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2

이종구 기독교인 이시다 로쿠지로, 철도 기관원 파업을 주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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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협동조합
::: 이천이십삼년 삼월 삼십일일 ::: 2023 03 31 :::

이종구의 금요인문학
기독교인 이시다 로쿠지로, 철도 기관원 파업을 주도하다
이시다 오쿠지로(石田六次郎)는 1889년 4월에 ‘5등 화부’로 도꾜에 있는 철도국 신바시(新橋) 기차과(氣車課)에 취업해 일급 25전을 받았다. 이후에는 도꾜 서북부와 인접한 이바라키(茨城)현의 미도(水戶), 도꾜 북쪽에 있는 혼슈(本州) 중부 내륙의 토치기(栃木)현에 있는 오야마(小山)에서 근무하였다. 직책은 탄수(炭水)원으로 기관차에 석탄을 싣고, 물을 보급하며, 청소를 하는 노동에 종사했다. 그는 1892년 4월에 일본철도회사로 옮겼으며, 청일전쟁이 박두한 1894년에 간신히 기관차를 운행하는 승조원이 되었다. 화부 3년을 거쳐 1896년 말에 기관원 보조가 되었고 1897년에 기관원으로 승진했다. 1895년에 기록한 비망록에는 “나는 처음으로 기관차를 타고 운전하는 업무를 맡았다. 정신없이 바쁘고, 주의해야 할 일이 많고,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관원은 책임이 무겁고 과격한 노동을 했지만 대우는 철도 종업원 중에서도 열악했다. 더구나 이시다는 기관원이라는 일이 지기에게 맞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처자를 부양하기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다.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이틀 만에 죽었다. 다음에는 아들을 낳았지만 젖이 나오지 않아 불에 덴 것 같이 우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동냥젖을 먹이려 다녀야 했다. 따져 보면 불행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행복은 자각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시다는 자기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상황도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다.
이시다는 1896년부터 혼슈 동북에 있는 아오모리(靑森)현 시리우치(尻内)에 근무하게 되었지만, 구석에서 툴툴대며 불평이나 하고 있으면 문제도 해결되지 않으므로, 회사에 대해 대우를 개선하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898년 초에는 같은 기독교인이고 속마음을 알고 있는 아오모리에 근무하는 이케다 모도하치(池田元八)와 상담하였다. 승무를 마치고 귀가한 다음에 며칠 동안 생각을 가다듬어 한 편의 격문을 기초했다.
“삼가 다시 인사드립니다. 피눈물을 삼키며 제군에게 호소합니다. 제군도 반드시 동감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어디나 의무가 있으면 권리도 있습니다. 책임이 중대하면 반드시 명예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도리에 맞지 않으면 반대하는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처지입니다. 작은 물건이라도 챙기지 못하면 반드시 소리가 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겪지만 티끌만큼도 얻은 것이 없다. 기세를 올려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아니, 정의를 위해 크게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이시다는 이와 같은 주장을 펴며, 더 나아가 기관원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것을 밝히고, 열악한 대우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며, 궁핍한 사정을 기술했다.
“만일 불평을 말하면 의외의 불행을 겪는다. 말없이 퇴사하려 해도 상당한 방해를 받는다. 눈물을 삼키며 남아 있으려 해도 박봉은 그대로다. 다른 과는 물가가 오르면 일반적으로 급료가 오른다. 그러나 비상한 노고를 해야 하고 비상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 우리들은 한 번도 임금 인상이 없었다. 아내는 옷이 얇아 울고, 아이는 배가 고파 울고, 그러나 우리가 밤낮으로 고생해 가며 얻은 것은 냉대, 비웃음, 멸시, 아내의 피눈물, 아이의 우는 소리뿐이다. 아 ! 우리 당국은 눈이 없는가, 모르고 있는가”, “지금은 웃어야 하는 가을이 아니라 화를 내야 할 때이다. 울어야 할 가을이 아니라 분노할 때이다. 진짜 결심해야 할 가을이다.”
그는 글을 써나가며 또한 실행 방법을 얘기하기에 이르렀다.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1898년 2월 15일까지 기관원과 화부 일동은 이 서한을 읽고 반드시 임시 급료 인상을 요구하는 글을 써서 2전 우표를 붙여 과장에게 익명으로 몇백 통이라도 좋으니 무제한으로 동서남북에서 보내 진정한다. 다음에는 호칭을 바꾸어야 한다. 기관원을 기관수로, 보조를 기관수보조로, 화부를 승조기관생으로, 청소부를 기관생으로 해야 한다. ”
요구가 달성될 때까지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단결해, 끊임없이 상부에 호소하는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으며, 운동 조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와 같이 정신적으로 단결이 이루어지면, 여기에는 회장도 없고, 서기도 없고, 개 노릇을 하는 앞잡이 때문에 생기는 걱정도 없고, 배신자 때문에 슬플 일도 없다. 비교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지만 러시아 허무당과 비슷하며, 유럽의 사회당과는 다르다.”
