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9

4.19 혁명 60주년과 한국 기독교(옥성득)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4.19 혁명 60주년과 한국 기독교(옥성득)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20년 4월 18일

좋은나무



4.19가 혁명이 되려면 한국 사회 돌담 구석까지, 교회와 가정의 예배까지 정의와 민주,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스며들어야 한다.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사람은 다양하다. 다양한 욕구가 하나로 만날 때 혁명은 일어난다. 교회는 사람들의 행복과 구원의 욕구를 하나로 이끄는 혁명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피 흘림, 땀 흘림, 눈물 흘림 없는 조용한 혁명은 없다. 4.19를 맞는 한국 교회는 따뜻한 봄과 같은 혁명과 교회 혁신에 목말라 있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이승만 정부의 불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대항해 자유와 정의, 진리를 부르짖는 의거였던 4.19혁명.


4월은 잔인한 달이지만 또한 부활의 달이다. 4.3(제주, 1948년)을 지나 4.19(1960년)가 있고 벌써 6주년이 되는 4.16(세월호, 2014년)도 있다. 그러나 별다른 기념식 없이 60주년을 맞이하는 4.19를 돌아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큰 감흥이 없다. 60주년이 된 지금 사건 당사자인 4.19 세대가 퇴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 세대 전의 4.19가 오늘의 COVID-19에 가려 퇴색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비극과 재난이 넘치는 사회에서 망각은 치료제가 아니라 임시방편의 마약이다. 이 글은 4.19를 소환하여 소위 기독교 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해 간단히 평가하고, 4.19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혁명의 서사가 넘치는 사회

한국사는 혁명으로 넘쳐난다. 동학(1894)도 혁명, 4.19(1960)도 혁명, 5.16(1961)도 혁명, 촛불(2017)도 혁명이 되었다. 1961년 체신부는 4.19 제1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하면서 “4월 혁명 1주년”이라고 바로 규정했다. 이승만과 대결했던 장면 정권의 역사적 평가였다.




4월 혁명 제1주년 기념우표, 1961. 4. 19



그러나 한 달 후,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자 박 정권은 동학을 혁명으로 만들고, 그것을 계승하는 것이 5.16 혁명이라고 강변했다.1) 정권을 잡은 자는 역사를 새로 쓴다. 근현대 한국사는 정부의 역사요, 교과서의 역사요, 승자의 역사가 되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배운 4.19는 4월 혁명이 아니라 ‘학생 의거’였다. 그래서였는지 이후 민주화 운동에서 학생(운동권)의 역할이 증가했다. 1987년 민주화로 1992년에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자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혁명으로 높이기 위해서 4.19가 다시 혁명이 되었다. 촛불 혁명이 일어나고 2019년 3.1절 100주년이 되자 3.1 독립 운동을 3.1 혁명으로 불렀다. 그 결과 동학 혁명-3.1 혁명-4.19 혁명-촛불 혁명의 새 계보가 만들어졌다. 혁명이 많은 사회, 족보를 파고 새로 쓰는 사회는 그만큼 불안정하다. 산업화 세대를 부정하는 민주화 세대, 민주화 세대를 부정하는 디지털 세대, 그런 식의 역사 단절의 노력은 자신도 모르게 적폐를 이어가고, 과거를 부정한 결과로 미래도 불투명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

이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글들은 그가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경제적 시장 자본주의, 이념적 친미 반공주의, 종교적 기독교 건국론의 네 가지 원리를 대한민국의 초석으로 놓았기 때문에 이후 민주 번영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여기에 일방적 친미가 아닌 반공 포로 석방에 이어 한미 군사 동맹을 맺어 국가 안보를 확고히 한 점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국부로 칭송한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거나 혐오하는 측은 제주 4.3 사건 처리나 보도연맹 사건국민방위군 사건 등에서 무고한 시민 학살, 6.25 전쟁 대비 부실, 한강 폭파 이전 도피, 여러 불법적 개헌과 부정 선거로 사임한 것 등을 열거한다. 초대 대통령이었기에 공과가 많고 섞여 있다. 따라서 이 짧은 글로 다 기술하기 어렵고 나의 공부도 그리 깊지 못하다.



