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3

참여연대는 우리의 딸들을 두번 다시 하나꼬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회원전용 활기차 - 참여연대



참여연대는 우리의 딸들을 두번 다시 하나꼬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회원전용 활기차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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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우리의 딸들을 두번 다시 하나꼬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자유게시판
김수길
Dec 24, 2001 (17: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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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사태에 대한 내 양심을 거스리지 못하기에 참여연대를 떠나며, 참여연대에 대한 일체의 지원을 끊고 그 속죄의 뜻으로 나의 조그마한 지원을 정신대할머니들에게로 돌린다.

끝으로 참여연대는 우리의 어머니들의 역사를 다시 한번 조명하고 우리의 딸들을 두번 다시 하나꼬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한 토론회를 통해 좋은 결과를 얻기 바라며 나는 발길을 490차 수요일 시위로 돌린다.
그동안 저의 의미없는 몸짓을 지켜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박원석국장님, 안진걸간사님이하 참여연대의 여러 회원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건승하십시요.

http://www.nojum.co.kr/

군'위안부' 여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위안소규칙이 적용되었다. 위안소 이용규칙에는 군의 이용시간, 요금, 성병검사, 휴일 등에 관한 세부사항까지 규정되어 있으며, 특히 위생관련 규정이 많았다.

군'위안부'들은 대개 아침부터 초저녁까지는 병(兵), 초저녁부터 밤 7∼8시까지는 하사관, 야간에는 장교를 상대하였다. 장교는 숙박할 수 있었다. 여러 부대가 같이 주둔한 경우에는 서로 요일을 달리해서 위안소를 이용하였다.

군인 한사람당 대개 30분이나 1시간 이내로 이용시간이 제한되었다. 군'위안부'들은 하루에 10명 내외에서 30명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주말이면 훨씬 더 많았다. 또 위안소가 없는 지역에 파견되면 임시 막사에서 그 부대의 전인원을 상대하기도 하였다.

위안소는 이용시간과 군위안부의 민족에 따라 요금이 달랐다. 군인들은 요금을 지불했다고 하지만, 군인들이 지불한 요금은 업자의 배만 불렸을 뿐, 군위안부 수중에까지 들어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무료로 운영된 위안소도 소수 있었다.

군'위안부'들은 처음에 군인들에게 반항하여 맞기도 하였으나 보초 때문에 도망갈 엄두를 못낸채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름도 '하나코', '하루코' 등 일본식 이름이나 번호로 불렸고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당했다. 술에 취한 군인들은 '위안부'들을 손으로 때리거나 칼로 찌르기도 했다.

군'위안부'들은 일주일 ∼ 열흘에 한번씩 군의나 위생병에게 성병검사를 받아야했다. 검사 결과 합격된 '위안부'들만 군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돈벌이에 혈안이 된 주인들은 검사에 떨어졌어도 군인을 상대하도록 강요하였다.

군인들은 성병예방을 위하여 삿쿠(콘돔)를 써야했으나 삿쿠를 쓰지 않은 군인들도 많았다. 그 결과 '위안부'들의 상당수가 성병에 걸렸다. 그러면 606호 주사를 맞거나 중독 위험이 큰 수은으로 치료받았다. 성병이 심해지거나 임신하면 어느날 위안소에서 없어지기도 하였다.

군'위안부'들은 부대 혹은 위안소 주인에게 밥과 된장국, 약간의 반찬이 있는 식사를 하루에 두세끼 제공받았다.

군인이 너무 많이 들어오거나 부대로 파견된 경우에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듯 군'위안부'들은 군위안소에서 외출도 제한당한 채 정기적인 성병검사를 받으며 매일 군인을 상대하는 성노예로서 생활하였다.

위안부들이 위안소를 벗어나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위안소 경비가 엄격하기도 하려니와 섬이나 허허벌판 타국에서 탈출은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탈출을 기도하다가 실패했을 때에는 가혹한 벌을 받은 후, 다시 '위안부'노릇을 했다.

위안부들은 일제가 패전하자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 더욱이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이들을 한데모아 죽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잠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집단으로 귀국선을 타거나, 혼자 스로 숱한 어려움을 헤치면서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타국에서 그대로 머물러야했던 경우도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귀국 도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배가 파산되어 집단적으로 수장되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있었다.


http://www.nojum.co.kr/
이 게시물을


댓글 1




Dec 24, 2001 (17:20:42)

김성무님께~

그동안 올리신 글의 논조로 보아 상당히 저와 같은 견해를 가지신 회원님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 김성무님을 한번도 직접 뵌적은 없지만 게시판에서 나마 회원님을 알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여연대의 회원을 탈퇴하시겠다니 같은 회원으로써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문제제기를 하셨던 회원님들중에 결국 참여연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떠나셨던 회원님들이 다시 생각이 납니다.

다른 곳에 가입하신다는 곳에서라도 항상 좋은 일만 생기시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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