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6

강상현 ‪#‎반일종족주의_비판 [1-4]



(1) ‪#‎반일종족주의_비판_1회‬ – Facebook Search




강성현
28 August at 16:45 ·



#반일종족주의_비판_1회

1.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반일 종족주의> 프롤로그 첫 문장이다. 영화 <주전장>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후지키 슌이치 등의 입에서도 흘러 나온 말이다. 얼마 전 YTN 등의 보도에서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우연 박사(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이기도 함)가 유엔인권이사회에 가서 조선인 강제동원은 없다고 발표할 수 있도록 제네바 왕복 항공비와 체류비를 댄 일본 우익 인사 그 사람이다. 후지키 자신도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폄하, 부정 발언을 일삼던 자다. 한미일 공조를 깨는 북한과 정대협의 활동이라는 주장을 국제인권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던 그 자 맞다.

일본 무라야마 담화 이후 고이즈미 내각과 민주당 내각으로 간간이 표명되어 왔던(사이사이 이를 부정하는 온갖 망언에도 불구하고)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표명을 뿌리 뽑으려는 일본 우익, 그리고 이른바 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안 교과서 포럼’을 만들었던 이영훈 등의 ‘뉴라이트’ 학자들과 정치인.
카세 히데이키, 후지키 슌이치 등 일본 우익 부정론자들과 이영훈 등 한국의 뉴라이트가 함께 합창하는 “한국은 거짓말의 나라, 한국인은 거짓말하는 국민”이라는 주장의 ‘접점’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2.
한국의 거짓말 문화를 입증한답시고 이영훈은 2014년 위증죄, 년도를 알 수 없는 무고건수와 보험사기, 2018년 정부지원금 통계 수치를 언급하고 일본과 미국과 비교하며(여기선 수치가 나오지 않는다) 거짓말과 사기가 난무하는 한국에 대한 비난을 한다.

이영훈 등 낙성대경제연구소 사람들은 참 통계 수치를 좋아한다. 표, 그림의 수치를 보여주고, 객관적 실증과학의 모양새를 취하며 이게 “기본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통계수치가 있는 그대로 진실인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데이터를 조사하고, 정의 내리며, 항목/범주로 구분하는가의 맥락, 다시 말해 통계적 지식 생산의 맥락을 고려해서 수치를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예컨대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통계치는 식민지적 지식 권력의 목적과 효과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분석되어 활용되어야 한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활용되는 표, 그림의 수치에 대한 분석이 자의적, 선별적이고, 심지어 일차원적 분석에 그치고 주장은 참으로 과감하다 못해 비틀거나 왜곡하고 있다는 반론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이 거짓말 나라고 한국인은 거짓말 국민이라는 무시무시한 주장을 하면서 근거로 삼는 저 선별적인 수치 아닌 수치들은 이영훈 류 연구의 실증주의적 모양이 형해화되었을 뿐 아니라 극단의 목적론적 오류와 일반화의 오류로 뒤범벅된 “추악한 괴물”의 모습을 드러내주고 있다.

3.
이영훈은 거짓말 정치의 예로 MBC PD수첩의 광우병 관련 보도 방송,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세월호 추모 천막의 “거짓말의 광란”을 들고 있다.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한국인의 집단 심성이 만들어 낸 거짓말”, “거짓말의 천막(세월호 천막)은 사람들을 겁박하고 있었습니다. … 혼은 죽었는데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는 좀비들이었습니다” 같은 표현으로 한국인들이 거짓말의 광란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어찌해볼 수 없는 그의 황폐한 정신 세계가 보였다.

저런 정신 세계의 소유자와는 공론장에서 토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기확증의 편향에 빠져서 자기 뒷 모습을 바라보는 진영의 사람들을 향해 외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말하는 자위 행위를 한다. “거짓말 하는 사회나 국가는 망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진실을 구도하는 자신만이 애국자여서, 어떠한 억압에도 애국자로서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기 확증적이고, 결연히 말하는 태도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4.
이영훈은 역사학과 사회학이 거짓말 학문의 온상이라 단언한다. 특히 근현대사에 오면 거짓말이 횡행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이르면 거짓말이 절정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낙성대경제연구소 학자들은 기본적 사실 관계를 추구하는 진짜 연구자라 위치시킨다. 그러면서 이영훈은 “고매하신 대법관들에게 묻”는다.

“거짓말의 가능성이 큰 주장을 검증하지 않은 재판은 과연 유효한 것인가.”