1919년 3.1 혁명 반제국주의 독립 투쟁에서, 1948년 정부 수립 반공산주의 건국 투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처음 맞이한 1949년 3월 삼일절 30주년에서, 비록 건국은 1948년이지만 1919년에 이미 그 탄생을 선언하였으며, 30년간 그 독립(건국)을 위해 투쟁한 결과로 쟁취한 것이므로, 마음속에 이미 1919년에 건국하였다고 정리했다. 곧 선언적 독립은 1919년에, 실제적 건국은 1948년이라고 주장했다.2) 그는 3.1 운동을 ‘무저항 혁명’으로 규정했으며, ‘임정법통론’을 주장하고 ‘3.1 정신’을 계승한 것이 대한민국이라고 하여 북한에 대한 정통성도 확보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연합국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곧 3.1 운동과 이후 독립 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역사 인식이었다. 다른 나라 헌법과 달리 신생 대한민국의 제헌헌법 전문(前文)은 3.1 혁명과 그 정신 계승을 밝히고 있다. 제헌국회 의장이었던 이승만이 노력한 결과였다. 그에게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리 잡을 곳이 없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1948년을 “민국 29년”으로 표기한 <관보> 등을 내세워 1919년을 건국 원년으로 보지만, 어떤 사안을 볼 때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해야지 한두 자료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민국 29년”이라는 문구나 연호는 이승만이 1919년 한성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실에 근거한 이승만의 대통령직 당선의 정통성을 강화시켜 주는 기제였다.3)

​나아가 1949년 삼일절 기념사에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 독재주의의 대결 구도를 강조한다. 냉전 구조 속에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에서부터 생존하는 길은 공산당과 좌익분자를 타도하는 길이므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단결과 국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단결과 투쟁을 촉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대한민국을 자유 민주 국가로 만드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천명했다.

​결국 이승만은 3.1 정신이 민중이 대동단결하여 반제국주의 독립 투쟁에서 반공산주의 건국 투쟁으로 진전되어 왔다고 보고, 건국 직후 냉전의 혼란 속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 반공 반좌익 투쟁을 강조했다.


나는 다시 선언(宣言)하노니 왼 세상이 다 적색화(赤色化)하고 왼 세계가 다 합(合)해서 우리를 공산화(共産化)하려 할지라도, 우리는 죽음으로써 항쟁(抗爭)하여 우리나라는 우리의 것이요 우리 일은 우리가 해 간다는 굳은 결심(決心)으로 최후(最後)의 일인(一人)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나라와 민족(民族)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 해 테러가 300건 이상 횡행하고,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 등이 있었던 1948년을 지난 후의 삼일절이었다. 독립은 건국이요 완전한 독립은 통일로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끝까지 반공 북진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6.25 전쟁 중에도, 반공 포로 석방에서도, 한미 군사 동맹 조약 체결도, 냉전 체제 하에서 반공의 보루 의식도 모두 그의 통일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승만의 일생은 반제국주의 독립 투쟁이 반공 건국 투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적절한 초대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 정권이고, 그 정권의 실패가 기독교 정권의 실패였던가?

1960년에 대학교를 다녔던 4.19 세대 중 일부는 기독교 정권이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그 말은 반성적 차원에서 한 말이지 엄정한 역사적 평가는 아니다. 왜 이승만 정권이 기독교 정권인가? 지난 10년 넘게 이승만 기독교 입국론이 보수 기독교인들 가운데 유행해 왔다. 그러나 근거가 약하다. 4.19 세대인 이만열 교수는 1980년대에 밝힌 기독교 정권론을 수정하여, 2016년에 다음과 같이 유보적으로 말했다.