그리고 이시다는 마지막 부분에 단체 명의를 “임시 기성대동맹회(期成大同盟会)중앙부”라고 쓰고는 날인했다.
이 격문을 모든 노선의 기관원에게 보냈다. 항상 냉대에 울고 있던 기관원들은 이를 읽고는 공감하였으며, 새롭게 분개하며 용기백배하게 되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기관원 사이에 퍼지는 불온한 공기를 알아챈 회사는 당장 사람을 보내 움직임을 살피게 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본 이시다는 다시 “경계서”를 각지에 보냈다. “수상하고 말 잘하는 자들은 백만가지의 수단을 사용해 우리 당의 개획을 탐지하고 있다. 경계해야 한다. 걍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미 때믐 늦었다. 회사는 우선 주모자인 이시다, 이케데 두사람에게 정직을 명했으며, 다시 아오모리 2명, 시리우치 2명, 이치노세키(一ノ関) 5명, 모두 10명을 해고 처분했다. 이것을 알게 된 기관원들은 단호하게 궐기했다. 질병, 사고를 이유로 모두 결근하는 수단을 사용했다.
시리우치의 기관원들은 각지의 기관원에게 타전했다. “시리(尻内), 아오(青森) 모두 그만두었다”
이치노세키의 기관원도 모리오카(盛岡)의 기관원에게 급보를 보냈다. “지급(至急), 기관고(機關庫) 모두 그만두었다.” 이와 같이 전보로 연락을 주고 받은 결과, 도꾜의 우에노(上野)에서 혼슈 북쪽 끝에 있는 아오모리를 잇는 구간의 철도가 1898년 2월 26일 새벽부터 대부분 멈추고 말았다. 이시다는 이 쟁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 전쟁은 결코 명분이 없는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올바른 명분으로 선전하는 전사는 술기운을 띠고 있지 않고, 폭언을 내뱉지 않고, 곤봉을 휘두르지 않고, 진짜 정정당당했다. 이때문에 사회에 관심을 가진 인사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여러 신문 잡지에는 호의적인 평론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실렸다.”
사실, 일본에서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 쟁의는 여론의 지지와 기관원의 굳건한 단결에 힘입어 기관원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 10명의 해고를 철회하라는 요구는 대부분 그대로 받아 들여졌으나 주동자인 이시다와 이케다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 쟁의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일은 기관원이 서기 수준의 대우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기관원들이 직명(職名) 개정에 집착한 것도 이와 깊은 관계가 있다. “수(手)”라는 직칭(職称)은 서기의 신분을 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관원 쟁의의 기본적 의의는 노동자의 신분적 해방 만이 아니라 나아가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864년에 중농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다는 우편국 서기를 거쳐 순사를 했다. 1887년에 도꾜로 상경해 학교를 다니고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새로운 사상의 하나인 기독교에 끌려 입교하고 금주회에도 가입했다. 독서가인 그는 철도국에 취업한 다음에도 책을 통해 미국의 철도노동운동을 접하고 기관원 처우 개선 운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미 1897년 10월에는 타카노 후사타로(高野房太郎)의 노력으로 ‘노동조합기성회’(労働組合期成会)가 조직되었으며, 그해 123원에는 철공(鉄工)조합이 만들어져 타카노와 카타야마 센이 간사를 맡고 있었다. 쟁의 주동자가 되어 일본철도에서 해고된 이시다는 카타야마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쟁의가 끝난 다음에 이시다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기관수들이 조직한 노동조합인 “교정회"(矯正会)의 규약 제2조는 ‘목적’을 ”본회 회원은 오로지 회사의 융성을 도모하고 회사와 부침을 같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직무를 근면하게 수행함은 물론이고 온후독실(溫厚篤實)하고 품행방정하여 조금도 조폭과격(粗暴過激)한 거동을 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즉, 기독교도가 지도적 역할을 맡아 탄생한 노동조합이므로 목적도 윤리적이었다.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당시에는 노동자가 주도하는 사회운동은 각 개인의 인간적 성장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윤리적이라는 말이 타협적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교정회는 그 시대에 쟁의를 거쳐 조직된 유일한 조합이었으며 쟁의 자금을 축적하고 있었다. 카타야마 센도 교정회를 ‘교전적(交戰的) 조합’으로 부를 정도였다. 이시다는 해고된지 반년 후에 복직하였으나 노동운동의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그는 철도 노동자를 대상으로 금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전근하는 곳마다 노동자 전도에 힘썼다. 직장에서는 순조롭게 승진해 조역(助役), 주임, 기관고장(機関庫長)을 거쳐 1925년에 기사로 승진해 퇴직했다. 이후에는 혼슈 동북에 있는 센다이(仙台)에서 종교 활동에 헌신했다. 이시다는 1937년에 73세로 병사했다.
(“시리우치”, 현재 “하치노헤”에 있는 파업 기념비, 일본노동조합운동 발상지로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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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구
    (“시리우치”, 현재 “하치노헤”에 있는 파업 기념비, 일본노동조합운동 발상지로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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