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2

한민통과 ‘김대중의 배신’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한겨레21

한민통과 ‘김대중의 배신’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한겨레21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1년12월05일 제387호 


한민통과 ‘김대중의 배신’

그의 구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그가 대통령이 돼도 고국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동포들

사진/ 73년 8월 일본의 호텔에서 납치될 뻔했다가 동교동으로 살아 돌아온 김대중씨의 기자회견. 이 납치사건은 한민통의 결성을 막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보도사진연감)


19세기 후반 이래의 고난에 찬 우리 역사는 많은 해외이민을 배출했다. 만주의 재만동포사회, 일본의 재일동포사회, 미주의 재미동포사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해외근거지였다. 실상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해외동포들의 역할을 빼놓는다면 온전히 재구성될 수 없다. 해방 직전 3대 독립운동세력으로 흔히 꼽히는 중경의 임시정부, 연안의 독립동맹,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집단 등은 모두 해외에서 우리 동포들을 기반으로 싸우던 집단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지하다

지난 11월20일 성공회대학교에서는 ‘해외동포와 한국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 정도나마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해외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은 동포들의 공이 매우 크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들의 기여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 이 학술심포지엄은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한국민주화운동에서 해외동포들이 수행한 역할을 뒤늦게나마 평가해보려는 첫 시도이다. 해외동포들이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수행한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작업은 우리의 민주화운동의 전체상을 재구성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일이다.

필자도 이 심포지엄 기획에 처음부터 참가했는데, 이런 학술회의가 기획된 것은 단순히 해외동포들의 한국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여가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서도 꿈에도 그리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동포들의 사연을 알리고자 함이 이 심포지엄을 준비한 중요한 목표의 하나였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흔히 한통련이라 불리는 이 단체는 김대중 대통령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은 귀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동포들을 규합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동포들과 함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통련의 전신으로 약칭은 한민통)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한민통의 초대 의장으로는 김대중이 내정되었다. 해외에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반박정희 세력이 결집되는 데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한민통의 결성식을 1주일 앞둔 1973년 8월8일 악명높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강행했다.

김대중이 납치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들은 한민통의 결성을 준비하던 재일동포사회의 민주인사들이었다. “김대중 선생이 보이지 않는다”는 놀라운 소식에 한걸음에 그랜드 팔레스 호텔로 달려간 이들은 김대중의 호텔방에서 독한 마취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묵었던 옆방에서 권총 탄환 2발과 피묻은 휴지, 배낭, 비닐 박스, 김대중의 담배 파이프 등을 발견하고는 아찔해 했다.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려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들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김대중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민통 회원들은 김대중의 대담기사가 실린 <세카이>(世界) 8월호 50권을 사다가 회견장에 나온 기자들에게 나눠 주면서 김대중을 납치해간 집단이 중앙정보부임에 틀림없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한민련 결성식, 폭력배들의 습격


사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그리워했으나 결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고 윤이상 선생의 빈소.(이용호 기자)


한민통은 이런 상황 속에서 출범했기 때문에 한민통의 반유신독재투쟁 전개는 김대중 대통령 구출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한민통 회원들이 주축이 된 김대중선생 구출대책위원회는 한민통과 표리일체의 관계에서 운동을 벌여나갔다. 김대중이 납치된 그 긴박한 순간에 조직적으로 김대중의 구명운동을 벌인 집단은 한민통밖에 없었다. 김대중은 납치된 지 6일 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왔고, 한민통은 8월15일 결성선언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한민통의 김대중 구출운동은 세계 각 지역의 해외동포들과 국제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국제적인 반박정희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7년 3월22일 국내의 민주세력이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자 한민통은 ‘민주구국헌장서명운동 해외동포추진본부’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한민통의 제의는 즉시 미국, 유럽의 동포사회와 민주단체들의 지지를 받아 해외에서의 서명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유럽, 미국동포사회의 지도자들이 도쿄로 와서 한민통을 중심으로 한 재일동포사회의 민주인사들과 함께 1977년 8월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해외한국인민주운동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약칭 한민련)을 결성하였다. 한민련의 결성은 해외동포사회의 민주세력이 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했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해외한국인민주운동대표자회의의 이틀째 회의가 진행되던 8월13일, 대회장은 민단계 청년단체원 수백명의 습격을 받았다. 물론 이 습격사건의 배후에는 중앙정보부와 주일대사관이 있었다.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민단계 폭력배들의 습격을 맨손으로 막아내던 한민통의 청년단체인 한청의 회원들은 다수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수십년 전 고국을 떠나 박 정권의 폭력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해외동포들은 이 사건을 통해 박 정권의 야만적 폭력을 실감하면서 민주화의 의지를 더욱 다져갔다.

