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8

문갑식의 주유천하 〈12〉 김상헌과 최명길과 남한산성의 비극 : 월간조선

문갑식의 주유천하 〈12〉 김상헌과 최명길과 남한산성의 비극 : 월간조선

문갑식의 주유천하 〈12〉 김상헌과 최명길과 남한산성의 비극

‘사드호란(胡亂)’을 맞아 김상헌의 절의(節義)와 최명길의 현실론을 되돌아보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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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중국의 보복은 정묘호란-병자호란에 이은 사드호란
⊙ 인조의 조선, 병력도 없고 국정은 마비됐으며 민심도 등 돌린 상태
⊙ 400여 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상황, 놀랍도록 비슷
⊙ 국제정세 눈 돌린 채 내부 싸움만 몰두하면 멸망의 길
남한산성은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다. 인조는 대비도 변변히 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맞았고 남한산성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항복해 청 태종에게 수모를 당한다.
  1623년 3월 13일 두 사람의 팔자(八字)가 굉음을 울리며 뒤바뀌었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과 능양군(綾陽君·1595~1641)이었다. 광해군은 그날 조선의 15대 군주에서 물러났고 능양군은 16대 군주가 됐다. 이후 광해군에게는 폐주(廢主) 혹은 혼주(昏主)라는 말이 늘 따라다녔다.
 
  ‘인조반정’이라고 불린 이 쿠데타는 광해와 능양 사이에 얽힌 원한 때문에 시작됐다. 광해와 능양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선조는 아홉 후궁 사이에서 열세 명의 아들을 뒀다. 광해는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고 능양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난 정원군의 맏아들이었다.
 
  공빈과 인빈은 선조의 총애를 놓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공빈은 광해를 낳고 2년 만에 세상을 떴다. 이후 인빈은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머니의 후광 때문인지 인빈이 낳은 신성군(信城君)을 선조는 아꼈다. 인빈에 대한 선조의 애정이 깊어갈수록 인빈의 오빠 김공량의 위세도 높아져 갔다.
 
 
  임진왜란이 광해군에게는 기회
 
  이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임진왜란은 어머니를 일찍 여읜 광해군에겐 기회가 됐다. 첫째, 신성군이 피란 도중 죽었다. 둘째, 선조는 파천하기 직전 광해군을 왕세자로 지명했다. 셋째, 광해군은 왕세자가 된 것은 물론 분조(分朝) 활동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분조란 말 그대로 전쟁 상황에서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한쪽이 적에게 피해를 입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광해군은 의주 쪽으로 파천한 선조와 달리 함경도-강원도-황해도 등을 떠돌며 관군들에게 전투를 독려하고 의병(義兵)을 모집하는가 하면 흩어진 민심을 다독였다.
 
  전쟁이 끝나자 상황이 다시 일변(一變)했다. 1602년 선조가 인목왕후와 재혼해 영창대군을 낳자 차기 왕권의 행방이 다시 묘연해진 것이다. 왜란 때의 공신 정곤수는 1600년 선조에게 재혼을 하지 말라고 호소한 바 있다. 정비가 들어서 아이를 낳으면 광해군의 입지가 흔들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정곤수의 우려는 사실이 됐다. 더구나 명나라가 광해군을 첩자(妾子), 즉 첩의 자식이자 차자(次子), 즉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로 승인해 주지 않자 광해군은 1608년 아버지 선조가 세상을 뜰 때까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광해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권 후보들을 제거했다.
 
  1613년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희생됐다. 1615년에는 정원군의 3남 능창군이 모반 혐의를 받아 죽임을 당했다. 그 충격 때문인지 1619년 정원군이 세상을 떴다.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인조, 즉 능양대군은 1620년 무렵부터 사람들을 모았고 3년 뒤 거사에 성공했다.
 
 
  인목대비의 교지를 주목하라
 
  여기서 잠시 1623년 3월 23일, 즉 세상이 뒤바뀐 날의 광경을 살펴본다.
 