그동안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았다. 그가 집권했을 때, 전기가 간행되고 동상이 세워지고 화폐의 화상으로 등장했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4.19 이후에는 독재자로 배척, 평가되었다.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진영 논리에 영향을 받으면서 첨예한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승만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더구나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역사적인 접근법으로 그의 행적을 살피면서 그를 평가하는 수밖에 없다. 그를 국부로 평가할 수 있는가의 여부도 이런 역사적 평가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 역사를 어떻게 객관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 왜 이승만 정권을 기독교 정권이라고 보는가? 첫째, 기독교인 대통령, 부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다수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 대통령, 전도사 대통령, 집사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많아도 기독교 원리와 가치가 구현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기독교 정당이 나와서 정권욕에 불타는 인사들이 국회의원이 되면 기독교 국가가 되는가?

둘째, 이승만이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1948년 정동제일교회 귀국 환영회에서, 이후 여러 차례 국회 연설 등에서 기독교 국가론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꿈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로만 하는 수사법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국민의 정치 수준이 너무 올라갔다. 기독교 정권이 헌법을 어기고, 부정 선거를 하고, 사사오입을 하는가?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수백만 겨레를 죽음으로 몰았는가? 기독교 정권이 부정부패로 망하는가? 말로 하면 무엇을 못하랴! 전두환 대통령도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겠다’고 수사법을 구사했다. 말잔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기독교 국가가 무엇인지 구체적 과정을 기술하고 하나하나 실천해야 한다. 교회다운 교회나 기독교 대학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해 갈팡질팡하면서 어찌 정권을 창출하며 어찌 기독교 국가를 세우겠는가? 말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면 그동안 대한민국 백 개는 세웠을 것이다. 한기총이 기독교 입국론을 독점하고 말잔치하게 할 수 없다.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입국론의 청사진을 제대로 그릴 때이다.

셋째, 개신교에 군목(軍牧), 형목(刑牧), 경목(警牧) 제도를 허용하고,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설립을 허가하는 등 제도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기독교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에 특혜를 주고 교회를 정권의 시녀로 만드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개신 교회는 미군정 때 선교사 고문(顧問) 정치와 목사들의 통역(通譯) 정치로 정치적 힘을 얻고, 월남한 약 7만 명의 기독교인들은 일제 적산(敵産)을 불하받아 교회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 이후 10년간 설립된 2,000개 교회 중 90% 이상이 월남한 피난민이 세웠으며, 그중 다수가 적산을 받아서 설립했다. 대한민국 수립에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개신교는 군목, 형목(형무소 목사는 처음에는 공무원), 경목 제도, 반공 이념의 혜택을 차례로 입으면서 교세가 급성장하고 목사들이 정치적 힘을 가졌다. 교회는 국기에 대해 90도로 절하는 최경례(最敬禮) 대신 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보는 국기 주목례(注目禮)를 요구했고, 이를 들어준 정부를 적극 지지했다. 1952년 정⸳부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을 조직적으로 지원한 교회와 KNCC는 1954년에 기독교방송, 1956년에 극동방송 설립을 허락받았다. 1956년 선거를 지지한 것은 당연했다. Give and take. 혜택을 받고 여당에 표를 주었다. 정교분리가 아닌 정교유착의 길을 걸었다. 기독교 정권이 아니라 타락한 교회를 이용한 정권이었다.


1952년 여름 부산에서 반자유민주주의로

이승만은 전쟁 중이던 1952년 6월, 부산에서 ‘국민의 뜻’이라면서 ‘반이승만 국회’를 공산주의자들의 뇌물을 받아 친북주의자가 된 국회의원들이 할거하는 ‘공산주의 음모’의 장이라고 주장했고, 경찰이 11명의 국회의원을 체포⸳투옥했다. 국회의원 183명 중 반이승만파 131명은 120명으로 줄었고, 2/3가 되지 못해 반이승만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이범석 내무장관을 통해 경찰력으로 ‘무능한’ 국회를 해산했다. 계엄령 속에서 수정된 헌법으로 8월 5일 치러진 직접 선거에서 이승만은 조봉암을 6.5대 1로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국민의 불안을 이용한 빨갱이 색깔론 음모론이 한국 정치에 활용된 경우였다. 뇌물이나 음모는 근거가 없었다.