이영훈은 대법관들에게 역사를 모르는 법률가들이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만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확신에 차 있다. 이 책이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와 “벌거벗은 물질주의와 육체주의”라는 샤며니즘의 현실에서 비롯된 거짓말의 광란에서 대한민국을 구할 것이라 확신한다.

5.
책 내용은 역사수정주의와 극단적 부정론을 오가는 수준들의 글들을 엮고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수정주의와 부정론 입장의 글들을 주로 싣는 일본 우익 잡지들의 글들과 자료 구사, 논리 구성, 주장의 함의 등의 면에서 유사하다. 어떤 경우 놀라울 정도로 같다. 심지어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일본 우익 잡지의 필자로 등장한다. 본인이 자원해 투고한 것인지, 극우 잡지가 간택해 연락한 건지 선후를 모르겠지만, 뭐 중요하겠는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한국 뉴라이트(대안교과서포럼에서 낙성대 경제연구소, <반일 종족주의>로 이어지는 계보의 학자와 정치인, 언론인 등)와 일본 극우 부정론자들 사이의 “접점”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그냥 만나는 수준을 뛰어넘어 실시간 역사수정주의적 자료 구사, 논리 구성 등이 실시간 대용량으로 처리되는 “포털”이구나 싶다.

6.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후지키 슌이치가 이우연 박사의 양복 옷깃을 매만지고 먼지를 세심히 털어주는 장면, 이우연 박사의 멋적은 듯 웃는 모습은 한국 뉴라이트와 일본 우익 부정론자들 간의 관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주전장>에서 일본 우익 부정론자들의 구심점 카세 히데아키의 조롱 섞인 말이 단박에 떠올랐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말.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귀여운 나라에요. 버릇없는 꼬마가 시끄럽게 구는 것처럼 정말 귀엽지 않나요?”

이우연은 그들에게 버릇 있고 어여쁜 꼬마 같아 보였다.

후지키 슌이치도 이우연 박사의 글과 말이 너무나 놀랍고 어여뻤다. 스포트라이트도 비춰주고 싶지 않을까? 후지키가 관심을 주고 키워준 미국의 토니 마라노처럼, 이우연도 그들의 관심을 듬뿍 받고 일본으로 자주 불러줄 것이라 생각한다. 돈과 일본의 관심이 따라올 것이다. 아베가 일본 국회에서 “한 한국의 경제학자”(이영훈을 말함)를 언급한 것 이상으로 이우연의 노력 여하에 따라 스승을 앞지를 수도 있겠다 싶다.

7.
문제는 이영훈과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 그리고 뉴라이트 학자, 정치인, 언론인 등의 “힘”과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는 거다. 지난 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고, 앞으로 더 가속화되겠구나 싶은 생각에 걱정이 많아졌다.

다음/네이버 카페와 블로그 시절에도 스스로 신친일파로 자칭하는 사람들의 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만의 아주 작은 리그였고, 고립무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영훈 등의 뉴라이트, 심지어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가 제공하는 컨텐츠로 무장하고, 유투브를 적극 활용한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소수 일베적 감성의 이용자들이 유투브에 채널을 만들어 역사수정주의, 부정론적 입장의 컨텐츠를 재탕해서 만들다가, 최근에는 조회수가 수만에서 수십만을 찍는 유투브 채널로 진화했다. 월 유투브 광고 수익이 수천만원 대인 경우도 생겨났고, 일본 포털 극우사이트에서나 보이던 부정론 입장의 댓글들이 이 채널 아래에 한국어, 일본어로 합창을 하듯 댓글이 달리게 되었다. 모두 제2, 3의 이영훈, 이우연이 되고 싶어하는 일반인들이다.

이걸 보고 내면화한 어떤 청년들이 소녀상에 모욕을 가했다. 침을 뱉고, 일본어로 “텐노 반자이”를 말하고 혀짧은 외설물에 나오는 일본어를 내뱉었다 한다.

이영훈의 황폐한 정신 세계가 유투브를 매개로 점차 한국 사회로 잠식해들어가는 것일까?

이영훈의 이승만 학당 TV도 최근 일본어 번역 자막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한다. 너무나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8.
유사 역사학의 외양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고대사 쪽의 유사 역사학은 울트라 내셔널리즘과 제국적 판타지의 얼굴로 주류 역사학계를 “친일파”, “식민사관”으로 공격하고 있는 반면에, 근현대사 쪽 유사 역사학은 반일 종족주의 및 민족주의 비판, 한미일 동맹과 함께 북한을 악마화하고 탈냉전분단과 평화로의 길을 거짓이라고 선전하며 스스로를 “친일파” “토착왜구”라고 자기 정체화하며 표현하고, 주류 역사학계와 사회학계를 반일종족주의에 편승해왔던 거짓말쟁이로 매도하고 있다.

