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2

이재봉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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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4 h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추천사:
“전창일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의 큰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전창일 선생님을 언제 어디서 처음 뵙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주로 글과 강연을 통해 통일운동 해오느라 6천명쯤에게 이메일 보내는데 선생님께서 어떻게 수신자 명단에 포함됐는지도 궁금하고요. 아무튼 매달 한두 번 보내는 이메일에 종종 정성과 사랑으로 답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메일 아이디에 ‘하나의 조국’이라는 ‘onejoguk’을 쓰고 계시니 열렬한 통일운동가로 짐작할 수 있었고요.
선생님께서는 저를 항상 과대평가하셨습니다. 대략 10년 전부터 30년 아래 자식뻘인 저에게 꼭 ‘존경하는 이재봉 교수님’으로 시작하는 답글을 보내시더군요. 과분하고 민망스러운 칭찬을 곁들이시면서요. 2014년 <이재봉의 법정 증언>을 연재할 때는 ‘양심과 지식과 용기를 겸비한 학자’로 떠받들어주셨습니다. 국제정세에 관한 글엔 ‘자랑스런 민족의 석학’이나 ‘세계적 석학’이라고 치켜세워주시고요. 책을 소개하면 양서 추천해줘 고맙다며 주문해 읽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제 이메일을 받으면 복사해 가까운 분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무슨 모금운동을 벌이면 기꺼이 동참하셨습니다. 통장도 없어 따님을 통해서요. 박정희 정권 때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수가 돼 징역살이한 데 대한 배상금을 이명박 정권 때 받았는데, 그 액수가 많다고 박근혜 정권이 강제반납 조치를 내리며 은행예금을 차압하고 연리 20%의 ‘이자 고문’까지 하는 바람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으시면서 말입니다.
2-3년 전엔 ‘90대 늙은이’여서 잘 걷지는 못해도 살아 숨 쉬는 한 저와 함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더 큰 걸음을 내딛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컴퓨터를 일주일에 한두 번 열어보느라 제 이메일을 며칠 늦게 읽으면 무슨 큰죄라도 저지른 듯 죄송하다고 하셨고요. 작년엔 시력이 약해져 대형 손잡이 돋보기를 이용하느라 책 읽기가 아주 불편하다면서도 이메일 답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늙어서 보행도 어렵고 모임에 가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 웬만하면 외출하지 않고 주위의 권유로 회고록을 쓰신다더군요.
지난 5월 ‘진보당’에 가입했다는 제 이메일엔 얼마나 반가웠는지, ‘존경하는 이재봉 교수님’이란 호칭을 ‘경애하는 이재봉 동지! 박사님!’으로 바꾸셨습니다. ‘진보당 고문’으로서 제 입당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며, “함께 하여 더욱 반갑고 기쁨이 한이 없습니다”고 하시더군요. 작년 10-11월 제가 ‘김동수 선생 유산 나누기 운동’을 벌이면서부터 선생님께서 진보당원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김재연 진보당 대표에게도 책을 보내달라면서 송료를 대신 부담하셨거든요.
그런데 지난 3월 대선을 앞두고 제가 진보당에 몹쓸 짓을 저질렀습니다. “검찰독재의 횡포와 역사의 퇴행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윤석열 집권을 막자며 김재연 대선 후보에겐 사퇴 권유하는 글을 은밀히 보내고, 당원들에겐 이재명 찍어달라는 글을 여기저기 올렸으니까요. 열성 당원들의 거센 비판과 거친 욕설에 잠시 시달리며 선생님을 떠올려봤습니다. 나중에 아래와 같은 답글을 주시더군요. “저 역시 지난 대통령선거에 이재명 후보 캠프 남북공동선언 실천위원회 특보단 상임고문으로 참여했습니다. 진보당 고문임에도 이재명 후보의 당선을 낙관할 수 없는 위급한 처지라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인혁당 사건과 범민련 활동 등으로 십수 년 감옥에 갇혔던 어르신의 유연성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이에 앞서 작년 말 양쪽 눈 백내장 진단을 받고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다행히 회고록 집필을 마무리하고 김상구 현대사학자에게 평전과 편집을 맡겼다는 소식을 전해주시더군요. 그리고 지난달 김상구 선생으로부터 이 책 추천사를 부탁받으며 무려 1,100쪽의 원고를 받았습니다.
원고를 읽기 전까지, 선생님께서 저를 과대평가하신 만큼 저는 선생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1960-70년대부터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신 수많은 어르신들 가운데 한 분으로만 알았지요. 인민혁명당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 징역형을 받고, 정부에서 이적단체 취급하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범민련) 남측본부 지도자로 지내셨다니 조금 ‘과격한 통일운동가’이리라는 생각을 가졌고요.
원고를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역사를 공부하면서, 선생님의 기구한 운명과 너무 앞서가신 삶을 어느 정도 알게 됐습니다.
  • 선생님은 192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부모 도움 없이 대학 다니려고 1947년 홀로 서울로 내려왔답니다.
  • 1948년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데모에 참여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전쟁이 일어나 석방됐고요.
  • 전쟁 중엔 북한 인민군 장교로 시작해, 남한 국민방위군 훈련병이 되었다가 미군부대 지게부대원으로 일하는 등 세 번 징집을 당했답니다.
  • 이 과정에서 1928년생 전철구가 1921년생 전창일로 뒤바뀌며 호적까지 뒤죽박죽됐고요.
  • 나중엔 미군부대 통역관이 돼 미군장교 대우를 받기도 하고, 미8군사령부 경제조정관으로 일하기도 하면서 떼돈을 벌기도 했답니다.
  • 남한 회사의 중역으로 초빙되면서는 근무시간의 절반을 통일운동에 할애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1960년 4월혁명 이후 1961년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민자통) 최고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몸담게 됐고요.
  • 그러면서 1990년대 말까지 다섯 번에 걸쳐 15년간 감옥에 갇히는 등 험난한 시련을 겪으신 거죠.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부인께서도 똑같았으니까요. 1950년대 당시 최고 사범대학을 나와 사명감을 갖고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답니다. 부잣집 아이는 공부 잘하지 못하는데 반장 하며 1등으로 기록되고, 가난한 집 아이는 공부 가장 잘하는데 4-5등으로 기록된 걸 발견하고 바로잡았답니다. 교장과 교감의 협박 섞인 수정요구를 거부하며 싸운 뒤, 학교의 부정과 비리에 교사의 자부심과 보람을 맛보기 어려워 3년 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답니다. 곧 양재기술을 배워 의상실 차리고 돈벌어 자식들 교육시켰고요. 한편 남편 석방운동 벌이다 1970년대 터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남민전) 사건에 엮여 잠시 구속됐는데, 그 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2003년 작고하셨다는군요.
원고를 읽는 동안 제가 몹시 존경하는 ‘간첩’ 김낙중 선생님이 종종 떠올랐습니다. 두 분의 삶에 비슷한 점이 많아서요. 전창일 선생님보다 3년 후배지만 2년 전 돌아가신 그 분도 저에게 글을 보내실 때 꼭 ‘존경하는 이재봉 교수님께’로 시작하셨지요. 자식 같은 놈에게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극구 말렸습니다만. 김낙중 선생님과 1990년대 말부터 교분을 쌓으면서 2008년 썼던 글 한 토막 아래에 옮깁니다.
“저는 좀 건방진 편이라 남들에게 존경한다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두 분을 들겠습니다. 간디와 김낙중..... 그에게 죄가 있다면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성인이고 선각자라도 몇 년 정도 앞서가야 이해와 존경심을 갖고 따르는 후배와 제자들이 많이 생겼을 텐데, 수십 년을 앞서가는 바람에 ‘정신병자’나 ‘간첩’이 되어 장기수가 되지 않았을까요?”
전창일 선생님께서도 시대를 너무 앞서가시는 바람에 기구한 운명을 만들고 험난한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이 책 제3권 ‘전창일의 맺음 글’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통일문제에 대한 좋은 글을 쓰신 분, 저서 발간하신 분에 대한 감사와 격려 편지 등을 전자우편(e-mail)을 통한 교류로 교우관계를 형성하며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학자들을 나이의 차이를 떠나 나는 학문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나열한 10여명 이름엔 ‘이재봉 교수’도 끼어있군요. 쑥스럽지만 저를 이토록 아끼고 사랑해주신 선생님을 곧 찾아뵙고 감사와 존경의 큰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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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1 - 분단과 전쟁, 1945-1959  |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1
김상구 (엮은이),전창일 (감수)책과나무2023-04-05
책소개

