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3

CK Park - 천박한 평가 트럼프가 판문점에서 김정은을 만난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일이 있기 직전...



CK Park - 천박한 평가 트럼프가 판문점에서 김정은을 만난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일이 있기 직전...







CK Park
1 July at 12:34 ·



천박한 평가

트럼프가 판문점에서 김정은을 만난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일이 있기 직전 그리고 직후 미국, 독일, 영국 언론에서 나온 소리를 살펴보았다.

- 미국의 자존심을 잃었다. 트럼프가 자기 스태프들의 허를 찔렀다. 스탭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했다. 대통령이 세계 최강의 국가 이미지를 위험에 빠뜨렸다.
- 트럼프가 상대를 잘 못 보고 있다. 트럼프가 잔인하고 권위주의적 독재자에게 만나기를 청함으로써 그에게 정치적 선전의 빌미를 주었다.
- 두 사람이 아무리 만나도 실제적인 핵 포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주의. 그들은 이번을 포함하여 세 번 째 만나고 있지만, 북한에서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은 있지만, 실제적인 일은 일어나고 있지 않다.
- 새로운 팀을 만들어 대화해도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 3~4주 안에 팀을 구성하고 결렬되었던회담을 다시 하기로 했지만,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

대부분 전형적인 미국의 부정적 시각이다. 물론 트럼프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여론을 직수입하는 자유당, 미국적 시각을 가지고 과연 국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미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하던지, 김정은을 독재자라고 계속 지칭하든지, 변화가 없으니 냉전으로 돌아가자는 논리다. 이런 시각은 한반도에서 지속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대립에 대한 피차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북한에만 지우는 고압적인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구분단, 영구대립, 증오의 대결을 계속하라는 소리다.

군사적 대립으로 긴장이 넘치던 비무장지대에 군복이 아니라 양복을 입고 나타난 문 대통령과 트럼프의 상징적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는 방송이 별로 없었다. 우리 국민만 남북 70년 적대적 관계에서 벗어나 평화와 공존으로 나가는 역사의 발걸음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전적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럭비공 같은 트럼프를 앞세워서 걷는 길이다. 오직 BBC만 우리의 심정을 조금은 알아주고 있다. 독일 뉴스는 그저 객관적으로만 언급하고 말았다. 트럼프가 다소 교활한 정치가로 이 국면을 자기의 선거국면에 이용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이 크지만 일면 내 마음도 여전히 불안하다.

2. 트럼프가 기지를 발휘하여 김정은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서 형성된 남북 간 최소한의 신뢰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뢰는 서로를 바꿔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토대다. 이 토대는 미국, 트럼프, 일본,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다. 현재 오직 남북한 정부만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동안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미국적 시각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보았고, 그 시각을 고착화하는 데 있어서 조중동, 그리고 종편까지 가세하여 나팔수 노릇을 했다. 이 집단은 한반도 평화란 오직 전쟁을 통해 이룰 수 있거나, 북한을 궁지에 몰아 아사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시시때때로 북한을 악마화함으로써 우리 가슴에 북한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심고 그들의 호전적 평화론이 아닌 정의로운 평화론이 우리 머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위협했다.

이런 전략은 이승만이 미군정 등에 업혀 사용한 것이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다. 그들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시시때때로 간첩 조작 사건을 터트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도 감행했으며, 국민에게는 북한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곤 했다. 이런 흐름은 한반도의 가난한 대중이 보상 없는 자유주의보다 평등주의적인 사회주의에 더 호감을 가질 것을 미군정이 두려워한 나머지 반사회주의자나 반공주의자들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그들이 도처에서 양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만행을 모른 척함으로써 우리가 서로를 죽이고 죽게 만든, 기획적 냉전체제의 결과이기도 했다. 여기서 미국은 선, 북은 악이라는 정형화된 가치판단 형식이 우리 의식 속에 옷 입혀 졌다.

이런 역사를 계속 이어가자는 이들은 사실 증오의 정치를 이용해 왔던 집단이다. 미국의 매파, 일본의 극우, 조중동, 자유당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우리를 관망하며 투견처럼 피투성이가 되도록 서로 싸우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가 이런 투견이 되기를 자처한다면, 우리 한반도의 역사는 멈추거나 퇴행할 수밖에 없다. 서로 죽이려는 반문명 죽음의 세력만 강화될 뿐이다. 그 증거가 북의 핵전략이다. 정치 권력이 사람을 섬기지 않고 정치 권력의 구조적 세력화를 도모할 경우, 그 정치 권력이 상대방을 악마화하면 할수록 더 큰 정당성을 얻고 더 강한 것이 된다. 냉전 선전 수단은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전략적 수단이다.

