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을 묻다 -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권보드래,천정환 (지은이)천년의상상201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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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박정희 시대의 역사상과 문학과 ‘1960년대의 모순’과 문화정치를 통해 다시 읽음으로써, 그 시대에 배태되어 우리를 키우고 존재하게 만든 현대성과 지성의 풍경을 담았다. 한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1960년을 묻다>는 그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이제까지 없었던 시각으로 이 시대를 해석한다.
미디어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문화정치사,<사상계>, <청맥>등의 지식인 담론과 문학작품을 분석한 지성사적 조명이 교차하면서 1960년대의 풍경은 새로운 빛을 받아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자유와 민주주의, 풍요와 개발을 향한 욕망이 충돌하는 이 시대의 장면들은 여전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즉, 오늘날 한국사회의 온갖 불협화음이 그때에 시작됐으며, 우리는 여태껏 1960년대의 화두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사실과 충격적으로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차
■ 여는 글 1960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감사의 말
1부 1960의 재구성 혁명의 시간 쿠데타의 시간
1장 4ㆍ19는 왜 기적이 되지 못했나? 4ㆍ19와 5·16, 자유와 빵의 토포스
1. 4ㆍ19는 어떤 사건이었던가
피의 화요일, 파괴적이거나 혁명적이거나 / 우발적 행진, 방향 잃은 시위대 / 대학생 신화의 탄생
2. 어떻게 5·16이 가능했는가
활기찬 모색의 시절 / “올 것이 왔구나” / 빛바랜 ‘빵 없는 자유’
3. 혁명의 시간과 쿠데타의 시간
힘과 속도, 세대교체의 정치학 / 4·19가 4·19로서 이어졌다면 / 5·16이 되어버린 4·19
2장 4월의 문학, 근대화론에 저항하다 1960년대 문학의 새로운 정신, 《산문시대》에서 《창작과비펑까지》
1. 4·19의 문학적 불모성과 풍요
개인의 자유와 혁명 / 4·19라는 감춰진 동기
2. 낙오되고 실종된 자유 그리고 문학
유예된 ‘자유’의 양식화 / 《산문시대》, ‘속물도 패배자도 아닌’ / 김승옥, 스스로 법죄를 연민하는
3. 이청준의 정신주의, ‘허기’의 정치성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빵을 버리는 수밖에” / ‘선택할 수 없는 세대’의 자유
4. 방영웅의 원시주의, 《분례기》의 몰역사성과 불결성
《창작과비평》의 야심작 《분례기》 / “미친놈 아니면 살아” 있을 수 없는/ ‘창비’ 대 ‘문지’ 이전, 1960년대라는 동시대성
3장 엇갈린 운명, 1960년대 ‘지성’과 사상전향 동백림 사건 임석진과 통혁당 사건 김질락의 삶과 사상
1. 분단-‘후진국’의 지성과 사상선택
후진성의 모순적 힘 / 반곡독재 국가에서 사상을 갖는다는 것 / 스스로 침묵하거나 말을 빼앗긴 지식인들
2. ‘웅얼거린 갈릴레이’, 임석진의 전향과 행로
갈릴레이의 위장전향 / 두 번 월북한 헤겔철학의 권위자 / 박정희 앞에서 자수한 간첩 / 간첩을 창작하고 간첩을 용서한 권력 / 침묵 속에 ‘학문’으로 살아가기
3. 김질락, 용서받지 못한 희생양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 ‘과잉전향’의 인식론과 우익적 논리 / 전향선언문의 텍스트성과 지성의 책임 / 분단정치의 뫼비우스 띠
|보론| 현대 한반도에서의 사상전향 연구를 위하여
권력획득과 전향 문제 / 한국식 전향의 특수성
4장 “내 귀에 도청장치” 간첩의 존재론과 반공영화 텍스트의 문화정치
1. 간첩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간첩은 어떤 존재인가? / 그들의 얼굴
2. 나는 ‘간첩’이 아니고 너는 ‘간첩’이고
간첩의 유명론 / 주권권력의 카운터파트
3. 그토록 수많은 ‘간첩들’
표상공간에 잠입했거나 체포된 ‘간첩’ / 잠입에 실패한 간첩, 민주화 이후 포착된 간첩
4. 간첩·반공영화의 텍스트 원천
심리전 도구로서의 반공영화 / ‘국가’라는 이름의 창작자 / 〈고발〉, 1960년대 간첩서사의 새 표상공간 / 간첩영화의 미래
2부 1960의 정신현상학 지식과 지성의 안과 바깥
5장 중립의 꿈, 1945~1968 최인훈 소설의 정치적 상상력과 ‘제3의 길’ 모색
1. 냉전 너머 아시아를 생각하다
소설로 쓴 국가론 《총독의 소리》 연작 / 중립의 비정치적 유토피아를 노래하다
2. ‘하나의 세계’는 불가능했나?
미국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나라 / ‘하나의 세계’냐 ‘세계의 궤멸’이냐 / 공존과 협력의 길
3. 중립의 꿈과 세계의 상상지리
한반도 중립은 “소련만 불로소득케” 되는 셈? / 중립의 모델, 오스트리아와 라오스 사이
4. 《태풍》에 나타난 중립의 종말
좌절된 중립의 꿈에 대한 조사(弔詞) / 만하임 혹은 ‘아이히만’ 사건과 부활의 논리
5. 다시 그 불온한 변신담 불러내기
강소국(强小國) 모델과 제3의 길 / 냉전 이후《화두》의 의미
6장. 민족 혹은 소명의 나르시시즘 1960년대식 지성과 민족본질론 그리고 ‘한국학’의 풍경
1. 민족주의와 ‘아메리카’의 매혹
후기-식민지화와 아카데미즘의 구조화 / 일본 유학파와미국 유학파
2. 1950년대의 ‘민족’과 1960년대의 ‘민족’
어중간한 ‘바지저고리’ 같은 것 / 4·19라는 재출발 / 1960년대 민족주의의 성격과 모순
3. 문화적 종족본질론과 이어령의 한국문화론
“흙속에 저 바람 속에” 던져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 자의적인 한국문화론 / 이어령 붐과 민족의 자기의식
4. 함석헌과 박정희, 수난과 사명의 민족 서사
민족적 소명의 나르시시즘 / 민족개조의 사명과 ‘우리 민족의 나갈 길’ / 민족성 또는 “한국인의 이상기질”
5. 문학적 지성과 민족주의, 조동일과 김현
김현의 경우, 자유주의 문학적 지성의 전사 / 1960년대식 ‘지성’의 지양, 1970년대의 새로운 분화
7장 《사상계》가 사랑한 세계의 지식 냉전 시기 세계 지성과 한국
1. 새로운 지(知)의 세계를 만들다
4월혁명과 《사상계,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 《사상계》가 번역한 세계의 지식 / 어떤 외국 사상이 들어왔나?
2. 한국 지성의 ‘비밀’ 《엔카운터》
“빌려드릴 수 없”는 잡지 / 《엔카운터》와 문화자유회의 / 《사상계》 속 《엔카운터》
3. 문화자유회의와 1960년대의 지식ㆍ문화계
문화자유회의 ‘한국지부’의 활동 / 사상계가 사랑한 잡지들, 그리고 냉전(기) 자유주의 / 문화자유회의의 파국과 《사상계》의 위기
3부 1960의 망탈리테 박정희 레짐과 현대성의 탄생
8장 자기계발 혹은 실존을 위한 책읽기 ‘60년대식’ 독서와 자아의 운명
1. 1960년대에 완성된 ‘근대의 책읽기’
근대의 개인에게 필요한 ‘처세·수양’의 담론 / 1920년대의 ‘수양’, 1960년대의 ‘성공’, 2000년대의 ‘자기계발’
2. 1950~1960년대 초 자기계발서의 경향
수양 독본의 종언 / 새로운 자기계발 상품, 미국산 카네기
3. 잘 팔리는 행복론과 불행한 사회
자기알기, 자기돌봄 / ‘처세의 기술’과 ‘세대론’
4. 교양주의 전성시대, 전혜린과 ‘문학소녀’
전혜린과 전봉덕, 식민지 부르주아 교양주의와 엘렉트라 드라마 / 소녀시대, 대중적 교양주의와 문학
5. 박정희식 개발시대, ‘60년대식’ 자아의 운명
교묘한 변주 / 국가주의에 포획된 교양
9장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의 ‘교양’과 자유교양운동 교양의 재구성, 대중성의 재구성
1.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
‘동원’과 ‘탈동원’의 문제 / 독서운동이 민족중흥을 가져온다?
