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4

알라딘: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식민지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탈향, 망향, 귀향의 서사 차은정

알라딘: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식민지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탈향, 망향, 귀향의 서사> 차은정 (지은이) 2016 [Sejin서재]



양장본378쪽

책소개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풍의 음악을 들으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품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수수께끼를 ‘한국 출신 일본인’의 귀환 후의 기억과 실천을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기억과 실천은 저자의 아버지의 기억과 실천과 동일한 어떤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제국-식민지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식민지를 살아가게 하는 식민지의 기억의 정치학이며 그 기억을 떠안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목차
서론_ 외지인의 고향, 식민지
20년만의 귀향
‘한국 출신 일본인’의 조선화(朝鮮化)와 후루사토
‘식민자’의 조선화와 역사의식
외지에서 식민지로: 내부의 타자에서 외부의 타자로
연구방법론과 책의 구성

1부_ ‘한국 출신 일본인’조선화와 제국의식

[1] ‘한국 출신 일본인’의 원류: 연구과정 및 연구대상 개괄

[2] 경성의 기억과 조선의 표상
‘원체험(原體驗)’의 자각
‘원체험’의 시공간, 경성의 기억도(記憶圖)
‘다민족’의 풍경
‘조선적인 것’의 경험, 조선화의 구축
조선인의 표상: ‘어머니’의 기억
‘식민지배의 무자각’의 조건
외지의 내지인에서 내지의 외지인으로


[3] 조선화의 신체와 타자성
기억의 신체화
‘경성내기(京城っ子)’의 놀이
‘경성내기’의 조선의 놀이: 놀이의 전래구조와 변용
‘경성내기’의 놀이의 민족별 범주와 식민지적 혼종성
조선의 놀이와 신체화의 서사
조선의 놀이의 재인식: ‘조선적인 것’에서 한국의 문화요소로
조선화의 타자성

[4] 내선일체의 이상과 모순: 훈육의 서사와 제국의식
훈육의 서사와 ‘마음의 고향’
황민화교육과 내선일체
경성의 일본인 소학교의 황민화교육
군국소년의 이상과 모순
‘마음의 고향’의 균열과 봉합: 선택되는 기억

2부_ ‘한국 출신 일본인’의 한국방문과 역사의식

[1] 한국인의 환대를 받은 일본인들: 연구과정 및 연구대상 개괄
[2] ‘사범’의 사명의식과 지속되는 사제관계
식민지와 ‘스승’의 의미
경성사범학교 개요
경성사범학교의 ‘자치’
‘사범’의 사명의식과 농촌의 ‘계몽’
보편적 교사상과 역사의식
[3] ‘경중회’의 ‘모교’ 방문과 식민지적 타자성
식민자의 기억, 귀환자의 실천
경성중학교 및 동창회 개괄
훈육의 기억
패전 후 동창회 활동과 한국인
기억의 관성과 역사의식: ‘마음의 고향’과 식민지적 타자성

결론_ 기억의 영토와 실천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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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차은정 (지은이)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규슈대학교 한국연구센터 방문연구원과 히토쓰바시대학교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2016)이 있으며, 
  •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조너선 프리드먼, 공역), 
  •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오카모토 유이치로), 
  • 《숲은 생각한다》(에두아르도 콘), 
  • 《부분적인 연결들》(메릴린 스트래선), 
  • 《부흥문화론》(후쿠시마 료타, 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최근작 : <북한의 민속>,<21세기 사상의 최전선>,<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총 1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제는 꽤 알려진 사실이지만, 식민지조선에는 적지 않은 일본인이 살았다. 1945년 제국일본의 패전 당시 조선의 일본인은 군인을 제외하고 민간인만 70만여 명에 달했고 서울에서만 인구의 약 30%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결 직후 조선의 거의 모든 일본인들은 연합군총사령부(GHQ)에 의해 ‘본토’로 귀환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가늠할 뿐이다. 이 인구규모는 20세기 식민지 가운데 ‘백인 이민 국가’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본토’ 인구가 유입되었던 프랑스령 알제리의 다음 가는 수준이다(우치다 쥰 2008). 

