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2

강창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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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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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출생1952년 1월 28일 (68세)
대한민국 제주도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직접 편집
국적대한민국
거주지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학력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사
도쿄 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경력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장
종교불교
소속위원회외교통일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의원 선수4
의원 대수17·18·19·20
정당더불어민주당
지역구제주 제주시 갑
당내 직책제주도당 위원장
웹사이트http://www.kangci.net

강창일(姜昌一, 1952년 1월 28일 ~ , 제주)은 대한민국 제17·18·19·20대 국회의원이다. 2004년 5월 부터 제17대 국회의원(제주시·북제주 갑열린우리당)으로 활동했고 제18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제주시 갑)으로 활동하였고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학력[편집]

경력[편집]

  • 제주4.3연구소 소장
  • 광주5.18기념재단 이사
  • 아시아평화인권 한국위원회 운영위원장
  •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교무처장

의정활동[편집]

  • 2004년 5월 ~ 2008년 5월: 제17대 국회의원(제주도 제주시.북제주군 갑)
  • 2004년 ~ 2008년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위원,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건설교통위원회 위원
  • 2005년 열린우리당 제주도당위원장
  • 2007년 열린우리당 탈당 후 대통합민주신당 입당
  •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정책위 부의장
  • 2007년 국회 한·미자유무역협정(FTA)체결대책특별위원회 위원
  • 2008년 5월 ~ 2012년 5월: 제18대 국회의원(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갑)
  •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위원, 바다와 경제 국회포럼 공동대표
  • 아시아 평화과 번영 공동대표, 현재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위원
  • 국회 독도영토수호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 2012년 5월 ~ 2016년 5월: 제19대 국회의원(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갑)
  • 2012년 7월 ~ 2013년 3월: 19대 국회 전반기 지식경제위원회 위원장
  • 2016년 5월 ~ 2020년 5월: 제20대 국회의원(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갑)
  • 2016년 12월 ~ 2017년 12월: 제20대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
  • 2017년 5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2017년 6월: 한일의원연맹 회장
  • 2018년 7월 ~ 2020년 5월: 제20대 국회 후반기 행정안전위원회 위원
  • 2020년 10월 ~ 한일의원연맹 명예회장

어록[편집]

  • 2009년 7월 27일 민주당의 미디어법 장외투쟁과 관련 "하늘을 거스른 자, 반드시 망한다고 옛 성현들이 줄곧 역사 속에서 가르쳐 왔습니다."[1]

논란[편집]

횡령 의혹 윤미향 의원 옹호 논란[편집]

정의기억연대(옛 정대협⋅정의연) 대표 출신 윤미향 의원(당시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의 위안부 피해자 기부금 유용 의혹 논란에 대해 친일·반인권·반평화 세력이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운동을 폄하하려는 부당한 공세라고 하면서 14명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당선자 포함)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나서 논란이 되었다. 성명서에는 강창일·김상희·김영주·남인순·박홍근·홍익표·송갑석·송옥주·정춘숙·제윤경 의원과 고민정·양향자·이수진(동작을)·임오경 당선자가 이름을 올렸다.[2][3]

역대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선거대수직책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2004년총선17대국회의원제주 제주시·북제주군 갑열린우리당56,608 표
48.19%
1위국회의원당선.png초선
2008년총선18대국회의원제주 제주시 갑통합민주당32,707 표
39.29%
1위국회의원당선.png재선
2012년총선19대국회의원제주 제주시 갑민주통합당42,006 표
43.35%
1위국회의원당선.png3선
2016년총선20대국회의원제주 제주시 갑더불어민주당49,964 표
47.98%
1위국회의원당선.png4선

각주[편집]