전쟁의 와중에 한국 민주주의의 두 자녀인 국회와 대통령이 정반대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 씨앗은 급조된 1948년 첫 헌법에 뿌려져 있었다. 과도기에 단원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간접 선거)하도록 했으나, 이후 수정하여 양원제와 대통령 직접 선거제로 간다는 이해가 있었다.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했으나 사회주의가 혼합된 형태였다. 여러 분야가 타협된 형태로 헌법이 작성되었기에 헌법 수정 과정에서 충돌은 예견되었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 협정은 영구적 남북 분단 고착화와 북한의 지속적 위협을 예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영도하에 북진 통일을 원했고, 강력한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욕심이었다. 그 결과 국회와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1952년 일방적 헌법 수정과 대통령 당선은 이승만의 구상대로 되었다. 이승만은 해방, 정부 수립에 이어 대통령 직접 선거라는 “제2의 혁명”이 있어야 건국(독립, 국가 통일)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는 자는 이승만 혼자였고, 그 결과 1952년 8월의 대통령 선거는 “1인 혁명”에 머물렀고,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경제는 어떠했나? 전쟁 발발 후 2년간 UN이 지원한 5억 불(미국이 4억 9천5백만 불 지원) 이상의 지원비로 한국인들은 생존했다. 미국 달러로 고아와 과부들이 살았다. 한편 달러화와 원화는 1대 6,000원이 공식 환율이었으나, 사업장에서는 1대 9,000원으로 거래되었고, 군인과 창녀들이 이용된 암달러 시장에서는 1대 15,000원이었다. 60% 남는 장사를 하는 모리배 정치꾼과 사업자들이 전염병처럼 창궐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교회가 달러를 쉽게 보낼 수 있도록 정부로부터 “미국弗 계정 이체” 자유 거래를 허락받았다. 따라서 영어를 잘해서 달러를 가져오는 목사들이 교계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휴전이 되기 전에 이미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는 부패로 무너지고 있었다. 식민지 유산의 폐해에 전쟁의 상흔이 더해지면서, 신생 대한민국호는 선장과 선원들이 각자도생으로 가면서 암초 가득한 대해에서 방향을 잃었다.




1960년 2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당선 기도회에 참석한 교계 지도자들.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는 명백한 부정 선거였으며 교회가 정권의 시녀가 된 경우였다. 이승만 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민주주의의 핵심 과정인 선거를 부정으로 타락시키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이로써 1952년 후반부터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승만은 미국 정가의 반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후 8년간 이승만 정권은 점점 더 반민주, 반시장경제, 반기독교적 가치의 정권으로 타락해 갔다.


4.19 혁명의 기독교적 의미

개신교는 친미 반공 노선으로 정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4.19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소수의 개신교인이 4.19에 참여한 성서적 근거는 무엇이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 4.19 이후 교회 방향에 대한 김재준 목사의 글을 정리하려고 한다. 이후 여러 교회사가들이 서술하는 평가를 정리하고, 오늘 4.19가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자.



4.19 의거 참여 성서적 근거: 사도행전 4장 19절

1901년 고종의 대한제국 후기와 일제 강점기(1910~1945년)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까지 집권자와 소위 보수적인 선교사와 목사들은 한결같이 로마서 13장 1-7절을 내세워 불의한 정권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니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그 구절과 함께 오용한 구절은 딤전 2:1-2, 벧후 2;13-17, 마태 17:24-27, 요한 18:36 등이었다. 곧 권력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세금도 잘 내라는 말만 뽑아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보다는 ‘신민’이나 ‘국민’으로서 정부에 복종할 의무만 강조했다. 특히 요한 18장 36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를 차단했다.

그러나 마침내 1960년 4.19 때 한국교회는 사도행전 4장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당국자/종교 지도자]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불의한 정권과 지도자에 항거했다. 교회가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어린 청년들의 값진 희생의 피가 뿌려져 결국 한국 민주주의가 꽃피었다.

