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3

아베 삼대, 그리고 박정희

아베 삼대, 그리고 박정희

아베 삼대, 그리고 박정희

[기고] 요괴와 일본 육사 졸업생

김동규 동명대학교 교수  |  기사입력 2019.07.22.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2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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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길윤형 기자가 번역한 <아베 삼대>를 읽고 있다. 역대 최장의 임기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 수상 아베 신조. 그의 태생적 본질을 아버지 아베 신타로, 할아버지 아베 간의 삶과 정치적 행적과 더불어 추적하는 책이다.

지금의 한일 갈등 국면이 없었다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책이다. 전쟁 가능국가(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이것은 곧 대외 침략 가능 국가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를 향한 헌법 개정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는 아베 신조.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 현행의 분쟁 성격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이 책의 163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전 재무상 후키다 아키라(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타로의 최측근)의 인터뷰 내용이다.

질문 : 기시 씨는 한국과 관계가 깊었지요?

답변 : 기시 선생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박정희)를 매우 귀여워했습니다. 그도 기시 선생을 의지했습니다. 애초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죠.”

기시가 누구인가?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로 그에게 극우보수의 정치관을 이식한 인물. 자유당과 민주당을 합당시켜 오늘날 왜곡된 일본 정치 시스템을 기초 세운 거물 정객. 도조 히데키 전쟁내각의 장관이었으며 2차대전 종료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복역한 인물. 쇼와(일왕 시대)의 요괴라 불리우며 일본의 현실 정치를 주물렀던 희대의 모사꾼, 바로 그 기시 노부스케를 말한다.

기시는 1957년 수상에 취임했고 1960년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막후에서 오랫동안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최고 실력자가 된다. 박정희가 5.16쿠테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찬탈한 해가 1961년이다.

그러니 "기시가 박정희를 매우 귀여워"하고 "박정희가 기시를 의지"했던 시기는 한국과 일본이 '한일협정'을 맺고 이른바 국교정상화를 실행한 시점과 정확히 맞물린다.

책장을 덮고 난 이후에도 위의 인터뷰 대목이 마음 속에 둔중히 울린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는 하다.(한승동이 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두 인물의 은밀한 상관관계를 정면으로 조명한 역작이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전한다. 1961년 11월 12일 쿠테타 성공 후 처음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가 도쿄 아카사카의 어느 요정에서, 기시를 비롯한 일본 내 만주 인맥들을 만나 유창한 일본어로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일찍이 정한론을 주창한 사이고 다카모리, 조선 침략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 등이 박정희가 말한 그 지사(志士)들이니 그 이상 덧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한일 현대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전직 일본 관료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저 한 마디는 의미와 무게가 또 다르다. 너무나 적나라하고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저 한 마디야 말로 박정희 등장 이후 박근혜에까지 이어진 굴욕적 대일 관계의 기괴한 비밀을 푸는 열쇠인 것이다. 무엇보다 1965년 (현재 사태의 뿌리가 된) 한일협정이 왜 그토록 졸속적이며 매국적으로 진행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일본 수상에게 귀여움을 받은 한국의 철권통치자. 이 희비극 같은 장면에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있을까.

박정희를 "애지중지" 귀여워했던 늙은 요괴는 박이 부하에게 총 맞아 죽은 8년 후까지 천수를 누리고 91세에 세상을 떠났다. 만약에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못다한 정을 나누고 있을 것인가?

일그러진 이 땅의 현대사가 새삼 서글퍼지는 월요일 오후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50104?no=250104#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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