  1.  이종구 기자 (2009년 7월 27일). “민생 속으로 vs. 국민 속으로”. YTN. 2009년 7월 28일에 확인함.
  2.  “與 "윤미향 논란은 역사 왜곡 세력의 부당한 공세" 성명서”. 2020년 5월 14일. 2020년 9월 30일에 확인함.
  3.  “윤미향의 '호위무사' 자처한 민주당 의원들”. 2020년 5월 19일. 2020년 9월 3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전임
(제주시)현경대
(북제주군)양정규
제17대 국회의원(제주 제주시·북제주군 갑)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열린우리당 → 무소속 → 대통합민주신당 → 통합민주당
(제주시·북제주군 을)김우남
후임
(제주시 갑)강창일
(제주시 을)김우남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전임
(제주시·북제주군 갑)강창일
(제주시·북제주군 을)김우남
제18대 국회의원(제주 제주시 갑)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통합민주당 → 민주당 → 민주통합당
(제주시 을)김우남
후임
(제주시 갑)강창일
(제주시 을)김우남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전임
(제주시 갑)강창일
(제주시 을)김우남
제19대 국회의원(제주 제주시 갑)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민주통합당 →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제주시 을)김우남
후임
(제주시 갑)강창일
(제주시 을)오영훈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전임
(제주시 갑)강창일
(제주시 을)김우남
제20대 국회의원(제주 제주시 갑)
2016년 5월 30일 ~ 2020년 5월 29일
더불어민주당
(제주시 을)오영훈
후임
(제주시 갑)송재호
(제주시 을)오영훈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강창일

최근 수정 시각: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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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휘장(9대-19대)




국회휘장





국회휘장(9대-19대)





대한민국 제17 ~ 20대 국회의원
강창일
姜昌一 | Kang changil
강창일
출생
본관
가족
아내 장용선, 슬하 1남 1녀
종교
불교(법명: 도행(道行))[8]
신체
163cm, O형
학력
오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국사학 / 학사)
도쿄대학 (인문사회학 / 석사)
도쿄대학 (인문사회학 / 박사)
병역
면제(수형)
소속 정당
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7181920
현직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몽양기념사업회 이사장
상생과통일 포럼 고문
더불어민주당 지속가능제주발전특별위원회 고문
주 일본국 특명전권대사(내정)
약력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제주4.3연구소장
제17~20대 국회의원
외부 링크
홈페이지 아이콘

1. 개요2. 생애
2.1. 정치 활동
3. 사건사고/논란
3.1제주도에 중국 공안 들여와야 발언 논란3.22019년 일본의 대한국 경제 보복 관련 의원총회 연설
4. 여담5. 선거 이력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1952년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면 고산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오현고등학교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대통령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이후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현경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의 비서로 잠깐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인문사회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1991년부터 배재대학교에서 일본학과 교수,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제주 4.3연구소 소장도 역임하였다.

2.1. 정치 활동[편집]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제주도 제주시-북제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현경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해당 선거를 포함하여 현경대와의 국회의원 선거 상대전적은 현재까지는 3전 전승이다. 이후 열린우리당 제주도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친박으로 분류되어 공천 탈락한 현경대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보수진영의 표가 갈려 비교적 수월하게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독도영토수호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번에는 지난 총선과는 반대로 현경대 후보가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았고, 이에 불복한 2명의 후보가 전부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또 표가 갈렸다. 같은 해부터 대한민국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다가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으로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 201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에는 안철수와 문재인 간의 내분에서 문재인의 사퇴를 촉구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제주도 농축산식품국장을 지내던 새누리당 양치석 후보와 국민의당 장성철 후보와 대결하게 되었다. 출구조사 때 양치석 후보와 접전이었지만 예측 1위였고 그 기세를 몰아 1만 1707표차로 압도하여 양치석 후보를 꺾고 4선 고지에 올랐다. 단 한번 낙선도 없고 탈당 없이 무려 4전4승. 제주도 헌정 사상 최초로 4연속 당선 기록을 썼다.[9]

20대 국회가 출범한 이후 첫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 출마했다. 기사

2020년 1월 12일,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

이후 2020년 11월 23일, 남관표 대사의 뒤를 이을 제25대 주일대사로 내정됐다.# 한국의 현역 정치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일본통이며 일본에서도 강 전 의원의 선임에 대해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인사로 보고 큰 관심을 보였다.#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 내정자가 쿠릴 열도 4개 섬 등과 관련해 일부 언론에서 2011년에 러시아 영토라고 말했다는 지적이 나온데 대해 일본 언론에 해명했다.#

3. 사건사고/논란[편집]

3.1. 제주도에 중국 공안 들여와야 발언 논란[편집]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중국 공안을 제주도에 들이라고 발언해, 논란이 있었다.#

3.2. 2019년 일본의 대한국 경제 보복 관련 의원총회 연설[편집]