2. 유신 스타일의 인문주의와 자유교양운동
“빨리 바르게 쉽게” 고전 100권 읽히기 운동 / 대통령기쟁탈전국자유교양대회 개최와 《자유교양》 발간 / 문화능력이 곧 국방능력? / 자유교양대회의 팽창과 소멸
3. 교양의 재구성, 대중성의 재구조화
매 맞아가며 고전 읽기 /교사들도 동원되다 / 고전교육의 효과와 내면화 / ‘반교양의 교양’과 탈동원 효과 / 교양과 대중문화의 양가성
10장. 아프레걸 변심담 혹은 신사임당 탄생설화 1950~1960년대, 성과 세대의 표상정치학
1. 4월의 반동? ‘여성은 가정으로!’
분노한 남성, 혁명과 보수성
2. 1950년의 여성, 아프레걸과 자유부인
자유라는 이름의 통속이 유행하다 / 차디찬 육체의 주인공들 / 자유부인 현상, 계·댄스·자모회
3. ‘젊은 사자들’의 유행과 그 누이들
‘아프레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 ‘젊은 사자들’과 세대-젠더의 교체 / 4월혁명과 여성, ‘가정으로’와 ‘사회로’ 사이
4. 혁명의 뒷골목에서
‘어린이’도 ‘첩’도 데모하던 나날 / ‘영웅적 지도자’를 구함 / 아프레걸에 대한 부정과 순결의 환상 / 다만 ‘참아야’ 하는 시대의 개막
11장. ‘1960’은 왜 일본문화를 좋아했을까? 일본문화에 대한 한국사회의 분열증
1. “또 하나의 기적” 한류?
타인의 시선 /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와 ‘금수조치’
2. ‘4·19’는 왜 일본문화를 좋아했을까?
일본문화의 유행, ‘친일’과 ‘트렌드’ 사이 / 1960년대 ‘일류’와 일본문학 / 김승옥 생각의 모순 / 한국 대중독서계를 평정한 이시자카 요지로
3. 1960년대 민족주의의 여러 얼굴
1965년의 분열증 / 《빙점》 열풍 전후
4. 열고 또 막기, 그리고 희생양 만들기
박정희의 7·13 공양과 후속 법적 조치 / 관제 민족주의의 희생양이 된 대중문화 / ‘한류’나 ‘일류’ 너머
■ 맺는 글 ‘개발’과 ‘민주화’를 넘어
■ 주 / ■ 주요 참고논저 /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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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권보드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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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편집위원. 한국 근현대문학 전공자. 현재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연애의 시대』, 『1960년을 묻다』(공저), 『3월 1일의 밤』등이 있다.
최근작 : <서울리뷰오브북스 5호>,<서울리뷰오브북스 4호>,<서울리뷰오브북스 2호> … 총 29종 (모두보기)
천정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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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산 출생. 한국 현대 문화사와 문학사 연구자. 『문화론적 연구’의 현실 인식과 전망』(2007),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 『근대의 책 읽기』(2003) 등을 발표하여 한국 현대문학사 연구의 폭을 넓히고, 『대중지성의 시대』(2008),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스포츠민족주의와 식민지 근대』(2010), 『자살론―고통과 해석 사이에서』(2013),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2014) 등을 썼다. 『혁명과 웃음―김승옥의 시사만화《파고다영감... 더보기
최근작 : <숭배 애도 적대>,<문화과학 108호 - 2021.겨울>,<현대사회와 범죄학> … 총 3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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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파국이 온다>등 총 73종
대표분야 : 조선사 1위 (브랜드 지수 7,873점), 철학 일반 18위 (브랜드 지수 25,103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1. 196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이 책이 말하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개발’과 ‘독재’를 주도한 산업화 세력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한 민주화 세력의 격전지이다.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이 서글픈 대립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갈등의 기원은 자유로 상징되는 1960년의 4.19와 빵으로 표상되는 1961년의 5.16일 것이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집단기억으로 나뉘었고, 이후 한국 사회는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상투적인 ‘대서사’만이 범람해왔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1960년대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라는 시각이 요청된다.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천정환(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은 ‘문화정치’와 ‘지성’이라는 관점으로 ‘오늘의 한국’을 만든 1960년대를 탐색하였고, 그 결과를《1960년을 묻다-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이라는 책으로 선보인다. 이 책은 박정희 시대의 역사상과 문학과 ‘1960년대의 모순’과 문화정치를 통해 다시 읽음으로써, 그 시대에 배태되어 우리를 키우고 존재하게 만든 현대성과 지성의 풍경을 담았다.
한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1960년을 묻다》는 그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이제까지 없었던 시각으로 이 시대를 해석한다. 미디어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문화정치사,《사상계》,《청맥》등의 지식인 담론과 문학작품을 분석한 지성사적 조명이 교차하면서 1960년대의 풍경은 새로운 빛을 받아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자유와 민주주의, 풍요와 개발을 향한 욕망이 충돌하는 이 시대의 장면들은 여전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즉, 오늘날 한국사회의 온갖 불협화음이 그때에 시작됐으며, 우리는 여태껏 1960년대의 화두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사실과 충격적으로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형성된 ‘문화적 현대성’은 이제 포스트모던의 흐름 속에서 소멸ㆍ해체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위력적이다. 과연 ‘문화적 현대성’은 지성(인문학)과 교양(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왜 1960년대인가?” 둘이 함께 책을 쓴다고 말했을 때 가장 먼저 돌아온 물음이었다. 얼마 전〈불후의 명곡〉에 신중현이 출연했다. ‘전설’답게 신중현은 백발을 휘날리며 빨간 일렉트릭기타를 옆에 두고 앉아, 씨스타의 효린이〈커피 한 잔〉(1964)을 부르고 노브레인이〈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1969) 등을 리메이크해서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주뻘 가수들을 격려했다. (…) 노브레인은 기성의 권위 같은 건 우습게 여긴다는 펑크밴드답지 않게, 가장 공손한 태도로, “한국 록의 창시자” 신중현 선생님이 없었다면‘ 오늘날 저희 같은 밴드도 없을 것’이라며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바로 이 상황, 전설의 살아 있음, 그것이 이 책이 전하고 싶은 첫 번째 이야기다. 정치와 문화 전반에서, 1960년대에 첫 무대에 오른 그들이 한국 ○○의 창시자가 됐다. 더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창시자가 아니라 중창자(重創者)이거나 중시조(中始祖) 같은 존재다. 1930년대 혹은 1950년대를 살아간 선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창시자’라는 명명은 큰 과장이거나 오류가 아니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는 한국의 지성사와 문학 분야에서 그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제도와 정신은 1960년 이래 새로운 시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살아 있다.
─<여는 글>, 5~6쪽
오늘날의 기원은 사실 4·19 자체가 아니라 5·16이 돼버린 4·19다. 공을 이룬 것은 개발독재정권이요 이후 문제에 대처하지 못한 것은 무능한 후계자들 탓이라는 투다. 그러나 1960~1980년대의 기록적인 경제성장이 개발독재정권 덕이었다면 1990년대 말의 금융위기 또한 개발독재정권의 후과(後果)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이 경제성장에 힘입은 만큼이나, GDP 10위권의 번영 속에서 더 쓰디쓴 대립과 소외와 원한의 심정 또한 고도성장의 부산물이다. 개발독재정권이 만든 국가 모형의 영향은 그토록 강력하다. 오늘날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1960년대 이래 한국이 걸어온 길이 다른 데 처했다고 생각한다면, 돌아가야 할 곳은 박정희 시절이 아니라 4·19라는 원점 바로 그곳이다.