조선의 일본인들 가운데에는 관공리, 정치가, 군인 등의 ‘정책적 식민자’와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생활조건으로의 적응과정’으로서 조선인과 접촉하고 조선문화를 습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은 스스로 조선으로 건너온 1세와 달리 조선문화를 주어진 환경으로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실제로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 중에는 ‘본토’로 귀환한 후에 ‘본토’의 문화를 이질적인 것으로 느끼면서 조선문화를 ‘원체험’으로 인식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조선시절을 기억하는 그들의 ‘지금’, 즉 귀환 후의 삶이다. 그들은 1945년 제국일본의 패전과 함께 ‘본토’로 귀환한 후 조선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사회에 새로이 적응해야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출신의 일본인으로 자신을 재인식해야 했다. 일본인이되 ‘본토’ 출신이 아니라는 자기인식은 그 반대급부로 조선시절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이 속에서 그들은 식민지조선에 있었던 일본인 학교의 동창회를 조직하고 그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며 한국방문과 ‘모교’ 후원 등의 교류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왔다. 요컨대 그들의 조선시절에 대한 ‘지금’의 기억은 지난한 실천의 결과물이다.

자, ‘조선 출신의 일본인’ 또한 제국-식민지의 역사를 말끔하게 청산했을까? 그들은 왜 ‘조선인과 잘 지냈다’고 강변하는 것일까? ‘전후일본’의 맥락 속에서 그들은 식민지조선의 어떤 기억을 토해내야 했으며 또 어떤 기억을 감춰야 했을까? 이 기억의 정치학이야말로 식민지 이후에도 식민지가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전후일본’에서 ‘식민지조선’을 살아내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제국-식민지의 역사를 청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지금’의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른 ‘정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국-식민지의 기억을 선별하고 망각을 부추기는 논리를 밝혀냄과 동시에 그 논리에 휘말려 제국-식민지를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춰진 기억을 풀어내는 일일 것이다. 최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제국-식민지의 ‘정산’을 ‘모의’하는 한국과 일본 양국정부의 정치적 협잡은 여전히 그러한 역사적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나는 이 책에서 일본풍의 음악을 들으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품었던 나의 어린 시절의 수수께끼를 ‘한국 출신 일본인’의 귀환 후의 기억과 실천을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기억과 실천은 나의 아버지의 기억과 실천과 동일한 어떤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제국-식민지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식민지를 살아가게 하는 식민지의 기억의 정치학이며 그 기억을 떠안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책을 내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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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을 읽고 나의 생각과 유사하면서도 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직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대신해 내가 다른 논문에서 일부 언급한 글을 붙여둔다. 이른바 '식민 2세'의 식민지 이후 식민지 인식에 관한 글이 이 책이라면 나의 글은 '식민 2세'의 식민지 생활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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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식민통치기간이 길어지면서 처음 50명 남짓의 재조일본인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거주 집단이 되었다. 그런 만큼 이주 시기와 거주 지역과 상태에 따라 ‘조선인식’과 ‘제국의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독 다양한 차이 중 확실한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세대 간 구분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 식민 1세대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도 않고 있고, 1세대조차 ‘도래자’와 ‘신도래자’로 스스로를 구분하고 있으며, 식민 2세대(조선에서 태어난) 또는 식민 1.5세대(조선에서 자라난) 중 일제 말기에 성인이 되는 세대와 패전 후 성인이 되는 세대로 구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식민 2세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식민 1세와의 차이가 언급되고 있는 것 같다.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문화 및 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 패전 이후 고착화된 식민지 지배의 망각과 봉인, 그리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그동안 숨겨왔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재조일본인으로서의 식민지 경험을 하나 둘 씩 말하기 시작한 세대가 식민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거나 자라나 패전에 의해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일본에서 일본인이 아닌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패전 이후 망각의 매커니즘 속에서 부유하던 이들은 1970년대를 전후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출판한 체험기, 수기, 소설, 그리고 인터뷰를 토대로 식민 2세들에 대한 연구들이 21세기에 축적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식민 2세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성과는 니콜(Nicole Leah Cohen)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은 이 연구에서 1940년대 식민지 조선, 그 중에서도 경성의 재조일본인 상류계층에서 자라난 ‘京城子’를 ‘제국의 아이들’로 명명하며 그 경계적인 정체성과 문화적 혼종성을 통해 탈민족주의적인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그 외 문화, 문학계에서는 식민 2세 작가들의 작품 분석을 통해 식민 2세의 경계자적 위치와 내셔널리즘 비판의 테제로 삼고 있다.