호산 전창일의 일생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펼쳐진 통일운동을 기록하여 분단 77년 만에 출간된 최초의 통일운동사이다. 제1부 ‘분단과 전쟁’(1945년~1959년)에서는 전창일 통일운동의 근원을 밝혔다. 일제강점기 북청 물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북에서 광복을 맞았으나 단선 단정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한국전쟁 중 인민군, 국군, 미군을 거치게 되며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시작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광복 후 남과 북이 이념 차이로 겪는 갈등,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고 가족과 ‘전철구’라는 본명을 잃게 된 전창일의 나라와 자신을 찾기 위한 외침이 통일운동인 것이다. 책에는 교육환경의 변화, 신의주 학생 반공 의거, 여운형 암살, 단선 단정 반대운동 등 광복 후 북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냈다.

백수(99세)에 가까운 전창일의 구술대담과 회고록, 남북 해외 동포들이 연대한 범민련 관련 자료, 투옥 중 받은 편지, 감옥에 수감된 동지들이 보낸 편지 등 접할 수 없는 통일운동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목차
추천의 글
발문
들어가는 말

제1장 내 고향 북청에 내 핏줄들이 살고 있다
01 분단으로 인해 뿌리가 바뀌다
02 혈육들의 소식을 듣기까지
03 40여 년 만에 핏줄이 쓴 편지를 보다
04 전창일, 또 감옥으로 가다
05 다시 흐른 세월 30년, 결국 보지 못한 혈육의 얼굴

제2장 일제 통치하에서 살아가기
01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다
02 북청의 지리와 문화
03 김춘배와 김일성 신화
04 ‘덤베북청’과 ‘북청물장수’ 그리고 북청의 인물들
05 일제 강점기 말기, 가족 이야기

제3장 북에서 체험한 해방
01 해방과 8월의 폭풍(원폭투하, 소련참전에서 종전까지)
02 점령군과 해방군
03 달라진 교육환경
04 반공학생의거와 소련군의 흥남 NZ공장 기계반출의 진실
05 소련 군인과의 인연 그리고 어머니와의 이별

