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3

한국 현대사를 다룬 KBS 다큐멘터리 시리즈 <모던 코리아>의 이태웅 PD를 만나다


한국 현대사를 다룬 KBS 다큐멘터리 시리즈 <모던 코리아>의 이태웅 PD를 만나다
KBS 다큐멘터리 시리즈 <모던 코리아>의 기획자 이태웅 PD를 만났다. 굳이 얼굴을 마주 보고 묻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굳이 그의 육성으로 듣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BYESQUIRE2020.02.04
이태웅의 현대사 
이른 아침부터 불러내서 미안하다. 출근 시간에 길거리에서 촬영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괜찮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정도다.
늦게 자진 않았나? 어제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는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일찍 잤다. 나이 먹으니까 새벽에 하는 축구도 잘 안 보게 된다.
이태웅은 아직 스포츠 프로그램 PD인가?
KBS
스포츠국 소속이다. 지금 교양국에서 일하는 건 파견 나와 있는 형태고.
스스로 그렇게 인식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스포츠 프로그램 PD의 영역을 많이 벗어나 보이니까.
아무래도… 하는 일은 통상적인 스포츠국 PD 업무와는 차이가 많이 생기긴 했다.
이태웅 PD의 기획에서 출발한 KBS 다큐멘터리 시리즈 〈모던 코리아〉는 다양한 주제로 한국의 현대사를 다룬다. 총 몇 부작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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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정도 더 만들어서 10부작으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직 미지수이기는 하다
.
지금껏 통일, 대우 사태, 수능을 다뤘다. 2월에는 해태 타이거즈, 삼풍백화점, 1992년 휴거 소동을 다룰 예정이고. 1부 ‘우리의 소원은’은 직접 연출까지 했는데, 또 연출하는 편이 있을까?
확정된 건 없다. 다만 10부작이 된다면 조선총독부 철거를 다루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게 1995년에 굉장히 큰 이벤트였더라.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나. 흥미로웠다. 이 산 저 산에서 발견된 말뚝에 대한 해석이라거나,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같은 소설이라거나, ‘민족 정기’로 대변되는 일종의 자신감이 폭발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해주기도 하고, 오늘날의 한일 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도 같다.
전작인 〈88/18〉까지는 그래도 명목상으로나마 ‘스포츠 다큐멘터리’였다. 88올림픽 자체보다 개최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그리긴 했지만. 〈모던 코리아〉는 다르다. 이태웅의 필모그래피에서 번외 편일까, 아니면 작업 범주가 확장되는 과정일까?
확장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사실 〈모던 코리아〉  1부인 ‘우리의 소원은’은 〈88/18〉을 준비하다가 나온 기획이다. ‘아, 이것도 다뤄보면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아무리 스포츠 이슈에 걸려고 해봐도 걸릴 게 없는 거다.(웃음) 그때 마침 동기인 교양국 PD가 제안을 했다. 88/18〉을 모티프로, 팀을 만들어서 시리즈를 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그간의 작품을 순서대로 보면 본인만의 스타일이 점점 더 확고해진 듯하다. 〈모던 코리아〉 1부 ‘우리의 소원은’은 특히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는 인상이고.
교양국 국장님이 〈88/18〉 같은 걸 재미있게 보셨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하셨던 말이, ‘프랑스 예술 영화처럼 만들어보라’는 거였다.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은 편해지더라. ‘진짜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되…겠지?’ 하고.
화면 전환의 호흡도 빨라져서, 처음 볼 때 ‘MTV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각양각색의 쇼트가 빠르게 전환되고, 그 잔상들이 쌓이고 쌓여 특정한 감흥을 선사하는 영상. 편집 과정에서 걱정되는 순간은 없었나?
안 그래도 민혜경 작가가 이번에 그런 피드백을 많이 줬다. 밀도가 너무 높아서 보기가 힘들다고. 그래서 계속 덜어낸 게 지금의 결과물이다. 사실 나는 매 다큐멘터리마다 ‘이번이 마지막 작업일 거다’라는 생각으로 임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려는 부분도 있고.
국장이 직접 ‘누벨바그 영화처럼 만들어보라’고 격려할 정도면 이제 그런 위태로운 입지는 벗어난 것 아닌가? KBS 스포츠 유튜브 채널도 ‘믿고 보는 태웅PD’라는 꼭지를 쓰고 있는데.
