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8

이봉창의사의 '마지막 사진' 발견 | 2014 | 중앙일보

이봉창의사의 '마지막 사진' 발견 | 정랑일보 | 중앙일보

이봉창의사의 '마지막 사진' 발견
중앙일보 일본어판 2014.10.03



이봉창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1932년 9월 30일 아사히신문이 호외를 발행했다. 이의사의 사진 옆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대역범인 이봉창(上) 그의 생가(아래 오른쪽)와 도쿄에서 숙장에 인정한 筆蹟’(사진=우메겐 기념관)독립 활동가 이봉창 의사(1900-32)의 '마지막 사진'으로 보이는 얼굴 사진이 처음 발견됐다. 이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1932년 9월 30일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호외에 게재된 사진이다. 이 사진이 게재된 10일 후인 10월 10일 이의사는 교수형에 처했다.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매헌 기념관 윤주 관장은 2일 “우메겐 윤봉길 의사의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이 사진을 발견했다. 이봉창 의사 남긴 사진은 몇 장밖에 되지 않는다. 이 사진 이후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봉창 의사가 남긴 마지막 사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유인천황의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미야우치 대신의 마차가 뒤집혔지만, 의거는 실패했다. 체포된 이의사는 도쿄 감옥에 수감됐다. 9월 30일 도쿄 법원에서 350여명의 경찰이 수중에 둘러싸인 가운데 진행된 재판으로 사형을 전해졌다. 그날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호외에 이의사의 옆모습이 게재되고 있다. 10월 10일 교수형에서 순국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당시 이의사는 미혼이었다.



윤관장은 “사진을 봐도 뺨이 뚝뚝 찼고 매우 얽힌 얼굴이다. 심각하게 심문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호외에는 이의사의 생가 사진과 도쿄의 숙박지에 남긴 이의사의 필사 사진도 동시에 실렸다.

이의사의 의거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와 함께 일제시대 '3대 의열투쟁'으로 꼽힌다. 이의사는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빵집 직원으로 일해 학대를 받고 남만주 철도회사에서 운전견습을 하고 있을 때는 '조선인'이라고 모욕됐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자극받은 이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어를 배우는 등 6년간 일본에 익숙해진 뒤 중국 상하이의 임시 정부를 방문했다. 비밀리에 백범·김구를 만난 이의사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31세입니다. 앞으로 더 31년간 살아도 지금보다 더 나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간 쾌락이라는 것은 모두 맛보았습니다. 앞으로의 영원한 쾌락 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각오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나에게 세상을 놀라게 하는 성업을 시켜 주세요.”

백범은 이의사와 함께 안중근의사의 동생 집에 갔다. 이의사는 거기서 태극기(한국의 국기)를 앞에 두고 양손에 수류탄을 잡은 채 천황에 대한 저격을 선서했다. 이의사의 의거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천황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당시 침체하던 상하이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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