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4

[청사초롱-박상익] 야나이하라와 日 양심세력 : 네이버 뉴스



[청사초롱-박상익] 야나이하라와 日 양심세력 : 네이버 뉴스

박상익] 야나이하라와 日 양심세력
신문23면 TOP 기사입력 2019.07.24.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 야나이하라 다다오(1893~1961)는 1937년 ‘중앙공론(中央公論)’ 9월호에 ‘국가의 이상’이란 글을 기고했다. 국가의 이상은 대내적으로는 정의, 대외적으로는 평화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를 들어 일본의 대륙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국내의 언론·사상 탄압에 항의하고,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사건(1937년 7월 7일)을 불의의 싸움으로 단정하여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 글이 문제가 되어 ‘중앙공론’ 9월호는 판매 금지되고, 야나이하라는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이른바 ‘야나이하라 사건’이다. 대학에서 추방된 야나이하라는 개인 월간지 ‘가신(嘉信)’을 발간하면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고전독서회 ‘토요학교’를 열어 단테, 밀턴 등을 읽었다. 그러나 ‘가신’마저도, 이를 폐간하는 것은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야나이하라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1944년 폐간되고 만다. 전세가 기울어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폭격할 때도, 모든 시민이 방공호로 대피할 때도 그는 밖에 나가 예언을 무시한 나라의 운명을 침통하게 지켜봤다고 한다.

패전과 함께 그는 도쿄대학 교수로 복직해 총장(1951~57)을 역임했다. 그는 중앙공론사가 1966년 창립 8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근대 일본의 대지식인 10인’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필자는 1980년대 초 ‘토요학교’의 한국인 제자 노평구(1912~2003)로부터 야나이하라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말기 위암으로 투병 중인 야나이하라를 문병했을 때 그는 노평구의 손을 잡으며 “군국주의보다 암이 더 무섭다”며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평생을 군국주의에 맞서 싸운 지식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도쿄대 총장 재직 시 학내 소요사태로 일본 국회에 소환된 그는 급진 이념도 대학에서 마땅히 연구돼야 한다며 대학과 학문의 자유를 단호히 옹호했다. 실험실에서 페스트 같은 인체에 유해한 병원균을 연구하듯 체제를 위협하는 사상일지라도 대학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야나이하라는 한국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제일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한국을 깊이 사랑했던 그는, 월간지 ‘가신’과 학술논문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무단통치와 경제착취를 비판했으며, 장래 자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국민족 중심의 경제정책을 펼 것, 한국민족의 자주적 지위를 용인하고 조선의회를 개설할 것 등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언어정책, 기독교 탄압, 동화정책을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했다. “조선인 학동이 조선인 교사에 의해 일본어로 일본 역사를 배우는 소학교 교육을 참관하고 심중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 탄압에 신음하던 많은 한국인이 그의 격려와 의로운 투쟁에 힘을 얻었다. 야나이하라는 젊은 제자들이 한국 여행을 떠날 때, 한국에 가면 무엇보다 일본제국주의의 착취 실상을 보고 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1961년 그가 서거하자 각계각층의 애도가 이어졌다. 탐욕에 물든 권력자와 그를 추종하는 사이비 학자 등 진리를 거스르는 세력에 대한 의연한 저항, 섬나라 국민에게 보기 드문 활달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인격, 기독교 사상의 확장으로 학문과 신앙을 통합시킨 대형 지식인의 면모는 큰 울림을 남겼다.

1965년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그의 방대한 저작 전집 29권이 발간됐다. 그러나 그의 저작 가운데 시중에서 구해 볼 수 있는 번역서는 지난 4월 출간된 ‘개혁자들’(포이에마)이 유일하다. 우리의 빈약한 지식 인프라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신조 정권의 도발 국면에서 일본 극우세력과 선량한 일본 시민을 분리하는 전략도 필요해 보인다. 그러자면 일본의 양심세력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소수에 머물고 있는 그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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