한민통이 중심이 되어 해외의 반박정희 한국민주화운동 세력이 결집하고, 해외와 국내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서로 고무·격려하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예의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였다. 1978년 박 정권은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를 한민통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조작했고, 이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라는 ‘훈장’을 달게 되었다.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한민통 간부들


사진/ 아직도 귀국할 수 없는 송두율씨.(한겨레 이정우 기자)


그러나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든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정사는 정작 한민통 회원도 아니었고, 한민통의 간부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간첩죄로 10년형을 받은 김정사가 6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와 활보하고 다닌 사실은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웅변해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한민통의 초대 의장인 김대중을 옭아매고, 해외에서 진행되는 유신독재 타도투쟁을 말살하기 위한 자작극이었다.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감행하면서 전두환 등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때 김대중을 ‘반국가단체의 수괴’로 만든 것은 바로 그가 한민통의 초대 의장이었기 때문이다. 한민통 또는 그 후신인 한통련과 김대중을 얽어 김대중에 대한 사상 시비를 건 것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에도 ‘한민통 관련 사진 위조사건’이 발생하여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멍에는 김대중을 괴롭혔다.

한민통·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만드는 고리는 우리가 흔히 조총련이라 부르는 총련의 존재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반도의 분단은 일본동포사회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재일동포의 97∼98%가 38도선 이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이 오랜 기간 재일동포사회에서 소수자의 위치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기민(棄民)정책 때문이었다. 정부는 1978년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이유를 “한민통의 조직 자체가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고, 당시 한민통 의장 등 구성원의 성분이 북한에 가서 지령을 받은 공작원이거나 조총련의 조종을 받은 자들이며, 공작금도 김일성의 직접지시에 의해 거액을 지원받고 있으며, 활동면에서도 각종 반한규탄대회 등에 공공연히 조총련과 공동으로 활동하고 있는 점 등의 증거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민통의 간부와 회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 신분인 총련의 성원도 아니고, 무국적자인 조선적도 아닌 대한민국 국적 보유자들이다. 한민통의 창립을 준비해온 70여명의 발기인에는 민단 중앙단장·의장직을 역임한 민단의 원로들과 현직고문들, 그리고 민단 동경과 대한부인회 동경, 재일한국청년동맹중앙본부와 각현 본부 현직장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전원 민단의 단원들이며 조총련 동포는 단 한명도 없었다. 김대중을 대신하여 한민통 의장대행을 맡은 김재화(金載華)의 경우 민단 단장을 8번이나 지낸 민단의 원로이자 한국의 8대 국회의원였으며, 그뒤를 이어 한민통 의장이 된 배동호(裵東湖), 곽동의(郭東儀) 등도 모두 민단의 핵심간부 출신들이었다. 특히 곽동의는 한국전쟁 당시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을 만큼 반공일선에서 활약해온 인물이었다.

해외동포들이 제작한 ‘광주 비디오’

한민통이 결성될 당시 김대중은 재일동포 민주인사들과의 회합에서 대한민국 절대지지, 선민주회복 후통일, 조총련과는 연계하지 말 것 등 세 가지 조직원칙을 밝히면서 “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과 함께 손을 잡고 그렇지 않으며 손을 끊겠다고 통고”했고, 재일동포 민주인사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여 한민통을 결성하면서 초대 의장을 맡기로 하였는데 납치사건이 발생했다고 밝혔다.(<신동아> 1987년 6월호 참조)