이들 연구에서 식민 1세대와 식민 2세대가 구분되는 첫 번째 이유는 고향이 달랐다는 점이다. 즉,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으로 이주해 거주한 식민 1세대는 한국을 집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일시적인 거주지이며 돌아갈 곳을 염두에 두었다. 반면, 식민 2세대는 식민지 조선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의 부모처럼 일본이 고향일 수 없으며 도리어 조선이 고향이 됨으로써 돌아갈 조국도 없는 일본과 조선의 낀 세대일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식민 1세대는 식민지에 거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본토 일본인’이 되려고 노력했고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며 조선인 앞에 군림하는 ‘제국의식’ 속에서 살았고 그들의 자식에게도 ‘일본인다움’을 지속적으로 교육시켰다. 반면, 식민 2세대는 그러한 교육을 받으면서도 ‘거의 비슷’하기는 했지만 ‘완전하지 않’는 위치였고 이 때문에 이들은 ‘반일본인 반조선인’이라는 경계적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세대 구분론은 먼저, 식민 2세대가 자신이 태어난 조선을 그리워하며 그들 일본인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식민지배의 실상을 반성하든 아니면 단순히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든 사후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즉,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자적 삶이나 ‘반일본인 반조선인’이라는 인식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으로서 느끼며 품었던 생각과 인식이 아니라 패전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그리고 정착하면서 느끼며 가졌던 복합적인 감정인 것이다. 물론 식민 2세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회주의와의 만남이든 고통 받는 재일조선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든 전후 반성 없이 기억을 봉인하고 망각하는 일본의 과거 인식을 문제 삼으며 스스로가 식민자였으며 일본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고 느끼는 감정과 인식이 전후 각각의 국가에 만연하는 내셔널리즘에 따라 과거를 한 방향으로만 보는 시각을 해체할 수 있는 탈민족적이고 트랜스내셔널한 시선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세는 여전히 주목해야할 긍정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인식이 식민 1세대와 식민 2세대를 구분할 수 있는 사실적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세대 구분을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 이주하는 시기적 차이와 더불어 지역별, 계층별, 젠더별로 더욱 세밀하게 구분하여 다양한 재조일본인 상을 확인하고 이를 구축하는 것이 역사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더군다나 식민 1세대는 물론 태어난 고향이 일본이기에 돌아갈 조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조선에 뿌리박고 ‘제국의식’ 속에서도 ‘조선본위’ 또는 ‘지역본위’, 예를 들어 ‘경성의식’ 또는 ‘부산의식’을 앞세우면 살아갔다. 그들은 살아서 돌아갈 고향을 일본에 두고 있었지만 죽어서도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조선에 눕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 성공한 재조일본인들은 더욱 그랬다. 패전이 되었을 때 자신이 모은 농장과 재산을 조선에 두고 갈 수 없어서 한국인으로 귀화하고자 했던 군산의 일본인 지주 시마타니 야소야의 일화는 상징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식민 1세대가 고향으로 귀환을 생각하며 조선에서 거주했다면 일본인 거주지마다 조성된 무덤들은 어떤 의미일까. 오히려 이들은 조선에 건너와 뼈를 묻을 각오였지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재조일본인 상층부의 인물들도 조선에서 죽으면 자기가 거주한 조선의 거주지와 일본의 고향에서 각각 장례 의식을 거행했지만 결국 조선에서 묻힌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1세대와 2세대를 태어난 고향과 조국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식민 2세대는 오히려 ‘일본인다움’ 또는 ‘본토 일본인’이 되기 위한 교육과 활동에 앞장섰다. 그들은 본국과 같은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동일한 여가의 대부분과 소비를 추구했고 자주 일본 스타일의 집에서 사는 동시에 신사와 사찰에 예배하거나 일본 상점에서 쇼핑하거나 다른 일본인들과 클럽이나 이웃 단체에서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들은 일본의 각 지역 사람들이 섞이기도 하고 조선이라는 풍토적 속성도 가지고 있었기에 절충적인 문화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 또한 일본 문화라고 여기며 살았다. 또 다른 식민 2세 연구에서 언급한 것처럼 식민 2세들 중 성인으로 조선에서 활동하거나 조선과 일본문단에 등단한 사람들은 스스로 내선일체의 선봉에서 활동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과 패전 이후 일본에서 등단한 작가들은 등단의 차이와 전후 조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 세대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식민 2세로서 ‘제국의 딸’이 된 아사노 시게노를 볼 때, 이들은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그리고 ‘제국의 딸’이라는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재조일본인들의 다양한 모습과 정체성은 세대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것처럼 조선으로 건너온 시기적 차이, 태생적 차이, 계층적 차이, 지역적 차이, 젠더적 차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연구가 축적되고 난 이후 이들 차이를 통해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재조일본인 연구는 보다 다양한 군상들을 발굴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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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2016-09-1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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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nnis Kim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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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간한 책으로 ‘한국 출신’일본인들의 ‘일본이주 ‘와 패전이후 이들이 기억하던 ‘식민지 조선’이 1965년 한일정상화 이후의 한국을 통해 어떻게 인식되어지는지 인터뷰와 동창회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의 회고록, 이들과 동창 관계에 있던 소수의 조선인 동창과의 교류를 살펴 봅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살 때 인식하지 못했던 ‘식민자 ‘로서의 자각을 일본의 패망이후 일본으로 다시 이주한후 일본에서 살아온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또 다른 존재로 바라 보았을 때 비로소 느꼈다고 고백한 점입니다.