  인목대비가 능양군에게 옥새를 넘겨주면서 쿠데타는 인조반정으로 승격된다. 이후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를 ‘역적의 수괴’라 부르며 죽이겠다고 나섰다. 도승지 이덕형이 연산군 때의 일을 거론하며 말렸지만 그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쏟아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역괴(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과 간통하고 그 서모(庶母)를 죽였으며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구비했다. 어찌 연산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후 발표된 인목대비의 교서 가운데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 열 가지를 열거했는데 외교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이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지 못해 죽을 때까지 명이 있는 서쪽을 등지고 앉은 적이 없었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深河)전투 때는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禽獸)로 만들었다.”
 
  재조지은이란 ‘거의 멸망(滅亡)하게 된 것을 구원(救援)하여 도와준 은혜(恩惠)’란 뜻이다. ‘심하 전투’란 1619년 후금(後金)의 왕 누르하치가 명을 정벌할 때 강홍립(姜弘立)의 원군 1만5000명이 명을 도와 후금과 싸우는 척하다 광해군의 지시로 후금에 투항한 일을 말한다.
 
  이런 인식은 당시 조선의 조정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망해가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융성하는 후금, 즉 청(淸)을 무시하고 배척하면서 조선은 나라가 사실상 멸망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된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 지 30여 년 만에 일어난 정묘호란-병자호란은 여러모로 비교된다.
 
 
  선조와 인조의 차이
 
삼구정은 밑바닥의 돌이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청음 김상헌은 이곳에서 병자호란의 수모를 되새겼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는 선조 주변에 문무의 인재가 넘쳤다. 문신 쪽에서는 류성룡·이원익·이항복·이덕형 같은 이들이 지모(智謀)를 짜냈고 무신 쪽에서는 이순신·권율 같은 덕장·맹장이 즐비했으며, 홍의장군 곽재우처럼 전국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망해가는 나라를 부축했다.
 
  반면 정묘호란-병자호란 때 인조 주변에는 변변한 재목이 없었고 간신들만 그득했다. 임경업을 제외하면 별다른 장수가 없었으며 의병 또한 왜란 때와 비교해 그 규모가 형편없었다. 이는 인조라는 인물 자체의 능력이 할아버지 선조에 비해 모자랐고 나라가 두 차례 왜란으로 거덜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왕이 바뀔 때 명의 사정은 어땠을까. 1623년 3월 13일 《희종실록》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바다를 통해 모문룡의 진영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모문룡 스스로 둔전(屯田)을 경작하도록 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이 모문룡은 두고두고 조선을 괴롭힌 화근(禍根)이 된다.
 
  모문룡은 명의 장수이며, 모문룡 진영이란 평안도 철산(鐵山) 앞바다에 있는 가도의 동강진을 말한다. 모문룡은 절강성 동강 출신인데 가도에 진을 치며 자기 고향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가도는 조선과 후금이 지척인 데다 요동반도와 발해만과 산동으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였다.
 
  모문룡은 1622년 여기서 요동 수복을 외쳤는데 후금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모문룡은 왜 이곳에 진을 칠 생각을 했을까. 1618년 이래 명은 후금에 연전연패했다. 1619년 사르후에서 참패한 후 개원(開原)이 함락됐고 1621년에는 요양(遼陽), 1622년에는 광녕(廣寧)이 무너졌다.
 
  조선과 명을 잇는 육로의 단절은 명의 조선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됐다는 뜻이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모문룡은 요양이 후금군에게 함락되자 요동을 떠나 조선의 의주, 용천을 떠돌다 1621년 진강으로 잠입했는데 불과 220여 명의 군사로 후금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진강기첩’이다.
 
