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8

정진호 박사(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 저자) "아내 생애 가장 슬픈 생일을 보내다"

 정진호 박사의 글 ("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 저자)

"아내 생애 가장 슬픈 생일을 보내다"

아내는 오늘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우울한 생일을 맞이했다.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시일야대성통곡을 한지 1주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아내에게는 절실한 일이었다. 새벽마다 일어나 남편과 자식의 일 보다도 더 간절하게 매달려 기도했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지극히 보수적인 장로 교회에서 자라나 정치에는 관심이 1도 없었고, 민족이나 통일의 문제에도 아무런 흥미도 없었던 여자였다. 교회 오르간 반주자로 지휘자로 늘 칭찬만 받고 자라며 성가대 봉사가 크리스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던 처치 걸이었다. 연세대 음대생으로 미니스커트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피해, 아니 쟤네들은 왜 밤낮 데모질이야? 하며 눈쌀을 찌푸리고 후문으로 다니던 철없는 여대생이었다. 술마시던 남편이 미국 생활 몇년만에 극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선교지에 억지로 끌려간 이후에도 자기는 선교사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었다. 그저 자기에게 맡겨진 음악적 재능으로 최선을 다해 섬겼을 뿐, 성가대와 밴드부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그를 통해 많은 학생들과 동역자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거기까지가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이었다.

만일 그녀가 평양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동일한 성정의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 이 민족의 분단 현실을 몸으로 부딪힌 경험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그녀는 그렇게 보수적인 크리스천의 전형으로 살아갔을 터였다. 그런데 그녀의 인생이 변하고 말았다.

평양을 다녀온 후, 방학 중 토론토에서  <1987>영화를 온 가족이 함께 가서 보았다. 동시대 같은 학교 교정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이한열이 바로 자기 대학 정문에서 최류탄에 맞아 사망하고, 그 함성과 분노와 목마름으로 마침내 이 땅에 민주화의 꿈이 실현되는 그 장엄한 장면 앞에, 아내는 극장 안이 떠나가도록 목놓아 울었다. 자신의 지난날이 부끄러워 울었고, 이제 깨닫게된 분단의 현실이 애달파서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내는 투사가 되었다.

선거가 끝난 다음날, 아내는 가까운 대학 선배가 초청하여 억지로 나갔다. 후배인 아내를 끔찍이도 아껴주고 밥을 종종 사주는 귀부인 같은 착한 권사님이다. "문선아 문선아, 선거가 너무 잘 되었지? 난 너무 기쁘단다." 아내가 기가 막혀 중얼거리듯 말한다. "언니, 나는 이재명을 찍었어요." 선배가 깜짝 놀라 펄쩍 뛴다. "아니 그 사람은 공산주의자래. 그리고 끔찍한 범죄자라고 하던데?" 아내는 입술을 깨문다. 어떻게 이렇게 무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런 확인도 없이 그냥 믿을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보다 부자들의 이익공동체로 변해버린 한국 대다수 대형교회 보수 기독교인들의 모습이요, 과거의 내 모습이 아닌가? 내가 한국에서 그냥 그렇게 교회 안에서 갇혀서 살았다면 이 언니처럼 되었을 터인데. 물론 그 언니네 가족은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몇채씩 가지고 있다고 한다.

생일 아침, 요즘 전혀 기운을 못 차리는 엄마를 의식한듯 딸 아이가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가지고 들어와 깜짝 놀라게 한다. 제자들이 어떻게 알고 케잌을 선물하고, 동역자들이 여기저기서 선물도 보내온다. 기분전환을 시키려고 밖에 끌고나가 외식을 해도 아내는 여전히 한숨을 쉰다. 졸지에 나라 잃은 어깨쭉지가 내려간 백성의 그 모습이다.

아내를 통해 남편은 크리스천이 되었고, 독립운동가 남편을 통해 결국 아내도 독립운동가가 되고 말았다. 지난 몇년 간 잠깐의 휴식에 취해 있었는데... 뺴앗긴 들을 되찾기 위한 그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이 이제 다시 다가온 것이다. 

이재명 54.8%, 윤석렬 32.9%를 찍은 해외동포들의 투표율이 발표되었다. 일제시대 나라 잃고 해외로 떠났던 그 시절에도 해외동포들이 더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고, 그 가난한 삶 속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었다. 우물 안에 갇혀 일제와 영합하여 자기 잇속을 채우기 급급했던 내국인 보다, 해외로 떠난 그들에게 조국의 모습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여졌고 그래서 그들은 애국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이번 대선이 남긴 의미는 실로 심각하다. 지난날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투사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 되찾은 조국을, 부동산 셈법과 일제가 쓰던 흑색선전과 갈라치기와 전쟁 선동에 하루 아침에 도로 팔아버린 것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유관순과 안중근과 윤동주와 문익환과 전태일과 이한열과 김용균의 피와 땀과 눈물을 팔아버린 것이다. 이회영 일가가 자신이 소유한 명동 일대의 수백억 부동산을 모두 팔아 독립자금으로 끌어안고 떠났던 그 기개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해외동포들이 다시 일어나 외치고 있다. 조국이여 깨어나라고. 당신들이 저지른 이번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자기 잇속에 나라를 팔아버린 그 행태에 다름아닌 줄 알아차리라고. 나라를 잃고 나면 백성은 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고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 야만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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