흔히 일제 강점기를 볼 때 억압받는 조선인들의 입장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인데 비해 당시 일본 본토( 내지, 內地라고 불리던)에서 조선으로 ‘이주’해온 재조 일본인에 주목한 점은 그래서 참신합니다.

인터뷰를 한 한국 출신 일본인들 중 이미 고령으로 고인이 된 분이 많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1920-1940년대 이들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과 경험담, 그리고 당시 조선인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지(ethnography)적’ 기록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1930년대 말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에 이들이 경험했던 학교 생활과 조선인들과의 생활경험은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략침략과 그들의 군사물자 동원 , 식량 증산계획 등을 숫자가 아닌일차적 경험으로 알려주는 것이기에 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케이스 스터디에 해당하는 경성사범학교 출신들의 경험담과 경성중학교 출신의 경험담은 시대의 차이를 두며 약간 다른 양상을 띄지만 이미 일제는 1930년대부터사범학교 출신 국민학교 교원들을 조선 각지의 농촌에 발령내고 이들을 통해 식량 중산을 꾀했고 이들을 통해 지역을 조선총독부 정책 실행의 최전선에 앞세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경희궁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는 설립 당시 이미. 조선총독부 자녀들만을 위한 일본인 학교였으며아주 소수의’양반가 ‘ 조선인이나 사업가 자제들만이 이 학교에 입학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두산 그룹을 세운 박승직 상점가 장남 박두병이나 한은 초대총재 구용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 등이 경성중학교 출신인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국가정책에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했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계층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일제가 아무리조선을 일본화하려 해도 조선의 촌부들이 일본어를 잘 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농촌에 발령받은 경성사범 출신 일본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조선어로 의사소통 할 수 밖에 없다고 회고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당시 졸속으로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의 막후 접촉을 위해 일본의 자민당 간사장 출신 정치인이 청와대를 방문하고 비밀협상을 한일 양측 모두 ‘일본어’로 진행했다는 후일담이 나왔을 때 매우 놀랐고 경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는 일제시대를 산 인물들이라 일본과 관계가 긴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 딸까지 일본에게 어쩔줄 몰라하다니.부녀가 일본에게 한국을 얕잡아볼 기회를 제대로 주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때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식민지 시대에 교육받은 소위 한국사회의 ‘원로’라는 집단을 통해 한국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1960년대는 한국 전쟁이 끝난지 10여년 해방이 된지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때로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엘리트들이 넘쳐나던 시대였습니다.

위의 경성중학교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 자신의 동기 동창들이 한국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고젊었을 때 하던 것처럼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알던 산업화 세대가 은퇴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1960-70년대 처럼 일본이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는 하기 어려울 것으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지난 40여년간 일본에서 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면 몹시 불편한 기분입니다.