  승첩도, 대첩도 아닌 ‘기이한 승리’라는 뜻의 기첩이란 말이 붙은 것은 그만큼 명이 후금군에게 싸우는 족족 져왔음을 보여준다. 당시 왕 광해군은 이런 모문룡을 화근으로 여겼다. 지는 해 명과 뜨는 해 후금의 상황을 냉철히 관찰했던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섬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이후 광해군은 모문룡을 철저히 무시했다. 이런 모문룡에게 인조반정은 새 기회가 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명에 대한 의리에 사무쳤던 인조와 그 신하들은 괄시받던 모문룡을 환대하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했다.
 
  당시 모문룡 찬양 열기를 잠시 살펴본다. 영의정 이원익은 “백성들이 군신의 대의는 몰라도 임진년에 명이 베푼 재조지은에는 감격하고 있다”며 명의 후금 공략에 동참하자고 말했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귀는 한술 더 떠 “모문룡과 합세해야만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했다.
 
 
 
국제정세에 둔감한 우물 안 개구리가 바로 당시의 조선

 
청원루는 청음 김상헌이 만주에서 돌아와 일생을 마친 곳이다. 청을 멀리한다고 해 청원루다.
  국제정세에 둔감한, 우물 안 개구리들이 국정의 주요 보직을 장악하면서 조선에는 거대한 암운(暗雲)이 드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변변한 병력조차 없으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책상물림’들의 나라에 대해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후금은 호시탐탐 ‘버르장머리’를 고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친명배청 못지않은 화근은 또 있었다. 인조가 반정에 성공한 지 석 달도 안 돼 역모(逆謀)의 움직임이 세 차례나 포착됐다. 인조가 가장 믿었던 무장 이괄(李适)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거병(擧兵)하자 인조 정권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반정 성공 후 이괄은 인조에게 후금군을 방어하는 대책을 제시하고 정권 보위에 나섰다. 이괄을 인조가 서북 변방으로 보내 후금 방어를 맡기려 하자 이귀가 반대했다. “서울에 남겨두고 의지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조는 이를 받아들여 이괄을 1623년 5월 좌포도대장으로 임명했다.
 
  3개월 뒤 다시 서북 변방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인조는 8월 16일 이괄을 부원수로 임명해 평안도로 보냈다. 이괄은 태연하게 임지로 떠났으나 석 달 뒤 논공행상에서 자신이 2등 공신으로 책봉되자 불만을 터트렸다. 더구나 한양에선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의 리더십은 실종
 
  영변에서 군사를 일으킨 이괄은 질풍처럼 남하했다. 1624년 2월 8일 이괄의 군대가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인조는 황급히 한강을 건넜다. 이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임금이 탈 배가 없어 전라병사 이경직이 한 척을 구해왔더니 신하들이 서로 타려 경쟁을 벌인 것이다.
 
  위기의 순간 임금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경직이 칼을 뽑아 들고 위협하자 그제야 신하들이 뒤로 물러섰다. 인조가 배에 올랐지만 한참이나 출발하지 못했다. 임금을 경호해야 할 군사들이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배가 한강 중간쯤 도달했을 때 궁궐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인조가 수원에 도착했을 때 조정에서는 이괄의 반란군을 부산 동래에 있는 왜인 1000명을 빌려 막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은 항왜(降倭)들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고 불과 몇십 년 전 싸운 일본의 힘을 빌리자는 발상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괄은 2월 10일 한양에 입성했는데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조선 역사에서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괄의 난은 장만과 정충신에 의해 제압됐으나 인조의 권위는 실추됐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심지어 “모든 재물이 바닥나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잇따랐다.
 
  더욱이 인조가 서울을 비운 사이 난민들은 궁궐과 관청에 난입해 불을 지르고 공사의 재물을 약탈했다. 각종 서류와 문서, 양곡들이 없어지고 불에 탔으며 각 관청에 보관됐던 무기들도 사라졌다. 이원익의 기록에 따르면 “반란을 겪은 후 모든 군기(軍器)가 사라졌다”고 한다.
 
