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2

알라딘: 한국 사람 만들기 1 (반양장) -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알라딘: 한국 사람 만들기 1 (반양장) -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한국 사람 만들기 1 (반양장) -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l 한국 사람 만들기 1

함재봉 (지은이) | 아산서원 | 20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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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2 (반양장) - 제3부 친일개화파 [품절] 한국 사람 만들기 1 (양장) -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한국 사람 만들기 1 (반양장) -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총 5권의 시리즈로 진행될 <한국 사람 만들기> 제 1권의 1부 '조선 사람 만들기'에서는 한국 사람이 대체하고 있는 조선 사람의 형성 과정과 정체성을 추적한다. 2부 '친중위정척사파'에서는 17세기, 조선 초기의 급진 개혁을 통해 탄생한 조선 사람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과정을 소개하며, 그 시대적·사상적·정치적 계보를 추적한다.






한국 사람 만들기 서문
‘한국 사람’은 누구인가? 5
한국 사람은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8
‘조선 사람’에서 ‘한국 사람’으로 9
다섯 종류의 한국 사람 11
‘한국 사람’이라는 담론의 틀 13
한국 사람의 계보학 17
방법론에 대하여 19
감사의 말씀 23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서론 34

제1장 고려 사람 대 조선 사람 40
1. “장가가지 말고 시집가라” 40
2. 장가만 갔던 고려 사람들 43
3. 고려의 근친혼 풍습 49
4. 처가살이한 조선 사람들 51
5. 제사를 거부한 조선 사람들 53

제2장 주자성리학의 정치경제 58
1. 중국의 강남 개발 59
2. 강남농법과 송의 경제 혁명 66
3. 송대의 국가-시장 관계 71
4. 송의 영화 75

제3장 ‘선비’의 탄생 80
1. 과거제도와 ‘사’의 탄생 81
2. 문학에서 도학으로 85
3. 주자와 강남농법 87
4. ‘사’와 예의 부활 89
5. ‘사’와 종법제도의 부활 92
6. 주자가례의 완성 96
7. 명의 대안 101

제4장 조선의 혁명 104
1. 원과 고려: 주자학 문명 도입의 창구 104
2. 세종의 급진 개혁 109
3. 조선의 농업 혁명 114
4. 조선 향촌 질서의 구축 117
5. 족보와 집성촌의 탄생 123

결론 126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서론 132

제1장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 138
1. 명의 쇠퇴와 여진족의 등장 143
2. 누르하치의 부상 145
3. 팔기군의 탄생 148
4. 몽골의 항복과 요동 함락 152
5. 청태종과 도르곤 155
6. 청의 성공 요인 162

제2장 청의 대륙 정복과 중국 지식인들의 반응 170
1. 중국 지식인들의 반응 171
2. 황종희의 주자학, 양명학 비판 174
3. 고염무와 왕부지, 안원의 주자성리학 비판 178
4. 고증학의 태동 182

제3장 청의 대륙 정복과 조선의 대응 184
1. 소현세자: 닫히는 조선의 첫 희생양 185
2. 송시열과 「기축봉사」 192
3. 숭명반청 이념의 체제화 198
4. 제1차 예송 199
5. 제2차 예송 206
6. 예송의 세 가지 논점 207
7. 주자성리학 근본주의와 도통이론 213
8. 주자성리학 근본주의와 남존여비 사상 217
9. 양주일기의 기록 222

제4장 천주교의 도전 226
1. 예와 신앙 227
2. 이익: 주자성리학과 천주교의 만남 232
3. 주자학적 금욕주의와 천주교의 침투 236
4. 정약용과 상제의 역할 244
5. 신앙으로서의 천주교 248
6. 강희제와 교황 클레멘트 11세의 전례 논쟁 250
7. 조선의 전례 논쟁과 제사 거부 253
8. 천주교 박해의 시작: 신유박해 257
9. 황사영 백서 사건 261
10.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선교의 시작 263
11. 기해박해와 프랑스 함대의 출현 266

제5장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동치중흥 272
1. 제1차 아편전쟁 273
2. 제2차 아편전쟁 278
3. 베이징 함락과 원명원 약탈 281
4. 태평천국의 난과 후난학파 294
5. 상군의 결성 300
6. 상군의 성공 요인 303
7. 상승군의 역할 308
8. 동치중흥의 실패 311

제6장 위정척사파와 쇄국 정책 314
1. 양이의 출현 315
2. 조선의 중국 정세 정탐 317
3. 병인박해 319
4. 제너럴셔먼호 사건 324
5. 병인양요 328
6. 이항로의 척사 사상 334
7. 신미양요 343

