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7

[자주시보] [최영식의 북녘생활]나의 군생활1



[자주시보] [최영식의 북녘생활]나의 군생활1

최영식
기사입력 2018-08-07




▲ 인민군 정찰병들, 일찍 군대에 가기 때문에 앳된 얼굴들도 있다. 북은 군 생활이 10년이다. 제대 후에 대학에 추천받아 가지고 하고 일터로 가기도 하며 계속 군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디를 가나 제대군인들은 모범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대환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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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탈북자입니다.

탈북자들 중에서 언론에서 나와 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북에 대해 정확히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 남의 현실입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판문점선언으로 남북의 관계가 개선되고, 통일 분위기가 높아지는 속에서 북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통일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고자 하는 남과 북, 북과 남이 서로에 정확히 알고, 잘 아는 것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북에서 직접 경험한 것만을 진실 되게 써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먼저 군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1992년에 군에 입대하였는데 신병훈련 3달(군종, 병종마다 신병훈련기간이 다름)받고 10월말쯤 중대에 배치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가면서 나름 기대가 컸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며 중대가 환영행사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요.

하지만 도착해보니 중대 건물은 직일근무병 몇 명 남겨놓고는 텅 비다시피 했습니다.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북녘군대는 식량은 국가로부터 공급받지만 부식물은 대부분 자체해결 이라 봄이면 농사짓고 가을이면 수확 할 때라 중대가 가을걷이에 나간 것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여 등에다가 한 짐씩 진 군인들이 대열을 맞추어 중대앞마당으로 들어오는데 마침 그곳에서 기다리던 우리들을 보고 신병들이 왔다고 중대장과 사관장(중대내무생활책임자)이 반가운 얼굴로 걸어와서는 일일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분 다 흙투성이에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가지고 그 흙투성이 손으로 반갑다고 손을 잡아주는데 그 당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저도 나이가 들어가며 그때를 생각해보고는 바로 그것이 관병일치의 기본이었고 그런 지휘관들이 있어 북의 청춘들이 그 당시 10년이라는 군대복무를 자랑스럽게 마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보니 흙투성이 손으로 신병들 손잡기가 멋쩍었는지 손을 툭툭 털고 자신들옷에다가 문지르고 나서 신병들에게 손 내밀던 그 지휘관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철없던 그 당시에 저는 내가 농사나 짓자고 군대에 나온 건 아닌가하고 실망을 했고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그 후 신입병사생활 1년은 사실 집에 있을 때보다 더 편했습니다.

군 생활10년이라 신입병사는 1년 동안은 거의 아무런 임무도 없었고 바로 위부터 분대장까지 친 막내동생 돌보듯 돌봐주었지요.

물론 중대가 100명도 넘는 청춘들의 집단이라 가끔씩 다툼도 있고 1년차 선후배끼리는 친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내다가도 서로 자존심싸움도 하고 그러지요.



그렇다고 인민군군인들은 모두가 올바른 사람들인가?

절대로 그렇지가않습니다.

보석도 순도가 100프로 될 수 없고 불순물 몇 프로 들었다고 보석이 보석 아닌 것은 아닙니다.

저도 불순물에 속했던 군인이었고 그 불순물은 그 집단에서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북녘은 고난의 행군을 선군정치로 이겨냈습니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압박과 봉쇄에 가까운 제재를 받는 나라에서 군대가 나라를 지키는 것은 물론 국가경제회생을 위해 건설도, 농사도, 탄광광산작업도 심지어는 고기잡이까지 앞장서 해나가야 했으니 그 고난과 역경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집단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애국심에 기반한 도덕성과 헌신성이었겠지요.



나이 들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겠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녘의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사람들입니다.

저 혼자 생각이 아니고 아무리 북녘 정권을 싫어하는 사람도 북녘을 방문하고는 북녘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북녘의 실상을 더하지도 덜지도 않고 짧게라도 쓸려고 합니다.



물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금은 여러 가지로 많이 변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녘사람들의 근본적인 정신과 의식은 절대로 변화지 않을거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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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식의 북녘생활]나의 군생활2

최영식
기사입력 2018-08-08




제가 중대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동기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훈련은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고 훈련이 끝나면 몸은 땅속으로 잦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신입병사이니 전체분대가 관심가지고 돌봐주었지만 내몸이 힘든건 누구도 도울 수 없었지요.



