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3

페리스코프 :: 어제오늘 LA의 이병한 님과 주고받은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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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orunkim.tistory.com/search/이병한?page=2 [페리스코프]






페리스코프 :: 어제오늘 LA의 이병한 님과 주고받은 메일



 
김기협이라고 합니다.  중국사 전공자인데(학위논문은 마테오 리치) 학계에서 활동 끊은 지 20년 가량 되고, 언론에 글 쓰며 혼자 공부해 온 사람입니다. 몇 해 전부터는 거의 프레시안만을 통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 선생님 글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읽을수록 관심 범위와 기본 시각,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 취향에서도 공유하는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학계를 떠난 이래 다른 사람 공부를 크게 의식할 일이 없고, 내 공부에 관해서도 동료로서 이야기 나눌 사람 마주칠 기대 없이 지내 왔는데, 이 선생님과는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군요.
 
나는 지금 2013년 8월까지로 예정된 "해방일기"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2008년 3월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낸 이래 한국근현대사의 늪에 빠져서 지냈는데, "해방일기"를 끝으로 이 방향 작업에서 빠져나오려 합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밀려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이 선생님도 흥미롭게 여기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혹시 정말 흥미를 느끼신다면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흥미를 너무 많이 느껴서 "그런 일은 내가 하고 싶은데요." 하신다면 기꺼이 맡겨놓고 나는 딴 짓 하겠습니다. 주제를 더 키워서 힘을 합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런 가능성은 억지로 바랄 것이 아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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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구상하고 있는 작업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와 (2) "중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현대문명의 두 축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정리해 보려는 겁니다. (1)의 "유럽"은 물론 지리적 영역이 아니라 근대문명을 대표하는 "근대유럽"을 말하는 거죠. 로마제국 이후 지중해문명이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으로 갈라지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문명이 이슬람문명과의 관계를 통해 근대문명을 빚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는 겁니다.
 
(2)의 "중국"은 천하체제를 대표하는 "중화제국"을 말하는 겁니다. 춘추 말-전국 초 천하 사상의 출현에서부터 19세기 말 만국공법 체제에 유린되기까지의 과정을 화이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겁니다. 오늘 올리신 글의 "제국" 개념으로 연장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특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3) "동아시아의 20세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지금까지 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작업에서 연장되는 것이므로 (1), (2)보다 먼저 해치우고 싶은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업방식으로 효과적인 수행이 가능할지 미심쩍은 면이 있어서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처음 구상할 때는 엄청난 작업이 될 것 같았는데, 마침 이와나미강좌로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11책이 나온 것을 보니 기반이 많이 닦여져 있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죠.
 
"근대"라는 것에 대해 포괄적인 관점을 세우고 싶은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지역 20세기사는 근대화에서 시작해 탈근대화로 끝난다는 느낌이에요. 근대의 시대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목적 아래 동아시아 20세기사를 정리해보고 싶은 겁니다.
 
더 길게 늘어놓고 싶지만 듣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르는 채 독백을 너무 길게 하기가 좀 거시기하군요. 흥미 느끼시면 내 블로그 orunkim.tistory.com 의 "뭘 할까?" 카테고리를 살펴봐 주세요. 나는 생각나는 걸 거기다 대개 적어둡니다.
 
이 선생님 공부 잘 펼쳐지기 바라며 불쑥 보내는 글 맺습니다.
 
김기협 드림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1013 [페리스코프]





2012년 7월 20일, (금) 오후 2:01
 

20여 년 전 유럽에 자주 다닐 때 그곳 지식인사회의 '친구' 관계를 무척 부러워했죠. 사제간에도 퍼스트네임으로 서로 부르며 친구 관계를 바탕에 깔아놓고 지내다가 스승 노릇이나 제자 노릇을 더러 하게 되면 그 바탕 위의 무늬처럼 받아들이는 거죠. 어제 메일 끝에 '스승', '선배' 같은 말을 쓰셨는데, 나는 일단 '친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관해 이 선생처럼 가까운 생각과 느낌을 함께 가진 '친구'와 만난다는 것이 무척 반갑습니다.
 