 
 
정묘호란 겪고도 반성 안 해

 
  모문룡에 코가 꿰이고 무너져 가는 명에 기댔으며 떠오르는 후금과 등을 진 데다 반란으로 기강이 무너졌으며 민심까지 등진 조선에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1627년 1월 8일 홍타이지가 조선 정벌을 명한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병자호란》에서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홍타이지는 원래 조선에 강경론자였다. 아버지 누르하치나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의 입장은 달랐다. ‘조선이 명의 배후에 있는 점을 고려해 적대하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조선을 삐딱하게 보던 홍타이지가 등극한 것은 조선에 재앙이었다.”
 
  한 교수는 정묘호란의 원인을 두 가지로 본다. 첫째가 1627년 만주 지역을 덮친 심각한 기근이었으며, 두 번째가 ‘목엣가시’ 같은 모문룡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후금이 명의 본토를 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금군은 1627년 1월 13일 압록강을 건넜다. 1월 21일에는 청천강을 도하했다.
 
  이때 안주성을 지키다 성이 무너지자 자결한 평안병사 남이흥이 죽기 직전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내가 지휘관이 돼 한 번도 습진(習陣)을 해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고 말했다. 이괄의 난 이후 인조는 또 다른 쿠데타를 우려, 무장들을 기찰하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쿠데타 우려해 장수들이 군사훈련도 못 해
 
  이 때문에 습진을 하면 역모의 수괴로 몰리는 상황이었기에 남이흥 같은 무장들은 병사를 거느리고도 변변한 훈련조차 못 했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는 3월 3일 후금과 강화했다. ‘조선이 향후 후금을 적대시하여 나쁜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명을 숭배하고 청을 경멸했다. 1636년 11월 25일 홍타이지는 신하들과 함께 환구(圜丘)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는 자신이 조선 정벌에 나서게 된 까닭을 고하는 자리였다. 홍타이지는 축문을 통해 조선이 저지른 잘못을 열거했다.
 
  1619년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했으며 1621년 후금이 요동을 차지한 후에도 도망쳐온 한인들을 받아들여 다시 명에 넘겼고 정묘호란 후 맹약을 체결했지만 누차 공격했고 명에는 함선을 제공하면서 자신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1636년 12월 9일 마침내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은 의주~곽산~정주에 무혈입성했다. 이때 조선군은 산성(山城)에서 웅거하며 저항하는 전략을 폈지만 청은 이것을 역이용했다.
 
  조선군과 백성들이 의주의 백마산성, 평양의 자모산성, 황주의 정방산성으로 피한 틈을 타 곧장 서울로 진격한 것이다. 텅 빈 대로를 청군이 질주해 지나가자 뒤늦게 놀란 조선군이 성 밖으로 나와 청군을 뒤쫓는 진풍경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조선군 지휘부는 또 다른 실책도 했다.
 
  당시 의주 건너편 용골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청군이 침략하면 당연히 봉화 두 개가 올라야 했다. 12월 6일부터 연달아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 정방산성에 주둔하던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그것을 무시했다. 겨울에는 적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1636년 12월 9일 청군이 가공할 기동력으로 순안을 지나 안주로 향할 무렵에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김자점의 장계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3일이었는데 14일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장계가 또다시 날아들었다. 인조가 그날 밤 강화도로 가려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를 살린 최명길의 용기
 
인조는 원래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김자점의 보고가 늦어 인조가 길을 나설 때 청군은 이미 은평구 녹번동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다.
  청군이 은평구 녹번동에 나타난 것이다. 광해군 시절부터 강화도는 유사시의 피란처였다. 상당한 군량과 화약도 비축돼 있었다. 그런 강화도에 인조는 가지 못했다. 인조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 나섰다. 청군 선봉장 마부대와 강화에 대한 담판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막 무악재를 넘던 마부대에게 최명길의 담판 요청은 ‘시간 끌기’로 보일 여지가 충분했다. 가자마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최명길은 적진으로 갔고 그가 시간을 버는 사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다.
 
  여기서 최명길에 대해 알아본다.
 