제4장 단선·단정 반대운동
01 여운형의 죽음과 좌우합작운동의 몰락
02 한국대학 입학 그리고 단선·단정 반대투쟁
03 잊을 수 없는 인연, 동지와 친구들
04 남북연석회의와 5·10 단독 선거
05 제2차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 협의회(평양)와 남북조선 총선거(해주)
06 첫 번째 구속(1949년 4월) 그리고 옥중에서 만난 사람들

제5장 6·25 전쟁, 군대를 네 번 간 사연
01 1949년, 전쟁터로 변한 38선
02 운명의 기로 서울
03 인민군 생활(첫 번째 군대 이야기)
04 제주 육군 제1훈련소에서 겪은 고초(첫 번째 강제징집)
05 지게부대 이야기(두 번째 강제징집)
06 노무봉사단 이야기(세 번째 강제징집)
07 일본인 수사관과 한국전쟁

제6장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기
01 미군 부대(1169공병여단)에 취직하다
02 휴전회담과 원자폭탄
03 아내 임인영과의 인연
04 양말수입 장사와 미곡상회 투자
05 취직(OEC)과 결혼, 그리고 투자실패 경험담

표 목차
표1: 전창일의 호적과 남북 이산가족 신청서의 내역 비교표
표2: 북청 지역의 독립유공자 명단
표3: 북청 지역의 사회주의자 명단
표4: 미·소 군 조선 진주 관련 내역
표5: 신의주 사건 희생자 비교 내역
표6: 국회 프락치 사건 피고인 구형과 선고
표7: 1949년 38선 충돌과 인민유격대와 교전 현황
표8: 한국전쟁 인명피해
표9: 한국전쟁 사상자 비율 비교표
표10: 한국전쟁 참전 일본인 현황

자세히 보기 목차
1. 전창일이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1992.2.10.)
2. 내 고향 이북(북청)에 띄우는 편지(1992.5.1.; 「말」지 1992년)
3. 동생 전철문이 전창일에게 보낸 편지(1992.9.11. 추석날)
4. 사촌 형 전철우가 전창일에게 보낸 편지(1992.9.12.)
5. 전창일이 사촌 형 전철우에게 보낸 편지(1992.12.)
6. 전창일이 동생 철문, 철명에게 보내는 편지(1992.12.)
7. 전창일이 이종 동생 조열하 장로에게 보내는·편지(1992.12.14.)
8. 전창일이 전철우 전철문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1995.3.22.)
9. 사촌 형 전철우가 전철구에게 보낸 편지(1995.11.5.)
10. 큰 누님 전수암(전초선)이 동생 철구에게 보내는 편지(1995.11.5.)
11. 동생 전철문이 전철구에게 보내는 편지(1995.11.5.)
12. 동생 전철문이 전철구에게 보내는 편지(2008.5.29.)
13. 전창일이 조카들에게 보내는 편지(2019.1.18.)
14.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亜戦争終結ノ詔書)(1945.8.15.)
15. 신의주 반공학생의거(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및 해방일보 사설, 신의주 학생 사건에 대하여(1945.12.19.)
16. 좌우합작 7원칙
17. 위대한 겨레의 지도자, 인민의 벗, 몽양 여운형 선생 48주기 추도사
18. 김구·김규식이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1948.2.16.)
19. 김일성·김두봉이 김구·김규식에게 보낸 답신(1948.3.15.)
20. 연석회의 공동성명서(1948.4.30.)
21. 최초의 국가보안법(1948.12.1.)
22. 한국군의 공격행위를 지지할 수 없다는 무초 대사의 지적에 대한, 한국군이 38선을 넘어가 공격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해명(1949.5.10.)
23. 송악산지구 육탄 10 용사의 진상, 김익열의 증언(1964.5.4.)
24. 백선엽(192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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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통일운동에 뛰어들다
01 4월 혁명 후 혁신계 활동과 공영토건 사장의 배려
02 아내의 변신, 교사직 사표를 내다
03 통일운동 참여의 계기와 삼민당 당수 문용채와의 조우
04 혁신정당의 상황과 7·29 총선
05 전창일, 민자통 중앙위원이 되다
06 민족일보 창간과 혁신계
07 2대 악법 반대투쟁

제8장 5·16 쿠데타와 도피생활
01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02 5·16 쿠데타와 혁신계
03 도피생활
04 6·3 항쟁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05 콜린스 라디오 입사, 그리고 간첩 오인 사건

제9장 인혁당 조작사건과 전창일
01 자강학회 이야기 그리고 박정희의 무한 권력욕
02 민족통일촉진회와 7·4 공동성명 그리고 10월 유신
03 긴급조치 시대
04 긴급조치 4호와 전창일의 구속
05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짜인 각본
06 군사재판
07 운명의 4월 8일
08 전주교도소에서의 수형생활
09 전창일의 단식과 아내의 구명운동
10 임인영의 구속과 남민전 사건
11 출옥과 사상전향서

제10장 범민련의 통일운동
01 북조선, 고려민주연방공화국(80.10.10.) 창설을 제안하다
02 ‘투쟁대오의 선봉’ 학생들의 희생과 6월 민주항쟁
03 ‘형집행정지자’ 전창일의 삶
04 범민족대회와 황석영, 문익환, 임수경의 방북
05 민자통 재건과 전민련의 통일운동
06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의 발족
07 노태우 정권의 탄압과 범민련의 투쟁
08 UN 동시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헌법 제3조와 국가보안법
09 범민련 강령 규약이 제정되다
10 김영삼의 당선과 문익환의 범민련 이탈
11 문익환 프락치 사건의 진실
12 조문단 사건
13 가자 서울대로, 보라매공원에서 관악산을 넘어
14 마지막 투옥 그리고 공안당국과의 투쟁