제7장 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의 대립 354
1. 조선 경제의 모순 355
2. 조선 정치의 모순 361
3. 흥선대원군의 개혁 362
4. 마지막 선비 최익현 364
5. 왕도 정치 대 부국강병 372
6. 고종의 친정과 조선 경제의 몰락 377

결론 382










P.8~9
'한국 사람'이란 용어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다.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이 설립되면서 새 나라의 사람들을 호칭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에는 '한국 사람'이란 표현이 1962년 9월 22일 기사에 처음 나타난다. '한국 사람'은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새로운 인간형이다.
P.9
19세기 말까지도 '조선 반도'로 불리던 땅에 살던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었다. '조선 사람'은 14세기 말~15세기 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朝鮮, 1392~1910)의 건국 세력은 불교 국가였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고려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이질적이기만 한 주자성리학이란 이념을 도입하여 새 문명을 건설한다. 조선 왕조가 강력하게 추진한 개혁의 결과, 16세기 말에 이르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움의 근간으로 삼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리관을 내재화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조선 사람'이 완성된다.
P.11
조선 사람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나선 조선 사람들은 다섯 가지 대안을 찾는다. 첫째, '친중위정척사파', 둘째, '친일개화파', 셋째, '친미기독교파', 넷째, '친소공산주의파', 다섯째, '인종적 민족주의파'다.
P.40
우리는 조선 사람이 한국 사람의 '원형'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 사람 역시 조선조의 개혁 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형이다. 고려 사람은 조선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고려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사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려 남자들은 처가살이를 하였다. 또 대부분의 고려 사람들은 외가에서 나서 자랐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성행하였다.
P.132
조선 말의 위정척사 사상은 흔히 화서 이항로와 면암 최익현의 학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기원은 병자호란(1636~1637)을 겪으면서 형성된 후기 조선의 친명반청(親明反淸) 이념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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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2017년 11월 11일자 '책의 향기'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7년 11월 10일자 '학술.지성 새책'





지은이 : 함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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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 겸 원장이다. 미국 칼튼대학교(Carleton College)에서 경제학 학사학위(1980),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1992)를 취득한 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1992-2005),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UNESCO) 사회과학국장(2003-2005),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한국학연구소 소장 겸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2005-2007), 랜드연구소(RAN...






‘한국 사람은 누구인가?’ 유태인(Jew)들은 어디에 살든 유태인이다. 중국 본토 바깥에 사는 모든 중국 사람들 또한 어디에 살든 모두 ‘화교’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을 ‘조선 사람’이라 하지 않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코리안’이라는 불리는 우리에겐 비단 공통의 단어만 없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과 조선 사람(북한 사람), 재미 교포와 재일 교포, 조선족과 고려인 사이의 공통점도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는가? 언어인가? 이념인가? 종교인가? 과연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 함재봉은 이 책에서 “‘한국 사람’이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다움’이 무엇인지, 무엇이 ‘한국 문화’인지, 누가 ‘한국 사람’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다음 다섯 가지 담론의 틀로 풀어나간다. ‘조선 사람’이 해체되고 ‘한국 사람’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정치적, 지정학적, 이념적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망라하는 이 다섯 가지 담론의 틀은,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로 정리된다. 저자는 해당 담론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며, ‘한국 사람’이라는 의미의 망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한국 사람’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인간형의 정치적, 국제 정치적, 사상적 배경을 추적한다.

총 5권의 시리즈로 진행될 『한국 사람 만들기』 제 1권의 1부 <조선 사람 만들기>에서는 한국 사람이 대체하고 있는 조선 사람의 형성 과정과 정체성을 추적한다. 2부 <친중위정척사파>에서는 17세기, 조선 초기의 급진 개혁을 통해 탄생한 조선 사람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과정을 소개하며, 그 시대적·사상적·정치적 계보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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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2 (반양장) - 제3부 친일개화파 l 한국 사람 만들기 2

함재봉 (지은이) | 아산서원 | 2017-11-29








정가 35,000원
판매가 31,500원 (10%, 3,5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반양장본 | 544쪽 | 153*227mm | 1034g | ISBN : 979119619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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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만들기 2 (반양장) - 제3부 친일개화파 [품절] 한국 사람 만들기 1 (양장) -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한국 사람 만들기 1 (반양장) - 제1부 조선 사람 만들기,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



조선 사람의 가슴과 뇌리에 깊이 뿌리내린 반일 감정과 ‘왜’(倭)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 피해 의식, 강력한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이르면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친일개화파가 출현한다.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늘 중국을 문명의 원천으로 간주해 온 조선 사람들이 중화 질서의 가장 변방이었던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조선은 근대 문명을 일본으로부터 배운다. 친중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 조선의 왕실은 모두 근대 문명을 금수와 같은 서양 오랑캐의 것으로 치부하고 거부하면서 그 내용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청은 왕조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의 유교 문명이 우월하다는 ‘중체서용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근대 문명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는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고 있던 일본이었다. 이 비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문명개화의 당위성을 배우고 근대 문명을 조선에도 이식하고자 한 사람들이 친일개화파다.

