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5

70년의 적, 이젠 사람으로 만나고싶다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70년의 적, 이젠 사람으로 만나고싶다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70년의 적, 이젠 사람으로 만나고싶다

등록 :2020-06-25 14:41수정 :2020-06-25 14:41




유신 시절 어느 해, 아홉살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한 글짓기 대회에서 시를 써서 상을 받았다. ‘총싸움’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탕탕탕/ 아이들이 총싸움을 한다/ 부서진 나무 조각 주워 모아서/ 망치로 툭탁탁 만든 권총/ 총싸움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 나도 커서 국군 되면 공산당을 무찔러야지.” 별생각 없이 쓴 시로 뜻밖의 상을 받은 나는 계속 분발하여(?) 그 이듬해에도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이 적힌 상장을 받았다.


‘아홉살’ 소년이 쓴 시의 주제가 자연의 아름다움도 친구와의 우정도 아닌 ‘무찌르자 공산당!’이었다는 사실은 부끄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나는 아이들에게까지 반공을 내면화하려 했던 반공훈육의 모범생이며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나는 공산당은 때려잡고 무찔러야 할 적이라는 말을 무수히 들으며 자랐다. 박정희 정권 때 골목에서 총싸움 놀이를 하던 소년은 전두환 정권 때는 청소년이 되어 학교 운동장에서 ‘총검술’ 훈련을 했다. 반공 병영 사회의 섬뜩한 성장사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장면

전쟁과 반공의 기억으로 심란한 6월, 권정생 선생님의 <몽실언니> 한 장면이 생각난다. 열살 소녀 몽실이 언니뻘 되는 인민군 최금순에게 국군과 인민군 중 누가 더 나쁘고 누가 더 착하냐고 묻는다. 금순은 “다 나쁘고 다 착하다”고 답한다. 이해 못 하는 몽실에게 금순이 설명해준다. “국군이나 인민군이 서로 만나면 적이기 때문에 죽이려 하지만 사람으로 만나면 죽일 수 없단다.” 몽실은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만나면 착하게 사귈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아듣는다. 아이들에게 평화의 심성을 심어주기 위해 동화를 쓰셨던 권정생 선생님이 어린 내가 썼던 반공 시를 읽으셨다면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하루 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아흐레 앞두고,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남한도 인도적 차원으로 지속해오던 개성공단 송전을 중단하는 사실상 보복 조처를 실행했다. 북한은 ‘대남관계’를 ‘대적관계’로 재규정하고 다시 대남 ‘삐라(전단) 살포’를 예고했다. 남한도 할 말이 없는 게,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한다는 ‘4·27 판문점선언’을 두해가 지나도록 비준하지 못했다. 세계는 탈냉전으로 돌아선 지 오래인데 남과 북만 여전히 냉전 중이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사람으로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일까.




2018년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헌법에 제시된 ‘국민’을 ‘사람’으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려는 의도지만, 남북관계에서도 서로를 ‘사람’으로 환대할 수 있게 해주는 발상 전환이다. 전쟁 중에 금순이 몽실에게 해준 말은 냉전 중인 오늘에도 진실이다. 적대에서 환대로 나아가려면 70년 동안 적이었던 서로를 사람으로 만나야 한다. 평화는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정경일(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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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well/well_friend/950905.html?fbclid=IwAR18L5_GPMqgEMpFR2Gam2-4fgVM9gLHT7bBIu-juyW0D0Pq6ku40pck2cY#csidx74d2d6593ab8813a45eb88b56bde4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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