표 목차
표11: 5·16 쿠데타의 전개과정
표12: 혁명재판 공판기록
표13: 특수반국가행위 사건 수형자 목록
표14: 제1차 인민혁명당 관련 피의자 명단
표15: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의 적용 건수
표16: 인혁당 및 민청학련 피고인 재판결과(긴급조치 1, 4호 위반)]
표17: 남민전 사건 피고인 재판결과
표18: 분신 사망 일람표
표19: 6월 민주항쟁 연표
표20: 문익환 목사 사망경위 보도

자세히 보기 목차
25. 긴급조치 제1호(1974년 1월 8일 공포)
26. 긴급조치 제4호(1974년 4월 3일 공포)
27. 전창일 공소사실 요지(1974.5.27.)
28. 전창일(무기징역)의 아내 임인영 씨가 작성한 호소문
29.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 사업 총화 보고, 198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30. 문익환, 나는 왜 평양에 갔나
31. 1990년 제1차 범민족대회 결의문(판문점 대회 결의문)
32. 1990년 1차 범민족대회 서울 채택 결의문
33. 남북기본합의서(1991.12.13.)
34.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강령, 규약(1993.12.16.)
35. 백인준 의장과 문익환 목사의 송수신 편지 3통
36. 조문단 사건, 전창일의 모두진술서(1994.10.26.)
37. 변호사 변정수, 변론 요지(199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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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6·15, 10·4 선언과 인혁당 무죄투쟁
01 김대중 정권의 통일 정책과 통일대축전의 무산
02 민화련·민화협의 출범 그리고 범민련과의 갈등
03 마지막 범민족대회
04 범민족대회의 소멸과 6·15 공동선언
05 6·15 공동위원회의 성립과 10·4 선언
06 인혁당 무죄투쟁
07 무죄 받고도 죄인이 되다
08 박정희가 물고문·전기 고문하더니 박근혜가 ‘이자 고문’ 하더라

제12장 반-통일 정책과 통일운동의 불씨
01 전창일이 바라보는 한국 정치 현실과 미래
02 5·24 조치와 대북 제재
03 반국가단체와 이적단체 그리고 통일운동의 불씨
04 강희남 목사와 연방통추
05 통일대박론과 촛불 정국
06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정상회담
07 전창일과 청년들

표 목차
표21: 범민족대회 개최 일람표
표22: 6·15 북측위 임원 명단
표23: 6·15 남측위 임원 명단
표24: 6·15 해외위 임원 명단
표25: 인혁당·민족일보·아람회 사건 국가 상대 손해배상청구소송
표26: 천안함 침몰상황과 원인
표27: 천안함 침몰 보도 목록
표28: 반국가단체, 이적단체 목록
표29: 조선일보의 ‘통일이 미래다’ 시리즈 목록(일부)
표30: 세월호 침몰 전후의 상황 및 보도
표31: 북조선의 핵 및 미사일개발 일지
표32: 하노이 회담 결렬 원인에 대한 북미의 입장

자세히 보기 목차
38. 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홍근수)
39. 6·15 남북 해외 공동행사 공동준비위 결성선언문(2005.3.4.)
40. 국정원으로부터 인혁당 부당이득 배상금 반환소송을 당한 77인의 호소문(2013.7.27.)
41. 유신독재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 주범 박정희 고소(2019.4.9.)
42. 한국 정치 현실과 미래
43. 천안함 사태 관련 대북 조치 발표문(5·24 조치)
44.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2005.11.25.)
45. 천만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마지막 고별사(2009.5.1.)
46. 김정은 북한(조선) 노동당 위원장 육성 신년사 전문(2018.1.1.)
47. 한(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4·27 선언, 2018.4.27.)
48.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과 도널드 제이·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 사이의 싱가포르 수뇌회담 공동성명(2018.6.12.)
49. 9월 평양 공동선언(2018.9.19.)