친일개화파가 일본으로부터 배운 것은 근대 산업, 군사, 교육, 법뿐만 아니라 ‘독립’이라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일본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 불리는 근대 국제법을 익히고 불평등 조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민족 국가’라는 독립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근대 국제 질서를 배운다. 당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청은 조선 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고 서구 열강과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중국의 속방(屬邦)임을 적극 홍보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실, 민씨 척족 중심의 친청파 역시 모두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대내외에 스스럼 없이 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청 간의 사대 관계가 근대 국제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인 종속 관계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다.

친일개화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훗날 “개화파”로 불리게 되는 극소수의 인사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문명개화’를 이루고 있던 메이지 일본을 보고 배우면서부터였다.





서론

제1장. 메이지유신
1. 에도 시대의 정치
2. 에도 시대의 경제
3. 에도 시대의 사상과 교육
1) 유교
2) 고쿠가쿠(國學, 국학)
3) 란가쿠(蘭學, 난학)
4) 바쿠마츠(幕末, 막부 말기)의 안보 지식인
4. 외세의 출현과 바쿠후 체제의 모순
5. 나라의 새 중심: 천황
6. 미국과의 조약과 그 여파
7. 바쿠후와 조슈, 사쓰마의 개방 정책
8. 존왕양이파의 부상
9. 조슈와 사쓰마의 대립
10. 나마무기 사건
11. 시모노세키 전쟁과 사쓰에이 전쟁
12. 사쓰마의 쿠데타와 조슈의 역쿠데타
13. 제1차 조슈 정벌
14. 조슈의 내전
15. 삿초동맹(薩長同盟)
16.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17. 선중팔책(船中八策)과 대정봉환(大政奉還)
18. 보신전쟁(戊辰戰爭)
19. 판적봉환(版籍奉還)과 메이지유신 체제의 형성

제2장. 메이지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
1. 이와쿠라 사절단의 파견 배경
2. 이와쿠라 사절단의 여정
3. 유신 세력의 분열과 정한론
4. 조일 관계의 뇌관: 쓰시마
5. 기도 다카요시의 정한론

제3장. 중화 질서에 도전하는 일본
1. 청일수호조약의 체결
2. 기유약조 체제의 해체
3. 류큐와 대만 문제

제4장.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1. 정한론의 재부상
2. 사이고 대 오쿠보
3. 오쿠보의 외교
4. 오쿠보의 대만 정벌

제5장. 개국 아닌 개국: 강화도 조약
1. 고종의 신외교
2. 일본의 반응
3. 운요호 사건
4. 청의 의중을 떠보는 일본
5. 신헌과 구로다의 강화도 담판
6. 최익현의 도끼 상소
7. 강화도 조약

제6장. 쇄국과 개국 사이에서
1. 리델 주교 사건
2.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일본 방문
3. 사이고의 반란과 오쿠보의 암살
4. 표류하는 조선
5. 이홍장과 청의 신조선 정책
6. 이홍장의 조미수교 중재

제7장. 개화파와 일본의 만남
1. 김옥균
2. 불교, 부산과 개화사상
3. 이동인의 일본 밀항
4. 제2차 수신사 김홍집과 황준헌의 만남
5. 김홍집과 이동인의 만남

제8장. 급진 개국과 대미 수교
1. 고종의 개국 결정과 이동인의 밀사 파견
2. 신사유람단과 본격화되는 일본 배우기
3. 조미수호통상조약
4. 김옥균의 첫 일본 방문

제9장. 위정척사파의 반격과 청의 제국주의
1. 영남만인소와 홍재학 상소
2. 대원군의 반격: 안기영 역모 사건과 임오군란
3. 청의 신제국주의
4. 제물포 조약과 청에 밀린 일본
5. 속국에서 직할령으로
6. 청의 간섭과 친청파의 개혁