전우용 선생의 토착왜구 낙인은 부정적 용법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박근혜 청와대의 대변인 출신이었던 윤창중이 <반일 종족주의> 책 출간 기념회 자리에 가서 스스로 “난 토착왜구”라는 말을 한 것을 보고 그냥 웃을 수만 없었다. 엄마부대 대표 주옥순의 망언이 일회적인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면 광화문에서 애국당과 함께 박근혜를 위한 통성기도와 시위를 하는 “애국 할배/할매”들이 난 친일파다, 신친일파다 외칠 판이다. 이미 그런 조짐이 있다.

9.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탈 냉전과 탈 분단, 평화로의 길을 못바땅하게 생각하고, 북한과 중국을 적대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익을 담당해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를 만들려는 아베에게 No!를 외치고 한일 시민사회가 연대하려는 움직임보다 아베와 일본회의 같은 극우의 사상과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한일간에 급속한 접점과 연결선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를 학술적인 수준에서 서평하거나 그럴거리조차 되지 않는다고 가볍게 웃고 넘길 때가 아니다.

역사적, 세계사적 전환기에 발생하는 신보호주의적 파고에 급격히 자라나는 새로운 파시즘적 생각과 행동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서로 급격히 연결되면서 거대한 반동의 흐름을 만들어낼 듯 싶다. 바로 그 때 평화와 인권에 반하는 진정한 위기가 도래하지 않을까?













강성현
31 August at 15:47 ·



#반일종족주의_비판_2회

1.
이 책은 참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면서 기어이 한국의 반일종족주의를 증명하려 애쓴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식민지근대화론의 대척점에 있는 신용하 교수의 식민지수탈론, 강제동원, 조선인의 육군특별지원병/학도지원병,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부속 청구권협정, 백두산과 독도, 쇠말뚝, 구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고종(“망국의 암주”)과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노무현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사업의 과오, 마지막으로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주제/소재들은 일본 우익들이 오래 동안 공격해왔던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한국의 ‘뉴라이트’가 이 공격에 가세해왔다.

한국의 뉴라이트들은 2000년대 노무현 정부 시기에 전개되었던 친일(파) 청산에 저항하면서 등장한만큼 ‘반 노무현’을 ‘에토스’로 삼았다. 그들은 당시 대두하고 있던 탈민족주의 또는 트랜스내셔널리즘에 기반한 ’민족주의 비판’ 논의 일부도 뉴라이트 버전으로 변형해 활용하는 기민함을 보였고, 최근에는 국가주의와 가부장제의 공모를 비판하는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의 논의도 역사수정주의 버전으로 형해화해 뽑아먹고 있는, 이쯤 되면 참 악랄한 짓도 벌이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초국가주의적, 초민족주의적, 가부장제적 생각과 태도를 공사 양면에서 적나라하게 보이면서 말이다. (그들 내부도 스펙트럼이 다양하니 조합이 다양하긴 하다.) 이영훈의 글 속에 가득한 가부장제적 언어 속에서 여성의 고통이나 자유의지를 통한 계약의 주체, 결정의 주체로 보는 문장들이 착취되듯 뽑혀 나올 때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역겨워 죽을 뻔 했다.

2.
<반일 종족주의>를 읽은 것만으로 정신이 황폐해지고 아프더니, 가슴이 답답하고 큰 숨을 내쉬게 된다. 토악질 몇번을 해도 시원해질 것 같지가 않다. 어제 조은 선생님 칼럼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여름 정원>을 읽을 때 숨구멍이 좀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반일 종족주의> 책은 내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몸에 큰 해를 끼칠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무엇보다 이 책의 저본인 유투브 이승만 TV 채널의 강의들이 수만에서 수십만 구독/조회를 찍으며, 이 채널에 영향을 받은 파생 유투브 채널이 점점 확산일로에 있고, 이것으로 돈을 벌고 진영화된 관심을 받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우경화와 서로 시너지를 주고 받는 이 사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누군가에게 이 책과 유투브 강연은 유해 컨텐츠/미디어인데 반해, 다른 누군가에겐 인기 상품이고 서로 돌려보며 칭찬하는 우수 컨텐츠/미디어이다.