─<맺는 글>, 557쪽
2. 응답하라 문화연구! 박정희 레짐과 현대성의 탄생
― 이 책에서 듣다
《1960년을 묻다》는 문화연구(또는 문화론적 연구)의 관점에서 1960년대를 탐사한다. 문화연구는 연구방법과 시야의 전환을 아우르는 말이다. 문화연구는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새롭게 천착하고 지식과 문화제도의 기원을 탐사해 오래된 연대(年代)의 당대성을 복원해왔다. 민족·남성·엘리트에 가렸던 존재를 되살렸고, 제도·담론·표상이라는 미개척 분야를 답사해 식민지 시대 사회·문화에 대한 새로운 상을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1945년 이후의 문학·문화사를 다시 읽고 연구하는 흐름이 활발해졌다. 또 그 시선은 1970~1980년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며, 방향은 무엇일까? 근대 초기나 식민지 시기에 대한 문화론적·고고학적 접근에 대당(對當)될 만한 의의를 가진 것인가? 문화연구의 시각에서 해방 이후 역사를 다시 읽는다면, 무엇을 겨냥해 어떤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까?
한국의 사회·문화적 현대성은 19세기 말~20세기 초를 첫 번째 단계로, 1920~1930년대의 식민지 근대화를 두 번째 단계로 하여 구축되었다. 탈식민과 전쟁을 거치며 한국의 현대성은 재구조화된다. 남한에서는 그 굴곡을 1950~1960년대에 걸친 사회·문화 전반의 미국화와 냉전 체제화, 미디어와 대중의 폭발적 (재)형성, 근대문화제도의 (재)구축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새로운 현대성은 《1960년을 묻다》에서 다룬 1960년대에 안착, 1990년대까지 그 힘을 유지·존속시킨다. 오늘날까지 현대성은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
해방 이후를 대상으로 한 문화연구의 출발은 문제적 근과거와 문제적 당대를 동시에 문제 삼으려는 의욕의 표현이다. 오늘날의 문화연구자들은 근대화와 민주화라는 열쇠말로 요약되곤 하는 지난 반세기를 어떻게 달리 성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이제 막 스스로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연구의 전환은 ‘1987년 체제’의 성립과 함께 20대를 시작하고, 2000년대에 30대를 보낸 세대가 품어온 갈증의 표현이자, 새로운 지적·인간적 현실에 대한 절실한 인문학적 요청을 끌어안고자 하는 전신(轉身)의 시도였다. 한편 그것은 전(前)세대가 부여한 ‘국문학’이라는 오래된 판으로부터의 비약이자 즐거운 탈주의 시도이기도 했다. 어느새 ‘문화론적 연구’는 2000년대 이후 국문학 연구의 핵심 경향 같은 게 됐다. 심지어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로서 100퍼센트 사실이 아닌 착시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전환’은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진행 중이다. 우리는 전환을 더 발본화하거나, 스스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오래, 신진처럼 문제를 제기하고 비정형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 이 책은 그간 ‘문화론적 연구’에 대해 제기돼온 이런저런 격려와 우려에 대한 조그만 답이기도 하다.
─<여는 글>, 11쪽
3. 1960년대의 모순과 우리 시대의 모순
― 이 책을 보다 : 4 · 19세대와 386세대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정치의 장에서 ‘산업화 대 민주화’라고 상투적으로 요약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대서사’를 더 적실한 것으로 수정하려 한다. 1960년대의 한국인들도 ‘두 송이 장미, 한 그릇의 밥’을 함께 원했다. 밥과 장미는 각각 생존(경제)과 인간적 존엄(민주주의)을 상징한다.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모순적이고 길항하는 힘들의 각축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 힘들은 ‘민주화 대 산업화’처럼 서로 이항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민주화와 산업화가 각각 인간적 존엄과 인간계발의 필요조건이듯, 양자는 1960~1980년대 개발연대의 화두이자 지상목표로서 경쟁하고 보완되며 커져왔다.
1960년대는 4·19와 5·16의 연속과 불연속, ‘빵’(평등에의 욕구)과 ‘자유’(개인주의화의 욕망) 사이의 모순(1장), 박정희와 김일성의 적대적 공생(3·4장)에도 관철된다. 또한 이 책을 읽다보면 《사상계》의 모순(7장)이나 4·19세대와 1960년대 지성의 자기모순(2·5·6장)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유와 반공을 동시에 살고, 민족(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열렬히 서구를 추종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광기가 춤을 추며 사회·문화가 전반적으로 ‘군사화’, ‘남성화’되는데도 대중의 문화적 역능과 여성의 역할이 증대한다든지(10장), 황금만능·경제 제일의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속물과 졸부를 곳곳에 등장시켰음에도 저항의식과 인문학적 교양이 함께 커가는 드라마적 변증법이 펼쳐지는 광경도 있다(8·9장).
새로 출발하지 않고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광풍 속에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조가 4.19세대가 만든 체제의 종결점이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4?19세대의 인문학적 상상력도 어쩔 수 없이 낡아가는 듯하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냉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19세대가 냉전 시대 한국의 생존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 지금은 냉전 이후 어떻게 살 것인지가 화두다. 학문 분과는 재편돼야 하고, 제도는 바탕에서 다시 생각되어야 하며, 취업과 복지의 구상도 다시 짜여야 한다.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모색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시, 1960년이 필요하다.
─<맺는 글>, 5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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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소 알라딘을 애용하지만 예스24에서 15% 할인해줘 거기서 샀다. 알라딘은 왜 할인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2. 논문모음집이라 그런지 조금 어렵네요. 3. 서문과 맺는글이 좋았습니다. 왜 1960년대를 주목하는지 공감이 되었습니다.
봉천동 2014-06-2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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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묻다.
이 책은 서문이 매우 마음에 든다. 저자들이 정말로 '이 책을 왜 썼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7쪽. 그는 여의도 정치판으로부터 평범한 사람의 정치적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모델'이자 망령인 것이다. 그 망령을 영원히 묻어버리거나 쫓아내기는 참 어렵다. 아마 한국에서 국가주의가 기능하고 '경제성장'에의 환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더 오래 우리는 박정희의 포로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박정희는 인민주의(포퓰리즘)적인 '통치성'과 발전국가의 환각을 강렬하게, 길어도 '너무' 길게, 보여주고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절대빈곤과 후진성 위에 성립한 악몽이지만, 그 통치는 단지 폭력으로 점철된 독재와 괴상한 법률, 그리고 정치제도로만 환원될 수 없는 총체적 차원의 것이기도 했다. 그 '총체'를 이 책에서는 '문화'라고 부른다.
8쪽. 우리는 '좋은 전설'로 아직 살아있는 1960년대와, 우리들 삶과 마음속의 어두운 망령인 1960년대를 함께 성찰하고 한꺼번에 벗어나야 한다. 사실 그럴 만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들, 1960년대의 주역들이 주춧돌을 놓았던 민주주의와 '근대성'은 이미 낡은 것이 됐다. 또는 '종언' 휘슬이 울렸지만 인위적으로는 연장전이 계속되고 있는 '근대문학'처럼, 아직 살아 있다 하더라도 곧 마를 우물 같은 것이거나 낡은 참조 대상일 뿐이다.
8쪽.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죽지 않은, 바꿔 말하면 박정희, 장준하, 함석헌, 임석진, 김질락, 최인훈, 전혜린, 이어령, 김현, 이청준, 백낙청 같은 고유명사에 실린 그 시절의 정신과 지성, 아니, 단지 거명된 엘리트나 지식인만의 것은 아닌 수만에 달했던 <사상계>와 그보다 더 많던 <여원>의 독자들처럼 대중문화, 사상, 교양 등에서 '아래로부터' 새로운 현대를 창출해냈던 무명씨들의 망탈리테, 그러나 결국 서서히 사라질, 그러나 오늘에 맞닿은 근과거, 이들이 이 책의 주제이자 '배경'이다.
