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3

[김동춘 칼럼] 개념 수입에서 개념 수립으로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김동춘 칼럼] 개념 수입에서 개념 수립으로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김동춘 칼럼] 개념 수입에서 개념 수립으로

등록 :2019-03-12

우리는 반대의 길로 가면서 세계 일류로 간다고 착각했다. 유학파 선호, 세계화 만능, 단기 성과 위주의 연구지원 체계, 서울대 등 몇 대학에 자원 몰아주기, 사립대학 중심의 대학 체계, 서울 중심의 문화 학술 생태계, 대학 서열화의 고착화 등이 그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세계에서 유럽과 미국을 제외하고 노벨상 수상자를 수십명 배출한 유일한 나라는 일본이다. 그런데 비서방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였던 나라도 일본이고, 그들과 같은 발전 수준에 올라선 나라도 일본이다.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유일한 나라인 한국 사람들은 이제 방탄소년단(BTS)이 세계 대중음악의 최고 수준에 오르고, 서울의 번화가도 도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서 한국이 일본과 거의 같은 수준에 올라섰다고 자만하는 경향도 있다.

큰 착각이다. 과학기술, 기업 경영, 전문성의 수준 등 어느 한 영역에서라도 일본을 잘 살펴본 사람은 누구나 양국의 격차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많이 좁혀졌고, 민주주의 수준에서 한국이 앞선 점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격차는 기초학문, 기초과학기술, 즉 개념 설계 능력일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기업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거나, 서구의 선진 학문을 빨리 배웠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거두었을까? 실제 일본의 대부분 노벨상 수상자는 유학파가 아니라 국내파들이고 그들은 주로 일본어로 논문을 썼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24명 중 반 이상은 도쿄대 출신이 아니고, 그중에는 이름 없는 대학 출신도 있고, 중소기업이나 열악한 조건에서 근무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 대다수는 사립대학 출신이 아니라 거의 한 연구를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국공립대 출신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자연과학도가 아니므로 기초과학이나 공학 차원에서 노벨상 수상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학문 일반, 특히 한국 사회과학의 처지에서 유추해보면 일본의 사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외국 것을 아무리 많이 배워도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적 질문이 현장에 뿌리박은 것이어야 한다. 둘째, 장기적인 기초 연구는 기업의 논리에 덜 휘둘리는 국공립대학에서 가능하다. 셋째, ‘내 것’에 기초해야 국제적인 교류가 의미가 있다. 넷째, 연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관심과 영역을 공유하는 연구자들 간의 긴밀한 교류에 기초해야 한다. 즉 연구 클러스터가 있어야 뛰어난 성과가 나온다.

세계화의 바람이 분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반대의 길로 갔다. 유학파 선호, 세계화 만능, 영어 논문 중심의 개인별 업적 평가, 단기 성과 위주의 연구지원 체계, 서울대 등 몇 대학에 자원 몰아주기, 사립대학 중심의 대학 체계, 서울 중심의 문화 학술 생태계, 대학 서열화의 고착화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반대의 길로 가면서 세계 일류로 간다고 착각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한국의 연구개발(R&D) 지출 비중은 세계 1위다. 인문사회과학 연구비 지원 예산도 적지 않고, 박사과정, 박사 후 과정생 지원 사업이나 대학 ‘연구소 지원’ 사업도 크게 꾸준히 늘었다. 학자들 논문 편수도 눈에 띄게 늘어 외형적으로만 보면 학문과 대학은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대학과 학문을 질적으로 고양시키려는 체계적 고민이나 장기적 학술 지원은 사실상 없었다. 영어 논문 열풍은 20년째 지속되고 있으나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 중 세계적 반열에 오른 사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들은 건물 짓는 데는 엄청난 돈을 지출하나 사람을 키우는 작업에는 매우 인색하다. 우수한 인재들이 기초학문 분야가 아닌 의대와 법대를 가서 재능을 주로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과거 선진국 따라잡기 성장 과정에서는 선진 이론의 수입과 학습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한국은 조립가공 수출의 단계를 벗어났는데도 개념 수립 능력, 기초 학문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고부가가치 독자 브랜드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원천기술은 독자적인 이론과 개념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회과학계의 경우 지금 한국과 세계가 처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독자적인 개념과 이론이 없고,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약하다. 외국 석학 아무리 많이 초청해도 자체의 학문을 생산하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세계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을 목표로 한 지원정책(BK21)을 재고해야 한다. 지방 거점대학 육성을 통한 연구 클러스터 조성, 고등사회과학원과 같은 기초 연구단위를 만들어서 장기 투자를 해야 하고 국내 박사가 세계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독자적 개념과 이론이 있어야 세계와 인류에 기여할 수 있다. 과거 제국은 이론과 개념으로 여전히 세계를 주도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나라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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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85636.html?fbclid=IwAR2IM6eVlaN6ITrzG4b2hzmbYiAVVudv3zgKzA8u6t-DJyTk3SizHVcz0ug#csidxfc639fe6c20319992bc785f7e61fa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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