백 선생이 지도교수라는 사실로 약간은 이해가 됩니다. 이 선생 관점이나 태도에 그분의 보탬이 얼마간 있었겠죠. 우리 세대에서는 나도 백 선생 담론에서 참고되는 것을 많이 얻는 편이지만 다소의 거리를 느끼는데, 이 선생에게서는 그 거리가 훨씬 적게 느껴집니다. (백 선생 얘기 나온 김에... 1993년 내가 논문 심사받을 때 백 선생이 막 연세대에 부임했어요. 하마트면 내 논문을 심사하는 불편한 위치에 설 뻔했다고 백 선생이 말하며 웃곤 했죠.)
 
첫 답장에서 "유럽" 프로젝트에 대해 "남들이 해둔 것 활용해서 생각을 정리하는 정도겠지요."라고 하셨는데, 사실 나는 "중국"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그 두 가지를 "기능적 과제"로 생각하는 거죠. 이 선생은 더 창조적인 작업으로 끌리는 모양인데, 그 점에서는 나랑 차이가 있군요. 나는 꼭 해야 할 일이란 기준으로는 "20세기"보다 "유럽"과 "중국"을 앞세웁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이란 기준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述'과 '作'의 차이로 생각합니다.

사실 "기능적 과제"라곤 해도 학계의 통상적 기준으로는 엄청 독창적인 작업이 되겠죠. 공부해 오는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로 삼은 두 사람이 Jacques Gernet 와 Jonathan Spence 인데, 내가 생각하는 "기능적 과제"란 것이 제르네의 업적을 모델로 한 겁니다. 자기가 중국 문명에 들이댔던 것 같은 큼직한 좌표계를 끄집어내 유럽에 들이대는 꼴을 그분이 보면 뭐라 할지...  (자기 아버지한테 고자질하지 않을까? 루이 제르네는 당대의 고전학자였다고 들었어요.)
 
통하는 게 많은데 모처럼 뚫리니 매일 쓰게 되네요.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겠죠. 블로그에 올리기로 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공부와 일을 좋게 봐주는 분들의 시선도 의식하면서 그분들께 잘 해드릴 수 있는 게 뭘까 늘 생각하는 게 좋을 거 같거든요. 아마 이런 식으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주제를 정해서 프레시안에 내놓을 만한 형식의 글을 쓰거나, 생산적인 교류 방법을 잘 찾아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혹시 알아요? 구경꾼 훈수도 들어올지. ^^
 
피차 상대의 글을 상당 범위 읽어놓은 게 있으니 이야기가 잘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서슴없이 털어놓으세요. 교신이 안정된 단계에 이르면 매주 1-2회 이 선생에게 생각 정리해 보내는 시간을 나는 갖고자 합니다.
 
김기협 드림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1015 [페리스코프]





 
 
흠~ 백 선생이 해주셨음직한 얘기네요.
그분 스스로 지키시는 기준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분도 붕붕 떠 다니다가 어느분께 한 방 얻어맞은 얘기일지도~ ^^)
그런데 이 선생은 그 가르침을 초과달성한 거 같아요.
이 선생 글이 술술~ 펼쳐지는 걸 보면 아는 거 박박 긁어내고 짜내는 글이 아니거든요?
이건 내가 경험으로 아는 겁니다. (으~ "나도 해봐서 아는데~" 뭣도 모르는 늙은이들 타령!)
써먹을 생각 없이 재미로만 수십 년 공부를 쌓아오다 보니,
쓰고 싶은 주제가 있을 때 관련 내용 갖다댈 걸 골라잡을 수 있는 여유를 좀 가지게 됐죠.
그 비슷한 '노성(老成)'의 느낌을 이 선생 글에서 느끼기 때문에 내가 놀란 겁니다.
 