11쪽. '국문학자'들이 왜 이런 책을 썼는지 궁금해할 독자가 혹 있을까. '문화론적 연구'란 연구방법과 시야의 전환을 아우르는 말이다. (중략)우리는 저 불타버린 1980년대의 사회과학과 민중, 민족문학 속에서 자라났고, 환멸과 욕망의 1990년대에 근대성론과 '포스트'사상을 배웠다.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도로서 우리를 키운 팔 할은 김윤식과 조동일, 김현과 백낙청이었으며, 전국적으로 균일한 '국어국문학과'의 교정과 이념의 체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장대한 체계가 서서히 힘을 잃더니 와르르 무너지는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중략) 문학연구의 전환은 '1987년 체제'의 성립과 함께 20대를 시작하고, 2000년대에 30대를 보낸 세대가 품어온 갈증의 표현이자 새로운 지적, 인간적 현실에 대한 절실한 인문학적 요청을 끌어안고자 하는 전신의 시도였다.
12쪽. 신자유주의 체제 최전선의 하나인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때로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로 맹목적이고 순수한(?) '경쟁'을 강요한다. '(영어)논문'이 지상 최고의 글쓰기처럼 된 오늘날 대학에서 이런 '책'은 매우 홀대받는다. 더구나 이렇게 한가롭게(?) 공저 따위를 출판하는 일은 두 사람이 다 '가진 것 많은' 정규직이니까 가능한 일이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 책의 '물적 토대'이다. 대학문화를 지배하며 한국 지성사에서 분명 새로운 역사적 국면을 만들고 있는 이 간교한 양과 돈 중심의 문화는 분명 심각한 연구거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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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모로 2013-03-19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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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권보드레, 천정환, 『1960년을 묻다』, 천년의 상상, 2012
응답하라 1960년! / 오영진
대선 이후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박근혜 씨의 당선이 1960년 박정희체제로의 회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를 불식하고 글을 시작하자. 이 책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본격적 비판서가 아니다. 제목처럼 1960년대를 그 무대로 하지만 유신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1970년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면을 크게 할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저자들이 4.19혁명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5.16이 돼버린 4.19”가 이들의 비판적 조명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4.19혁명의 의미를 이승만의 하야에 두는 것이 아니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체제의 본격적 출범까지로 범위를 넓혀 고찰해보는 데에 이 책의 목표가 있다. 쟁점은 명확하고 간단하다. 4.19혁명은 왜 자유의 정신을 완성하지 못하고 ‘늙은 가부장’을 ‘젊은 가부장’으로 교체하는 것에서 멈추었는가?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의 주범이라고 보는 것은 쉬운 상상력이다. 이렇게 내러티브화된 역사는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전형적인 장면들을 심어놓는다. 4.19의 정신을 짓밟은 박정희의 군화발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테레오타입(stereo-type)화된 역사에 만족할 때, 비난은 가능하지만 비판은 불가능하다. 그동안 문학전공자들의 문화연구가 갖는 미덕은 당대의 표상들을 구분 없이 가로질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입체와 다양을 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상 속에 자리 잡은 전형화된 장면(Scene)들을 부순 일이다.
책을 들여다보자. 4월 혁명 후 몇달 뒤 실시한 유권자 대상의 설문조사에는 “초인적인 독재자를 구함”이라는 의견이 적혀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자유’와 ‘민주주의’의 혼란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를 포기하려는 경향은 사실상 예비되었던 것이다. 이후 5.16쿠데타로 ‘고귀한 무질서’가 ‘빵’에 대한 요구로 전환될 때 다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자유에 대한 실존적 고민에 골몰하던 ‘아프레 걸’이나 ‘자유부인’은 어느새 국가동원체제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신사임당이 되어버린다. 이청준은 ‘굶기의 자유’로, 김승옥은 ‘자기파괴의 자유’로 나아가나 실은 이는 자유의 정신이 정치적 힘을 잃고 개인을 심문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사상의 자유를 잃어버린 지식인들은 국가만들기의 짝패인 간첩만들기의 희생양이 되어 전향의 테두리에 갇힌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4.19가 5.16에 의해 부정된 것이 아니라, 4.19가 스스로 5.16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자유의 정신은 의외의 곳에서 발현된다. 65년 한일협정반대시위가 상기시키는 반일정서와는 달리 4.19직후 한국의 대중은 일본문화에 흠뻑 빠져있었다. 한편으론 일본문학에 경도되었으면서도 당대 대중의 일본문화수용은 비판하는 지식인의 모순이 드러난다. 60년대 소위 일류(日流)는 청년․대중이 새로운 감각을 열망하며 자유를 사용한 결과이다. 또한, 박정희 체제 국가재건 교육사업의 하나였던 교양주의는 매맞아 가며 배우는 고전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낳았지만 ‘대중’의 독서행동을 질적․양적으로 변화시키고 이들을 조세희, 이문구, 황석영 등의 70년대 본격문학에 접속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권보드레․천정환 각 필자가 약 2년간 집중적으로 발표한 논문 11편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냈으나 그 유기적 완성도는 높다. 각 장이 다양한 분야를 논의하지만 “4.19의 정신은 어떻게 변화되고, 스스로 부정되며 그럼에도 연속성을 갖게 되는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기 때문이다. 독자입장에서 이렇게 입체와 다양으로 복원된 4.19 이후의 풍경들을 주워담는 것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이 책의 내적 논리 두 가지는 따로 논평할 필요성이 있다.
첫째, 이 책은 필자 스스로 밝혔듯이 386세대가 복원한 4.19세대에 관한 책이다. 이 두 세대는 젊은 시절 성공적으로 정치적 존재증명을 완수한 세대들이다. 더군다나 386세대는 이 4.19세대가 이루어놓은 지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학습해온 세대이다. 여전히 민주화의 책무를 완성하지 못한 세대가 산업화라는 반쪽의 성공을 이룬 세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의 혁명에서 미완의 과업을 우리세대의 의무로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겠다.》 이 점에서 이제 문화연구의 경향이 해방이후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기변화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동안 국문학 안에서 문화연구가 전대의 문학연구의 빈자리를 메꾸는 소극적 방식으로 주로 식민지시기를 다루었다면, 해방 이후를 문화론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오늘날 형성된 문학-근대성의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응사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문학’연구의 보충으로서의 ‘문화’연구가 아니라 ‘문화’연구의 보충으로서의 ‘문학’연구가 시도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문화연구의 이론적 토대가 ‘구조’에서 ‘주체’로 강조점이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그간 일련의 ‘기원’과 ‘탄생’시리즈는 역사의 어떤 결절점에서 구조가 주체를 주조하는가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역사철학적 분기점에 대한 판단과 통상의 구조주의적 인식방법이 혼용된 결과 매 시기 ‘기원’들이 탄생한다. 이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강렬도 높은 주체들이다. 이에 들뢰즈는 후기푸코의 작업을 고찰하면서 ‘구조’에서 ‘주체’를 읽는 법을 제안한다. 주체는 파인 홈을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파선을 그리며 외부로 향한다. 이 책에서 조심스럽게 진단했듯이 교양주의에 의해 주조된 60년대의 문학소년․소녀들은 교양의 힘을 품고, 되려 반체제적 활동의 역량을 발휘한다. 이런 장면의 포착을 통해 사태는 모순적이지만 복합적으로 반성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로가 아니라 폭로 이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일 것이다. 언술한 두 논점은 앞으로 이 책이 읽힘으로써 재생산되고 확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바 4.19의 유산은 자유의 정신이다. 이것이 이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4.19의 유산을 어떻게 이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유는 정치적 혼란에의 공포로 느껴지거나 ‘간첩’이라는 정신적 외계에 억압됨으로써 그 자체 거부될 수도 있었다. 또한 정신적 ‘허기’의 자유나 ‘자기파괴’의 자유같은 개인의 내면적 차원에서만 구현될 수도 있었다. ‘문화자유주의’의 영향권에 든 『사상계』와 같이 어디까지나 미국이 지지하는 ‘자유세계’의 정치체제적 ‘자유’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계발의 자유일 수도 있고, ‘아프레 걸’이 보여준 절망에의 자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파노라마 속에서 번뜩이는 이가 있으니 바로 김수영이다. 몇 장의 챕터에서 종종 인용문으로 언급된 그는 자유가 일으키는 신열에 쉽게 열망하거나 회의하지 않고, 자유를 순전히 부정의 정신으로 이해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사물의 규정성을 부정성으로 전환하는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그 자신의 표현대로 “맑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가 4.19 이후 자유의 ‘혼란’을 ‘생동’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이러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문학적 성과가 ‘자유’의 정신에 있다는 것, 아니 4.19 의 정신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된 것은 이 책을 통해 필자가 얻은, 고루해보이지만 의외의 소득이다. 오늘날 우리가 수행해야할 4.19혁명의 미완의 과제란 바로 이렇듯 ‘자유-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가 아닐런지. (문학의 오늘, 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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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독 2013-03-31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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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960년대인가?