앞으로 한일 부정론/역사수정주의의 연대의 속도와 양이 반전평화인권에 가치를 둔 한일 시민 연대의 그것을 급격히 압도할 것으로 걱정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이영훈 현상, 반일 종족주의 현상을 간과하면 할수록, 관심을 꺼야 사그러질거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다가오는 현실은 그 반대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3.
나는 “종족주의의 아성”으로 꼽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이 책에는 이영훈이 쓴 “우리 안의 위안부”,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과 주익종이 쓴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와 “한일 관계 파탄나도록”, 총 5개의 글이 있다. 120여 쪽 분량으로 책의 30%에 해당한다. 이영훈은 이 주제를 책의 클라이막스에 배치해 핵심으로 삼았다.

이영훈의 글들을 읽으면서 난 과거 TV토론회에서 자신의 ‘망언’으로 나눔의 집에 찾아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한 것에 대한 이영훈의 앙금이 느껴졌다. 이영훈의 와신상담이랄까? 그러나 그렇게 쓴 이 글들은 절치부심은 했는지 몰라도 결코 절차탁마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영훈이 제시한 통계와 1차 문서 자료, 2차 문헌에 대한 자의적 선별과 해석은 물론, 오독을 넘어 왜곡 수준의 논리와 내용들이 상당했다.

이영훈 글의 시각과 논리 뼈대는 하타 이쿠히코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1999)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타는 일찍부터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고백하고 반성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의 신빙성을 비판했다. 이것이 아베 내각이 들어서면서 요시다 세이지 증언과 아사히 신문 보도에 대한 이른바 ‘검증’ 사태로 이어졌다.
일본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지부 동원부장이었던 요시다 증언에 대한 진실과 진정성 여부의 검토는 그리 간단한게 아니다. 개인의 의도를 넘어서 효과의 문제가 있다. 요시다 증언 일부가 번복되거나 입증되지 않았더라도 그가 말하는 내용 전부가 부인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요시다 생전에 제주도 성산 주민들의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증언은 나오지 않았지만, 최근에 성산일출봉 근처 위안소 터와 이에 대한 주민 증언이 나왔다.)

하타는 일본군 위안소를 전쟁/점령 지역의 확대된 공창제도/시설로 해석하는 시각을 제공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정부는 위안소 업자가 위법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단속했다는 자료 선별과 해석을 통한 주장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서 이미 많은 비판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에서는 박유하 교수에 이어 이영훈의 글에까지 이어진다.

하타는 일본군 ‘위안부’가 자신의 자유의지와 의사로 취업 또는 자기영업한 것이며, 그 성적 노동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대가를 받았으며, 고수익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타는 “합법적 계약”이었음을 강조한다. 나쁜 업자에게 속아 유괴되거나 납치된 피해 여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범죄는 민간업자(특히 조선인 업자)가 한 것이며, 일본군이나 정부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이영훈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그는 위안부 “자기 영업”이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위한 자료 근거와 해석은 하타나 이영훈이나 거의 같다.

따라서 하타는 일본 정부나 군의 죄는 없으며, 이에 대한 책임도 없다고 주장한다. 비난은 오로지 위안소를 경영한 민간업자에게 있다. 설령 “인간사냥”식의 “강제연행” 케이스가 있더라도 그건 점령지에서 군의 하부 조직이나 병사들이 한 것이고, 일본 정부나 군부 중앙의 명령이나 승인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인신매매와 관련해 좀 부연하면, 아베는 2015년 3월 27일 미국 방문 전에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를 했다. 아베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인신매매” 그러니까 ”human trafficking”(휴먼 트래피킹) 당했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고 하면서 “가슴 아프다”고 인터뷰했다. 영어로 휴먼 트래피킹은 국가 등 권위적 기구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라는 뉘앙스가 있지만, 한자로 인신매매는 민간에 의한 범죄라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 아베는 인신매매라는 용어를 선택해 미국 및 해외 여론에게 일본이 반성과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쇼를 했다. 그리고 일본에 와서는 계속 민간 업자의 범죄와 책임으로 돌리고 있으며, 특히 조선인 업자를 강조한다.