  최명길은 인조를 국왕으로 추대한 1등 공신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것은 부친과 관련 있다. 최기남(崔起南·1559~1619)은 광해군대에 영흥부사로 있다가 계축옥사에 연루됐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경기도 가평에서 7년을 은둔하다가 병사하였다.
 
  최기남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모두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인 몽길은 일찍 죽고 그 아래 둘째가 래길(來吉)이며 셋째가 명길이다. 그 밑으로 혜길(惠吉)과 만길(晩吉)이 있다. 최명길의 묘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지만 태어나기는 1586년(선조 19) 금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겸(子謙)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지천(遲川)이다.
 
  8세 때에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晏子)가 되며 또 그다음 날엔 공자(孔子)가 되리라”라고 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 이항복과 신흠 밑에서 수학했고 조익·장유·이시백(李時白)과는 절친했다.
 
  최명길은 20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 해에 소과와 대과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홍문관 전적이 됐지만 북인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던 1614년(광해군 6)에 병조좌랑에서 삭직(削職)됐다. 이후 선조비인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이귀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했다.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공이 인정돼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반정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이조좌랑에서 이조참판에까지 출셋길을 달렸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이라는 전란만 없었다면 관료로서 뛰어난 업적을 칭송받았을 것이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관제개혁을 주장했고 병조참판 시절에는 백성들의 부세 및 군량미를 경감시키는 정책을 폈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던 중에는 인조의 친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두 정승 반열에 오른 15가문이 있는데 최명길 가문도 그중에 속한다.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그의 손자이다. 최석정은 영의정을 무려 8번 역임한 인물로 할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념적으로는 양명학적 성향을 띠었다.
 
  다시 병자호란의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가 본다. 남한산성은 천험의 요새다. 성곽에서는 도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제는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황급히 오다 보니 군사도 군량도 별로 없었다. 더구나 일각에선 여전히 “성을 빠져나가 강화도로 가자”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남한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1만2000명에서 1만8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군량을 감안하면 최대 45일을 버틸 수 있었다. 이런 조선군을 청군은 완전 포위하고 고사시키려 했다. 쫄쫄 굶고 추위에 떠는 조선군에게 청군은 가끔 홍이포를 쏘아댔다. 공포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최명길의 국서 김상헌이 찢자 최명길은 다시 붙여
 
청음 김상헌은 안동 김씨의 일원이나 훗날 서울 장동에 웅거하면서 조선 말기 세도정치를 편 장동 김씨의 시조 격이 되는 인물이다. 사진은 안동에 있는 안동 김씨 고택 가운데 하나다.
  이러는 사이 남한산성에서는 화친파와 옥쇄파가 다투고 있었다. 화친파의 선봉은 앞서 말한 최명길이었으며 옥쇄파의 선봉은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었다. 최명길이 “나라가 보존돼야 와신상담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하면 김상헌이 “적정(敵情)도 모르면서 지레 와신상담을 말하느냐”고 핀잔놓는 식이었다.
 
  전쟁의 끝 무렵 최명길이 항복문서의 최종본을 다듬고 있는데 김상헌이 들어와 그것을 보더니 북북 찢어버리고 통곡했다. 그러던 사이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1월 30일 인조는 마침내 삼전도로 나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여기서 척화파의 대표인 김상헌에 대해 알아본다. 그는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등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570년(선조 3) 6월 3일에 서울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에는 어머니가 임신한 지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김극효(金克孝·1542~ 1618)는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주로 외직이나 중앙의 한직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외가는 대단했다. 외조 정유길(鄭惟吉·1515~1588)은 좌의정을 역임했다. 정유길의 조부는 중종 중반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1462~1538)이고 증조는 성종 때 이조·공조·호조판서를 역임한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었다.
 
  그가 겪은 첫 번째 큰 전란인 임진왜란은 아직 출사하기 전인 22세 때 발발했다. 그는 부모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란했다가 겨울에 충청남도 서산(瑞山)으로 갔다. 이때 아들 종경이 3세로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전란의 와중인 1596년(선조 29) 가을에 김상헌은 과거에 급제해(19명 중 13등)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했다.
 
