적 인식을 비판하며 유교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부합한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자세하게 소개할 수 없어 짧게나마 소개를 하자면 위잉스는 유럽에서 가톨릭이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로 바뀐 것처럼 중국에서 불교와 도교가 안사의 난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 교리상의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불교는 이미 선종 내부에서의 교리의 변화로 인해 의식상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특히 그것이 안사의 난을 겪으며 불교도들 또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하여 노동의 가치를 논하고 근검절약 및 성실한 노동의 가치를 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흔히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몰라"는 말로 많이 받아들여지는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말인 "일하지 않는 날에는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이 시기의 불교 논리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동의 당위성이 불교를 통해 논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도교 또한 이러한 불교의 변화와 맞물려 점차로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세속형' 종교로 변모하고 있었다. 당송변혁기를 거치며 불교와 도교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경향을 접고 '입세고행'(入世苦行)의 세속형 종교로 변모하고 있었다는 점을 위잉스는 강조한다.

중국인들의 종교생활에서의 이와 같은 격변은 곧 송나라 시절에 형성되어 번창한 신유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송명시대의 성리학은 특히 불교의 '입세고행'의 논리에 충격을 받아 유학의 논리 또한 천리(天理)의 현실에서의 실현을 강조하는 '인세지향'(人世指向)의 체계로 바뀌게 된다. 마르크스가 <헤겔법철학비판서문>에서 말하였듯이 "진리의 피안(彼岸)이 사라진 뒤에, 차안(此岸)의 진리를 확립"하는 것이 "역사의 임무", 즉 성리학의 임무가 된다. 이들은 불교, 도교 등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지금 존재하는 현실을 '천리'에 부합하는 형태로 적극적으로 개조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막스 베버의 주장과 달리 중국의 유교 또한 현실의 적극적인 개조 의지를 지녔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물론 이 지점에서 중요한 차이는 청교도들이 예정결정론에 따라 자신들의 세속적인 성공을 구원의 징표로 삼는 것과 달리 유학자들은 현실에서의 성취를 천리와 일치한다고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차이가 내가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차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이처럼 불교와 도교의 변혁이 유교의 변혁을 이끌면서 적극적인 현실개조의 의지가 창출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면 이러한 현실의 적극적인 개조를 누가 이끌 것인가를 두고 또다시 일대변혁이 일어난다. 명대의 양명학의 등장이다. 양명학이 등장하면서 사회 곳곳에 유가의 윤리가 침투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기존의 지배계층이었던 사(士)가 아닌 상인(商人)이 윤리의 주체로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재의 역사학계에서 흔히 유상(儒商)이라 부르는 이 계층의 등장은 전통적인 신분적 위계질서를 부정하고 각자의 직업에 따른 노동의 수행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는, 대단히 근대적인 인식체계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의 실증적 문제를 지적하는 일은 쉽지만 그 시대구분의 틀 자체는 논파하기 쉽지 않다. 대체로 위잉스는 중세말기의 상업자본의 발흥과 상인의 윤리적 주체로서의 성립을 함께 엮어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위잉스가 보기에 중세 말기의 상업 발전이 점차로 노동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었으며 그것이 다시금 윤리주체로서의 상인계층의 자기인식으로 이어지며 일대의 정신사적 변혁이 일어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즉, 근면혁명과 노동을 중시하는 윤리체계의 등장은 사회발전에 필연적으로 부대하는 현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근면혁명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경제사학자 쟌 드 브리스(Jan de Vries)에 의해서도 확립된다. 드 브리스는 하야미의 근면혁명론을 네덜란드에 적용하여 분석하였는데 앞서의 스기하라, 하야미 등이 근면혁명을 일본적인 혹은 아시아적인 특질로 보았던데 반해 드 브리스는 '근세'라 불리는 역사발전 단계에 도달한다면 대부분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았다. 이 지점에서도 차이가 명확해지는데 하야미의 경우에는 생산에 있어서의 혁신, 다시 말해서 생산과정에서 보다 많은 노동력의 투입을 통한 농업생산물의 더 많은 산출을 중시하였다면 드 브리스는 "수요"의 확대를 중시한다. 드 브리스의 경우에는 시장경제의 발전 속에서 수요가 경제발전을 이끌며 분업체계를 발전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에 소농들의 '근면혁명'은 기본적으로 본인들의 수요를 더 많이 창출하고자 하는 욕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장경제 자체가 수요에 부응하여 분업체계를 확장하는 과정이 전제되어 있어야 비로소 기계의 도입을 통해 분업체계의 폭발적인 발전으로서의 '산업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게 드 브리스의 논지이다. 이렇듯 상이한 두 이론체계를 '근면혁명'이라는 이름에서 하나로 묶는다는 일은 수많은 오해를 낳게 된다고 본다.

