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9

한청훤 정의당이 집권 했다 하더라도



(2) 한청훤




한청훤
7 September ·



나는 설사 정의당이 집권 했다 하더라도 지금 문통과 현 정권의 외교안보 노선을 그대로 반복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집권 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했던지간에 일단 집권했으면 국가 전체와 국민 모두를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짖눌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황을 낭만화 시켜 대화와 평화를 실컷 떠들 수 있는 야당 입장과 핵무기를 가진 호전적 적대국과 바짝 달라 붙어있는 국가의 최고 책임자의 입장은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듣기에 그럴듯한 착한 마음 넘치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어떤 책임도 없는 때나 가능한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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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Gishik Lee, 이종태 and 22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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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규 무릎을 탁 칩니다!!!


Like · 1 · 7 September at 11:01Manage

최재욱 정의당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거란 부분엔 공감합니다.

다만 그렇다면 왜 선거전에는 그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를 했는가. 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공격하고 본인은 그들과 다를 것 처럼 이야기를 했는가에 대해서 회의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집권하면 이런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는 걸 모르시지도 않았을텐데 말이죠. ...See more


Like · 4 · 7 September at 11:09 · EditedManage

한청훤 replied · 1 Reply


Seunghoon Paik 문재인 정권이 180도 바뀐것이라 보는 것 부터가 좀 bias 가 낀 시선으로 보는것 이라 생각합니다. 북한 비핵화는 문 재인 대선 공략인데요... 대화 dialogue 를 앞세우는것이 강압외교와 상충하지 않는데, 대화 하겠다란 표현을 일상 언어로 받아드려 친구하겄다로 인식하는 분들이 많은듯 합니다.


Like · 3 · 7 September at 12:42 · EditedManage






한청훤
6 September ·



http://v.media.daum.net/v/20170906172135116?f=m

94년 미국의 북폭 검토와 함께 북핵 문제가 해결될 유이한 기회가 2000년에 있었다. 전자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는 것과 달리 후자는 평화적으로 해결이 가능했었기에 너무 아쉽고 원통한 일이었다. 2000년 미국과 북한은 DJ와 한국 정부 중재 아래 북핵 폐기와 북미수교 직전 까지 가는 협상을 진행 하고 있었다. 조명록 차수와 올부라이트 국무 장관이 워싱턴과 평양을 교차 방문했고 클린턴은 미국 대선이 끝나는 대로 본인 혹은 차기 대통령 평양 방문을 통해 북미수교 합의를 선언할 계획이었다. 그때는 카디피도 후세인도 멀쩡할 때였고 김정은도 미국에 의한 안전보장으로 핵 없이 체제 보장이 가능하다고 믿는 시기였다. 핵 폐기와 북미 수교로 북한이 본격 개혁개방이 가능하겠다는 전망에 한반도에 그 어느때 보다 낙관적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부시가 당선되고 새로운 공화당 행정부는 클린턴 정부가 추진하던 북한과의 협상을 모두 폐기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잔뜩 움츠린 김정일은 다시금 핵 개발에 매진하고 곧이어 대량살상 무기와 핵이 없어 몰락한 후세인과 카다피의 운명을 보며 핵 없이는 체제유지가 불가능 하다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 협상은 동상이몽 상태에서 그져 김정일의 핵 개발 시간벌기와 주변국의 미련에 의한 형식적 대화 진행이었다. 그리고 십 수년이 지나고 그의 아들은 6번째 핵실험을 통해 아버지의 유훈을 실현시킨다. 이제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핵 폐기는 거의 불가능해 졌으며 94년 급의 전쟁 위기 까지 긴장 국면이 높아지고 있다.


가끔 대체역사를 가정하는데, 만약 그때 앨 고어가 승리하고 북핵 폐기 및 북미관계 정상화의 빅딜이 성사되었으면 지금 어떠했을까 상상하곤 한다. 만약 그렇게 흘러갔다면 나는 지금 쯤 북한 체제가 평화적으로 무너지고 한국에 의한 통일 혹은 북한체제가 좀 더 상식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전자는 북한 개혁개방 휴유증의 경착륙, 후자는 연락륙의 결과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결론이 났던 지금 보다는 상황은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2000년 미국 대선은 나에게 지금도 아쉬순 기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앨 고어가 실제로 이겼으면서도 괴상한 미국 선거 제도 때문에 패배했던 터라 더욱 그렇다.


페리 프로세스 주역, 中매체에 "1999년 북핵해결 놓쳐 아쉽다"
(베이징=연합뉴스) 심재훈 특파원 =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1999년 간발의 차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기회를 놓쳤다고 회고했다. 관영 신화통신 자매지인…
V.MED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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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프로세스 주역, 中매체에 "1999년 북핵해결 놓쳐 아쉽다"
입력 2017.09.06. 17:21댓글 24

"그때로 돌아갈수 있다면 클린턴 행정부 종료전 협의 마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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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연합뉴스) 심재훈 특파원 =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1999년 간발의 차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기회를 놓쳤다고 회고했다.