2010년대인 지금 왜 "1960년을 묻다"란 책이 나왔을까? 그게 의문이었다. 이 의문점에 대해서 이 책의 작가들은 여는 글에서 답을 하고 있다.
1960년대는 지금 우리를 규정하는 시원이라고... 따라서 1960년대를 보면 지금의 우리를 알 수 있다고.
우리는 '좋은 전설'로 아직 살아 있는 1960년대와, 우리들 삶과 마음속의 어두운 망령인 1960년대를 함께 성찰하고 한꺼번에 벗어나야 한다. 사실 그럴 만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여는 글에서 7-8쪽
1960년대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는가? 바로 4·19다. 그리고 이 4.19는 5.16으로 끝나게 된다. 민주와 자유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던 4.19. 그리고 이런 4,19를 계승했다고 표방하면서 오히려 4.19를 무덤으로 끌고 가버린 5,16.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5.16에 침묵하거나 찬성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독재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1960년대.
1960년대의 문화, 사회,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서 연구한 결과물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너무도 전문적이어서 학자들이나 또는 전공자들이나 보아야 하는 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문적인 연구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표현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50년 우리 사회가 궁금한 사람이 읽으면 재미있게 읽거나 또는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책이다.
작은 제목이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이라고 달고 있어서 박정희라는 개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하는 점을 제목에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 책 내용에서는 박정희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서 문화가 어떻게 왜곡되거나 변질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살피고 있을 뿐이다.
하여 '1960년을 묻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1960년대 중에서도 정치사와 경제사는 빠지게 된다. 문화를 중심으로 1960년대를 살핀 책이라고 보면 된다.
4.19이후 단 1년 만에 5.16이라는 군사쿠테타로 인해 자유는 저 멀리 사라지고, 민주 역시 역사의 뒤안길에 머물러 있게 되고, 문화는 군사정권의 논리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하고, 국민들은 그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맛보기 시작한 때.
알게 모르게 경제 논리가 사회에 침투해 자유와 민주를 경제가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하는 때. 그런 전환점. 그래서 1960년대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의 시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과 비슷한 일을 우리는 겪지 않았던가.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헌... 그러나 지금은 다시 한계에 봉착하고 1990년대의 아이엠에프를 거쳐 우리 삶을 장악한 경제논리.
결국 경제논리에 의해 다른 것들이 다 묻혀버린 지금 이 시대를 1960년대는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1960년을 묻는 행위는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를 묻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를 거쳐 암울한 70년대, 그러나 곧 80년대가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인간은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이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갇혀 오로지 경제논리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지금... 어쩌면 지금은 1960년대의 쌍생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쌍생아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겪었다. 알고 있다. 이 알고 있음을 행위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도 다시 1960년을 물어야 한다. 묻는 행위, 이것은 행동하겠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같은 길을 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답을 찾았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덧글
다른 부분도 다 읽을 만하고 재미도 있지만 특히 4장 "내 귀에 도청장치"는 간첩을 다룬 이야기로서 지금 시대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참 생각할 것이 많다. 헤겔 철학의 권위자인 임석진이 어떻게 동백림 사건과 연결이 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을 송두율과 비교하면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많은 간첩사건들... 1960년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이 4장에서는 처절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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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14-08-2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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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중문화의 역동성
저자는 "1960년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직접적 기원"(553)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4.19혁명으로 문을 연 1960년대는 이윽고 혼돈 속에 빠져들어간다. 4.19 혁명으로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을 보고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위대하신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478)라며 외치기도 했고, 그해 7월에 있었던 총선 여론조사에서는 "초인적 독재자"를 구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497) "선의의 독재"를 갈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발발한 5.16 쿠데타에 대해 대중과 지식인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4.19 혁명 당시 군부가 보인 태도에 대한 우호적 감정과 쿠데타 세력의 민정이양 약속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5.16 쿠데타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책은 아직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가시화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중반의 여러 지식인들의 사상적 경향을 당시의 저작들과 잡지들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이어령과 함석헌이 발견하려고 했던 한국 민족의 특수성, 김수영과 <사상계>가 열광했던 서구식 자유주의, 통일혁명당의 김질락이 북한에서 수용하려 시도했던 공산주의, 최인훈이 꿈꾸었던 중립화 노선 등등 이 시기 다양한 지식인들의 삶과 사상이 교차하는 모습을 이 책은 문화연구의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다. 그 밖에 여성, 교양, 자기계발, 간첩 등과 같은 개념들의 사회적 역사 또한 이 책은 탐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1960년대의 일본문화 수용이다. 4.19 혁명 이후, <빙점>을 비롯한 일본 소설, 일본 음악 등의 일본 문화가 한국으로 급격히 유입되었고, 김승옥은 다자이 오사무, 엔도 슈사쿠, 오에 겐자부로 등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525).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앞두고 이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발생했지만, 반대로 대중적 수준에서 일본문화 수용이 광범위하게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오히려 일본 문물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규제를 가했다. "요컨대 국교 재개를 추진한 박정희 정권은 '매판'과 '반민족'의 혐의를 벗기 위해 대중문화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이 금수조치는 한편으로는 (피상적) 민족주의에 근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급 대중'이라는 엘리티즘적 이분법에 근거한 것이었다"(546)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이같은 한국 지식인들의 모순은 1960년대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문화연구는 꼭 필요한 작업이고,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꼭 나와야 할 책이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대해 무지했던 탓도 있어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쉽게 읽히지만은 않았지만, 지적 흥분을 충분히 제공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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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짱짱맨 2016-12-1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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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을 묻다: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권보드래, 천정환) 2015년 읽은 책 / 책
2015. 3. 14. 12:19
이 글을 보낸곳 (1)
1960년을 묻다
작가 권보드래, 천정환
출판 천년의상상
발매 2012.12.03
1960년대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책.
'미시사'를 탐구했다는 '여공 1970'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던 책이다. 1960년대 끝자락인 68년에 태어났지만 1960년대가 낯설지 않은 것은 1960년대 한국의 모습이 1970년대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한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저자들이 1960년대에 대해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사실 오늘날의 한국에 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의 1차적인 목적인 '1960년대 문화의 충실한 재현'은 오히려 기대에 못 미친 느낌이다. 역시 그 시대를 피부로 느끼려면 당시의 신문, '사상계' 같은 원 사료를 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의 1장, '419는 왜 기적이 되지 못했나'는 1960년대를 규정했던 양대 사건인 419와 516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는 419와 516을 분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일베가 생각하듯 그렇게 간단한 대립 관계로 나타낼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는 일단 419를 주도한 것이 대학생이 아니었고, 고등학생이 선도했던 시위가 '대중 봉기'로 이어졌음을 보인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대중'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 얹은 뒤, 결국 그 밥상을 전유했던 것이다.