이영훈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라는 글은 이런 시각과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4.
다음 글부터는 이영훈이 쓴 구체적 주장 내용을 들어, 어떻게 자료를 자의적으로 선별 해석했고, 심지어 오독을 넘어 왜곡했는지 주요한 대목을 들어 해설하고자 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영훈 책에 대한 위기의식은 이런 시각, 논리의 내용은 아니다. 1999년 하타 이쿠히코에서 크게 더 나아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내용들에 대한 학계의 비판이 폭을 갖추고 깊이 있게 소개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일일이 다 비판적 해제를 달 수는 없지만 주요 대목을 들어 각 유형별로 비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이런 것보다는 이영훈 등의 유투브 강연->여러 파생 채널의 등장->일베로만 치부할 수 없는 구독자들의 확산과 네트워킹->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컨텐츠의 상업성->반일종족주의 책 류의 출간->일본 쪽에서 이런 유투브 채널의 대거 유입과 구독/조회의 확산, 네트워킹—>이영훈 류를 일본과 국제사회의 무대에 초청해 일본을 위한 논리를 대변하게 하는 것 등에 대한 위기의식이 정말 크다.

2019년 7월 책이 출간되었고, 지금 10쇄를 찍었다 한다.
뉴라이트 정치인, 연론인, 학자들이 박근혜의 국정교과서 사태 이후 오랜만에 단단히 뭉치고 있고, 이승만 TV는 일본어 자막을 준비하고 있으며, 주옥순 같은 이가 늘어나고 있다.
광화문에는 나는 친일파다, 나는 토착왜구다, 북한과 중국에 대항해 한미일 삼각 동맹을 위해서 친일파, 토착왜구를 자처하겠다는 류의 외침들이 지금보다 늘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반문’, 돈벌이, 정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거다. 제2, 3의 이영훈, 이우연, 주옥순이 도처에 나타날거다. 자한당 내부에서도 이미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 연구, 일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무엇보다 이런 황폐한 책을 읽는게 정말 곤혹스럽다.

이런 위기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를 분석하고 반박하는 책이나 논문, 대중 교양서 출간 같은 방식으론 역부족이다. SNS 같은 미디어의 속도와 양을 따라갈 수가 없다.

무엇보다 유투브가 정말 중요하다. 유투브가 ‘주전장’이 될 것이다. ’위안부’ 연구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기반(연구자 풀, 자료 아카이브, 연구소, 역사관 또는 기념관, 그 밖에 국가와 법 중심의 트랙과 피해자와 사회 중심의 트랙에서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디어의 특성을 고려한 여론 및 공감 형성과 교육 프로그램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정의연 등 중앙과 지방의 지원단체들의 운동 방식과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고민이 지금 너무 절실하다.

...

참고로 현재 유투브에서 <반일 종족주의>를 반박, 비판하고 있는 채널은 황현필, 심용환 등이 검색되고 있다.




102102

22 comments45 shares

LikeShow More ReactionsCommentShare

Comments


Seongnae Kim 답답한 현상. 공유해도 되겠지요?
2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6d

강성현 replied · 1 reply


Chulwoo Lee 아베가 트래피킹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어 어리둥절했는데 그 행위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군요. 국가가 개입한 트래피킹임을 특히 강조해야겠군요.
3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6d

Seongnae Kim replied · 5 replies


Heyryun Koh 심각하네요 ㅠㅠ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6d

강성현 replied · 1 reply


Eunjung Oh 이 책을 사서 읽은거에요? 학자도 참 할 직업이 아니네요~ 선배 눈이 걱정... 정말 어떤 책은 읽으면 정신과 몸을 갉아먹히는 기분이 든다는 말에 공감하며... ㅠ

가끔 그들이 말하는 황당한 논리를 깨주기 위해 조목조목하게 반박해둔 전투책도 있음 좋겠다고 생각해요라고 사회학자분들께 요구해보고... …See more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6d
· Edited

Eunjung Oh replied · 2 replies


Eun Hi Yi 안녕하세요 아마 처음으로 댓글 다는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인사드립니다. 요시다 증언은 함부르크 일본총영사관에서 도로테에 죌레하우스 소녀상 전시 당시 보낸 저지 문건을 통해서 알게되어 찾아 보았는데 이 분이 애시당초 소설가였고 2014년 당시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는데 당시 아사히 신문이 해당 기사를 취소한 것은 단지 압력에 의한 것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애시당초 요시다 본인이 접한 진실을 소재로 한 각색수기 형태로 발표된 것이었던가요? 내막을 잘 아시면 알려 주시면 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6d

Eun Hi Yi replied · 2 replies


최익현 저도 공유합니다. 무겁게 읽히는 글, 감사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강성현
4 September at 23:41 ·



#반일종족주의_비판_3회

(연재 넘버링을 단순하게 바꿨습니다.)