강창일, 정부의 日대응 비난하자···손가락 X 표시한 이해찬

2019년 7월 1일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가 발생했는데 이후 4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례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문재인 정부가 원칙과 명분에 집착해 일본과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미 2018년 위안부 판결 때 예견했던 일에 정부가 손 놓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때 "정치적 원칙과 명분을 가지고 정치적 문제를 풀어나갔어야 하는데 우리는 피해자 단체들과 대화를 해 의견을 수렴하는 동안 시기가 지나버렸다"는 말 때문에 구설수가 있었다. "피해자들의 의견을 다 들어줄 순 없고 대일관계와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식의 (민주당 지지층 대부분이 질색하는) 일부 보수층의 주장에 찬동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 의총 내에서도 웅성거림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해찬 대표가 손가락으로 'X' 표시를 하며 발언을 막은 게 덩달아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4. 여담[편집]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제주 제주·북제주 갑
열린우리당 그린 로고
56,608 (48.19%)
당선 (1위)
초선
2008
제주 제주 갑
통합민주2008
32,707 (39.29%)
재선
2012
민주통합당 연두
42,006 (43.35%)
3선
2016
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49,964 (47.98%)
4선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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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시 선거구 제16대 국회의원이다.[A] 2.1 2.2 제주시·북제주군 갑 선거구 제17대 국회의원 → 제주시 갑 선거구 제18대 국회의원[B] 3.1 3.2 제주시·북제주군 을 선거구 제17대 국회의원 → 제주시 을 선거구 제18대 국회의원[6] 인근의 신창리, 조수리, 청수리와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진철훈 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이사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7] #[8] 상당히 독실한 불자라고 한다. 실제로 불자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정각회에서 회장직을 맡았었고, 불교에 관련된 방송 프로그램에도 많이 출연하였다. 아내도 '피안행'이라는 법명을 가진 불자이다.[9] 제주도에서 최다선인 현경대(5선), 현오봉양정규(각각 6선)전 의원은 3연속 지역구 3선은 했지만(현오봉: 6, 7, 8대, 현경대와 양정규는 14, 15, 16대) 현오봉 전 의원은 9대에서 유신정우회(사실상 비례대표)로 원내입성이라 대수가 끊기고, 1980년 전두환 정부 출범 때 정치규제를 당하였고 설상가상으로 2년 뒤에 사망한다. 양정규는 17대 총선에서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17대 총선에 출마한 현경대는 낙선... 그런데 그를 꺾고 당선된 후보가 항목에도 나왔듯이 바로 강창일이다.[10] 잘 들어보면 제주어 특유의 억양이 나온다.-----

Okjin Park
6h ·



1.
2008년 강창일 / 민주당 의원 발언:
모든 전문 학자들, 한일관계에 관심 있고 일본에 국가 형태를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판단하는 것이고 중국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요. 일본은 종전의 패전국에서 벗어나가지고 1990년대 이후가 되면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군국주의화의 길을 걷는 것이 나타나거든요. 여기에 나타난 게 하나가 영토 문제예요. 북방영토부터 센카쿠열도 문제부터 우리 독도 문제까지, 이것은 일본이 가는 길이 군국주의화의 부활이라고 저희들은 진단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군사대국, 경제대국에서 군사대국으로 가는 것이죠.

2020년 강창일 주일대사 내정자:
강 내정자는 이 자리에서 야당 의원 시절이던 2011년 5월 쿠나시르(일본명 구나시리<國後>)를 방문했을 때 취재진에게 한 것으로 알려진 '북방영토는 러시아 영토' 발언에 대해 " 러시아에 빼앗겨 점유(占有) 당했다는 취지로 말했는데 잘 전달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
북방영토가 러시아 영토라고 했었던 과거의 발언이 실은 일본영토라고 말한건데 기자들이 오해해서 잘못 적은거 라고 하는군요.... 재빠른 태세전환에 저도 배우는게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은 GNP에서 차지하는 군사비가 2020년에도 1%미만인데 이걸 군국주의화라고 해석하시는 분이 일본전문가 정말로 맞으세요????? 이분이 생각하는 군국주의라는게 대체 뭔지 궁금하네요....

