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CIA 커넥션에 침묵한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
기자명윤효원
입력 2021.02.01
▲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미국에서 공직을 차지한 한국계 미국인 가운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에 임명된 박정현(미국명 Jung Pak)이란 자가 있다. 바이든 인수위원회에 참여하고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기 전에 박정현은 국가정보국(DNI)과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했다.
박정현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지난해 출간된 이란 책 때문이다. 부제는 ‘북한의 불가사의한 젊은 독재자에 대한 전직 CIA 요원의 통찰’이다. 책이 나오자마자 샀다. 그 이유는 2017년 2월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2에서 죽은 김정남 사건을 박정현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쿠알라룸푸르에는 국제공항이 두 개 있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2다. 국제공항은 대한항공 같은 국적항공기가, 국제공항2는 저가항공기가 드나든다. 두 공항은 택시로 5분 거리다. 김정남이 죽은 공항은 국제공항2로 서울 강남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비슷한 분위기다. 김정남이 국제공항2에서 오전 10시50분에 출발하는 마카오행 저가항공기를 타려 한 이유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박정현의 책에 김정남 사건은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난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10장에 나온다. 그는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죽었다고 썼다. 사망 당시 김정남이 입었던 복장은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사망 장소 설명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여성 두 명이 맨손으로 VX라 불리는 독성화학물질을 김정남의 얼굴에 문지르고 달아났다. 신경계에 가공할 손상을 가하는 VX를 두고 박정현은 “단 한 방울로 살상이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물질 중 하나”라고 했다.
김정남을 덮친 이는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와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28)으로 밝혀졌고, 사건 며칠 후 체포돼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치명적 화학물질을 사용했는데도 두 청년은 신경계나 피부, 호흡기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김정남을 돕던 공항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범행에 직접 관여한 리지현·홍성학·오종길·리재남 등 북한인 4명이 사건 직후 말레이시아를 떠나 체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사건 며칠 후 경찰은 북한인 리정철을 체포했으나 증거가 부족하다며 석방했다. 리정철은 3월 초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갔다. 경찰은 또 다른 용의자로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리지우를 북한대사관에서 조사했으나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했다. 같은해 3월31일 이들은 김정남의 유해와 유품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난 2019년 3월 시티 아이샤가 인도네시아로, 그해 5월 도안 티 흐엉이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말레이시아 법원이 이들에게 적용된 살인 혐의를 기각하고 석방시켰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정보기관이 따로 없고, 경찰 내부의 특수부(Special Branch)가 정보와 방첩 임무를 맡고 있다. 이는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공통점이다. 당연히 김정남 사건을 수사한 기관은 일반 경찰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보기관과 얽혀 있는 말레이시아 경찰 특수부다.
2017년 2월 김정남이 죽었을 때 CIA나 국가정보원의 끄나풀이 아닐까 생각했다. 2019년 6월 워싱턴포스트의 베이징 지국장을 지낸 애나 파이필드는 “김정남이 CIA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란 책을 냈다. 필자의 예측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를 취재한 파이필드에 따르면 김정남은 주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 CIA 요원을 만나 정보를 팔았다.
김정남과 미국 정보기관의 연계를 가장 먼저 보도한 언론은 일본의 아사히신문이다. 2017년 5월13일자에서 수사 간부의 발언을 인용해 김정남이 그해 2월6일 오후 홀로 말레이시아에 도착해 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하고 2월8일 휴양지로 유명한 랑카위섬에 있는 어느 호텔로 가서 다음 날인 2월9일 “방콕에 거점을 둔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을 만났다”고 보도했다. 이 미국인은 말레이시아 경찰이 “미국 정보기관과 연계가 있다고 보고 입국할 때마다 감시하던 인물”이었다.
2018년 1월29일 김정남 살인 혐의를 받는 두 청년의 재판이 열렸다. 증인으로 출석한 수사 책임자 완 아지룰 니잠은 김정남이 랑카위의 호텔에서 미국인을 만난 사실은 맞으나 그 미국인에 관한 정보는 획득하지 못했으며 호텔 이름 등 구체적인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로써 김정남의 방문 목적이 미국인을 만나려는 것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2019년 6월 애나 파이필드의 책이 나옴으로써 김정남이 CIA의 정보원임이 드러났다. CIA 경력을 갖고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로 임명된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 박정현의 책은 애나 파이필드의 책이 나온 지 거의 1년이 지나 나왔다. 하지만 박정현은 불성실하고 비겁하게도 김정남과 CIA의 커넥션에는 침묵하고 있다.
김정남이 죽을 때 메고 있던 검은색 가방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현금 12만달러(한화 1억3천421만원)가 들어 있었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노트북 컴퓨터를 포렌식하니 여러 파일이 누군가의 유에스비로 옮겨진 게 확인됐다. 세계 어느 나라나 입국시 별도로 신고하지 않는 이상 1만달러 넘는 현금을 갖고 출국할 수 없다.
박정현의 책을 읽으며 “방콕에 거점을 둔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 CIA 요원”이 남자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박정현은 김정남을 “플레이보이, 순수주의자”라 평했다. 김정남이 CIA 자금으로 추정되는 12만달러를 들고 나갈 수 있게 도우려 한 자는 누구일까. 그 돈은 김정남의 유해를 따라 평양으로 갔을까. 노트북 컴퓨터는 어디에 있을까. 김정남이 CIA만의 정보원이었을까. 김정남을 만났던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은 아직도 방콕을 거점으로 활동할까. 혹시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윤효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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