특히 훈련 중 방독면 쓰고 2킬로를 주어진 시간 안에 구보로 돌파하고 나면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 시간 안에는 누구도 저의 무기나 장구류들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전 시에는 나를 돕는게 아니고 죽으라는거나 마찬가가지라는 것이 분대장, 구대원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철봉, 평행봉 6종은 군인이라면 꼭해야할 기본동작이었기에 그걸 익히느라 진땀 흘렸습니다. 참고로 철봉, 평행봉을 못하면 북에서 군대생활 못해본 사람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던 어느 날 식당으로 밥을 먹기 위해 이동하던 중 다른 중대와 겹치게 되었습니다. 북녘 군대에서는 신입병사는 전사의 군사칭호로부터 시작되고 대열에서는 분대의 제일 뒷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렇게 식당 앞에서 대열 맞추어 기다리는 동안 옆의 중대를 곁눈질해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분명히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빨간 전사견장을 달고 저처럼 뒤에 꼿꼿이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이상하여 바라보니 그분도 저의 시선을 느꼈는지 저를 돌아보더니 웃음을 지었습니다.

당황했지만 함께 웃음을 지어준 후 바로 1년 선배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저기 이상한 전사가 있다고ᆢ 그러니 선배가 웃으면서 전사생활 내려온 군관이라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뭔 말인지 이해를 못했지만 그 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북녘 인민군의 오랜 전통에 따라 련대장, 정치위원 이상 지휘관들의 전사생활 체험을 한해에 한 달 이상씩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분들은 최소 20년 만에 다시 전사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북녘은 통신부대, 군의소 같은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부대지휘관은 병사시절을 거치지 않은 사회대학 졸업생들도 있지만 전투부대지휘관은 100% 전사부터 시작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한 알짜배기 군인들입니다. 전사생활 중인 그때 그분은 다른 려단의 정치위원이라고 했습니다.









▲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대를 방문하면 지휘관들에게 늘 강조한다는 말 '병사들을 사랑하라' ©자주시보





그 시절을 포함하여 지금껏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선각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책을 통해서도 배우고 깨달은 것이 많지만 직접 체험하며 깨달은, 깨달음의 깊이가 훨씬 깊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정치위원의 웃음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고 배고파하는 저에게 자신의 몫을 반씩이나 덜어주던 분대장과 구대원들이 눈앞에 선합니다.



그런 분들이 오늘도 북녘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런 분들의 자식들이 지켜가고 있는 북녘입니다.



처음 남쪽에 왔을 때 주변에는 북녘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는 사람들 뿐이라 참으로 서글프고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안에 붕괴한다고 방송언론은 하루 종일 떠들어대고 사람들도 그런 것으로 대부분 믿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많은 남북교류와 최근의 판문점정상회담으로 북녘에 대해 관심 갖고 올바로 아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기본적인 자세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북녘사람들의 머리에는 뿔이 있다는 황당한 거짓도 진실로 믿었던 그 시대를 생각한다면 오늘의 현실은 분명히 진보하였습니다. 저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북녘에서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남녘의 동포들이 머리에 뿔났다거나 경멸하고 쳐부수어야 할 대상으로 교육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학교 교육도, 집이나 동네어르신들의 말씀도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할 동족이며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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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식의 북녘생활] 나의 군생활3

최영식
기사입력 2018-08-14










▲ 함북도 북부지구 홍수피해지역 새 살림집 건설을 끝내고 기뻐하는 인민군 건설돌격대 ©자주시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런 굴곡도 없이 올바르고 곧은 길만 가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고 ᆢ빠르게 철들고 각성하여 타인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젊은 시절을 헛되이 보내는 것도 모자라 안 좋은 일에는 항상 이름을 알리며 살아가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역경과 고난은 인간을 빠르게 각성시키고 철들게 하지만 인간의 됨됨을 정확히 판단하게도 하지요.



저자신이 나라가 근심걱정 없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갔었고 고난의 길을 걷는 그 시절에는 헛되게 청춘시절을 흘러 보낸 인간이고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행하던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어느 순간 저 자신을 되돌아보니 하늘을 쳐다보기도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무안함을 안다는데 그래도 사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제가 어찌 짐승보다야 못하겠습니까.



이 글은 분명히 탈북자들도 볼 것 입니다.

그들 중 자신이 나서 자란 그 땅을 비난하고 헐뜯으며 저주하는 소수의 탈북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그 땅에서 살고 있었을 때 단한번이라도 나서 자란 고향, 사회와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적이 있었습니까? 단한번이라도 그 좋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정이 넘치는 웃음과 정다운 눈빛을 받아 본 적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마지막 한 조각 양심은 남겨두길 바랍니다.

