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6

1812 한완상2 창조와 희년에 나타난 평화담론 - 발선(發善)의 복음을 촉구하며 2

창조와 희년에 나타난 평화담론 - 에큐메니안

창조와 희년에 나타난 평화담론발선(發善)의 복음을 촉구하며 2
한완상 교수(전 통일부총리) | 승인 2018.12.11 19:18
여기서 필자는 성서가 증언해주는 평화메시지를 성서적 주요담론(혹은 신학적 담론)별로 찾아보려한다. 이런 성서담론의 빛 아래서 현재 한반도 주변에 돌풍처럼 일어나고 있는 평화 프로세스 현실을 성찰해봐야 할 것이다. 본격적인 한국평화신학을 세우기 위한 자그마한 마중물의 역할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성찰은 무엇보다 먼저 한국성서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 그리고 평화만드미(Peace-maker)가 되고자 하는 교회지도자들이 먼저 담당해야할 몫이다. 이런 뜻을 갖고 있는 평신도는 말할 것 없이 이 일, 곧 복음적 선교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서 전체에 관류하는 평화신학의 동력을 다음과 같은 주요담론에서 찾을 수 있고 또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의 평화 담론들
무엇보다 창조 내러티브(narrative)에서 먼저 하나님의 역사 주관의 뜻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역사 현실에서 창조주를 크게 감탄케한 그 시초의 아름다움과 선함의 상태가 훼손되면서 피조물들 간에 피흘림의 경쟁과 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이 때, 하나님의 대변인들(예언자들) 호소와 절규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평화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절규와 소망이 예수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에 또한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오심(성육신사건)과 예수의 비움 실천(Kenosis의 삶)을 역사의 예수 삶 속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깊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예수의 갈릴리 선교와 예수의 수난얘기에서 평화의 주제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처형 사건에서 그의 철저한 비움 실천이 주는 감동, 즉 그의 선제적 원수사랑 실천이 주는 감동은 바로 역사 예수의 재관식이 주는 감동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가 로마의 값싼 승리주의, 무력숭배주의가 어떻게 ‘맥없이 죽임 당하는 어린양’의 죽음 앞에서 무릎 꿇게 되는지를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예수부활 사건이 평화 만들기 실천을 더욱 힘 있고 더욱 따뜻하게 펼치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진실에 더욱 더 주목해야 한다. 부활의 예수(그리스도)가 역사의 예수보다 더 따뜻하고, 더 감동적인 변혁을 불러일으켰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제 이러한 몇 가지 주요 성서담론을 주마간산식으로 일별해 보자.
창조담론과 평화
창세기 내러티브에서 창조 여섯째 날 창조주께서는 인간과 동물에게 먹거리로 풀을 주셨다. 그리고 창조주께서는 창조질서를 보시고 감탄하셨다. ‘매우 좋구나’라고 하는 창조주 감탄의 의미를 음미해보아야 한다.
▲ La création du Monde, “The creation of the World Melchior Bocksberger”, 1530-1587. ⓒGetty Image
창조주의 감탄을 자아낸 창조질서는 한마디로 평화의 질서가 드러내 보여주는 그 아름다움과 선하심의 모습이었다. 인간과 동물이 씨 있는 풀을 주식으로 먹는 동안 그곳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먹거리 놓고 다툼이 없었다.
하기야 지금도 아프리카 사파리의 모습을 보라. 씨 있는 열매와 채소는 먹거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자라고 소비되고 재생된다. 채소와 열매를 먹는 동안 생명체들은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즐기는 가족 곧 식구가 될 수 있다. 밥상 공동체에 속한 생명체는 결단코 다른 생명체의 먹거리가 될 수 없다.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기에 밥상 공동체는 평화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이 공동체는 바로 샬롬(shalom)의 공동체였다. 그래서 창조주의 뜻이 이뤄지는 아름다운 질서였고, 선한 생명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생명체의 먹거리를 공동 먹거리로 먹지 않고, 다른 생명주체를 먹거리로 삼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갈등, 긴장,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다. 죽음과 죽임이 일상화된다. 그 때까지 평화스러웠던 초원은 긴장이 감도는 전쟁터로 변질된다.
이런 상황에서 육식동물의 등장은 바로 평화스러운 질서를 끝없는 긴장과 갈등의 투쟁관계로 변질시켰다. 바로 이 힘 있는 육식동물의 갑질이 악의 씨앗을 뿌린 주범인 셈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석할지가 하나의 신학적 도전이다.