제10장. 친일개화파의 독립사상
1. 김옥균의 제2차 일본 방문
2. 후쿠자와 유키치와 조선의 개화파
3. 김옥균의 독립사상
4. 김옥균의 제3차 일본 방문

제11장. 갑신정변과 친일개화파의 몰락
1. 갑신정변 전야
2. 거사
3. 청군의 개입
4.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
5. 김옥균과 친일개화파의 말로

결론

부록
1. 「구로다 훈령」 전문
2. 「강화도 조약」 전문
3.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의 부록 전문
4. 「조미조약(朝美條約)」 전문
5.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전문
6.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전문

주 (註)

참고문헌

찾아보기







P.436~437
친일개화파가 목격하고 배우기 시작한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힘을 기르고 있던 일본이었다. 아직 청이나 러시아, 그 외의 서구 열강에 직접 도전할 실력은 갖추지 못하였지만 급진 개혁을 통하여 근대 국가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동시에 부족한 힘을 외교력으로 보완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일찍 간파한 일본의 지도자들이 아직 힘으로는 좌지우지 할 수 없는 조선을 적극적인 교류를 통하여 일본식 근대화의 길을 가도록 설득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메이지의 지도층은 친일개화파들과 깊은 교류를 한다. 친일개화파들은 메이지유신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일본의 정치인, 경제인, 사상가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새로운 세계관, 국제 정세 인식, 그리고 국가관을 정립한다.
조선의 건국 세력이 송나라의 산업 혁명과 문화적 성취를 본받고자 개방, 개혁을 추진했다면 조선 말기의 개화파는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본 받고자 ‘개화’를 추구하였다. 위정척사파가 주자학을 문명의 정점으로 확신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다면 개화파는 일본이 받아들이고 있는 서구 근대 문명을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로 간주하였다. 위정척사파에게는 중국이 문명이고 서양이 오랑캐였다면 개화파에게는 서구와 일본이 문명이고 중국이 야만이었다. 개화사상은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조선 사람의 세계관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다.
그러나 친일개화파의 인식 전환은 당시 조선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친중위정척사와 친청 동도서기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조선의 주류 사회로서는 일본을 따르고자 하는 친일개화파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친일개화파가 자신들의 이념을 관철시키고자 거사를 하였을 당시에는 아직도 청이 너무 강했다. 정변이 일어나자 청은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게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한다. 반면, 아직도 메이지유신 초기의 일본은 청을 정면으로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청이 조선 정국에 적극 개입하자 일본은 친일개화파를 버린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갈 기회는 사라진다.
P.438
오늘날 많은 한국 사람들은 서대문의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문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 바로 뒤에 서대문형무소의 옛 자리가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독립문’은 중국의 칙사가 무악재를 넘어서 조선에 당도하면 조선의 왕이 직접 나가 그를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 즉 ‘중국을 사모하는 건물’을 허문 자리에 지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문이었다면 1897년에 지어진 독립문을 일제가 일제 시대 내내 그대로 두었을 리 만무하다. 독립문은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줬음을 상기시켜주는 상징물이었기에 일제가 그대로 두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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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의 가슴과 뇌리에 깊이 뿌리내린 반일 감정과 ‘왜’(倭)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 피해 의식, 강력한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이르면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친일개화파가 출현한다.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늘 중국을 문명의 원천으로 간주해 온 조선 사람들이 중화 질서의 가장 변방이었던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조선은 근대 문명을 일본으로부터 배운다. 친중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 조선의 왕실은 모두 근대 문명을 금수와 같은 서양 오랑캐의 것으로 치부하고 거부하면서 그 내용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청은 왕조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의 유교 문명이 우월하다는 ‘중체서용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근대 문명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는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고 있던 일본이었다. 이 비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문명개화의 당위성을 배우고 근대 문명을 조선에도 이식하고자 한 사람들이 친일개화파다.
친일개화파가 일본으로부터 배운 것은 근대 산업, 군사, 교육, 법뿐만 아니라 ‘독립’이라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일본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 불리는 근대 국제법을 익히고 불평등 조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민족 국가’라는 독립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근대 국제 질서를 배운다. 당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청은 조선 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고 서구 열강과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중국의 속방(屬邦)임을 적극 홍보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실, 민씨 척족 중심의 친청파 역시 모두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대내외에 스스럼 없이 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청 간의 사대 관계가 근대 국제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인 종속 관계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다.
친일개화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훗날 “개화파”로 불리게 되는 극소수의 인사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문명개화’를 이루고 있던 메이지 일본을 보고 배우면서부터였다.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빠르고 성공적인 근대화 과정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불과 한 세대 만에 봉건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한다.
조선과 일본은 비슷한 시기에 서구 열강과 조우한다. 외세의 도래에 대한 초기 반응도 유사했다. 서구 열강이 문을 두드릴 당시 조선과 일본은 모두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에서는 위정척사파가, 일본에서는 존왕양이파(尊王夷派,, 손노조이파라고도 함)가 일어나 개국에 극렬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조선과 일본의 역사는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조선에서는 위정척사파가 끝내 개국에 반대하고 친일개화파는 몰락한다. 반면 일본의 존왕양이파는 개국주의자로 변신한다.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 전환을 통하여 가장 극렬한 쇄국주의자들이 가장 적극적인 개국주의자가 된다. 이들이 일으킨 혁명이 메이지유신이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곧바로 조선의 문을 두드린다. 일본은 오랫동안 속해있던 중화 질서, 또는 ‘화이질서’(華夷秩序)의 역사와 구조, 논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근대 국제 질서의 역사와 구조, 논리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중화 질서를 자신이 주도하는 근대 국제 질서로 바꿔나간다. 조선과 중국에게 익숙한 전통 중화 질서의 개념과 용어, 이론과 상징을 근대 국제 질서의 것들로 하나씩 대체해 나가면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주도 면밀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꾼다.