419와 516의 연계도 잘 알려진 '올 것이 왔구나' 그 이상이었다. 516 직후 대학생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유기천 평전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416 직후부터 경제 성장에 대한 요구가 엄청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우리의 관심권을 지배한 것은 발전이요 산업주의 사상' '차라리 전체주의 국가라도 세워 숏 카트하자'라는 주장이 다름아닌 '사상계'에 자주 등장했다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정책이 재분배정책에서 경제발전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한 분이 '제2자본론'을 쓴 임원택 교수였다는 것도 놀랍다. 516 세력이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건 것도 (516 민족상!) 역시 419 이후의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었다. 결국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419 직후 '민주주의는 이미 낡았으며, 개발의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516 전에도 뚜렷이 나타났다는 결론이다.
저자는 419가 '현실적 언어라기보다는 문학적 언어로' 재생된 까닭이 바로 419와 516의 (자유와 빵, 혹은 민주화와 산업화의) 현실적 통합을 아쉬워한 일부 지식인들이 419의 '자유'를 가상적으로 분리해낸 데 있다고 주장한다. 419가 516 없이 죽 이어져 왔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질문도 던진다. 솔직히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질문이다. 장면 정부가 이미 경제개발계획을 다 세워 놓았다는 얘기는 나도 80년대부터 들었으니까. 차라리,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극단적이기까지 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 419와 516이 '한몸'이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516이 419의 계승을 주장했었고, 419는 516을 기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 2장, '4월의 문학, 근대화론에 저항하다'는 70년대 창비와 문지라는 양대 산맥이 등장하기 전, 60년대 문학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일단 4월 혁명 자체를 그린 문학 작품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는 위에서 보았듯이 419와 516이 통합되어 버려 '419의 순수성'이 배반당한 데 따른 듯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유'에 천착한 60년대 문학은 결국 419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몸부림이었다. 이청준의 정신주의, 그리고 방영웅(분례기)의 불결성은 모두 516으로 상징되는 '개발'을 봉쇄하여 419로 돌아가려는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것이 바로 김현과 김승옥이 주도한 '산문시대'의 남성 폭력-범죄성이다.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을 공공연한 화제로 담고 있는 소설이 많았다고 하며, 특히 김현이 "(초등학생 또래에 불과한 사촌누이의) 음핵을 만지자 홍조를 띠우며 빙그레 웃었다"는 글을 서슴없이 썼다는 대목에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유명한 김현이 말이다 소아성애자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목이다. 성폭력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은 90년대 송기원의 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에도 나왔었던 기억이 난다. 수십년이 지났어도 인간-남성-의 내면은 그리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 3장, '엇갈린 운명, 1960년대의 지성과 사상전향'은 똑같이 '사상전향'을 했는데도 한 쪽은 헤겔 철학의 최고 전문가로 남고 다른 한 쪽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임석진과 김질락의 얘기를 다룬다. 남과 북 사이에서 한반도의 지식인들이 어떠한 '중간계'나 '회색지대'도 없는 극한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다는 것은 물론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헤겔 철학의 권위자였던 임석진이 북한에 두 차례나 다녀온 뒤 박정희를 직접 만나 자수한 결과 그 유명한 동백림 사건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 그리고 사상계와 쌍벽을 이루었던 '청맥'의 주간이며 통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질락이 '사후 전향'을 하고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을 남겼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자수하여 광명 찾자'등의 국가적 구호가 단지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반공주의의 상투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에게 하는 재귀적인 말이자 스스로의 다짐임을 강조한다. '공산주의자' '좌익'은 타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자체였다는 것이다. 마치 박정희가 한때 좌익이었듯이. 그리고,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정치범에 대한 '전향공작'을 멈춘 적이 없다는 것도 상기시킨다. 지금도 새누리당의 일부 정치인들은 '좌익'이나 '주사파'에서 '전향'한 사람들이다. 김질락의 '어느 지식인의 죽음'은 아직도 반공 교재로 판매되고 있다.
제 4장 '내 귀에 도청장치'는 간첩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첩은 '스파이'와도 다른, 남북의 냉전 체제가 낳은 한반도의 '특산물'임을 주장한다. 특히, 형법상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오랜 법속이라는 대목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송두율 교수의 노동당 입당이 사실로 밝혀지자마자 보수 언론은 그를 '간첩'이라고 했다. 하지만 형법과 국가보안법 어디를 보아도 '노동당원=간첩'이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간첩은 법 이전의, '대한민국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이다. 수많은 간첩들의 생사가 법이 아니라 정치적 자의성에 의해 갈렸다. 황태성, 김질락은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김신조, 김현희는 살아 있다. 형식상 간첩에게 하는 말인 '어둠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구호는 마치 기독교의 교리와 같은, 한국의 핵심적인 '국시'인 것이다.
간첩이 정치적인 개념인 것은 사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박헌영이 다름아닌 '간첩죄'로 처형당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간첩 작전 요원이 "이 제도(=국가)가 없으면 인간의 존엄 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 물적 재부도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장면이 북한 영화에 나온다고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간첩은 남북한 모두의 특산물인 것이다.
제 5장, '중립의 꿈, 1945-1968'은 419 직후의 소설 '광장'에 등장한 한반도 중립화를 다루고 있다. '중립의 꿈'은 1900년대 구한말에 처음 등장한 후 1945년 해방 직후 본격화된다. 저자는 해방 직후 유행한 중립론의 기원을 웬델 윌키가 지은 '하나의 세계'라는 책에서 찾는다. 사실 이 책은 미소 냉전을 전제로 하여 중립화를 추구했다기보다는 냉전 이전, 파시즘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는 미소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었다. 현실 정치에서 '하나의 세계'라는 꿈은 1945년 루스벨트의 사망과 2차대전 종전으로 사실상 이미 사라졌고, 종전 직후부터 미소의 대립과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공포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결국 1947년 우리나라에 '하나의 세계'가 번역 출판된 것은 어찌 보면 적극적인 중립화의 추구라기보다는 이미 때늦어 버린 '통합'에 대한 아쉬움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중립의 꿈'은 '강소국의 꿈'이라는 형태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직무가 끝나면 전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을 때로는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 북유럽 여러 나라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환상 내지 동경은 이미 60년대에도 흔히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 해체로 인한 냉전의 종식은 오히려 '중립의 꿈'의 시효가 다하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립 자체가 어찌 보면 냉전을 전제로 한 말이다. 미소 냉전이 굳어지던 1950년대 중립국의 지위를 새로이 획득하면서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오스트리아의 예는 이제 무의미하기만 하다. 냉전이 끝난 지금 누구도 오스트리아의 중립국 지위를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 양 진영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통합된 국가를 이루었던 유고슬라비아가 소련 해체 이후 오히려 여러 나라로 쪼개져 버린 것은 냉전 종식이 한반도의 통일을 가져올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에 대한 통렬한 반례가 될 것이다. (물론 티토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사망이 유고 해체의 직접적 원인이었지만) 한마디로, 미소 '양극'이 사라지고 미국 '일극' 체제가 된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양극'을 전제로 한 '중립화 통일'이라는 선택지는 이제 소멸된 것이다.
자유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제3의 길'을 찾는다는 고귀한 이상은 헛소리가 되었으며, 이제 남북 통일은 북한을 자본주의 세계화 내지 미국 주도의 일극 안보/경제 체제로 편입시키는, 사실상의 '흡수 통일' 방법만 남아 있는 셈이다. 저자는 '모방과 의존의 질서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한국이 이제 미답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문학적 수사로 끝을 맺고 있지만, 이는 저자들이 정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닌 국문학자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줄 뿐이다.