2.
강 내정자는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은) 문 의장 생각을 설명한 것일 뿐이었다"면서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 역할에 대해 무지(無知)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 뭐 결국 문희상 의장 본인도 말실수했다고 하고 말이죠.. 뭔가 말을 할때는 자신의 위치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신중하게 말하는게 이렇게 나중에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게 되겠죠.. 그냥 일반인이 말하는 것하고는 다르다는것을 잘 생각해야죠..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살고싶었던 세상을 찾아갑니다.


BLOG.NAVER.COM

다산을 찾아서 : 네이버 블로그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살고싶었던 세상을 찾아갑니다. 정약용 생애 / 보정산방 2011. 1. 7. 16:26복사http://sambolove.blog.me/150100370299

1762년(영조 38) ~1836년(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 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이같은 논리가 가장 강렬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전제의 내용은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향촌을 30가구의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여장(閭長)의 통솔하에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된 조세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호포제(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경제의 균산화(均産化)와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사회적 부의 증대를 위해 노동력의 기능을 강조한 공동농장·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한전론(限田論)·균전론(均田論) 등 토지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생산이나 농업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특히 〈전론〉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생산에 주력하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사회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 原政〉·〈원목 原牧〉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왕정의 제일책으로 삼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 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태고 이래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민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정치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한 이상론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다산학).
먼저 〈경세유표 經世遺表〉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 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정약용은 〈주례〉 속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개념을 원용한 상제관(上帝觀)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매개로 이를 군주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천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유덕(有德)한 사람에게 옮겨진다는 것이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상제와 직결된 왕권과 상제와 직결된 민의 자주권 회복에 의해 하나의 통일된 통치체계를 수립하려 할 때 그 모습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며 사적 중간지배층의 배제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의 〈전제 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재정과 밀접한 조세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 이용후생학파).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공사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기구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성의 축조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 브리태니커

[출처] 정약용|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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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 납작 엎드린 강창일, 문희상 비판하며 “일왕? 천황이라 부를것”
기사입력 2020.12.02. 오전 10:48 최종수정 2020.12.02. 오전 11:36 기사원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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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대사 내정자 “문희상 전 의장, ‘일왕’ 관련 무지한 발언 했다”
일본 정치권과 외무성에서 강창일 주일대사 내정자에 대한 불쾌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강 내정자가 1일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 언론사 특파원들과 만났다. 요미우리 신문은 2일 강 내정자가 이날 모임에서 자신의 과거 발언을 ‘석명(釋明)’했다고 보도했다.


취재진 질문 받는 강창일 의원
이 신문에 따르면 그는 2011년 5월 쿠릴열도를 방문했을 때 쿠릴열도는 러시아 영토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이) 러시아에 빼앗겨 점유됐다는 취지로 말했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교도 통신은 그가 “(방문한 것 자체에) 문제는 없었다. (러시아의) 점유 상황을 시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강 내정자는 당시 국회 독도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다른 의원 2명과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러시아가 주권을 행사하는 쿠릴 열도의 쿠나시르 섬을 방문했다. 이에 대해 당시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 내각은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일한의원연맹은 이를 문제 삼아 방한을 연기하기도 했다. 자민당 간사장 대행을 역임한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의원은 국회에서 강 내정자 등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었다.


강 내정자는 2019년 2월 문희상 당시 국회 의장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왕의 사과를 요구한데 대해선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 역할에 대해 무지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강 내정자는 문 전 의장의 일왕 관련 발언이 나왔을 때 “일왕이 위안부를 위문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라며 그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으나 이번에는 ‘무지한 발언’이라며 사실상 그를 비판했다.


지난해 10월 KBS 라디오에서 일왕에 대해 “한국에서는 일왕이라고 말한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선 “대사로 부임하면 천황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강 내정자는 일본 정치권과 외무성 내에서 그에 대해 반발하는 기류가 나오자 서울의 일본 특파원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내에서는 강 내정자에 대한 불쾌감


일본내에서는 그의 쿠릴열도 방문이 부각되면서 불쾌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아그레망(외교사절에 대한 사전동의)을 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이를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하고 있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지난달 정례 브리핑에서 강 내정자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한국 정부의 인사 발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총리 관저 상황에 밝은 도쿄의 소식통은 “스가 총리는 아베 전 총리와는 달리 박지원 국정원장,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모두 만나 호의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며 “그런 상황에서 청와대가 반일(反日) 색채의 강창일 전 의원을 대사로 보낸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스가 내각은 뒤통수를 맞았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스가 내각은 강 내정자에 대한 아그레망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는 한일관계를 다시 벼랑으로 가져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주일 한국 대사관은 강 내정자의 아그레망이 신속하게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부임 절차가 마무리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도쿄=이하원 특파원 may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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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日언론에 과거발언 해명 "부임시 천황이라 부를 수밖에"