그래도 작업할 때는 늘 ‘이런 걸 내놓으면 다음에 또 하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웃음) 물론 예전에 비해 사내에서의 설득 과정이 줄어든 것 같기는 하다. 얘가 이 주제로 만들면 이렇게 만들겠구나, 여태까지의 결과물에서 예상할 수 있으니까.
88/18〉과 〈모던코리아〉는 KBS의 방대한 자료를 활용한 푸티지 다큐멘터리(자료 화면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 작업 과정을 설명해달라.
일단 아카이브에서 주제와 관련 있는 영상을 모두 분류한다. 하나하나 시청하고 엑셀 파일에 정리한다. 파일 번호랑,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어떤 부분이 인상적이었는지. 이걸 출력해 표시하면서 편집을 어떻게 할지 구상하고, 그걸 바탕으로 개략적인 영상을 만든다. 여기까지는 혼자서 한다. 20시간 정도 분량으로 추려지면 그때부터 제작진과 공유하고 함께 작업한다. 민혜경 작가, 김기조 디자이너, DJ 소울스케이프에게 보내는 시점도 이때다.
아카이브 분류 작업이 언뜻 보기에도 굉장한 ‘노가다’인데, 말한 것처럼 남에게 맡길 수가 없겠다. 특히나 이태웅 PD는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영상도 미장센 격으로 섞어버리니까.
맞다. 누군가에게 맡기더라도 성에 안 찰 거다. 내가 영상을 일일이 확인하고 내 안에 갖고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니까. 아무튼 추린 영상을 공유한 후에는 민혜경 작가와 미친 듯이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매일 조금씩 편집하고 그걸 바탕으로 의견을 교류하는 거다. ‘이거 별로다’, ‘이거랑 저거랑 바꾸면 어떠냐’ 등등 뭐 매일 숙제 검사받는 기분이다. 가끔은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웃음) 아무튼 나는 굉장히 드라이한 스타일인 반면 민혜경 작가는 촉촉하고 정이 많은 스타일이다. 서로 상쇄되면서 중간 지점을 찾게 되는 부분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면 너무 건조하고 정서적으로도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을 거다.

 
〈모던 코리아〉 1부 ‘우리의 소원은’. 연출 이태웅, 구성 민혜경, 미술 김기조, 음악 박민준(DJ 소울스케이프).
〈모던 코리아〉 1부 ‘우리의 소원은’. 연출 이태웅, 구성 민혜경, 미술 김기조, 음악 박민준(DJ 소울스케이프).
〈모던 코리아〉 1부 ‘우리의 소원은’. 연출 이태웅, 구성 민혜경, 미술 김기조, 음악 박민준(DJ 소울스케이프).
‘우리의 소원은’에서는 어떤 부분이었을까? 두 사람의 중간 지점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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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학생운동 세대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달랐다. 내 경우에는 사실 ‘저 사람들 대체 왜 저러는 건가' 하는 게 이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이었으니까. 바로 여기(남대문)였다. 88올림픽을 앞두고 학생들이 남북 공동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고 시위를 하는데, 정말 엉엉 울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거다. 나랑은 10학번 정도밖에 차이 안 나는 분들이. 내가 그분들에게서 거리를 두고 차갑게 보는 편이었다면, 민혜경 작가는 좀 더 따뜻하게 바라봤다고 생각한다.
88/18〉도 중립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에서 모두 다뤘으니까.
그걸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광주 5·18을 다루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그 사건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넘어가고자 했다. 그런데 민혜경 작가는 쉽게 표현해서 ‘전두환 X새끼’를 외치는 장치가 하나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허화평 씨도 나오는데 그렇게 해야 (균형이) 맞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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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실세였던 허화평 씨가 인터뷰이로 나오는 게 내부에서도 이슈이긴 했나 보다.
팀장, 부장 모두 다 우려했다. 재미는 있는데, 그가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느냐고.
허화평 씨 측에서 제기한 불만은 없었나? 결과물에 대해.
없었다. 방송이 나가고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때 그러더라. PD, 보니까 편집하는 데 고민 많이 했대?” 그게 좀 의미심장한 말이긴 했는데.(웃음) 아무튼 이 다큐멘터리가 관점에 따라서 까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애매하지 않나. 민혜경 작가와 주고받고 티격태격하는 과정이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의 결과물에 반영되는 것 같다.