조총련과의 연계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재일동포사회에서는 ‘재일의 38도선을 없애버리자’는 표어 아래 민단과 그 청년조직인 한청, 총련과 그 청년조직 조청(朝靑)과 공동성명지지 집회를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특히 한청과 조청의 중앙본부 공동집회는 양쪽의 예상을 넘는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새삼 재일동포들이 조국분단의 아픔과 조국통일 염원을 실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은 유신쿠데타 이후 국내 민주화운동의 절박한 사정과 국내의 반공콤플렉스를 이유로 한민통이 조총련과의 연대사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1980년 3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와 김대중에 대한 연금이 풀리고 그가 복권되자 한민통은 김대중선생 구출대책위원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 위기 상황에 이르자 한민통은 즉각 이 위원회를 재건하여 김대중의 제2차 구명운동에 돌입했다. 한민통은 즉각 계엄사령부가 조작한 ‘김대중 일파에 대한 중간수사 발표문’의 허위성을 폭로하였다. 한민통의 이러한 활동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세계의 광범한 인사들의 의분을 불러일으켜 김대중 구출을 위한 운동단체들이 일본의 주요 도시는 물론이고 범세계적으로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민통 상임고문 배동호 등은 여권도 없이 일본 법무성의 재입국 허가증만으로 1980년 6월 해외로 달려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간사회에 참가하여 한국민주주의와 김대중이 처한 상황을 널리 알렸다. 독일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빌리 브란트 서독 사민당 당수가 의장으로 있던 이 모임은 이후 김대중의 구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민주화운동과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전력을 다한 것은 한민통 등 일본의 동포단체만이 아니었다. 유럽과 미주동포들 역시 해외에서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조국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우리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광부와 간호사로 서독에 간 동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의 동포사회는 1967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출발 초기부터 용공조작의 대상이 되었다. 돌아가신 윤이상 선생이나 지금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송두율, 정규명, 이희세, 최기환 등 유럽 동포사회의 민주인사들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그리고 한국민주화에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던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서 청춘을 다바쳤다. 우리 모두가 광주의 참상을 알지 못하던 시절 한민통이나 유럽의 민주인사들이 제작한 비디오테이프는 광주의 진상을 국내와 전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유럽 정당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이분들은 불원천리하고 찾아가 행사장 입구와 호텔 로비에서 관계자들을 붙들고 조국의 민주화와 김대중 구명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또 유엔인권위원회가 있는 제네바에서는 매일같이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없었으면 오늘의 김대중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다.

고향에 오고 싶으면 반성문을 쓰라고?


사진/ 지난 11월20일 성공회대에서 열린 '해외동포와 한국민주화 운동' 심포지엄. 우리 사회는 해외동포들의 공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도 10년 가까이 미국에 있어보았기 때문에 해외에서 어머니 조국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안다. 이역만리 외국에서 조국을 그리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쓴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대신 정부는 이들에게 고향에 오고 싶으면 반성문을 쓰라고 요구했다.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인 윤이상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국을 그리워했으나 결국은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한스럽게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 했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를 기린다며 추모음악회를 열고, 추모비를 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반성문이라니, 도대체 돌아오지 못하는 동포들이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군사정권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벌인 것을 반성하란 말인가? 해외에서 외국인노동자로 살면서 온갖 차별에 맞서 민족주체성을 지켜내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것을 반성하란 말인가? 아니면 김대중 대통령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기 위해 노력한 것을 반성하란 말인가?

조국에로의 험난한 길을 그리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훈장도 경제적인 보상도 아니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연루자들이 민주화운동공로자로 선정되고 큰 보상금을 받는 오늘, 정말 김대중을 살려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닌 사람들은 아직도 반국가단체 구성원 또는 반한인사의 낙인 아래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고향이 남쪽인 한통련 인사들의 경우 부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돌아올 수 없고, 죽어서 고향에 묻힐 수도 없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조총련계 동포들도 무리지어 고향 땅을 밟는데,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자인 이들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고 있다.

최근 수지김 사건에서 보듯이 단순살인사건도 정보기관의 음습한 밀실을 거치면 이북의 납치미수사건이 되고 만다. 지난 1990년대에도 한통련은 조작간첩사건을 만들어내는 원천이었다. 조국에서 일본을 방문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재일동포들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자연히 한통련 회원들을 만났고, 공안당국은 남매간첩단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처럼 한통련이라는 이름은 수구반동세력에는 온갖 조작간첩사건을 만들어내는 요술방망이였다. 조총련동포들의 자유왕래가 실현되는 지금, 수구세력이 끈질기게 한통련을 물고늘어지는 것도 분열과 대립을 넘어 화해의 새 시대로 흐르는 도도한 물줄기를 되돌려보려는 미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이북과 조총련에게까지 쬐이는 지금, 대한민국 국적의 한통련 회원들과 유럽과 미국의 민주인사들이 고국을 그리면서도 고국을 찾지 못하는 역설을 보고 있다. 이들이 그토록 살려내기 위해 애썼던 김대중씨를 수반으로 한 정부는 군사정권에 의해 침해당한 이들의 인권을 회복하고 이들의 고국 자유왕래를 보장하는 대신 엉뚱하게도 이들을 반국가단체원으로 만든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 데 거액의 국고를 지원하고 있다. 정부가 외면한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나서서 그들의 자유왕래를 실현시켜야 한다. 그것만이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와 발전을 위하여 외롭게 노력해온 동포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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