며칠 메일 참고 있는 동안 이 선생 글을 좀 다시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해방일기> 제4권 출간 준비가 겹쳐져 좀 바쁘게 지냈거든요.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럽게 작업이 진행됩니다.
애초 생각은 연구자들의 업적을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었는데,
중요한 몇 가지 포인트를 독창적으로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진짜 고지식한 '술'을 시도했는데 더러 '작'이 나오는 거예요.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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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이 선생-선배들과 다른 담론으로 흘러가는 이유로
연배 차이를 생각하는 데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겠죠.
나 같은 늙은이 중에도 이 선생 글 보며 "아니, 내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하는 사람이 있고,
이 선생 연배에서도 그런 쪽으로 생각 펼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까요.
우리가 공유하는 생각으로 두드러진 것 하나가 '근대(성)'에 관한 것 같습니다.
밑바닥까지 홀랑 뒤집어보자는 욕심이죠.
나는 오랜 '무위(無爲)'의 생활을 통해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된 것으로 스스로 생각했는데,
이 선생은 개입-참여를 열심히 해온 분 같아서 내가 보기에 신기한 거예요.
개입-참여에는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평가에는 근대적 기준의 적용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취향의 문제일까?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내 메일에 이 선생이 답장하는 식으로 얘기가 진행되어 왔는데,
앞으로는 이 선생께 가급적 이니셔티브를 맡기고 싶습니다.
벅찬 작업을 벌여 놓고 있다 보니 당장 꼭 필요하지 않은 생각을 열심히 키울 여유가 없어요.
이 선생이 생각나는 것 많이 묻고 얘기해주고 하면 좋겠어요.
"묻고 답하는 과정"을 나도 환영합니다.
나는 입이 근지러워 못 참을 일이 있을 때 외에는 매주 한 차례 생각을 적어 보내고 싶습니다.
참, 학위논문 곧 제출할 모양인데, 그 얘기도 해주지 않을래요?
 
김기협 드림
 

 
백 선생님이 언젠가 '민두기 평전'을 쓰겠노라 한 적이 있습니다.
전 여러 필자들의 집합적 작업으로 쓰여지면 좋겠더군요.
서울대 동양사학의 기틀을 추적해 보는 학술사적 가치도 있지만,
워낙 이채로운 활극들이 다이나믹하게 펼쳐질 듯해서요. ^^

블로그의 댓글도 그러하고,
이번 메일도 그러하고,
제가 그렇게 노티 나는가, 곰곰 돌아보게 됩니다. ^^;
제 쪽글을 두고,
예쁜 얼굴의 여자가 잔뜩 분칠을 하고, 향수도 마구 뿌린 것 같다며,
혹평을 당하던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요.
대학원 수련 5년으로 노화되었나 봅니다.^^


근대(성)에 대한 상대화는 저로서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제가 98학번인데요.
포스트모더니즘의 절정기였습니다.
칸트, 헤겔 읽기 전에 푸코, 들뢰즈부터 읽었던 것이지요.
근대(성) 비판 자체가 하나의 '유행'이었습니다.
모 영화잡지에서 일을 거들었는데, 당시 평론들도 온통 그러했고요.
탈근대의 풍월을 읊어야 '폼'이 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근대에 대한 회의조차도 저쪽에서 빌려와서 포즈만 취한 것에 가까웠지만요.

한편 <녹색평론>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위로부터의 근대(성) 비판이라면,
녹평의 작업은 아래로부터 근대(성) 비판이 아니었나 합니다.
탈근대보다는 '비근대'의 옹호에 가까웠다 해야겠죠.
한때는 영국의 Resurgence까지 챙겨 읽을만큼,
김종철 선생에도 깊이 감화되었습니다.

그런데 탈근대론이나 생태론이나 '장소 감각'은 부족했지 싶습니다.
결국 말하는 내용과 어법들이 장소 불문 비슷했거든요.
자연스레 장소에 깃든 역사성도 약해 보였고요.
포스트모던과 생태주의를 배회하다,
최종적으로 동아시아론에 안착하게 된 것도, 그 장소 감각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탈근대'를 가더라도, 적색 대신에 녹색 일변도로 가는 것은 근대의 '반복'이지 싶고,
Resurgence의 다양한 길이 열리는게 '진화'에도 부합한다 여긴 것이지요.
동방은 동방의 길을 찾는게 인류라는 종의 진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할까요. 
그런 생각이 자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라는 발상에 의탁하는 까닭이지 싶습니다. 

저는 결국 인류사도 생물학이나 진화론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머리 식힐 때 자연과학서를 즐겨 읽는 것도 그래서이고요.
물론 한때 과학도를 꿈꾸시고, 과학사도 연마하셨던 것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요.

