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6

[서울신문]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서울신문]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입력 : 2019-03-13

조선 황실, 그들은 정말 애국자였나



▲ 창덕궁 인정전에서 촬영한 ‘이왕가’(李王家)의 사진. 1913~1915년쯤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부터 의친왕 이강, 순종, 덕혜옹주, 영친왕 이은, 고종, 순종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씨,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대한제국 황실은 경술국치 뒤 일본으로부터 이왕가로 책봉받아 식민지 기간 동안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개혁군주 고종(1852~1919), 조선을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1851~1895),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에게 독립의식을 키워 준 덕혜옹주(1912~1989).’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소설, 뮤지컬이 보여 주는 조선 황실 인물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열강의 조선 침탈 압박에도 나라를 구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부 문화계가 돈벌이를 위해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역사까지 항일이라는 이름으로 세탁한다. 학계에서는 “문화 콘텐츠의 특성상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상은 가능하지만 일부 작품은 가히 역사 창조 수준”이라고 비판한다. 조선 망국의 책임을 모두 일본에 떠넘겨 황실과 당시 지도층의 과오를 희석시키는 ‘분노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일본이 위안부 강제 동원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비롯해 “역사 왜곡을 일삼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역사 왜곡’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1918년 영친왕의 조선 방문 당시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이 연회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친왕, 고종, 순종.
서울신문 DB●“조선 황실 남성들 日장교 돼 일왕에 충성”

지난해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은 항일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의병과 긴밀히 소통하는 ‘우국(憂國)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태진(76)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등 일부 학자도 “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광무개혁(1896~1904) 등을 통해 청과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만들려고 나름 노력했다는 설명이다. 이런 모습은 다양한 작품에 투영돼 고종을 ‘비운의 군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학계 대다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다른 나라들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해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오직 고종만이 전제군주제로 되돌려 놓아 망국을 앞당겼다는 비판이 크다. 청일전쟁(1894~1895) 때는 미국 공사관으로, 러일전쟁(1904~1905) 땐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갑신정변(1884)과 을미사변(1895) 등 변고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외세에 의탁하느라 바빴다. 1898년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등 개혁을 요구하자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되레 이들을 탄압한 것도 크나큰 과오였다.



당시 조선사회를 기록한 외국인들도 그를 ‘무능한 군주의 전형’으로 봤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고 개탄했다. 조선이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지 못해 세계 발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이로 인해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고종의 잘못을 그대로 지적한 ‘불편한 진실’이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조선 민족 전체를 일본에 넘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13일 “고종과 황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지키고자 조선의 식민지화에 가장 앞장서 협력했다”며 “조선 황실은 식민지 기간 내내 (백성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이 제공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 행위”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조선 황실은 1910년 경술국치 뒤로는 별다른 국권 회복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이왕가’(李王家)로 책봉된 뒤 엄청난 재정 지원을 받았다. 경술국치 때 작성된 한일병합조약에는 조선 황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조문이 빼곡히 담겨 있다. 황실 인사들은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았다. 특히 남성들은 일본군 장교가 돼 일왕에 충성을 바쳤다. 그나마 의친왕 이강(1877~1955)이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한 것이 거의 유일한 항일 운동이었다. 1919년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학생의 기록에는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겨 가난 속에서 힘들게 사는데 조선 황실은 너무도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실망했다”고 나온다.
●백성들에게 ‘늙은 여우’로 조롱받은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명성황후 역시 매스컴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된 대표적 황실 인사다. 일부 문화계에서는 그를 ‘조선의 잔다르크’로 칭송한다. 국민들의 인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1~1898)과 권력 다툼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무속 신앙 등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세기의 악녀’로 평가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당시 조선의 국가 규모를 감안할 때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를 넘어서는 사치를 부렸다”고 지적한다. 1985년 시해 당시 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를 ‘늙은 여우’라고 불렀다. 그 별명은 일본인들이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당시 그의 악행에 분노해 조선인들이 붙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무용, 뮤직비디오 등에서 조선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희생된 애국자로 그려진다. 그의 최후가 너무 비극적이어서 대중의 안타까움이 과잉 이입된 탓이다. 하지만 역사 전공자들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도) 우리나라 문화계가 명성황후를 너무 미화했다”고 비판한다.

익명을 요구한 문화평론가는 “명성황후가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로 포장된 것은 2001년 KBS에서 그의 삶을 드라마로 방영하면서부터다. 국민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야 할 공영방송이 되레 망국의 주범을 구국의 위인으로 탈바꿈시켜 놨다.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돼 ‘조선은 선(善), 일본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덕혜옹주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 입어”

2016년 개봉 당시 6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 ‘덕혜옹주’도 역사 왜곡 논란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이덕혜는 1912년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25년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31년 쓰시마번주 귀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1962년 극심한 정신질환 상태로 한국에 돌아와 1989년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에서 덕혜는 당시 시대 상황을 마음 깊이 고민하고 일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일본 옷 입기를 거부하고 조선인 유학생들과 항일 교류 모임을 가졌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연설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고자 중국 상하이 망명도 추진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일제의 괴롭힘으로 정신병을 얻어 힘든 말년을 보냈다. ‘인간 이덕혜’는 분명 우리 역사의 희생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역사 속 덕혜는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를 입었다. 정신병 증세도 일본의 압박이 본격화되기 전인 10대 때 나타났다. 그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간여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영화 속 내용은 원작소설 ‘덕혜옹주’를 바탕으로 허진호 감독이 만들어 낸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이원규(72) 역사소설 전문작가는 “우리 문화계에 도를 넘는 역사 왜곡이 심각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살아있는 왕에 대해 ‘우리 고종께서는…’이라며 시호(죽은 뒤 왕에게 내려지는 이름)를 부르기도 한다”며 “최소한의 지식도 없는 일부 작가들이 역사의 궤를 반대 방향으로 바꿔 놓으려는 듯한 콘텐츠를 생산한다. 문화계 내부에서도 문제의식은 있지만 ‘동업자 정신’ 때문에 비판이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314009001&fbclid=IwAR2MRMX7aAiTtA1sqg1P2DKwXBO2lD7ZCks6ylALhXE3taYTtLcIYSMRAJo#csidxef64597f84bc69ea72e62863a232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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