수렵시대와 농업시대를 거치면서 인간들이 다른 부족을 경쟁자 또는 적수로 보게 되면서 집단 간 치열한 생존경쟁이 제로섬(zero-sum) 경쟁관계로 악화되었을 것이다. 부족 간만 아니라 부족 안에서도 다른 생명존재를 부리고, 남의 것을 빼앗는 힘을 더 많이 갖은 집단이 생겨나서 억압과 착취로 그 힘을 집중키시게 되면, 부족 내 평화도 끊임없이 훼손되었던 것이다.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권력을  확대시키려는 부족 내의 힘겨루기 또한 힘 있는 세력으로 하여금 육식성 체질을 강화시키고 육식성 문화를 작동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부족 안에 사자와 승냥이가 지배하는 ‘통탄스러운’ 지배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 이 같은 생명 박탈적 행태가 구조화(제도화)되면 그것은 악의 현실을 낳게 된다. 이 같은 악의 지배는 예나 지금이나 창조주를 근심하게 하고 분노하게 한다. 이런 비극은 부족 안에서, 그리고 부족 간에서 일상화 되면 평화도 공의도 모두 훼손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의 원초적 아름답고 선했던 질서를 동경하고, 그 회복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그들이 바로 성서의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창조주의 그 안타까움을 대변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언자로서 창조질서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그것이 회복과 회복의 비결을 제시했던 예언자가 이를테면 바로 이사야 예언자였다. 이사야 11장 6절에서 9절까지를 몸으로 읽어보라. 그 울림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그 메시지와 비전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사자가 소의 여물을 먹을 때 비로소 사자와 소가 식구 공동체, 곧 평화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 조국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Trump와 김정은이 한 상에 둘러 앉아 함께 가족 공동체가 될 때, 음식을 함께 나눌 때, 북미 간에 평화의 모멘텀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것은 1960년대 흑인인권운동가요, 복음적 목회자였던 킹 목사가 당시 갑질 했던 백인 사자들에게 던진 뜨거운 복음적 도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 진리다. 우리 사회와 국가 안에서도 경제적 불평등을 온존시키거나 악화시켜야만  온갖 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믿는 정치세력이 상존하는 한 대내 평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세계적 경제학자 피케티의 권고와 호소가 바로 그런 평화와 불평등해소의 호소였다. 신학자들이 그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희년담론과 평화
이런 맥락에서 구약의 희년담론을 평화 메시지로 재해석 할 수 있다. 희년 공동체의 뜻과 꿈은 바로 창조주의 뜻이기도 하다. 창조주의 뜻을 대변하는 이사야의 절국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나사렛 선포의 본질이기도 하다(누가 4:16-19).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은 바로 예수선교의 핵심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 날 나사렛 회당에서 친히 읽으셨을 때 원문의 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읽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희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나팔을 불게 된다. ⓒGetty Image
예수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고”라는 부분을 일부러 언급하시지 않았다. 예수의 아바(Abba)는 보복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복의 신은 끊임없이 싸워 힘으로 이기려는 신이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황제의 신적권위주의가 바로 이같은 보복과 승리의 권력욕을 드러내보였다. 예수의 아바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의 희년담론은 바로 사랑담론이요, 그래서 평화담론인 것이다.
희년은 기쁜 때요, 잔치의 날이다. 왜냐하면, 광복과 해방의 기쁨을 모두가 나누고 즐기는 잔치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식민지 고통 35년에 분단고통 70년을 겹쳐 겪으면서 아직도 해방과 광복을 누리지 못한 체, 지난 백년을 보냈다.
우리 삶 속에 백년 간 켜켜이 쌓여있는 트라우마를 아직까지 치유하지 못했다. 지난 분단 70년 간 친일, 냉전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했기에 희년의 환희를 우리는 겪지 못했다. 99년전 3‧1운동의 그 평화 정신을 이어 받은 촛불 시민들의 감동적 운동으로 이제야 우리는 평화 정치 흐름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시샘하는 반(反)평화적 정치세력이 우리의 희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있기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게다가 한국 교회의 일부 세력이 또한 반(反) 희년 세력에 동조하고 있기에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희년의 잔치는 바로 창조주와 평화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베푸시려는 평화와 공의의 잔치임을 우리는 주저 없이 선포하고 실천해야 한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은 바로 이런 실천에서 돋보이게 될 것이다.
한완상 교수(전 통일부총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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