전창일의 맺음 글, 인혁당 영어(囹圄)의 수업을 마치면서
연보: 해방·통일 관련 현대사 연표 및 전창일 연보
부록: 전창일 수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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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
책속에서
P. 30 나는 유년기에 소의 등에 앉아 졸다가 떨어지기도 한 목동이었고, 소년기에는 엄마랑 누나와 함께 또는 아버지를 돕는 학생 농부였다. 청년기에는 미 제국주의와 그에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슬픈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험한 애국·애족적 통일의 길을 걸으면서 낮에는 신문 배달과 막노동,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주경야독하는 혁명가였다. 그 후 다섯 번 옥문을 드나들어 합계 15년 동안 감옥 생활하면서 옥중 수업하였다.
그리하여 각자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풍요롭고 평등한 세상,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로운 왕국으로 인간의 비약이 약속되는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m) 이념이 나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 민족지상의 과제로 인식하여 조국 통일운동에 몸 바치기로 인식하며 살아왔다. 조국의 자주통일은 모든 이념에서 최우선적 민족적 과제이다. 이에 따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조직운동에 미력하나마 일미지역(一尾之役)을 다해왔다.  접기
P. 67~68 국사편찬위원회 면담자와의 대화에서 “내가 이름이 전철구예요. 원래 본명. 저기, 저기 있잖아요. 구명(舊名), 구명 철구라고 돼 있잖아요.”
라고 하는 전창일의 발언을 기억할 것이다. 전창일이 “구명 철구라고 돼 있잖아요.”라면서 보여준 서류는 2007년 8월 1일 자로 작성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말한다.
2007년 17일부터 22일까지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2000년 8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 개최되었던 제1차 이산가족 상봉 이후 16번째의 행사였다. 2 박 3일간 두 차례로 나뉘어 열린 행사에서 1회차 상봉에는 북측 97명이 재남 가족 404명과 상봉하였으 며, 2회차에는 남측 94명이 재북 가족 219명을 상봉했다.
전창일은 이 상봉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통일부에 ‘남북 이산가족 신청서’를 제출했다. 아쉽게도 전창일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 이 책 저술목적의 하나이다.  접기
P. 299쪽~300 집에 단 하나 있는 이 시계가 가끔 고장이 났다. 이제 의지할 것은 새벽 닭 우는 소리뿐이었다. 하지만이 닭마저 새벽에 울지 않을 때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침밥도 못 먹고 도시락도 없이 학교에 갈 수밖에. 파리한 얼굴로 돌아온 아들을 본 뒤, 그 후 시계가 고장이 나면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앉아 밤을 새웠다고 한다. 애처로운 모정이었다.
전창일은 졸업 후 이틀 밤을 자고 서울로 떠났다. 모친 조갑진손은 그 무렵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1킬로미터 정도를 따라 나왔다.
제방 언덕에 서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전창일은 엄마! 하면서 돌아보고, 다시 뒤돌아보면 어머니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들은 것은 집 떠난 지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후였다. 휴전되기 얼마 전인 1953년에 어머니가 창가에 앉아 하늘을 보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아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면서 돌아가셨다 한다. 사촌 형이 알려준 사연이다.  접기
P. 389 최근 5·10 총선의 투표율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UN 한국 임시 위원단에 관한 미국 연락장교의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 수는 9,834,000명이고 이들 중 등록자는 7,837,504명이고 투표자는 7,036,750명이다. 이 수치에 의하면, 등록자대비 투표율은 95.2%이지만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71.6%가 된다. 사실 이 수치 역시 의문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전체 유권자의 79.7%가 등록을 했고, 등록한 유권자의 95.2%가 투표했다는 것이 미국 연락장교의 보고내용이다.
이제 신문을 단순히 읽기보다 ‘행간의 의미’를 찾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미군이 7일 이래로 접수한 보고에 의하면, 사망 78명 부상 수십 명 그리고 수백 명이 구타를 당하였다 한다. 이상 사망자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의 습격 암살로 발생한 것인데, 여차한 행동도 투표자를 공갈하여 기수(旣遂)하지 못하였다”라는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대부분 유권자들이 생명을 무릅쓰고 투표에 참가했다는 얘기가 된다. 아무튼. 당시 대부분 언론들은 5·10총선의 화려한 결과를 홍보하기에 바빴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은 어떠했을까?  접기
P. 541~542 미스터 ‘로’로 불리는 오세민이 기회를 주었다. 미군 장교에게 전창일을 추천했다. 지금 회화는 경험이 없어 서툴지만, 영어 실력은 자기보다 못하지 않다고 얘기했다. 미군 장교는 전창일을 불러 영어로 된 공문서를 읽어보라고 했다. 테스트를 한 것이다. 발음이야 어쨌든 막히지 않고 모두 읽었다. 그다음에는 어떤 문장 하나를 써보라고 한다. 역시 문제없이 척척 써 나갔다. 오케이였다. 이로써 전창일은 미군 부대의 통역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 지게부대의 노무자가 그리고 빨래쟁이가 될 뻔했던 전창일이 하루아침에 미군 부대의 통역·번역관이 된 것이다. 미군 통역이 된 것은 전창일의 일생 중 대 사건이었다. 먼 후일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 전까지 전창일의 사회생활은 미군 부대 통역관 시절의 이력으로부터 시작된다. 통역이 됨으로써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접기
추천글
북녘 조국 북청에서 태어나시어 대부분의 생애를 남쪽에서 보내시는 동안의, 선생님의 귀중한 생애이면서 당대의 사회사, 민족사 바로 우리 현대사가 조감되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자료와 주해 또한 이 저작의 실증력과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었습니다.


- 권오헌 (계승연대, 양심수후원회 고문) 
헤아려 보니 선생님과의 인연이 20여 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긴 세월 동안 출석 모범생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서둘지 않으시면서 깊은 연구와 통찰을 겸한 끊임없는 공부와 실행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시는 그 열의에 저도 모르게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 이석영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가끔 선생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얘기가 나돌았다. 왜 그럴까? 이 책을 읽어보면 자연스레 풀릴 것 같다. 선생님께서 6·25 동란 전후 겪으신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은 상상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가혹했다. 이런 가운데서 용케도 버티셨고, 또 엔지니어, 지식인, 통일일꾼, 번듯한 직장인으로서 각양각색의 삶의 여정을 밟으셨다. 일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러한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해방공간과 통일운동 및 혁신운동의 현장이다.