에미상 수상 다큐멘터리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 제작진이 이런 말을 했다. “그 엽기적 역사의 핵심 인물인 쉴라를 어떻게 인터뷰이로 섭외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사실 그녀는 단번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응했다”고. 허화평 씨가 나오는 걸 보면서 그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허화평 씨는 처음엔 안 한다고 했다. 소속이 KBS라고 하니까 단번에 거절한 거다. 그래서 한번 찾아갔다. 사실 별다른 설득은 안 했다. 그냥 한 4시간 동안 허화평 씨가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그럼 합시다’ 하더라.(웃음) 누구나 자기 이야기 들어주는 건 좋아하지 않나. 나이 들면 더 그런 것 같고. 내가 이야기 듣는 건 잘하는 것 같다. 민혜경 작가도 늘 나더러 그렇게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잘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고.
인터뷰 스킬이 굉장히 뛰어난가 보다 생각했다. 인터뷰이들에게서 감정적 순간을 굉장히 잘 끌어내니까.
나는 무작정 듣는다. 그리고 절대 중간에 말을 끊지 않는다. 내가 끌어내기를 원하는 부분이 따로 있어도, 이 사람의 이야기가 질문과는 다른 길로 새도, 끝까지 기다린다.
인터뷰이의 면면이 좋은 걸로도 늘 호평받는데.
뭐…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인터뷰는 무조건 최대한 많이 하려는 쪽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리고 인터뷰를 해놓고도 못 싣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우리의 소원은’ 때는 5시간 인터뷰해놓고 한 장면도 못 쓴 인터뷰이도 있었다. 맥락상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섭외에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인가?
아니다. 딱히 무리하지는 않는다. 두세 번 청해서 안 된다고 하면 포기한다. 없어도 어떻게든 되더라고.(웃음) 왜 〈천하장사 만만세〉에도 그 시대의 주역인 강호동 씨가 안 나오지 않나.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가 당시의 사정상 무산됐던 건데.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본인이 직접 나오는 것보다 주변 인물들의 입에서 듣는 게 더 힘이 생기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고.
레터링과 디자인을 맡은 김기조, 음악을 맡은 DJ 소울스케이프에게까지 20시간 분량의 가공되지 않은 축약본을 보내는 이유는 뭘까?
전체적인 톤 앤 매너를 공유하는 거다. ‘이번에는 이런 화면을 많이 쓰게 될 거다’ 하고. 미리 보내면 화면 속의 자막이나 음악을 참고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본격적인 교류는 편집이 들어간 이후의 일이다. 민혜경 작가와는 5분 분량 단위로 교류를 한다면, 두 사람과는 15분 정도 분량을 만들 때마다 보낸다. 느낌 한번 보라고.
둘 모두 첫 장편부터 쭉 함께 작업했다. 이제는 디렉션도 거의 안 한다고 들었다.
맞다. 처음에는 어떤 타이밍에 뭐가 들어갔으면 좋겠는지 주문하고, 미리 음악을 받아서 들으며 맞춰서 작업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각자의 재량에 많이 맡긴다. 그냥 내가 그림 만들어서 보내주고, 작업하고, 마지막에 같이 앉아서 쭉 훑는 정도다.
서로의 중간 작업에서 영감을 받는 측면도 종종 있겠다.
김기조 디자이너의 샘플링을 받을 때가 특히 그렇다. 아무래도 음악보다 레터링이 눈에 바로 보이니까. 팀원들끼리 감탄하는 경우가 많다. 삽입 위치까지 모두 김기조 씨의 재량에 맡기는데, 예고편에서 로고가 정중앙에 박혀 있는 걸 보더니 ‘살짝 왼쪽으로 옮기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 정도로 세심하다.
있는 자료를 갖고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게 언뜻 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런 스타일로 만들기는 굉장히 어려울 테다. 영상과 영상을 붙일 때 그게 시청자에게 어떤 감정적 소요를 일으킬지 레벨 컨트롤을 생각해야 되고. 그런데 작업자는 같은 영상을 계속 보다 보니 개별 영상의 영향력에 무감각해지기도 할 테고.
그걸 확인하는 게 내가 민혜경 작가에게 요구하는 역할이다. 더 천천히 가야 할 것 같다든지, 힘이 빠지는 것 같으니 좀 더 빨리 가야 할 것 같다든지. 그런 피드백 측면에서는 민혜경 작가의 의견을 많이 존중한다. 그 외에 인터뷰이 섭외도 민혜경 작가가 많이 한다. 인터뷰해놓고 못 쓰게 되는 경우에 사과 연락도 민혜경 작가가 해주고.(웃음)

 
이태웅 PD의 필모그래피 

〈천하장사 만만세〉(2011).