앞서 우리가 보았던 포메란츠는 바로 이 드 브리스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해서 포메란츠는 영국도 중국도 모두 근면혁명에 기초하여 발전하고 있었고, 동일한 생태학적 한계점에 도달하였지만 영국은 '노동집약적'인 근면혁명으로부터 아예 탈피하여 '자본집약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되어간데 반해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는 여전히 노동집약적인 단계에 머물며 대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일정한 사회발전이 모두 동일한 '근면혁명'에 도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하야미, 스기하라 등의 일련의 논자들과는 결이 다르다.

포메란츠의 본래의 의도와 달리 포메란츠의 논의는 상당히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집약적인 근면혁명의 세계에서 자본집약적인 산업혁명의 세계로의 이행에는 생태학적인 '우연'이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지만 그것은 곧 자본집약적인 산업혁명의 세계로 이행하지 못했더라면 영국 또한 중국과 마찬가지로 고꾸라졌을 것이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우리는 기술혁신을 통한 기계제의 대규모 도입이 없이는 근면혁명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야미는 자신의 저작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에 항변하며 자신의 '근면혁명'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장기간의 힘든 노동"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근면혁명이란 - 인용자 주) 실제로 생산량의 확대 혹은 생산물의 질적 향상을 목표로 하면서 그 결과가 소득증대로 이어져 생활수준의 향상을 전망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힘든 노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강제노동이 비효율적인 것도 바로 그 노동에 대한 보답이 없는 고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이 자기목적화하여 장래의 보수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면, 장시간의 힘든 노동은 이미 고역이 아니게 된다."(하야미, 2006 : 12)

 그의 말은 어쩌면, 아니 일정 부분은 사실일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의 '투쟁'을 굳이 평가절하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힘든 노동을 감내하는 인간 내부로부터 나오는 힘이란 곧잘 상상을 초월한다. 도대체가 인간의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러한 힘이 나오는 것인지 혼자 한참을 상념에 빠질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하였듯이 "자기노동에 기반한 소유", 즉 소농일 때나 성립할 수 있는 말이다. 자본주의란 기본적으로 "타인의 노동에 기초한 소유"가 배타적으로 관철된 생산관계를 의미한다. 타인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일종의 '강제노동'을 행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있어 노동이란 곧잘 '노역'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다. 자발적인 노동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발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한계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닌 근본적인 결함을 논하는 것이다.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아무리 사장님이 말을 해도 노동자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그 한계는 자본주의에 의해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런 '노동집약적인' 발전 경로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포메란츠는 그가 의도한 것과 달리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진정한' 힘을 보여주었다. 노동집약적인 근면혁명의 세계는 끝끝내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비록 더 많은 자원을 활용하고 타국을 식민화 하였을지라도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력 발전은 근면혁명의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노동하기만 하고 더 심한 강도의 노동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는 삶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이러한 해방과정이 아무리 끔찍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인 자유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자유의 나라를 향한 근본 조건으로서의 '노동일의 단축'

 일찍이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발전이 이룩해내는 노동시간의 절약이 "자유의 나라"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다음의 인용문에서처럼 아름답게 그렸다.

 "사실 '자유의 나라'는 궁핍과 외적인 합목적성에 강요되어 노동하기를 그칠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 즉 그것은 당연히 본래적인 물질적 생산영역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미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 자연과 격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되지만, 마찬가지로 문명인도 그렇게 해야만 하고, 더구나 어떠한 사회 형태 속에서도 즉 모든 가능한 생산양식 하에서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미개인이 점차 발전해감에 따라 그의 '자연적 필연성의 나라'는 욕망의 확대 때문에 함께 확대되어진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생산력도 확대된다. 이 영역에서의 자유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것에서만 있을 수 있다. 즉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마치 어떤 맹목적인 힘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처럼 자신과 자연 간의 물질대사에 의해 지배당하는 대신에, 이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의 통제하에 두는 것, 요컨대 최소의 힘의 소비에 의해서 자신의 인간성에 가장 유리하고 가장 적합한 조건하에서 이 물질대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필연성의 나라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 나라의 저편에 '자기목적'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힘의 발전이 즉 참된 자유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직 저 필연성의 나라를 그 기초로 하여 그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일의 단축이야말로 바로 그것을 위한 근본 조건이다."(칼 마르크스, <자본>Ⅲ-3, 강신준 역, 이론과실천, 1990, pp.1024-1025)

 노동일의 단축을 통한 '자유의 나라'의 확대야말로 인간의 자기발전을 위한 궁극적인 기반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 자유의 나라가 없이 모든 시간을 노동에만 소비하는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이란 그저 이 지루하고 끝없는 노동을 견디게 하는 '진통제'로만 작용한다.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꿈꾸기만 하다가 죽는 삶을 살고 싶은가?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를 비롯한 우리 모두 이러한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인류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말이다. 대분기에서 탈락하고도 여전히 더 많은 노동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겠다는 이 집착!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인류를 근면혁명의 세계로 밀어넣는 한국인들의 집착에 박수를 보낸다.
더글로리 유튜브에서 캡쳐
"멋지다, 석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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