친일개화파의 좌절

급격히 근대화하고 있는 일본에 직접 건너가 보고 배우기 시작한 최초의 조선 사람은 불교승 이동인이었다. 1879년 김옥균과 박영효의 부탁과 후원으로 처음 도일(渡日)한 이동인은 1년간 일본 말과 문화를 익히면서 일본의 정치인, 지식인, 기업인은 물론 일본에 상주하고 있던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친일개화파와 일본의 교량 역할을 한다. 그 후 1880년 제2차 수신사 파견, 1881년 4월 10일 신사유람단 파견,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김옥균의 방일과 장기 체류를 통하여 조선의 개화파는 일본의 개화사상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귀국하여 조선의 개화를 기획한다.
그러나 친일개화파는 두 개의 장애물을 만난다. 첫째는 친중위정척사파였다. 대원군의 개혁을 ‘패도 정치’로 몰아 대원군을 실각시킨 위정척사파였지만 고종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적극 배우려고 하자 이번에는 대원군과 손을 잡고 이에 격렬히 맞선다. 안기영 역모사건(1881), 임오군란(1882)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이 함께 고종과 친일개화파의 개국 시도에 반대하여 일으킨 정변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쇄국주의자였던 대원군과 위정척사파가 다시 득세하자 이홍장이 공을 들여 추진한 조선과 서구 열강 간의 적극적인 수교 정책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으로 대군을 급파하여 군란을 평정하고, 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天津, 천진)으로 압송한다. 외세를 배격하겠다고 일으킨 임오군란은 오히려 외세가 조선 내정에 전례 없이 깊이 간여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병자호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직접 챙긴다. 청은 조선과의 관계를 전통적인 사대 관계에서 근대적인 제국주의 식민지 체제로 전환시키고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1859~1916)를 보내 조선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다.
임오군란이 불러온 청의 군사 개입과 정치 간섭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세력을 키워오던 조선 왕실의 외척인 여흥 민씨 척족이었다. 1874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민씨 척족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톈진으로 납치되자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청 역시 민씨 척족의 이용 가치를 간파하여 이들과 적극 손을 잡는다. 친일개화파의 두 번째 장애물인 ‘친청파’는 이렇게 형성된다.
일본을 통하여 근대 국가와 근대 국제 질서의 성격을 이해하기 시작한 친일개화파들에게 조청 간의 조공 관계는 굴욕적이었다. 중국은 더 이상 문명의 기준도, 따라야 할 이상도 아닌 오직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중국에 의존하여 권력을 유지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모두 가로막고 있는 민씨 척족 주도의 친청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오히려 친청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친일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역사는 친일개화파에게 가혹했다. 조선은 메이지유신과 같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정치 세력도, 사회적, 이념적 여건도 갖추지 못했다. 청과 정면 대결을 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부족했던 일본도 친일개화파를 돕지 않는다. 청군이 베트남을 둘러싼 청과 프랑스 간의 전쟁(1884~1885)에 조선 주둔 청군을 파병하면서 청군의 개입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오히려 위안스카이가 청군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결국 삼일천하로 끝난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직접 통치는 더욱 강화된다. 개화파는 역적으로 몰려 미국, 일본 등지로 망명을 떠났고 조선에 남은 그들의 가족들은 연좌제(緣坐制)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 혁명은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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