제 5장에서 저자들은 뜬금없이 최인훈의 소설 '태풍'을 소개한다. 일본 식민지 말기의 대동아공영권론과 50-60년대 인도네시아가 주도했던 비동맹 운동을 결합한 듯한 이 소설은 솔직히 현재의 '친일 척결'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일부 한국인이 '대동아론' '아시아 공동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태평양전쟁에 참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고, 이 '대동아 공영론'이 미소 냉전이라는 새로운 정세 아래서, '아시아-아프리카 단결'이라는 '비동맹 운동' 내지 '중립화'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불온한' 가능성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미소 냉전 시대 중립의 가능성을 파시즘에서 찾았다니!) '대동아론'에 대한 재평가라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식민지 시대 말기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광수 등의 '적극적 친일자'들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유신 직후인 이 작품의 발표 시점 (1973년)만 해도 친일에 대한 경계심리나 적대감이 오늘날만큼 크지 않았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제 6장, '민족 또는 소명의 나르시시즘'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미친 듯 롤러코스터를 타는' 1960년대식 민족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민족주의가 정치와 학문 영역에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419였다. 1950년대부터 나타난 제3세계 비동맹 운동, 그리고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가져온 '일본의 재등장'에 대한 우려 등도 민족주의 대두에 영향을 준 듯하다. 박정희마저 초기에는 516의 목적이 '자주경제 확립'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어령의 60년대 베스트셀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미제 지프차에 앉아 저 아래서 허둥대는 백의 민족을 내려다' 본다. 한민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서구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경악스러운 오리엔탈리즘'일 뿐이다. 그의 시각은 몰계급적, 몰역사적이며, 그가 한국 문화를 해석하는 방식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이어령이 학계에서 별로 인정/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물론 이어령의 지금을 있게 한 이 책이 '한국학'의 열기를 불러 일으킨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 강조되어야 한다.
"한국인이 이어령의 말대로 흙먼지 풀썩 일어나는 땅뙈기에 결박된 것도 당시로선 사실이었겠다. 그러나 땅이 부여한 속박이 계급과 젠더 관계로부터 왔다는 점도 한편 중요하다. 말하자면, 그들의 가난과 쫓김은 대부분 외세가 아니라 '내부' 즉 다른 한국인들에게 원인이 있었다. 과연 누가 한국 농민을 죽이고 억압했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시각은 몰계급적, 몰역사적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갑자기 위안부 문제가 떠올랐다. 위안부 문제는 민족 문제가 최우선인가? 계급과 젠더 문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부잣집-고관의 딸'이 위안부로 끌려간 사례를 우리는 찾아낼 수 있는가?
이어, 저자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와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에서 볼 수 있는 민족관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함을 지적한다. '수난으로 점철된 한국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며, 신랑 임금은 오고야 말 것'이라는 함석헌의 민족적, 종교적인 소명 의식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의 소명 의식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9백몇십번의 침략을 당했다'는, 수난을 유난히 강조하는 마조히즘은 '그러니 우리 민족은 역사적인/하늘이 내린 소명을 받았다'는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으로 바로 이어진다. 작년 여름 '친일 자학 사관'이라고 욕을 먹은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발언도 솔직히 이런 '수난-소명' 혹은 '마조히즘-나르시시즘'의 민족주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60년대 주류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너무나 억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주류 민족주의'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문학계의 거장인 조동일과 김현이 60년대에 보였던 치기어린 민족주의적 비평을 제시한다. 조동일의 경우, 한국 민족의 '골수에 찬 노예근성'을 비난하는 글을 쓴 바로 다음달에 한국 민족이 스스로 근대 문학을 성취했다는 '내생적 근대화론'이 담긴 글을 발표한다. 여기서 저자는 '민족적 마조히즘'과 '내재적 발전론'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놀라운 결론을 유도한다. 우리의 민족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수난'과 '열등감'에 시달리다 보니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한 '내재적 발전론'을 내세울 수 있으며, 여기에는 심지어 60년대 박정희 시대의 '국가이데올로기'가 작용한 징후도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한국사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대표주자 격인 김용섭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1960년대이다.
김현의 경우 앞에서 '소아성애자'가 된 데 이어 이제는 '박정희가 총애했던 관변 철학자 박종홍을 사숙한 섣부른 민족주의자'로 묘사된다. 향가에서 사설시조에 이르기까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 문학의 본질'이 계속 이어졌다는 무리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70-80년대 문지를 이끌었던 '지성적' 문학평론가 김현에 익숙한 내게는 너무나 생경한 모습이다.
물론 1970년대 이후 한국학-인문학이 분화되고 발전되면서 20-30대의 청년 학자가 한국 문학 통사를 저술하는 등의 '치기'어린 모습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민족에 대한 학문적 객관화를 방해하는 '수난-소명'의 의식이 과도하지는 않은지,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척점으로 새삼 강조되고 있는 '내재적 발전론'이 혹시라도 '민족적 마조히즘'의 반작용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 7장, '사상계가 사랑한 세계의 지식'은 1950년대 말-60년대 초를 풍미한 잡지 '사상계'의 해외 번역 기사를 통해 당시 지식인들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사상의 의미 및 한계를 생각해 보고 있다. 사상계 창간 당시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이미 그렉 브라진스키의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서 주장된 바 있다. '1960년을 묻다' 저자는 미국의 직접적인 협조보다는 사상계가 집중적으로 번역한 '엔카운터'라는 잡지 및 이 잡지를 발간한 '문화자유회의'라는 생경한 단체에 주목하고 있다. 이 단체는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이라는 구도를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 구도로 재편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소련을 반대하는 '신좌파' 내지 '비공산 좌파'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의 간판 아래 합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좌파'의 최대치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이는 결국 이 단체/잡지와 깊은 연계를 가졌던 '사상계'가 당시 한국에서 가지는 의미와도 일맥 상통한다. 1960년대 중반 '사상계'의 퇴조는 이 잡지가 대표하던 '자유' 이념이 '민족' 이념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함과 아울러 이 잡지 사상의 근원이 되었던 '문화자유회의'가 CIA 스캔들로 인해 파국을 맞았던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제 8장, '자기계발 혹은 실존을 위한 책읽기'는 '자기계발' 열풍이 최근 '신자유주의'의 대두에 의한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1960년대, 아니 1930년대에도 관찰되는, '근대화'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주장하고 있다. 근대적 처세 수양 교양 서적은 이미 1910년대에 출간되기 시작해 1920-30년대 독서문화의 핵심항목으로 떠올랐으며, 이는 자기게발 이데올로기와 그 사회적 수행은 식민지 조선의 근대인에게 주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떠올리게 된다. (제발 '근대화'를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았으면 하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1920년대의 수양, 1960년대의 성공과 2000년대의 자기계발이 각각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나, 내 눈에는 100년여의 시대를 관통하는 자기계발의 공통성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
'교양(고전) 있는 속물이야말로 속물 중의 고수이다' '남을 속물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교양이야말로 속물성의 완성태이다'라는 저자의 일갈은 오늘날의 '인문학 열풍'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물론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인문학 열풍'은 오늘날 벌어진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며,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야말로 '전집의 시대'이자 '인문학의 시대'였다. 1960년대에는 행복론도 유행하였다는데, '행복론은 작가나 유명인이 행복할 것이라는 엉뚱한 가상, 그리고 그들이 행복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깊고 유용한 통찰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환각이 작동해서 쓰인다'는 약간 비틀린 표현은 읽는 사람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다만, '교양과 처세(속물성)'의 통합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며, 사람에 따라서는 이 둘 사이의 모순이 파국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저자는 그 유명한 전혜린을 통해 제시한다. 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은 경성제대 졸업-고등문관시험 합격-일본 식민지 경찰관료-해방 후 육군 헌병대 부사령관-국무총리 비서실장-대한변협 회장-한국법사학회 회장에 이르는 '식민지 엘리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도 안전한 길'을 걸은 정말로 예외적인 인물이다. 결국 전혜린을 양육한 것은 식민지근대성과 그 시대의 교양주의라는 것이다. 전봉덕은 교양(지식욕, 인문학!)과 처세(친일-친이승만-5공 헌법 제정에까지 간여한 출세 지향적 삶)의 완벽한 모순적 병치를 상징한다. 하지만 딸 전혜린은 이런 모순적 삶을 살 수가 없어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독문학을 공부하러 갔으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전혜린이 우리 지성사에 남긴 흔적도 넓게 보면 '식민지 근대화의 유산'일 수 있겠다. 그만큼 식민지의 그림자는 길다.