로마서 13장은 ‘복종’이라고 쓰였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책임적 참여함’으로 읽어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하는 모든 일, 곧 정치까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세상 정권이 선할 때 기독교인은 로마서 13장의 말씀대로 시민의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불의할 때는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용과 짐승의 정권으로 알고 대항해야 한다. 이처럼 때를 분별하는 것이 역사의식이다.



4.19 이후 한국교회는 어디로

4.19 의거 1주년 때 김재준은 “4.19 이후의 한국교회”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4) 그는 4.19의 성격을 정치적 혁명이 아닌 정신적 의거로 보았다. 의거의 성서적 근거는 계시록 13장, 마태 22;21, 행 4:19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올바른 정교분리를 실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성역을 침범하는 불의한 정권에 대해서는 항거해야 한다. 4.19 이후 교회는 구체적인 사회 참여로 1) 절량농가(양식이 떨어진 농가-편집자 주) 구호 운동, 2) 국민 생활 재건 운동을 했다. 4.19 이후 교회 개혁 운동 방향은 1) 교회 본성 회복 운동, 2) 에큐메니칼 운동, 3) 지나친 반공 운동을 지양한 통일 운동이다. 교회는 정권 쟁취나 무비판적 지지 등에 눈멀지 말고, 항구적인 야당으로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의의 병기로 남을 각오를 하고 교회 본성 회복에 정진해야 한다.



교회사가들의 정리

1980년 이전에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한 교회사 책은

  • 클라크의 『한국교회사』(1961, 개정증보판 1973), 
  • 장희근의 『한국장로교회사』(1970), 
  • 민경배의 『한국의 기독교교회사』(1968)와 
  • 『한국기독교회사』(1972), 
  • 이영헌의 『한국기독교사』(1978), 
  • 채기은의 『한국기독교회사』 등이었다. 


클라크, 장희근, 이영헌, 채기은 등은 4.19나 정치적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는지 교회 분열과 신학의 발전과 해외 선교만 서술했다. 이런 경향은 1992년에 나온 김영재의 『한국교회사』에도 계속되었다.

민경배는 1968년 문고판 통사 마지막 장 “한국교회의 새 기상도”에서 “1960년의 소위 부정 선거에 대한 교회의 시대착오적인 판단이었다. 그때 한국의 교회는 이승만의 자유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과실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제도나 정치 생활에 대한 교회의 관계의 단층이 훤히 드러나면서 교회는 4.19의 학생 의거에서 심각한 반동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라고 서술했다. 교회가 피안성에 머물지 않고 사람이 사는 에큐메네(세상-편집자 주)에 있으므로 현실 세계에 참여해야 한다고 지적한 후, 그 전략으로 교회 일치를 요청했다. 이어서 신신학을 수용한 여러 신학 운동이 전개되었고, 1965년 한일협정을 반대하면서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으나, 1968년 월남전 참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지지했고, WCC 대회에서도 한국 정부측 입장을 변호했다고 서술했다. 당시는 토착화 신학은 전개되고 있었으나, 아직 정치 신학은 태동하지 않던 시점이었다. 민경배는 주저 『한국기독교회사』(1972, 1982)에서도 동일하게 서술하고, 교회 분열에 대처하는 교회 일치를 강조했다. 다만 1966년에 작사된 김재준의 찬송 “어둔 밤 마음에 잠겨”를 인용하면서 역사 참여 신앙을 강조했다.