또 한가지 이들의 인터뷰에서 불편했던 점은 한국 출신 일본인들이1930-40년대 당시 조선인들과 ‘잘 지냈다’는 이유로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에 명시적으로 드러났던 차별을 은폐하려 했던 경향이나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이 본격화되었는데도 본인들의 경험으로 자신들이 농촌 부락의 생산성 증대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무마하고 자신들이 총독부 정책을 충실히 집행한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회피하는 듯 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반성이나 청산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온 한국이나 일본모두 그래서 애매하게 상황을 마무리짓고 어물쩡 넘어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륙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태평양 해양 세력으로 떠오른 미국이 러시어와 중국의 힘을 압박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 모두 일제 강점기 상황을 그대로 놔둔 체 ‘현상유지 (status quo)’를 채택해 온 것이 해방이후 70여년이 넘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현재의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경성중학교 자리는 일제가 한일병합이후 경복궁 에 조선총독부를 1925년 완공해입주한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관료들을 위해 관사를 만들고 또 이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 것이 시작입니다.사유지를 피하기 위해 경희궁이라는 조선의 궁궐 자리에 학교를 지은 것도 사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19세기 말 경성에 진출한 당시에 모여살던 현재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서 점차 양반들이 모여살던 북촌으로 거주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경성중학교 자리 역시같은 맥락에서 설립된 것입니다.종로와 북촌일대에서 많이 모여살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인들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성에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따로 모여 살았는지 같이 섞여 살았는지는 연구서들마다 약간씩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하지만 일제강점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섞여 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부는 대체로 일본인들이 독점해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빈부격차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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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장이   201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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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을 읽고 나의 생각과 유사하면서도 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직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대신해 내가 다른 논문에서 일부 언급한 글을 붙여둔다. 이른바 '식민 2세'의 식민지 이후 식민지 인식에 관한 글이 이 책이라면 나의 글은 '식민 2세'의 식민지 생활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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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식민통치기간이 길어지면서 처음 50명 남짓의 재조일본인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거주 집단이 되었다. 그런 만큼 이주 시기와 거주 지역과 상태에 따라 ‘조선인식’과 ‘제국의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독 다양한 차이 중 확실한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세대 간 구분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 식민 1세대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도 않고 있고, 1세대조차 ‘도래자’와 ‘신도래자’로 스스로를 구분하고 있으며, 식민 2세대(조선에서 태어난) 또는 식민 1.5세대(조선에서 자라난) 중 일제 말기에 성인이 되는 세대와 패전 후 성인이 되는 세대로 구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식민 2세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식민 1세와의 차이가 언급되고 있는 것 같다.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문화 및 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 패전 이후 고착화된 식민지 지배의 망각과 봉인, 그리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그동안 숨겨왔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재조일본인으로서의 식민지 경험을 하나 둘 씩 말하기 시작한 세대가 식민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거나 자라나 패전에 의해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일본에서 일본인이 아닌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패전 이후 망각의 매커니즘 속에서 부유하던 이들은 1970년대를 전후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출판한 체험기, 수기, 소설, 그리고 인터뷰를 토대로 식민 2세들에 대한 연구들이 21세기에 축적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식민 2세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성과는 니콜(Nicole Leah Cohen)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은 이 연구에서 1940년대 식민지 조선, 그 중에서도 경성의 재조일본인 상류계층에서 자라난 ‘京城子’를 ‘제국의 아이들’로 명명하며 그 경계적인 정체성과 문화적 혼종성을 통해 탈민족주의적인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그 외 문화, 문학계에서는 식민 2세 작가들의 작품 분석을 통해 식민 2세의 경계자적 위치와 내셔널리즘 비판의 테제로 삼고 있다.