관영 신화통신 자매지인 참고소식망(參考消息網)은 빌 클린턴 미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과 대북 특사를 지낸 페리 전 장관이 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의 아쉬움을 표시했다고 6일 보도했다.

그는 "그 해(1999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반드시 클린턴 행정부가 끝나기 전에 북미관계 정상화 협의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4∼1997년 국방장관을 거쳐 1999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서 미국 의회의 위임을 받아 대북정책의 로드맵이 담긴 '페리 프로세스'를 제시했다. 1999년 10월 나온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지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3단계 접근 방안을 담은 포괄적인 대북 관여정책으로 평가받아왔다.

이 방안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맞물려 주목받았지만, 2001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

페리 전 장관은 "나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는 당시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변하도록 하려 했으며 회담 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경제, 농업 분야에서 지원하고 평양에 대사관을 설립해 양국 간 민간 왕래를 회복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2000년에 북미 관계 정상화의 대문이 점점 열어지고 있었다"면서 "그 때는 미국의 정권 교체가 문제가 될지 몰랐고 대화와 협상이 긴급한 일인 줄 몰랐다"고 언급했다.

그는 그러면서 "나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클린턴 대통령이 대화와 협상을 촉구했다면 양측은 미국 정권 교체 전에 합의했을 것"이라면서 "그 때는 우리의 황금기였고 유감스럽게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페리 전 장관은 "우리는 당시 합의에 매우 가까이 갔었고 몇 개월만 지나면 합의에 도달했을 것"이라면서, 부시 행정부와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 대해선 "그냥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실험을 강력히 비난하고 가능한 빨리 북미 간 고위급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면서 기자가 "기회가 있다면 트럼프의 대북 특사로 다시 방문하길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원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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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Eun Ha Chang, 이종태 and 15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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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애초에 고어였으면 이라크를 그렇게 헤집어놔서 헬게이트를 열지도 않았을 거고 중국의 부상에도 훨씬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을테죠.. 솔직히 17년 동안 뭔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하는 건 부질없긴 하지만 부시가 삽질한 덕분에 오바마도 8년 내내 꼬여버려서 이꼴난 거니 ㅠㅠ


Like · 10 · 6 September at 19:22Manage

한청훤 한국인 포함 전 세계 모든 자유민주진영 시민들에게 천추의 한 이죠. 그래서 앨 고어 표 잠식한 랄프 레이더랑 플로리다 선관위가 천하의 개개끼들 입니다.


Like · 6 · 6 September at 19:32Manage

김평강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가 젭 부시....


Like · 3 · 6 September at 19:34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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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gkyun Kim 김정'일'로 수정하시지요 ~^^


Like · 1 · 6 September at 19:41Manage

한청훤 그렇군요 ㅎ 방금 수정했습니다😀


Like · 2 · 6 September at 19:42Manage

김성중 조금 이견이 있습니다. 당시 페리 프로세스가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고 보입니다. 부시가 아니라 쿨린턴이 계속 집권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북한 정권의 최대 목표는 정권과 체제의 유지이고 특히 당시는 고난의 행군 직후 선군통치가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나 핵포기는 정권과 체제유지에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고 김정일 역시 이것을 직시하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나라와 인...See more


Like · 3 · 7 September at 14:09Manage

한청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이라크전쟁과 카디피 멸망전까지는 김정일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라면 핵 포기도 가능하다 생각했을 것 같은데 말씀하신 대로도 개연성이 있네요.


Like · 2 · 7 September at 18:55Manage

Kyeongwun Jeong 사실 돌아켜보면 1994년에 북폭으로 해결했어야 했습니다. 당시 국력으로는 중국과 러시아는 찍소리 못했을 것이고 북한은 1990년대말 고난의 행군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겠죠.


Like · 2 · 7 September at 23:04Manage

김성중 네 사실상 유일한 기회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Like · 8 September at 00:09Manage

김성중 그럼 당시 북한의 상황이나 국제정세를 봤을 때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북핵개발을 저지할 수 있었을텐데...


Like · 8 September at 00:10 · EditedManage

Pil Sun Choi 과거로 돌아가 상상해보는김에 제가 아쉬운 시점은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 전에 김일성이 죽어버린 것....


Like · 8 September at 04:28Manage

Jong Seok Kim 2000년이 아니라 2004년 미 대선이라 기억됩니다. 힘의 균형이 국제사회의 평화공존이라 생각됩니다. 국내 현대사에서 안타까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전시 작전권의 이양이 뼈져리게 아프게 다가옵니다.


Like · 8 September at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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