8장의 마지막은 조가경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516 직후 실존주의의 한계를 비판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복지사회의며 그 첫길이 경제제일주의이다'는 결론을 내린 글을 아마 자발적으로, 그 유명한 '사상계'에 발표한 것을 인용하고 있다. 박정희의 516이 어디서 갑자기 날아온 '괴물'이 아니라는 것, 많은 지식인들의 마음 속에 '박정희'와 '516' 즉 '빵'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경제제일주의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글이다.
제 9장,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의 교양과 자유교양운동'은 1960년대 '문화동원'의 일환으로 벌어졌던 '자유교양운동'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자유교양교육' 즉 liberal arts education은 서구에서 수백년 동안 이어내려온 전통으로 미국의 교육철학자 허친스가 시카고대학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Great Books' 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이는 지금도 '서울대가 추천한 고전 100선' '고전 100권을 읽히는 미국의 세인트 존스 대학' 등등의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고전읽기가 이미 1960년대 한국에서 국가적 차원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심지어 1968년부터는 '대통령기쟁탈전국자유교양대회'가 화려한 막을 올리기도 했다. 이 시대의 고전읽기운동은 앞에서 본 '국민교육헌장' 내지 '민족 개조-소명론'과 깊은 관계가 있음과 아울러, '입시열과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지금도 너무나 익숙한 동기가 작용하기도 했다. '자유교양대회'는 과열 경쟁과 우량도서 선정 과정에서의 잡음이라는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부작용이 부각되면서 1975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된다.
결국, 미국의 고등교육 이론의 하나인 liberal arts education-고전 읽기 운동이 직수입되어 권장되는 현상은 이미 1960년대에 그 '끝장'을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민족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 서로 섞이면서 길항 작용을 하는 것이 한국의 문화 자체를 이해하는 데 핵심 요소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이러한 국가 주도의 규율화되고 대중 동원적인 독서 운동이 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다원적이고 대중적인 문화를 낳았다는 서술로도 이어진다. '교양은 지배의 기제이면서 동시에 지배와 대립하는 것을 생산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서구적 고전주의'를 강제 결연시킨 것은 오로지 박정희 레짐의 신비하고도 아이러닉한 힘이라는 결론에서, 나는 저자가 박정희 레짐의 문화 통치를 결국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해석을 내린다. 어쨌든 '자유교양대회'와 함께 전국 학생들에게 강제되었던 고전 읽기 운동은 1970-80년대의, 본격 문학을 읽는 두터워지고 다변화된 독서층을 낳았다는 결론이 나오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박정희 레짐'이 아니고 그 레짐(유신을 포함하는)으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런 전국적이고 강제적인 고전 읽기 운동의 재현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제 10장, '아프레걸 변신담 혹은 신사임당 탄생설화'는 1950-60년대 문학을 통해서 본 '성과 사랑의 정치학'을 서술하고 있다. 일단 1950년대가 남성의 무능력-여성의 사회활동 활성화로 상징되며 419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남성의 우위를 되찾으려는 노력이었다는 해석이 새로웠다. 심지어 419를 이승만이 아닌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날 때 '할아버지 만세'라는 글귀가 붙는 가운데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시자'는 얘기까지 튀어나왔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잊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실존주의'가 유행하는 가운데 여성의 통속적인 자유를 상징하는 단어로 '아프레걸' 및 '자유부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아프레걸'은 미혼 여성의 성적 모험, '자유부인'은 기혼 여성의 '사회적 조직화'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4월 혁명 이후 '젊은 사자들'이라는 표현의 등장은 남성 대학생 세대가 아프레걸과 자유부인을 대치하게 되었다는, 즉 '세대와 젠더의 교체'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419에서 여대의 참여가 유독 저조했다는 것은 덤이다. 1960년대들어 여성에게는 가정에서의 지혜로운 참모 (='신사임당'의 길) 혹은 공장에서의 산업 전사라는 두 가지 길이 추천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여성작가들의 활동도 1950대에 비해 위축되었다. 196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거의 유일한 여성 작가인 박경리의 경우 여성-가부장적 의식을 체화하고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솔직히, 10장은 이 책에서 가장 애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강신재, 손소희, 한말숙 등 '여류 소설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50년대에 비해 60년대 여성 문학가들의 활동이 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1950년대에는 여인천하였고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남성이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물론, 419와 516을 통합시키고, '박정희의 남성성'을 419와 연계시킬 때 비로소 1960년대의 '남성 천하'가 잘 이해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1950년대의 정체된 사회-1960년 시작된 근대화의 비교가 여성이 열등하고 남성이 우등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드는 위험은 분명 있겠지만 말이다.
제 11장, '1960은 왜 일본문화를 좋아했을까'는 일본문화에 대한 관심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려 주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가 오히려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차단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부터 이 글은 시작한다. 1960년대 초 한국의 문화계는 '분열적'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419 이후 한편으로는 민족 의식의 고양과 아울러 일본에 대한 반감을 키워 갔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회 전반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함께 일본문화, 특히 일본문학을 대대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 이시자카 요지로라는 작가가 우리 독서계를 평정한 데 이어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이 1960년대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현상은 지금도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일본 문화의 국내 유입에 대한 우려는 한일 국교 재개와 함께 오히려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을 봉쇄하는 조치로 이어진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분리하고, 문학과 같은 '(고급)문화'는 계속 수입하는 가운데 영화, 음악, 방송, 신문, 잡지 같은 다른 영역의 문화 상품은 '저질 대중문화'로 간주하여 수입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물론 한일 수교 이전에도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은 금지되어 있긴 했다. 일본 대중음악은 영미권 팝송과 마찬가지로 불법복제 음반의 형태로 유통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매판'과 '반민족'의 혐의를 벗기 위해 대중문화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몇 가지의 주장을 내놓는다. 첫째, 현재 일본 우익의 한류에 대한 공격은 박정희 정권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금수 조치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화접변에 대한 공포, 혹은 정치적인 곤경을 상대방 대중문화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하려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둘째, 한일 사이의 문화 교류가 활성화되어 이제는 문화적 국경의 일각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K팝이 흘러도 과거사 해결 없이 한일 관계 개선에는 한계가 있다"는 한국 지식인의 말보다 "독도는 독도, 한류는 한류"라는 일본 한류 팬의 말이 더 객관적으로 느껴진다는 주장이 꽤 의미가 있어 보인다. (물론 저자는 '평화와 동등한 관계가 전제될 때'라는 '자기방어적 변명'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비판은 역시 '너 친일파지!'이니까.) 마지막으로, 문자문화의 지배권 약화 내지 '디지털문화'의 확대가 과연 한일간의 문화적인 '불평등'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지난 150년 동안 한일간의 문자문화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훨씬 더 큰 상태였었다. 과연 디지털 문화 시대에는 이러한 영향력의 구조가 바뀔 것인가? 일본의 그 광대하고 두터운 '오타쿠 문화'를 생각할 때 디지털 문화 시대라고 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적어질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다.
맨 앞에서도 밝혔듯이, 1960년대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오히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들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오늘의 한국 사회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이 1960년대에 대한 질문의 목적이요 또 저자가 이 책을 쓴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1968년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나는 자꾸 60년대 자체에 대한 정보가 궁금하다. 진정한 '1960년대 문화연구-미시사'에 대한 책은 아무래도 누군가가 다시 써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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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960년을 묻다: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권보드래, 천정환)|작성자 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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