이들 연구에서 식민 1세대와 식민 2세대가 구분되는 첫 번째 이유는 고향이 달랐다는 점이다. 즉,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으로 이주해 거주한 식민 1세대는 한국을 집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일시적인 거주지이며 돌아갈 곳을 염두에 두었다. 반면, 식민 2세대는 식민지 조선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의 부모처럼 일본이 고향일 수 없으며 도리어 조선이 고향이 됨으로써 돌아갈 조국도 없는 일본과 조선의 낀 세대일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식민 1세대는 식민지에 거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본토 일본인’이 되려고 노력했고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며 조선인 앞에 군림하는 ‘제국의식’ 속에서 살았고 그들의 자식에게도 ‘일본인다움’을 지속적으로 교육시켰다. 반면, 식민 2세대는 그러한 교육을 받으면서도 ‘거의 비슷’하기는 했지만 ‘완전하지 않’는 위치였고 이 때문에 이들은 ‘반일본인 반조선인’이라는 경계적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세대 구분론은 먼저, 식민 2세대가 자신이 태어난 조선을 그리워하며 그들 일본인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식민지배의 실상을 반성하든 아니면 단순히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든 사후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즉,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자적 삶이나 ‘반일본인 반조선인’이라는 인식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으로서 느끼며 품었던 생각과 인식이 아니라 패전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그리고 정착하면서 느끼며 가졌던 복합적인 감정인 것이다. 물론 식민 2세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회주의와의 만남이든 고통 받는 재일조선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든 전후 반성 없이 기억을 봉인하고 망각하는 일본의 과거 인식을 문제 삼으며 스스로가 식민자였으며 일본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고 느끼는 감정과 인식이 전후 각각의 국가에 만연하는 내셔널리즘에 따라 과거를 한 방향으로만 보는 시각을 해체할 수 있는 탈민족적이고 트랜스내셔널한 시선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세는 여전히 주목해야할 긍정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인식이 식민 1세대와 식민 2세대를 구분할 수 있는 사실적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세대 구분을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 이주하는 시기적 차이와 더불어 지역별, 계층별, 젠더별로 더욱 세밀하게 구분하여 다양한 재조일본인 상을 확인하고 이를 구축하는 것이 역사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더군다나 식민 1세대는 물론 태어난 고향이 일본이기에 돌아갈 조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조선에 뿌리박고 ‘제국의식’ 속에서도 ‘조선본위’ 또는 ‘지역본위’, 예를 들어 ‘경성의식’ 또는 ‘부산의식’을 앞세우면 살아갔다. 그들은 살아서 돌아갈 고향을 일본에 두고 있었지만 죽어서도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조선에 눕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 성공한 재조일본인들은 더욱 그랬다. 패전이 되었을 때 자신이 모은 농장과 재산을 조선에 두고 갈 수 없어서 한국인으로 귀화하고자 했던 군산의 일본인 지주 시마타니 야소야의 일화는 상징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식민 1세대가 고향으로 귀환을 생각하며 조선에서 거주했다면 일본인 거주지마다 조성된 무덤들은 어떤 의미일까. 오히려 이들은 조선에 건너와 뼈를 묻을 각오였지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재조일본인 상층부의 인물들도 조선에서 죽으면 자기가 거주한 조선의 거주지와 일본의 고향에서 각각 장례 의식을 거행했지만 결국 조선에서 묻힌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1세대와 2세대를 태어난 고향과 조국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식민 2세대는 오히려 ‘일본인다움’ 또는 ‘본토 일본인’이 되기 위한 교육과 활동에 앞장섰다. 그들은 본국과 같은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동일한 여가의 대부분과 소비를 추구했고 자주 일본 스타일의 집에서 사는 동시에 신사와 사찰에 예배하거나 일본 상점에서 쇼핑하거나 다른 일본인들과 클럽이나 이웃 단체에서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들은 일본의 각 지역 사람들이 섞이기도 하고 조선이라는 풍토적 속성도 가지고 있었기에 절충적인 문화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 또한 일본 문화라고 여기며 살았다. 또 다른 식민 2세 연구에서 언급한 것처럼 식민 2세들 중 성인으로 조선에서 활동하거나 조선과 일본문단에 등단한 사람들은 스스로 내선일체의 선봉에서 활동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과 패전 이후 일본에서 등단한 작가들은 등단의 차이와 전후 조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 세대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식민 2세로서 ‘제국의 딸’이 된 아사노 시게노를 볼 때, 이들은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그리고 ‘제국의 딸’이라는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재조일본인들의 다양한 모습과 정체성은 세대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것처럼 조선으로 건너온 시기적 차이, 태생적 차이, 계층적 차이, 지역적 차이, 젠더적 차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연구가 축적되고 난 이후 이들 차이를 통해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재조일본인 연구는 보다 다양한 군상들을 발굴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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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페이퍼 (2편)쓰기
 Dennis Kim   2022-08-25메뉴
1945년 8월 15일을 현재 한국에서는 일본제국주의로 부터 해방된 날을 의미하지만 일본에서 이날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날로 기억됩니다.

이렇게 동일한 역사적 시점은 두나라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은 어떻게 해방을 맞았으며 외세 특히 미군정에 의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경영하며 남긴 유산을 어떤 방식으로 청산했는지, 일본인이 남겨놓은 생산시설과 설비들이 이후 누구에게 불하되고 이후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심을 가집니다.현재 한국저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현재 한국 대기업의 출발이 어떠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괸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재조 일본인(식민지 조선에서 정착해서 살아온 일본인)들에게 패전은 자신이 조선에서 일궈 온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패전 이전까지 일들은 식민지 조선에서지배자로서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지냈고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일본인 거주지역에서만 살았습니다. 이들은 일본이 시행하는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첨병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지배층으로 군림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패망이후 어떤 처지로 전락하고 어떤 귀환과정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는지,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고 어떻게 갈등했는지 주로 일본 쪽 사료를 근거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귀환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조선에서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가해는 언급하지 않은 체 자신들을 어떻게 피해자로 둔갑시켰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재조일본인은 한국입장에서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을 바라보는 것과 유사한 시각을 일본인들에게 제공합니다.