〈공간과 압박〉(2012).
〈태극전사의 탄생〉(2013).
〈김연아, 챔피언〉(공동 연출, 2014).
〈숫자의 게임〉(2016).
88/18(2018).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영안실의 시체가 벌떡 일어나고, 자명종이 울리면 최재성 배우가 그 악몽에서 깨어나는 장면. 좀 수준 낮은 질문일 수 있겠는데, 해당 요소에 대한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
뭔가가 깨어나는, 세계관이 바뀌는 순간마다 그 장면을 넣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신입생들이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될 때라든지,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시작될 때라든지. 사실 원래는 초반에 한 번만 넣으려고 했는데 편집하다 보니 반복적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반복이 좋았다. 전위적인 느낌도 나고.
그러니까. 뒷부분이 잘 안 풀려서 넣어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괜찮아서 ‘아, 그냥 몇 번 더 써도 되겠다’ 싶었던 거다.(웃음)
편집에 깃든 특유의 위트도 이태웅 PD의 특징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다. 좀 창피한 얘기지만, 사실 나는 푸티지 다큐멘터리의 걸작으로 꼽히는 〈논픽션 다이어리〉를 보면서도 졸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그 영화가 화제가 됐을 때 극장에 가서 봤다. 동기이자 〈모던 코리아〉 책임PD인 염지선 팀장이랑. 그런데 둘 다 잤다.(웃음)
그럴 수도 있지. 왜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그랬잖은가. ‘영화를 보다 잠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감의 단계’라고.(웃음)
영화관을 나오면서 염지선 팀장이랑 그런 얘기를 했다. “아, 아트는 뭔가 좀 다르구나.(웃음) 나는 작업할 때 늘 보는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루하지 않게’도 그 요소 중 하나다. 일단은 나부터가 영상을 보다가 돌리게 되는 시점이 꼭 지루할 때라서. 위트도 위트지만 리듬의 문제인 것 같다.
이태웅 PD의 다큐멘터리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일단은 내레이션이 없으니까.
영화처럼 장면 장면만을 보여줘서 이야기가 되는 것, 나는 그게 제일 좋은 것 같다. 두 번째 선택지가 인터뷰다. 인물의 말을 통해 설명해야 하는 부분을 채우는 거다. 내레이션은 마지막 선택지다. 어떻게 해봐도 의미 전달이 안 될 것 같을 때만 사용한다.
말이 없으니 이미지 언어가 더 풍부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태웅 PD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꼭 계속 곱씹게 되는 장면이 생긴다. 예를 들어 〈숫자의 게임〉을 보고 나면 점수를 계산하러 과녁으로 걸어가는 선수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부감 샷이 계속 떠오른다든가….
맞다. 만약 그런 장면에서 내레이션으로 ‘밀어’버렸다면 장면이 평평해졌을 거다. 설명이 없으면 시청자 각자가 ‘저게 뭐지’ 하고 마음속에서 이미지를 빌드업하게 되니까. 그게 TV라는 영상 매체에 좀 더 맞는 전달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태웅 스타일’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덜컥 탄생한 게 아니다. 초기작에서부터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다거나, 스포츠 다큐멘터리에서 정치, 사회적 상황을 짚는다거나, 오프닝 시퀀스를 푸티지 콜라주로 만든다거나.
나는 미국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다. 스포츠와 정치, 사회적 이슈를 연결 짓는 건 그런 걸 보면서 영감을 얻은 부분이다. ‘얘네들은 스포츠 이야기만 하지 않고 그 일이 나오게 된 사회적 분위기, 정치적 사건까지도 연결하는구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천하장사 만만세〉를 만들 때부터 의식적으로 그 부분을 신경 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스포츠는 당의정(표면에 설탕 코팅을 입힌 알약)이고 그 안에서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를 바랐달까. 매 작품을 할 때마다 그런 마음이었다. 점점 스포츠의 비중이 줄어들고 다른 부분이 늘어났을 뿐이지.(웃음)
그런 행보는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관심사의 확장일까, 이동일까?