1.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 측의 이해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단정한다. 그는 “사실 인식에 관한 한 엄밀히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한국 측의 우수한 학술서는 단 한 권이 없을 지경”이라고 단언한다.

이영훈은 관련 연구가 단 한 권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정리하고 있는 연구 목록만 수십 페이지다. 컴퓨터를 켜고 누리미디어(DBIPA), 한국학술정보(KISS), RISS에 가서 ‘위안부’ 키워드를 입력하고, 검색되는 학위논문, 학술지 논문, 단행본 목록만 봐도 바로 확인된다.

이영훈도 교수 연구자이니 그걸 모르진 않을 거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의도한 바는 이런 걸 거다. “우수한 학술서”란 이영훈 본인이 인정하는, 자신이 보기에 거짓말 하지 않는 연구일거다. 내가 보니 이영훈이 인정하고 거의 복제하듯 참조하는 연구자는 일본의 하타 이쿠히코였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정도를 제외하면, 이영훈이 자신의 책에서 참고문헌으로 밝힌 2차 연구서는 대부분 그가 거짓말이라고 판정내리는 연구물들이었다. 그에겐 한국에선 정진성, 박정애 등이, 일본에선 요시미 요시아키, 송연옥, 김부자, 김영 등이 거짓말 학자들이다.

이영훈이 하타 이쿠히코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하야시 히로후미나 나가이 카즈 선생님을 언급하지 않는 건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우선 이영훈에게 두 분은 비판해 넘어서기 어려운 상대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야시 선생은 미국과 영국 자료까지 능숙하게 폭과 깊이를 확보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왔고, 나가이 카즈 선생은 일본 자료를 발굴하고 역사적 방법에 입각해 꼼꼼히 해석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설마 이런 분들을 이영훈이 듣보잡 취급한 건 아닐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2000년대 이후 진행된 성과들에 대한 공부가 전혀 안된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99년 하타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의 내용과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영훈의 글들을 보면, 그런 것 같다.

2.
이영훈이 하타보다 공부(?)를 한 부분이 더 있다면, 일본의 ‘내지(본토) 공창제’가 이식된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대좌부창기취체규칙 등으로 제도화된)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왕조의 기생제를 계보적으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이영훈 주장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그 의도가 너무 뻔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오수창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기고를 해가며 점잖게 비판하셨다. 더 언급하지 않겠다.
“기생이 위안부 원류? 이영훈 전 교수는 춘향전을 거꾸로 읽었다”(한겨레 신문, 2019.8.24)

공창제의 성립과 시행과 관련해서 이영훈은 일본 공창제에서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조선풍의 공창제”란 표현까지 쓴다. 그는 공창제의 법적 근거인 “대좌부창기취체규칙”을 잠깐 살펴보고 창기, 예기, 작부 통계 수치를 간단히 시계열적으로 제시하면서 조선의 공창제가 예기를 매개로 전통 기생업에서 일본식 공창제로, 더 나아가 조선도 1930년대가 되면 “대중 매춘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세세하게 비판할 대목이 많은데 여기선 넘어가겠다.
다만 이영훈은 이보다 이 조선풍 공창제로 흘러들어온 여성, 사실은 그 배후의 “호주제 가족”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할애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런 거다. 공창제는 합법이고, 성매매업은 일종의 노동시장이며, 주선업(자)는 모집한 여성을 지역 내, 지역 간, 국경 밖 외국으로까지 “송출”하였다. 이 때 여성이 창기로 취업하려면 보호자의 취업승낙서가 필요했는데, 아버지, 어머니, 오빠나 다른 친족이 “호주”의 자격으로 했고, 이를 증명하는 호적등본과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관할 경찰서장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호주권력”의 책임 아래에 “딸은 울면서 주선업자 손에 끌려갔다. 이것이 공창제를 둘러싼 이른바 인신매매의 실태다.” 그러면서 이영훈은 조선시대에는 그런 류의 인신매매는 없었다고 첨언한다.

“아버지가 딸을 주선업자에게 창기나 예기로 넘기는 것은 단순히 빈곤에 쫓겨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양육하고 보호할 가부장의 의무가 빈곤 계층의 가정윤리로 성숙해 있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이영훈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승만 TV를 봐서인지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기분나쁘게 들린다.