송고시간2020-12-0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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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 기자


'북방영토 러시아 땅' 발언에 대해선 "취지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강창일 일본 주재 한국대사 내정자가 '북방영토', '덴노'(天皇) 등 일본과 관련해 논란이 됐던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해 해명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2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강창일 내정자는 전날 서울 시내 모처에서 요미우리,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의 취재에 응했다.

강 내정자는 이 자리에서 야당 의원 시절이던 2011년 5월 쿠나시르(일본명 구나시리<國後>)를 방문했을 때 취재진에게 한 것으로 알려진 '북방영토는 러시아 영토' 발언에 대해 " 러시아에 빼앗겨 점유(占有) 당했다는 취지로 말했는데 잘 전달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 교도통신은 강 내정자가 "(방문한 것 자체에) 문제는 없었다. (러시아) 점유 상황을 시찰하는 것이 (방문) 목적이었다"면서 일본 쪽에선 갈 수 없어 사할린 남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를 통해 방문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서울 교도=연합뉴스)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 내정자가 1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일본 기자들을 만나 일본과 관련해 논란이 됐던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북방영토는 러시아가 사할린주(州)에 편입해 실효 점유 중인 하보마이,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 남쿠릴 4개 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이 부르는 말이다.

옛 소련은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한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 전격 참전한 뒤 1945년 8월 15일의 일본 항복 선언 직전에 이들 섬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옛 소련 시절인 1956년 일본과 합의한 공동선언을 통해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 4개 섬 가운데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넘겨주기로 했지만 지금까지 미해결 쟁점으로 남아 있다.

강 내정자는 또 지난해 2월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일왕 사과를 요구하는 발언을 한 뒤 자신이 일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문 의장 발언은)'천황'(天皇·일본어 발음 '덴노')이 옛 위안부를 위문(慰問)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취지였다"고 말했던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강 내정자는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은) 문 의장 생각을 설명한 것일 뿐이었다"면서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 역할에 대해 무지(無知)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 전 의장은 작년 2월 8일 보도된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을 잡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사죄하면 그 한마디로 (위안부)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키히토(明仁) 전 일왕이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일왕 사죄 문제를 거론했다.

아키히토의 부친은 일본인들이 그의 연호를 따서 '쇼와 덴노(昭和 天皇)'로 부르는 히로히토(裕仁)다.

한반도 식민통치의 성숙기와 절정기가 그의 재위 기간(1926~1989)과 겹치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위안부 문제 같은 수많은 불행한 역사가 그의 재위 중에 벌어졌다.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라는 문 전 의장의 표현이 나온 배경이었다.

하지만 고노 다로(河野太郞) 당시 외무상은 그런 역사적 배경을 외면한 채 "발언을 조심해 줬으면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도 국회 중의원(하원) 예산위원회에서 "많은 국민이 놀라움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 정부 차원에서 거센 반발 움직임이 있었다.



작년 2월 13일 중의원 예산위에 출석한 아베 신조 당시 총리.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결국 문 전 의장은 4개월여 만인 작년 6월 방한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해당 발언에 대해 "마음을 상한 분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강 내정자는 작년 10월 KBS 라디오에서 덴노에 대해 "한국에선 일왕이라고 하자"라고 말한 것에 대해선 "(주일) 대사로 부임하면 천황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현재 천황 호칭으로 한국에서는 격이 낮은 '일왕'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만, 외교당국 차원에선 일본이 공식적으로 쓰는 천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교도통신은 2017년부터 올해까지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강 내정자가 새 주일대사로 부임하면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생각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지일파'로 통하는 강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새 주일대사로 내정한 뒤 일본 언론은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인사라고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강 내정자는 도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일본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고, 2017년부터 올해까지 한일의원연맹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 매체는 강 내정자의 북방영토 방문 문제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강 내정자가 전날 일본 매체를 상대로 해명에 나선 것은 '주재국(일본 정부) 동의'를 받는 아그레망 절차가 진행 중인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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