3. 여기에 푼수 없이 영적 교사를 자처하며 등장한 세력이 종교다. 제대로 된 종교윤리는 초월적 혹은 내재적 선에 대한 신념을 가르치기 때문에 현실 정치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다소 거리를 둔다. 즉 종교의 정치화나 정치의 종교화는 초월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를 혼합시켜 인간의 가치 속에 담긴 욕망을 신적인 재가를 받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욕이 넘치는 종교 지도자들은 간혹 종교의 권위를 정치에 빌려주고, 정치를 마치 신의 재가를 받은 것인 양 승인해 준다.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가 일어나는 이유다. 이 경우 정치 권력은 마치 신의 대행자이거나 신의 뜻을 수행하는 권력인 양 행세할 수 있게 된다. 정치의 종교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히틀러가 이용했던 방법이다. 간혹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권력을 향한 낯뜨거운 종교의 아부 현상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일상에서 은연중 목격되는 이런 현상, 즉 정치의 종교화는 타락한 종교가 스스로 드러내는 종교 타락의 실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종교의 기괴한 정치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되고 힘든 역사가 이어질 경우 종교 내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신의 정의가 역사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고민이다. 전쟁과 기근이 겹쳐 무수한 사람이 비참한 죽음을 겪을 때, 그리고 그 누구도 고귀한 생명을 지켜줄 수 없는 절망의 시기에 신의 뜻을 예언하는 무리가 출현한다. 소위 말세의 비밀을 파악했다는 듯이 나서는 종말론자다. 이들은 극심한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 주어지면 그 고통의 진원지가 자신들이 믿는 선하신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거나, 혹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시험하는 도구라고 판단하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험용으로 사용하는 도구를 지목한다. 그 도구는 쓰임 받고 버려질, 저주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종말론이 성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6.25 전쟁 직후 가난이 극심했던 시기다. 종말론자들은 전쟁과 기근이 겹친 그 시대를 “말세”라고 규정했고, 말세에 나타나 하나님의 자녀를 박해하는 세력으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지목했다. 이들은 성경 마지막 책,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성서에 나오는 붉은 용이 바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의 해석에 따라 공산 세력은 두말할 것 없는, 사탄의 세력이 되고 만 것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을 주축으로,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들 대부분 이런 해석을 따라서 공산주의를 이해한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에게 적대하는 세력이므로 그들과는 대화나 타협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탄과는 말도 건네면 안 된다. 이들은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지만, 하나님의 원수, 사탄을 증오하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 오히려 덕목이라고 배운 것이다. 한국 교회가 엉터리 해석으로 신자들의 정신세계를 광범위하게 오염시킨, 죄악이다. 엄밀히 말해 초기 예수 공동체는 원시 공산주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독교가 이념에 채색되어 흉악한 키메라, 변종이 된 것이다.

이런 변종적 사고를 기독교라고 믿는 이는 평신도일 경우 내가 이해할 수 있지만, 목사이거나, 신학자일 경우 나는 다소 한심한 사람이라고 본다. 오늘 아침 아프리카 도처에 신학교를 세우고, 도처에서 학위 가운을 입고 찍은 사진으로 자신의 페북을 도배한 어떤 신학교 총장이라는 분을 내가 페절한 이유다. 그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에 대하여 우리가 증오와 대결이라는 분단의 역사에서 벗어나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는 “선진 사회로 나가는 느낌”을 가진다는 한 페친의 글에 대하여, 자신은 “역사가 나쁘게 가고 있어서 분노한다”는 노골적인 견해를 밝혔다. 지식인의 얼굴은 가지고 있으나 역사 비판 의식이 결여된 천박한 평가다. 화려한 박사 가운을 걸치고 있다고 하여 그가 절로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목격하는 엉터리 해석자들 대부분 교수, 박사라는 호칭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시대를 사는 지성적 크리스천이라면 탈제국주의적 노력, 탈미국적(반미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탈반공주의, 탈종말론적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주장은 대부분 제국주의의 앞잡이, 미국인의 이해관계를 지켜주는 지식인, 반공주의적 호전론자, 그리고 누군가를 빨갱이로 모는 사냥개 노릇을 하기 쉽다. 이런 사람은 학위 가운을 걸치고 지식인 행세를 즐겨 과시하지만, 대부분 자기의식이 어떻게, 누구에게, 왜 그렇게 길들여 졌는지 스스로 파악할 능력이 없다.




165박걸, Howard Kim and 16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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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기 역사 교수님으로 후반전을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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