아무튼 미군정은 패전국 국민인 재조일본인들을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두 일본으로 귀환시킵니다(미군정은 1946년 1월 23일부 일본인 총 철퇴령을 내린다).

하지만 소련이 점령한 38선 이북의 일본인들은 미군과 달리 일본인들을 억류시키고 이들을 노동력으로 차출해 북한 지역과 만주 소련으로 뷸러 노동을 시키고, 일본인 기술자들의 일본 귀환을 불허하고 아들을 통해 북한 지역의 산업시설을 정상화시킵니다. 이들은 패전 후 약 2년이 지나도록 조선 땅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Stalin)치하의 소련이 당시 북한과 만주 그리고 연해주에 집착을 하고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이유는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으로 약 28백만명이라는 인명을 잃고 이로인해 침체된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럽에서 부딛쳤던 나찌독일과 소련의 전투가 한반도 북쪽에 있던 일본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오랜기간 전쟁터를 떠돌던 일선의 소련군은 부족한 소련의 물자로 인해 현지에서 군량과 각종 물품을 조달할 수 밖이 없었고 이는 북한지역에 사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약탈과 성폭력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패전 후 수용소 생활은 물론 억류와 감금을 당했다 탈출하는 경우도 많았고 북한 지역을 탈출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재조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조선 즉 한국과 어떤 관계를 가져왔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조선을 기억하는지에 대한 연구서가 있습니다.당시 살았던 일본인들에 대한 인터뷰를 토대로 한 구술사연구입니다.

차은정씨가 2016년 쓴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선인,2016)’입니다.

패전이후 일본에 돌아간 일본인들은 그것으로 한국과 끊어진 것이 아니고 이후 상당기간동안 사적으로 공적으로 한국과 연결되었습니다.학교 동창회를 통한 인맥과 같은 지방에서 일했다는 지연이 1970-1980년대 식민지 시기를 살아오신 분들 생전에 양국 관계에 영향을 마친 것입니다.

공적으로는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의 실세 박정희 소장의 만주인맥이 일본과 닿아 결국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주인맥과 한국의 경제발전 관련해서는 아래 두책을 참고해야 합니다.

한석정 교수의 ‘만주모던 ( 문학과지성사,2016)’은 박정희가 추구했던 한국 근대화 계획이 민주국에서 일본이 행하려 했던 경제계획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보여주며 만주국 고위층이 패전 후 한국의 경제발전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두번째는 재일학자이신 강상중 교수의 ‘기시노부케와 박정희( 책과 함께,2012)’ 입니다. 제2차세계대전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가 전후 일본에서 어떻게 총리가 되었고 그가 박정희와 일본 정부간의 한일수교협상에서 어떤 막후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한국에서 훈장까지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그간의 여러 사정도 있고, 일본의 극우 정권이 지속적으로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고, 독재자 벅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무성의하게 체결한 일본과의 위안부협정에 대해 일본은 한국이 해결책을 가져오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대법원의 최종 판결마저 무시하는 등 도를 넘어 한국의 주권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얼빠진 분이 외교수석으로 기용되어 한일관계를 더욱 더 비정상적으로 만들 것 같아 보입니다.

일본에 대한 시선이 따라서 고을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무엇을 했는지 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따져봐야 합니다.

일본인들이 이땅애 처음 어떻게 군대를 주둔시켰고 어떻게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을 능멸하고 주권을 침탈해 갔는지에 대하서는 많은 연구서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일본인둘이 조선에 들어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어떻게 차별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패전 후 조선을 어떻게 떠났는지애 대해서는 놀라울만큼 연구서가 적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희소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연구서가 희소해지지 않게 더 많이 출판되길 바랍니다.

한국의 해방후 3년(1945-1948)은 정치적으로만 설명하기엔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좌우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로만 봐야 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 시기는 미국이 영국에 이어 세계 패권을 장악하던 시기이고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주의 봉쇄정책 (containment)을 폈고 그 정책의 자장이 아직도 한반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방 3년을 제대로 읽고 역학관계를 재대로 파악해야 왜 지금같은 한국사회가 나타나게 된 건지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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