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9

죽음을 준비하며 | 평화 세상 2 이재봉 2022. 3. 14.

이재봉의 평화세상


죽음을 준비하며 | 평화 세상


이재봉 2022. 3. 14.
08:44

http://blog.daum.net/pbpm21/602


죽음을 준비하며:
추기옥의 ≪우리, 아름답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를 읽고

2001년 40중반에 유서를 써봤다. 100살까지 꼿꼿하게 앉아 글쓰고 반듯하게 서서 강의하다 죽는 걸 소원으로 삼아왔지만, 언제든 사고나 병으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연습 삼아 쓰는 글이었지만 죽음을 떠올리니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한두 쪽 쓰는데 며칠 걸렸다. 죽는 연습 하다보면 지난날 돌이켜보며 앞으로 더 보람있는 삶을 추구하게 되고,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더라도 추하지 않게 숨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사회에 돌려줄만한 돈 없으니 시체라도 내놓겠다며 안구와 장기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자식들이 찾기 힘들 무덤 만들거나 납골당에 보관하지 말고 시신 불태워 가루로 뿌려 없애달라고 썼다. 아내가 거부 반응을 보이기에 유서를 널리 공개해버렸다. 그 무렵 내 통일운동 소식지 <남이랑북이랑>에 실어 5,000명쯤에게 이메일로 보냈더니 주간지 ≪한겨레21≫에서 전문과 함께 기사화했다.

그 뒤 한두 번 고쳐쓰는 데 눈물이 별로 흐르지 않았다. 유서 쓰는 게 좋은 죽음 연습이라는 걸 실감했다. 요즘 평균수명이 80 넘겼다지만 지금 60후반에 죽음이 닥쳐도 목숨 늘리겠다고 발버둥치지 않을 것 같다.

30초반 두 아들은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자립했다. 오래 전부터 난 물려줄 재산 없는데 재산 있어도 너희에게 줄 건 거의 없으리라 얘기해왔다. 부모 재산 적으면 형제 간 싸울 일 줄어든다는 능청도 떨었다. 다행히 둘 다 내 신세 지지 않고 좋은 대학 나와 괜찮은 직장 잡아 이미 번듯한 집까지 마련해놨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니 당연히 도움 받을 생각도 없다. 모아놓은 돈 없어도 죽을 때까지 매달 수백만원 연금 받아 잘 살 수 있다.

이런 터에 일주일 전 늙음과 죽음에 관한 책을 선물받아 여기저기 밑줄 긋고 고개 끄덕이며 진지하게 읽었다. 추기옥, ≪우리, 아름답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 (풀빛, 2022). 글쓴이는 대학동기 중 홍일점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내 짝사랑 대상으로 남아있는 여인이다. 독일 유학 후 번역과 통역에 종사하며 20년 전엔 묵직한 ≪정복의 역사, USA≫를 번역 출판해 내가 지녀온 ‘곱고 순한’ 사람 이미지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사회복지사가 되어 노인들 위한 요양기관을 운영해오면서 “노후준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비”하라고 이 책을 썼다. 나이 먹으면 무슨 일 생기고, 부모 자식 사이나 부부 간 갈등이 어떻게 일어나며, 졸혼과 황혼이혼이 왜 폭발적으로 늘고, 노인들이 언제부터 혐오대상으로 변해왔는지..... 전문지식을 쉽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펼쳐놓았다.

책을 읽으며 몇 가지 구상을 구체화하게 됐다. 첫째, 나이 들수록 꼰대질 않기 위해 힘쓴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벌어먹고 살아온 일이지만, 늙어갈수록 대화하든 강의하든 말수를 줄인다. 얼마 전부터 무슨 단체 ‘고문’이나 ‘지도위원’ 자리 맡아달라는 부탁 많이 받는데 될수록 사양한다.

둘째, 의식 없는 생활은 단 하루도 보내기 싫다고 미리 밝힌다. 주위에 도움주거나 사회에 기여하기는커녕 일가친척에 부담주며 음식만 축내는 삶도 피하고 싶다. 어떠한 ‘연명의료’도 확고하게 거부한다.

셋째, 내 장례식은 갖지 않도록 한다. 아내든 자식들이든 2-3일 빈소 지키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위로 받는 게 오히려 어색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죽는 즉시 즐겨입던 옷 입혀 화장하면 되지, 시체에 삼베수의 입혀 비싼 관에 담아 불태워야 할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이에 앞서 내가 죽으면 몇 만원이라도 조의금 낼 사람들 미리 알아둔다. 책읽고 글쓰기 싫어지거나 강의하기 어려워지면 삶의 의미 찾기 어려워질테니, 그들 찾아 죽음 대비한 여행을 즐긴다. 나 죽은 뒤 장례식장 찾아가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식들에게 건넬 돈으로 죽기 전 좋아하는 막걸리 한 잔 사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게 서로에게 더 재미있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22년 3월 이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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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요소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노후준비, 유서, 유언, 장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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