, 둘 다 맞는 표현 같다. 아까 말했듯이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예전 같지 않고,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기도 했고. 사실 스포츠국에 계속 있는 게 맞는지, 교양국으로 옮겨야 하는지 요즘 나도 그게 헷갈린다. 내 연차면 슬슬 팀장이 되는데, 일반적인 스포츠 프로그램 PD와는 다른 일을 많이 해온 내가 스포츠국에서 팀장을 맡는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하고. 사실 스포츠국의 가장 주된 업무는 스포츠 중계인데 나는 그 부분을 어느 정도 외면한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덜컥 옮기자니 당장 내년이 올림픽인데 스포츠국에 일손이 부족할 테고.
당신의 가장 큰 직업 윤리는 뭘까?
‘저 사람의 의도를 왜곡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 때문에 이 사람의 말을 왜곡하는 걸 가장 피하려고 한다. 살짝만 편집해도 같은 말이 굉장히 다르게 들리니까. 예를 들면 〈88/18〉에서 허화평 씨가 1987년도 시위 당시에 계엄령을 선포해 시위를 진압하는 건 전혀 선택지에 없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코멘트를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굉장히 오래 고민했다. 논란이 될 수 있는 주장이니까. 결국 그 부분을 넣기로 한 건, 물론 그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보는 사람이 판단하지 않겠는가 한 거다.
중립성에 대한 집착도 있는 것 같다.
중립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기보다 내 성향 자체가 그런 것 같다. 내레이션이 없는 것과도 연결되는 부분인데, ‘이 부분에서 이렇게 느끼면 됩니다’ 식으로 정리하는 게 싫은 거다. 어쩌면 나부터도 그들에 대한 입장이 서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박정희든, 5공이든, 주사파든 말이다. 5공화국은 이런 공도 있구나’, ‘하지만 저들은 광주에서 사람들을 죽였구나’. ‘우리의 소원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다 다를 테다. ‘거봐라, 저 사람들 빨갱이 맞잖아’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 저 시대에는 저게 당연한 이야기였겠구나, 나도 저 세대였다면 저런 생각을 했겠구나’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냥 이런 상황이었다는 걸 말하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사람들이 나왔다는 걸. 프로그램이 가치 판단을 해주기보다는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서 공유만 해줘도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중립적인 입장을 택해야겠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시청자의 관점에 따라 편향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KBS 홈페이지의 ‘우리의 소원은’ 영상에 달린 유일한 댓글은 박근혜 씨가 나온 토크쇼 장면을 삽입한 게 정치적이라는 비난이다.(편집자 주- ‘우리의 소원은’의 마지막 장면은 MC가 ‘정치할 거냐’고 재차 묻자 중언부언하던 박근혜 씨가 ‘할 생각이 없다’고 답하는 영상이다.)
1980
년대 말에 여러 억압이 풀리는 분위기 속에서 5공화국 시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박근혜와 박정희라는 존재도 돌아왔다. 그 사실까지만 보여주려는 게 내 의도였다.
아까 얘기한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악몽 장면이 그 뒤에 한 번 더 나온다. 다만 이번에는 자명종이 울리지만 최재성 배우가 깨어나지 못한 채 끝난다.
, 그 부분이 내 주관이 좀 들어간 부분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때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뭐랄까, 일종의 의심을 표현한 것 같다.
출발점은 호기심이었다고 해도 이런 영상을 보며 작업하다 보면 일종의 사명감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을 테다. 사명감이라는 표현이 너무 거창하다면 ‘역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맞다. 작업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을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 정리한 바는 이렇다. 나는 스포츠국 PD니까 올림픽이 열리면 중계를 하지 않나. 개막식 때 보면 SNS에 별의별 이야기가 다 올라온다.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고 욕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튼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경험이 되는 거다. 공공의 공유된 경험.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스토리로 제시한다면 그게 KBS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나이가 적든 많든, 정치적 성향이 좌든 우든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작업하다 보면 교과서를 집필하는 듯한 느낌도 드는 것 같다.
거창해지는 걸 피하는 성격 같은데 ‘KBS의 역할’이라는 표현은 자주 쓴다.
맞다. 가끔 아쉬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한국사에 의미 있는 분이 타계하거나 하면 그 사람에 대한 뭔가가 좀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KBS에서도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질 않더라. 그럴 때 제일 아쉽다.
섣부른 말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교양국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웃음) 지금 논해야 할 인물과 시대와 그 부재가 있다는, 그 의식만 보자면 말이다.
하하하. 아무튼 아까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KBS가 관련 자료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는데, 그걸 그냥 썩혀두고 있으면 안 되지 않을까.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뭔가를 제시하면 좋겠다. ‘같이 봅시다’ 하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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