이만열은 『한국기독교회 100년사』(1985)에서 해방 이후 역사는 간단히 다루면서, 해방 이후 교회 정화가 실패한 이유가 “60년 4.19에 의해 무너진 기독교적 정권의 성격과도 깊이 관련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을 “그 핵심 세력의 종교적 성분을 놓고 볼 때 기독교적 정권이었다”라고 보았다. 그 정권이 친일 관료, 군인, 경찰, 재계 실력자를 재등용하고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하면서, 정절, 지조가 무가치하게 되고 변신 행위를 현명한 일로 보는 사회 풍조가 조장되었다. 교회에서도 신사 참배자들이 지도자가 되고 교회 정화와 개혁은 실패했고, 그 결과 교단 분열이 뒤따랐다고 서술했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인이 급증한 100주년 시점에 정의, 자유, 평등의 가치는 확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90년대 이후 서술은 생략한다. 한국 사회가 급변하던 1960-85년에 나온 교회사 책들은 이승만 박정희 시대 한국의 정치와 교회 문제에 대해 거의 침묵했다. 정치 참여 신학은 거의 전무했다. 그 결과 김재준과 그의 후배들에 의해 민중신학이 나왔으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대다수 주류 교회의 정당한 반응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1980년 8월 한경직·정진경·김준곤 목사 등 보수 개신교 지도그룹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당시)을 서울 시내 유명 호텔로 불러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고 그를 축복했다.



오늘의 의미

혁명은 봄처럼 조용히, 그러나 고통스럽게 온다. 혁명은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인터넷 혁명이 가상 성찬식까지 가능하게 하고 있다. 4.19가 혁명이 되려면 한국 사회 돌담 구석까지, 교회와 가정의 예배까지 정의와 민주,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스며들어야 한다.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사람은 다양하다. 다양한 욕구가 하나로 만날 때 혁명은 일어난다. 교회는 사람들의 행복과 구원의 욕구를 하나로 이끄는 혁명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피 흘림, 땀 흘림, 눈물 흘림 없는 조용한 혁명은 없다. 4.19를 맞는 한국 교회는 따뜻한 봄과 같은 혁명과 교회 혁신에 목말라 있다.

지난 10년 이상 이승만 죽이기와 이승만 미화 작업, 두 트랙이 평행선을 그리며 달려왔다. 지나친 미화도, 지나친 왜곡 비판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사람 죽이기나 사람 신격화는 그만 하자. 20대의 이승만, 30대의 이승만은 약점도 있지만 한 명의 민족주의자로 성장하는 다양한 모습이 있었다. 동시에 보수 측 교회는 기독교인인 김구도 포용할 때이다. 교회는 이승만과 김구, 두 인물을 품고 민족과 국가가 나아갈 다양한 진로를 모색할 때이다. 김구나 이승만은 감리교인이었다. 장로교회는 국가 지도자나 좋은 기독교인 정치가를 기르지 못한 점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극보수주의라는 자기 격리와 무신학적 무이념적 정권 비판의 구시대적 누에고치에서 벗어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날개를 달고 넓은 들판 큰길로 나올 때이다.

주기철은 1930년대 중반 나치즘에 의해 독일 교회가 정권의 시녀가 되는 것을 <기독신보>를 통해 읽었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예언자적 신앙을 우익으로, 민주주의 가치를 파괴하고 자유와 생명을 말살하는 파시즘 제국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항일 민족주의 정치 신학이라는 좌익으로 삼아 두 날개로 날았다. 한국 교회가 주기철의 신앙을 따른다면, 시시한 유튜브 수준의 담론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가 나갈 길을 밝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해방 이후 현대사와 그와 연관된 교회사는 많은 연구와 성찰을 요구한다. 반전과 역전과 급변의 역사는 상상력과 신학과 영성의 보고이다. 한국기독교사는 그래서 할 만하다. 삶이 시시한가? 현대 한국사와 한국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자. 내일이 밝아지고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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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현상, “역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혁명’ 서사의 변화,” <인문논총> 75:1 (2018. 2): 177~218.

2) 대통령기록관에 올려있는 이승만의 “삼일절 30주년 기념사”( http://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는 金珖燮 편, 『이대통령 훈화록』 (중앙문화협회, 1950)에서 잘못 옮겨 적어 오류가 많다. <조선일보> 1949년 3월 1일 자에 게재된 원문에서 바로 옮긴 원문은 다음을 보라.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556?category=827206

3) 참고: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563

4)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145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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