이 사진은 안동시 풍산읍 소산마을에 있는 안동 김씨의 종택 양소재다.
  그때부터 선조가 세상을 뜬 1608년까지 김상헌은 이런저런 중하급 관직을 거쳤다. 김상헌에게 광해군의 치세는 대체로 침체와 불행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의정부 사인·교리·사간·응교·직제학·동부승지 같은 비중 있는 관직을 지냈지만, 빛보다는 그늘이 더 짙었다.
 
  첫 시련은 1611년(광해군 3)에 파직된 것이었다. 원인은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라 불리는 우찬성 정인홍(鄭仁弘·1535~1623)의 상소였다. 제목 그대로 그 글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 이황을 변론해 배척하고 자기 스승 조식(曺植)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상헌은 이때 정인홍을 비판했다. 곧 복직되기는 했지만 김상헌은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에도 아들 김광찬이 역모로 몰려 옥사한 김제남(金悌男)의 손녀사위라는 이유로 다시 파직됐다.
 
  광해군과 북인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인조와 서인이 집권하면서 김상헌은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경북 안동에 있는 석실(石室)에 있었다. 66세의 이 노대신은 남한산성으로 몽진한 조정을 뒤따라 들어갔고 위기 속에서도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그는 “반드시 먼저 싸워본 뒤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인조에게 말했다. 이런 판단으로 김상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데 반대했고 최명길이 지은 항복 국서마저 찢어버린 것이다.
 
  1637년 1월에 김상헌은 죽음을 결행하기도 했다. 엿새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풀어줘 살아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고 만 것이다. 1637년 2월 7일에 그는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다. 형 김상용(金尙容)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심양에서의 만남
 
남한산성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어장대다. 원래는 단층이었으나 영조 때 2층 누각 형태로 개조했다.
  1640년(인조 18) 11월에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는 김상헌이라는 인물이 관작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조정에서는 그를 심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그가 도성을 지날 때 인조는 어찰(御札)을 내려 위로했다.
 
  김상헌은 1641년(인조 19) 심양의 북관(北館)에 구류됐다. 그때 대표적 주화론자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 와 있었다. 16세 차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이 포로의 신세로 주고받은 시는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를 위하는 자라 판단하고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탄복했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없는 간신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강화론이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풀고 시를 지으며 우정을 나눴다.
 
  양대의 우정을 찾고(從尋兩世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頓釋百年疑)

 
  김상헌의 시에 최명길이 답시를 주었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네(吾道如環信所隨)

 
  머나먼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 최명길은 1645년(인조 23)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귀국한 지 2년 후 병으로 누운 최명길은 인조가 직접 문병을 갔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5월 17일 62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명나라가 망한 1644년 이듬해인 1645년 2월, 김상헌은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를 모시고 귀국했다. 그는 바로 석실로 돌아갔다. 소현세자는 두 달 뒤 급서했다. 이때부터 별세할 때까지 김상헌은 주로 석실에 머물렀다. 1646년(인조 24) 3월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무려 32번이나 사직해 한직인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숭명배청’의 절개를 상징하는 노대신의 일생은 3년 뒤인 1652년(효종 3) 6월 25일, 82세로 마감되었다. 그는 석실의 선영에 모셔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주에 세워진 석실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과 남한산성 현절사(顯節祠)에 모셔졌다.
 
  북한의 잇단 도발로 인해 한국이 자위책의 일환으로 사드 미사일 배치를 결정했다. 북한의 망동에는 요지부동이던 중국이 돌연 미국과 결탁한 한국을 혼내겠다며 강경책을 내놓고 있다. 지금은 경제적인 보복이지만 언제 군사적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 ‘사드호란(胡亂)’이라 할 만하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국정은 마비됐고 정치권은 분열돼 있으며 국민들은 태극기와 촛불로 갈라졌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나라를 위한 행동을 곱씹어볼 시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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