‘위안부’ 제도도 공창제입니다. ‘위안부’도 이렇게 합법적으로 모집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를 따진다면, 여성의 아버지 등 호주의 문제입니다. (이건 이영훈 인용이 아니라 내가 빙의해서~)

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한 일본 군과 정부는 온데 간데 없고, 모든 책임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을 “방매”한 아버지 호주에게 전적으로 돌려진다. 게다가 이영훈은 매일신보에 난 김초향이라는 기생의 사연을 소개하며, 딸이 공부하고 싶어 몰래 학교에 간 걸 아버지가 끌어내 죽어라고 두들겨 패고 학대한 것이 가부장이었다며, 결국 그 소녀는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사람의 꾐에 빠져 가출을 감행했는데, 이 길로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소개한다. 이 사연은 여러 정보를 담고 있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이영훈은 아주 단순하게 이렇게 정리한다.

“무지막지한 가부장의 폭력이 신여성으로서 자아실현을 꿈꾼 한 소녀를 위안부로 내몬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수준의 자료 선별과 일방의 비틀린 해석, 왜곡에 가까운 단순한 주장을 보고 있다보면, 왜!!! 내가 자료들을 찾아서 전체를 보여주고 다른 분명한 자료도 읽어주고 친절하게 논리적으로 해석해서 여러 풍부한 함의를 담은 논의를 정리해줘야 할까 깊은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3.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제는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이라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전쟁/점령 지역의 확대된 공창제도/시설로 바라보는 하타의 시각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았다고 판단한다. 하타의 주장은 학자연 하는 역사수정주의/부정론 입장의 우익 연구자 및 저널리스트에게 전시 위안소가 “확대된 공창제이고 합법”이라는 무기를 심어준 자다.
그러니까 그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공창제의 시각에서 보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다는 주장 이면에 이것이 “합법”이었고 “과연 성노예였나”를 주장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강제연행에 대해서도 노예사냥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걸 입증한답시고 “원 위안부의 증언”도 조작에 취약하다고 강조하면서 역사학자들은 그걸 자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용감무식한 발언까지 한다. (이쯤되면 실증주의 역사학이 이영훈한테서 질색하고 도망가겠다.)

이영훈이 비판하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들도 일본 (내지) 공창제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공창제의 유형, 구조, 역사를 연구한다. 제도의 공시성, 통시성, 연속 속 단절(또는 단절 속 연속)을 비교역사적인 시야에서, 또는 비교사회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한다. 이영훈은 모든 ‘위안부’ 연구자들이 군 ‘위안부’ 제도를 공창제와 절대 비교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이 ‘위안부’를 순결, 소녀, 민족주의로 진공 포장하고 마치 공창의 창기, 예기, 작부, 여급을 차별하는 것처럼 왜곡되게 주장하려는 듯하다. 세간에 그런 인식이 전혀 없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영훈이 이름을 호명한, 또는 본인의 참고문헌에 올려놓은 연구자들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영훈이 짧게 언급하면서 비판한 송연옥 교수의 논의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자.

송연옥은 공창제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연결해서 분석하는 대표적인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송연옥에 따르면 공창제도 다 똑같지 않다. 연속과 단절이 있다. 당연히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 사이의 비교도 그런 시각을 견지한다. 다시 말해 내 식대로 표현하면, 일종의 계보적 분석인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일본 공창제와 식민지 공창제의 구조와 특성을 비교하면서 “폐업” 규정의 차이를 주목하고 설명한다. 그녀는 일본 공창제와 달리 식민지 공창제 하의 창기는 자유의지에 따라 폐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이영훈의 반론 방법은 참 단순하다. 자유의지에 따른 폐업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여성이 업주나 업소로부터 도망친 사례도 자유의지의 폐업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반론 방법은 문제가 있다. 구조와 규칙은 여성이 스스로 폐업을 할 수 없게 했더라도, 현실에서는 백프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걸 두고 현실이 그러니까 구조와 규칙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구조의 구속이나 제약이 작동하지만 행위는 전적으로 구조에 종속되지 않을 때가 있다. 굳이 사회학에서 말하는 구조와 행위의 이중화 이론을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이야기와 제도, 장치, 구조를 오가는 방식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라면 다 알 거라고 생각한다.