- 강정구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전창일 선생님께서도 시대를 너무 앞서가시는 바람에 기구한 운명을 만들고 험난한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이 책 제3부 '전창일의 맺음 글'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통일문제에 대해 좋은 글을 쓰신 분, 저서 발간하신 분들과 감사와 격려 편지 등을 전자우편(e-mail)으로 교류하여 교우관계를 형성하며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학자들을 나이의 차이를 떠나 나는 학문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나열한 10여 명 이름엔 '이재봉 교수'도 끼어있군요. 쑥스럽지만 저를 이토록 아끼고 사랑해주신 선생님을 곧 찾아뵙고 감사와 존경의 큰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김상구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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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종비련)·종교법인법추진시민연대(종추련) 등에서 활동했다. 대부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종교인의 소득세 문제를 사회 문제화하는데 일조했으며, 종교권력 및 종교계 제반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종교법인법 제정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 선생을 발굴하며 역사에 눈을 뜨게 됐다. 역사는 이데올로기·종교·정치권력과 관계없이 정확하게 정직하게 기록되어야한다는 신념하에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김두한 출세기》 《김구 청문회》 《전쟁과 기독교》 《다시 분노하라, 이승만의 숨겨진 친일행적》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범재 김규흥과 3·1혁명》 《예수평전》 등이 있으며, 《박근혜·최순실 청문회》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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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3>,<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1>,<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2> … 총 14종 (모두보기)
전창일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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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보천리 출생(11월 18일)
•1947년 북청공업학교 졸업 후 월남, 한국대학 입학
•1949년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중앙위원으로 활동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조작) 사건으로 연루되어 무기징역 선고받고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옥 후, 사면복권
•1988∼1990년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공동본부장으로 활동
•1991∼19... 더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분단 극복을 위한 투쟁
최초의 통일운동사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1부 분단과 전쟁

호산 전창일의 일생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펼쳐진 통일운동을 기록하여 분단 77년 만에 출간된 최초의 통일운동사이다.
제1부 ‘분단과 전쟁’(1945년~1959년)에서는 전창일 통일운동의 근원을 밝혔다. 일제강점기 북청 물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북에서 광복을 맞았으나 단선 단정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한국전쟁 중 인민군, 국군, 미군을 거치게 되며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시작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광복 후 남과 북이 이념 차이로 겪는 갈등,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고 가족과 ‘전철구’라는 본명을 잃게 된 전창일의 나라와 자신을 찾기 위한 외침이 통일운동인 것이다. 책에는 교육환경의 변화, 신의주 학생 반공 의거, 여운형 암살, 단선 단정 반대운동 등 광복 후 북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냈다.
백수(99세)에 가까운 전창일의 구술대담과 회고록, 남북 해외 동포들이 연대한 범민련 관련 자료, 투옥 중 받은 편지, 감옥에 수감된 동지들이 보낸 편지 등 접할 수 없는 통일운동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통일운동가의 삶을 통한 한국 현대사의 재해석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1부 분단과 전쟁

호산 전창일의 일생을 통해 한국에서 펼쳐진 통일운동을 기록하여 분단 77년 만에 출간된 최초의 통일운동사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연합군최고사령관(맥아더)이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해 38선이 공식화되었고, 그 후 미군정, 모스크바 삼상회의, 미소 공위, 단독 정부,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분단이 고착화된 지 77년이 되었다.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는 이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이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가를 서술한 책이다.
갈등과 화합을 반복하고 있는 관 주도의 통일정책도 다루었지만, 좌우합작 7원칙, 단선 단정 반대운동, 4월 혁명, 6월 민주항쟁, 범민족대회 등 민간인 주도의 통일운동에 보다 큰 방점을 두었다.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는 1, 2, 3부(각 1권)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분단과 전쟁’(1945년~1959년)에서는 ①본명(전철구) 대신 이명(전창일)을 사용하고 호적(1921년생, 103세)이 실제 나이(1928년생, 96세)보다 7세나 많은 까닭, 사촌 형·누이·동생 등과 40여 년 만에 편지로나마 상봉한 감격 ②북청의 풍습·설화 및 고향을 빛낸 위인 소개, 정신대 회피 수단으로 조혼을 선택한 누이의 아픔 ③해방 후 소련 민정 하에서의 교육정책, 반공학생의거와 흥남 NZ공장 기계반출의 진실 ④좌우합작운동의 상징 여운형의 암살, 해주 남북조선 총선거 당시의 활약, 단선 단정 반대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사연, 옥중에서 만난 동지와 친구들 이야기 ⑤인민군, 국민방위군 제주 훈련소, 미군 지게부대, 국방군 노무봉사단 등 군대를 네 번 간 사연 ⑥영어회화가 가능하게 된 인연, 미군 부대(1169공병여단) 취직, 경제조정관실(OEC) 취직 및 아내 임인영과의 결혼 이야기 등을 다루고 있다.