없었다면 그 좋은 사람들로부터도 사람취급 받지 못한 자신의 떳떳치 못한 인생을 돌이켜 보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에 인터넷상으로 북녘에서 3년형을 받고 교화소 생활한 걸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여성 북한 인권운동가라는 인간과 말싸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정말 웬만한 나쁜 짓을 해도 남자들도 들어가기 힘든 교화소를 여자가, 그것도 3년 씩 이나 형을 받았다면 나는 당신의 북녘생활을 알만하다 했더니 아무런 말없이 사라지더군요.



범 무서운 줄 모르던 하룻강아지도 나이 먹으며 철이 들어가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 나이 값은 해야지 않겠습니까.



저는 군 생활 하면서 눈 많이 오는 아침에 기상하여 운동장에 나와 보면 중대장, 정치지도원, 소대장들이 벌써 눈을 반쯤 치운 것을 보고도, 명절 때가 되거나 훈련 중 쉬는 날이 되면 군관부인들이 밤새음식을 만드는 것을 보고도, 공사할 때면 없는 살림에도 죽이라도 끓여가지고 나와 군인들에게 먹이던 군관들의 부인들을 보면서도 그 모든 것이 어떤 나라 군대에도 당연히 있는 현상인줄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중대장집 근처로 지나다가 땔감이 전혀 없는 것을 보고 분대장과 구대원이 산에서 땔감을 구해다 주었는데 중대장이 그분들을 그렇게 혼내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렇게 혼이 났는데도 말년인 분대장들이 가끔씩 땔감을 군관가족들에게 몰래 해주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글은 군 생활했던 탈북자들도 보기에 한 점의 거짓도 없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쓰고 있습니다. 제 글에 반박할 탈북자들은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면 저는 보석덩이 하나를 놓고 평가할 때 보석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지 몇 퍼센트의 불순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태여 불순물들만 원한다면 그런 탈북자들이 쓴, 그들 자신들이 행했던 온갖 나쁜 짓을 마치도 북녘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쓴 글은 너무도 많으니 찾아보시면 됩니다.



물론 불순물이었던 저도 배겨나지 못하고 남들은 10년을 자랑스럽게 보낸 군 생활을 3년도 못하고 퇴출되었습니다. 북녘에서는 생활제대라고 합니다. 남녘에서 불명예제대나 비슷할 겁니다. 북녘에서는 생활제대가 아주 치욕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부끄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저의 죄명은 절도였습니다. 부대 식량 절도해 가지고 담배, 술과 바꾸고 또 들켜가지고 미수에 그친 일도 있습니다. (물론 20 리 밖에서 사라진 어떤 물건까지 제가 뒤 짚어 쓴 건 좀 억울하기는 합니다.)



북녘군대는 항일빨치산 전통을 이어받은 군대입니다. 항일빨치산 대원들은 누가 등 떠밀어서 그 길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강제로 징집된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영하40도를 오르내리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은 얼어서, 굶어서 죽어가면서도 동지들에게 자신의 옷을 벗겨주고 자신의 몫으로 차려진 강냉이 한줌도 숨겼다가 동지들의 입에 넣어준 인간으로서 도달하기 힘든 가장 높은 도덕적이고 고귀한 인간애, 동지애를 후손들에게 전통으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의 군대에서 동지들이 먹어야 할 식량절도해서 담배, 술을 바꾼 저 같은 부도덕한 인간이 용서가 되겠습니까. 도저히 그런 집단에 있을 자격이 안되는 거지요.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할 때면 얼굴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 올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군사복무1년은 정말 모범적으로 하였습니다. 중대에서 신입병사 8명중 제일먼저 상등병칭호도 받았고 소대장도, 하사관들도 칭찬 많이 해주었습니다. 사관장(중대하사관들중 최고직무)감이라고 중대장 앞에서 칭찬해주던 소대장 모습이 가끔씩 떠오릅니다.



내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저는 이미 정신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살아가다보니 저 같은 인간도 철이 들고 깨달을 때가 있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받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은 생각안하고 모든 것을 나서 자란 그 땅의 탓으로 돌리며 그 땅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도 자랑으로 떠벌이며, 그 대가로 밥벌이해가며 살아간다면 그렇게 가련한 인생 또한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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