송연옥이 볼 때, 일본 내지 공창제보다 그것의 식민지적 변형태인 식민지 공창제가, 식민지 공창제의 전시적 변형태인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더 억압적이고 노예적이다. 어떤 제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의도와 취지에 맞게 참고하는 모델이 있다.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는 짧게는 중일전쟁, 더 길게는 상해사변(여기까지 주류 연구의 공통된 입장),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는 러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데, 당연히 군과 공창제의 관계가 주목된다.
그래서 이것들을 공창제 계보에 위치시키고 일별할 수 있다. 그러나 하타나 이영훈처럼 그게 다 똑같은 거고, 특히 공창제가 당시 합법이었으니 ‘위안부’ 제도가 합법이고, 따라서 성노예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가도 한참 나갔다.
특히 이영훈은 ‘위안부’가 하나의 직업적 특성으로 볼 때 업자, 포주, 위안부와의 계약 문제로 환원시켜서 보자고 말한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또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할 때 그녀들은 돌아갈 수 없었습니까”라고 묻는다. 또한 계약에 근거해 있고 자발적이고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성노예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은 노예적 상황을 어떻게 상상하는 걸까? 국제법 상의 노예 용법을 알고 있는 걸까? 좁디 좁은 감옥 같은 장소에 쇠사슬에 묶여 감금당했다고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채찍으로 맞고, 밥도 잘 못 먹고, 옷도 잘 못 입고, 강제로 관계를 강요 당하고… 꼭 이런 걸 다 충족시켜야 노예적이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사실 강제연행 또는 강제동원 용법도 마찬가지다. 이영훈이 집중 공격하는 요시다 세이지 증언이나 영화 <귀향> 또는 소설 <아리랑>의 재현처럼 제복을 입은 헌병이나 경찰이 총칼을 차고 저고리를 입은 소녀의 머리채를 붙들어 끌고 가야만 강제연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제법에서 말하는 강제성의 용법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예컨대 그도 ‘취업사기’를 말한다. 그건 강제동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무엇보다 모든 ‘위안부’ 동원이 그런 형태의 강제연행은 분명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례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들이 있다. 이에 대해 이영훈은 기억의 특성을 이유로 들어 증언을 역사 자료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다. 위에서 말했듯 용감무식한 발언이다.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를 검증한다고 나서면서 산케이신문이 전위대로 나서서 증언의 신빙성 검증을 정치적으로 공세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

#반일종족주의 비판 4회에서는 이영훈이 동원하는 “미군의 심문기록”과 “어느 위안소 조바의 일기”, “문옥주” 사례를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려 한다.

미군의 심문기록은 전시정보국(OWI) 버마인도중국 방면 미육군에 배속되었던 ‘레도(Ledo)팀’의 일본계 미군 정보병사 알렉스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다.
일본군 포로 심문 제49호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집, 이동, 위안소 생활, 전쟁 상황, 일본군에 의해 어떻게 버려졌고, 죽었고, 생존자들이 어떻게 포로가 되었는지 비교적 소상하게 정리한 자료라 매우 중요한 문서다. 다만, 요리치가 워싱턴 상부에 선정적으로 읽을 만한 것으로 의도돼 작성된 것이라, 무엇보다 요리치 본인의 선입견이 투영된 보고서라 분석할 때에는 자료의 생산 맥락을 철저히 고려해가며 다른 자료와 교차분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 보고서는 버마 미치나에서 교에이 위안소에 소속되었던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대상으로 심문한 내용을 요리치가 재구성해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위안부들의 업자인 기타무라 부부를 심문한 또다른 보고서가 있다. 인도 델리 소재 동남아번역심문센터(SEATIC)의 번역심문 정보병사들이 작성한 1차 심문 자료다. 요리치 보고서와 비교하면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정반대의 진술들이 있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실마리들이 있다. 흥미로운 건 SEATIC 병사들이 요리치 보고서를 그 당시에 검토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자료들은 영화 또는 소설의 소재가 될만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기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도 마찬가지로 이영훈처럼 자기 주장에 부합하는 것만 뽑아내듯 읽으면 위험하다. 자료가 품고 있는 내용들은 균질적이지 않다. 서로 상충하고 갈등적일 때도 있다.

제일 열받은 것은 문옥주 사례에 대한 왜곡이었다. 이걸 쓰다보면 이 글을 이쯤에서 끝맺을 수 없을 듯하여… 나중에…

-------

#반일종족주의_비판_1회 클릭

#반일종족주의_비판_2회 클릭




48Takeshi Fujii and 47 others

1 comment22 shares

LikeShow More ReactionsComment
Share

Comments


Haeryong Park 감사합니다.
Hide or report this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