전창일은 민간인 통일운동에 대부분 관여한 거의 유일한 인사다. 그 업보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시기에 모두 복역한 바 있는, 흔치 않은 이력을 지닌 통일지사이다. 백수(99세)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정확한 기억과 놀라운 정열로 100회가 넘는 구술대담과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증언했으며, 그동안 간직했던 자료- 북녘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 남북 해외 동포들이 연대한 범민련 관련 자료, 투옥 중 받은 편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지들이 보낸 편지- 등을 공개했다.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숨겨진 역사복원에 참조되리라 본다.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1, 2, 3부 전권은 2,000페이지에 이른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400여 개의 주석, 300개가 넘는 그림(이미지), 32개의 표, 49개의 자세히 보기 등이 수록되어 자료집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윤기복, 백인준, 여연구, 김영호 등 북쪽 통일관련 인사를 비롯하여 김춘배, 이재옥, 이춘균, 조훈, 송영회, 주진경, 전삼갑, 박윤원, 김제옥, 강택룡, 백금석, 안병화… 등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정확하게, 정직하게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임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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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기에 다시 바라보는 인혁당의 진실
https://www.kdemo.or.kr/blog/70s/post/114
 
인혁당 사건은 우리의 굴곡 많은 현대사, 특히 독재권력 시기의 대표적인 비극적 사건 중 하나이다. 1975년 4월 9일,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20여 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흐느낄, 당사자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처절한 한과 치 떨리는 분노를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라는 무거운 짐을 새겨 놓은 이 처참한 사건이 발생한 지도 올해로 벌써 만 30년이 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형수 8명을 포함한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74년 4월 25일 신직수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칭에서부터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세칭 1차 인혁당 사건이 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중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중정이 발표한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는 ‘기소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검사의 기소거부라는 초유의 검찰파동을 겪었으며 재판과정에서도 이렇다 할 실체가 입증되지 못한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발표 자체가 참 해괴한 것이었다.
2차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독재권력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유신독재를 출범시킨 뒤 두 해째를 맞는 시점에서 발표되었다. 대학가에서는 반 유신데모가 잇따르고 양심적인 언론인, 교수, 종교인, 재야인사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개헌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74년 4월 3일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이날 민청학련의 명의로 작성된 선언문이 각 대학가에 뿌려졌고 서울대를 비롯하여 이화여대와 성균관대 등 여러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유인물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뿌려졌고, 박정희 정권은 대학가의 반 유신활동을 억누르기 위해 4월 3일 당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민청학련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금지했다.


이런 일련의 반 유신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는 과정에서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체제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그 당시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무려 1천 24명에 이르렀고, 그중에 253명이 구속 되었다. 그 가운데 인혁당 관련자 23명, 민청학련 관련자 27명을 포함하여 180명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75년 2월에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관련자들은 제외되었다. 그들은 74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 후 비상고등군법회의는 그들에게 사형과 무기, 징역 20년, 징역 15년 등 중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8명이었으며,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바로 그 다음날인 75년 4월 9일에 국방부는 그들에게 서울 구치소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은 바로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이수병 등 8명이었다.
 

고문을 통한 조작극이었다 - 황현승
그는 당시에 일반사회 교사로서 광신상고에 재직 중이었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을 당하신 고 김용원 님과 오산고와 명성여고에서 동료교사로서 친분을 쌓았던 그는 74년 5월 2일 남산의 중정으로 끌려갔다.
‘4월 중순에 잡혀갔다는 김 선생 관련인 것 같은데, 내가 왜 끌려왔을까?’ 이리저리 추측을 해봐도 광화문 다방에서 민청학련 선언문과 ‘민중의 소리’를 같이 본 일 외에는 특별히 짚어지는 데가 없었다.

 

3일이 지난 5일 저녁부터 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조사관이 부드럽게 물어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직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조사 받는 것에 대한 경험도 전혀 없었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케인즈의 경제이론을 소개하면서 자본주의의 흐름도 소유 위주에서 분배 위주로 바뀌어가고 있다 등등. 그 순간 담당 조사관은 “요시”(‘그래?’, ‘좋아’ 라는 정도의 일본말)라고 외쳤고 그는 곧바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갔다. 만 이틀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매서운 고문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결국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써야만 했다.


2002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조사한 조사관과 대질심문을 할 때 보니까 글씨는 분명 그의 것인데 왜 썼는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김용원 님의 집에 모여서 정부 전복을 논의했다고 하나 모두 거짓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는 것을 1년 뒤인 75년 4월 9일(8명의 사형 집행 이후) 처음으로 있었던 가족면회를 하고서야 정확히 알았을 정도였다. 그 전에는 민청학련사건이라 생각하고 구치소에서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곤 했었다.


74년 5월부터 82년 3·1절 때 형집행정지로 나올 때까지 그는 어떤 심정으로 그 억울하고도 원통한 시간들을 보냈을까. 개인적인 분노는 몇 년이 이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감옥에서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리기도 했다.


 