20세기 좌파들의 가장 약한 부분도 문명의 식생에 대한 공부였지 싶습니다.
정작 발딛고 있는 장소와 뿌리 감각이 없으니,
혹은 그것을 한사코 부정하고자 했으니,
다들 사상누각이 되어 제풀에 고꾸라진게 아니었나.
이성에 비해, 野性과 根性이 부족했다고 할까.
고전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전통이라고 해도 무방할 그 문명의 탯줄과 끊어지면서,
관념적 급진성으로만 내달리고 말았다고 여겨집니다.


제 학위논문은 동아시아론의 부족한 점을 메우는 작업에서 출발합니다.
일단 가장 부족하다 보이는, 냉전기 중국과 아시아를 주제로 잡았습니다.
'죽의 장막' 너머에서 만들어 갔던 '또 하나의 아시아'에 대해서는 공백 지대 같거든요.
북조선,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등등.
그들이 중국과 함께 만들어 가려했던 지역 구상과 실천이 있었습니다.
곧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이들 나라끼리 모여서 대안적 올림픽과 대안적 아시안게임을 펼치기도 했고요.
이러한 동향들을 최대한 복원해 내려고 합니다.
이들이 적극 개입했던 아시아-아프리카 작가운동도 정리하고 있고요.
훗날 김지하 선생이 로터스 상을 수상한 그 AA 작가운동이죠.
대저 비동맹, 중립주의, 제3세계론 등등으로 표출된 운동들인데,
저는 그 뿌리가 아프로-유라시아의 긴 역사와 무관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저항의 거점에 복원이 있던 것이지요.
본인들 스스로도 '르네상스'를 언급하기도 했고요.
21세기는 그 복원이 점차 여실해지는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종군했던 중국 지식인의 글들을 모아 읽고 있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이라고 할까,
제가 잠정적으로 '중화 사회주의'라고 명명한 미묘한 심리/인식의 지도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를 국제와 당제 간의 모순으로 접근하곤 하는데,
중국와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소련-동유럽과는 또 다른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중화주의의 유산이 끼친 연대와 갈등의 역동성을 밝히는 것이,
'20세기 동아시아'를 다룰 때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 내쳐 말하면,
저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면 할수록,
그 언어와 발상과 실천에서 점점 '중화제국'화 되어갔다고도 여기고 있습니다.
만주국의 건국이상(오족협화)이나 영미/소련 너머 근대를 초극하자는 대동아 이념 등,
지배의 논리만큼은 점차 '중화제국'화 되어 갔던 것 같아요.
일본도 청과 마찬가지로 중원으로 진출하면 할수록 중화의 논리를 말했던 것이지요. 
저는 그 관성과 지구력이 몹시 흥미롭습니다.
반미-반제국주의, 반소-반수정주의 외쳤던 문화대혁명 또한,
'사상적으로는' 대동아와 계승되는 지점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아니, 대동아를 훌쩍 넘어 AALA까지 확산될 정도였죠.
당시 마오의 세계관,
그리고 마오에 열광하며 그의 어록을 품고 다녔던 68혁명 세대들과,
무장투쟁의 동기를 얻었던 제3세계 게릴라들의 공명도 제 논문의 한 부분입니다.
반면 '중국혁명의 세계화'가 절정을 구가할 때,
정작 북조선과 북베트남은 척을 졌던 대목도 재미가 동합니다.
특히 머물기도 하셨던 연변의 경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겠죠.
이렇게 중화제국의 잔상과 변용, 복원과 탈구 등을 제대로 짚는 것이,
20세기 동아시아를 정리하는데 열쇠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학'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종종 들고요.

오전에 메일을 받고,
생각을 궁리하다 글로 정리하니 점심이 되었습니다.
두서없는 거친 생각들을 툭툭 뱉어 두었으니,
대화를 잇는 소재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몇 몇은 앞으로 프레시안 연재로도 소화할 예정입니다.
이곳 도서관에도 선생님 책이 네 권이나 있더군요.
틈틈이 읽으며, 저 나름으로 질문 보따리를 채우고 있겠습니다. 

<해방일기>의 대장정에 기대와 응원을 표하며.  

-이병한 드림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1019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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