그는 한때 격했던 감정의 편린들을 들춰내는 대신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보였다. 의문사위의 조사 과정에서 몇몇 증인들의 증언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관여한 사건이었으며 이것이 진상규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1,2심은 비상군법회의이었으니까 차치하더라도 대법원 판사들이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는 재판을 진행한 것에 대해서 양심고백을 해주기를 바랬다.
그는 고문 사실 보다 진상규명이 핵심이라며 정치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인혁당 관련자들은 국가폭력의 최대 피해자이며 희생자라고 말한다.
가족에게는 더없이 미안하다는 그는 끝으로 “사람들은 8인의 죽음에 대해 개죽음, 억울한 죽음이라고 하는데 일면 타당하나 일면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4·19 공간에서 진보적인 분들이었고 한 것은 그리 많지 않으나 박정희의 친일, 반통일, 반민중에 대한 역사적 대결로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구체적인 실천은 뚜렷이 없었지만 고인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명예회복의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기원했다고 들었다 - 신동숙, 이영교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들의 지난 30년은 어땠을까! 고 도예종 선생님과 하재완 선생님의 부인이신 신동숙·이영교 님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동네아이들이 ‘빨갱이 자식이다’라고 놀려도, ‘저 아줌마가 빨갱이야’라고 해도 그리고 집 담벼락에 ‘간첩이다. 잡아 죽여라!’ 낙서를 해도 얘들을 울리지 않고 잘 키우려고 이를 악물었다가도,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슬픔을 드러내기조차 싫었다고 한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사형이 쇼일 거라고 생각도 하고 바람도 가져 봤지만 그것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일체 면회가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청이 제한된 군사법정에서나마 남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억울함을 믿었던 아내들은 남편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함석헌 선생이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목요기도회와 천주교를 찾아가 호소해 보라고 일러줘서 대구에서 5남매를 각각 돌보면서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는 서울에 수시로 올라와서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설움도 많았다고 한다. 혹여 남에게 피해가 될까 봐 목요기도회에서도 인혁당 가족들끼리만 한 귀퉁이에 모여 있다가, 누가 다가오면 먼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엄혹했던 유신독재시절에 빨갱이로 몰렸던 사람들의 가족의 고립된 애환이 얼마나 깊고 사무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뜻 맞는 동료들끼리 모여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해 걱정과 논의만 했기에 남편들한테 혐의를 못 잡는 와중에 부인들마저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게 거슬렸던지 중정은 부인들까지도 끌고 가서 3일씩 잠도 안 재우고 남편의 죄를 강요하기도 했다.

심지어 물에 약물을 넣어 성적 흥분을 일으킨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조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내 남편은 간첩’이란 글을 쓰고 지장을 찍게 하는 고초를 겪은 부인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까지 환각상태에 시달리던 그 부인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밀려오는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단자살을 꾀했으나 때마침 찾아온 친정어머니의 만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친정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뒤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남편들이 처한 기가 막힌 상황도 상황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도 가족들의 아픔을 더해줬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는 정신적 충격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을 보이다가 남편이 풀려나기 얼마 전에 비극적인 삶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유족들이 겪었던 일들 중에서 지금도 가장 개탄스럽고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들과 유언까지 당국이 조작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점이다. 8명의 사형이 집행된 뒤 시신은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유족들에게 인도되었는데, 유언이라며 가족들에 전해진 내용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또한 고 송상진 님의 시신을 영구차에 실은 유가족들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던 응암동 성당에서 연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성당에 이르기 전에 경찰 당국에 의해 강제로 영구차는 벽제 화장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 송상진 님의 시신은 유족들의 허락도 없이 화장이 되었다. 그렇게 무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그의 시신에서 고문의 흔적을 없애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다.
가까운 친척들마저도 당국의 탄압이 두려워 그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그 암울한 시기에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사건 관련 가족들뿐이었다. “혼자 당했으면 아마 일가족 자살로 끝맺었을지도 모르나, 같이 당한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어요. 죽고 싶어도 남편의 누명을 벗겨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가족들끼리 같이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형극의 세월 속에서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라고 한다.


2002년에는 대법원에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으나 심리를 한번 한 후에 소식이 더 이상 없다고 안타까워 한다. 가족들은 현 정부가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희생자만은 아닌 민주화운동의 헌신한 인사들이다 - 전창일
모진 고문 속에서도 무고한 동료들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그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인혁당 사건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추진하고 있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노력이 독재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된 측면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날조된 사건의 진상이 정확하게 규명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건의 진상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었던 생각이나 죽기 전까지의 활동도 이제는 알리는 것이 살아남은 저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인혁당 관련자들 중 일부는 4·19혁명 때부터 계속하여 한일협정 반대와 반 유신투쟁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했었다고 덧붙였다.
 
사실 75년 4월 9일 사형으로 이 세상을 강제로 떠난 8명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재야인사 축에는 끼지 못했으나 대부분 꾸준하게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인사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분단된 현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는 내용의 증언을 자신이 쓴 글이 담긴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진상을 알리는 책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바람은 단순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8명의 억울함을 달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희생자라는 측면을 넘어서 그들이 죽음을 바쳐서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이 땅에 실현되기를 저 세상에서라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에 대하여 합당한 평가와 인정이 이루어지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분명 자신의 독재권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지하려고 날뛰는 광기어린 유신독재의 칼날에 쓰러져 간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비극적인 남북분단의 상황을 자신의 권력 유지에 끝없이 악용했던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민주화와 남북분단의 평화적인 극복을 위한 기나긴 투쟁에 기꺼이 바쳐진 숭고한 희생이기도 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의무
암울했던 독재권력의 시절을 지나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식 잃은 어머니들, 남편을 졸지에 영원히 빼앗겨 버린 여인들, 다정한 아빠를 잃은 자식들의 30년 묵은 한과 분노는 우리의 폐부를 찌르며 절규를 토해내고 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산자들의 의무가 아니냐고.


부족하다고 해도 이만큼 민주화 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독재권력이 뿌려 놓은 저 끔찍한 범죄를 단죄하지 못하고 그들에 의해 쓰러져 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노력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진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어떤 광풍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타오르던 우리의 가장 인간다운 내면의 양심과 이상의 불꽃마저 영원히 꺼져버리는 순간을 의미할 것이기에, 우리는 보다 나은 민주화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의 평화적 극복을 위하여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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