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2

역성혁명 - 위키백과, Dynastic cy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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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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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맹자 등의 유교에 근거한, 오행 사상 등으로부터 왕조의 교대를 정당화하는 이론이다.[1] 이러한 역성혁명은 정치 지배 주체의 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사회 경제 구조의 변화나 발전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현대 중국에서는 조대순환(朝代循環)이라고 불린다. 서양에서는 이 용어가 다이너스틱 사이클(Dynastic cycle)이라고 번역된다.

개요[편집]

주(周)의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멸망시켰을 때부터 주창되어, 하늘(天)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조에게 지상을 다스리게 하지만, 을 잃은 현재의 왕조에 하늘이 등을 돌릴 때 '혁명'(즉 천을 개하는 것)이 일어난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를 깨닫고, 군주(천자, 즉 하늘의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선양」(禅譲), 무력으로 쫓겨나는 것을 「방벌」(放伐)이라고 한다.

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의 조비는 “요순이 행한 것을 알겠다"(요순의 선양 역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후한(유씨)에서 (조씨)로의 선양처럼, 전 왕조(와 그 왕족)가 덕을 잃고, 새로운 덕을 갖춘 일족이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이 역전되다)라는 것이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며 '혈통'의 단절이 아니라 '덕'의 단절이 역성혁명의 근거라고 하고 있다. 맹자는 역성혁명의 방법론에 있어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양보하는 형태의 '선양'뿐 아니라 무력에 의한 왕위 찬탈인 방벌도 인정했다.[1]

대부분의 새로운 왕조에서는 사서 편찬 등에서 역대 왕조의 정통한 후계임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그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 왕조와 그 마지막 군주의 부덕과 악역함이 강조된다. 전형적인 예로서, 과 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양제처럼 나쁜 의미가 담긴 시호를 받거나, 조선의 연산군처럼 시호나 묘호 자체를 아예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에 대한 반역자인 이자성을 토벌하고 천하를 계승한  같은 경우에는,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높여 그에게 시호나 묘호도 주었다.

이와 같이, 역성혁명론은 왕조 교대를 정당화하는 이론이다.[1] 또한 이 이론이 있었기 때문에 유방이나 주원장 같은 피지배계층 출신자의 지배도 긍정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양, 특히 고대 로마의 후계인 동로마 제국을 제외한 광범위한 서유럽 사회에서 군주의 '혈통'이 가장 중시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서유럽 국가에서는 한 나라의 군주의 직계가 단절되었을 때, 국내에 군주인 것에 적합한 혈통의 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타국의 군주의 혈족으로부터 새로운 왕을 맞이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 정도로 혈통 원리가 지배적이었다.

동양에서도 역성혁명에 대한 비판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에도 막부가 지배했던 봉건 체제 일본에서는 야마가 소코가 이설을 제창하여, 일본의 만세일계 사상과 대비해 《중조사실》(中朝事実)이라는 책을 지었다.

반면 진의 진승(陳勝)은 '왕후장상(王侯将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라는 명언으로 역성혁명을 긍정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 · 오광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나중에 초한전쟁을 거쳐 한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오행 사상 면으로부터의 설명에서는 만물에는 목화토금수의 덕이 있고, 왕조도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덕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어,  왕조 말기를 흔들었던 184년의 황건적의 난은 "蒼天已死 黄天當立 歳在甲子 天下大吉 "(창천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이 마땅히 설 것이고, 그 해가 갑자에 있으니 천하가 크게 길하게 될 것이다, 『후한서』 71권 황보숭주이열전 제61 황보숭[2])의 슬로건이 내걸렸다. 한 왕조는 불의 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한조를 대신하는 왕조는 흙의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국에서의 역성혁명[편집]

한국사에서의 대표적인 역성혁명은 위만조선의 건국과 왕건의 고려 왕조 건국, 이성계의 조선 왕조 건국이었다. 왕건은 후고구려(태봉)의 장군으로 궁예의 '부덕'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추대 과정을 거쳐 즉위하였으며, 신라 경순왕과 후백제 견훤의 귀부를 받아들이고 삼한을 통일하였다. 이후 이성계는 고려의 장군으로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뒤, 정비 안씨를 압박하여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내어 그 자신이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가 되었다.

현대 대한민국은 공화정 체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그 행정부의 최고 수장인 대통령 교체는 현대의 '역성혁명'이라고까지 불리기도 한다.

각주[편집]

  1. ↑ 이동:   (일본어) 『易姓革命』 - Kotobank
  2.  范曄. 《後漢書/卷71》 (중국어) – 위키문헌 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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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유럽의 경우4. 목록
4.1. 한자문화권
4.1.1. 중국사4.1.2. 한국사
4.2. 한자문화권 이외
4.2.1. 영국사4.2.2. 그 외
4.3. 예외 사례4.4. 가상 사례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세습 왕조가 다른 가문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조란 '천명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했으니, 천명()이 바뀌는() 것은 곧 혁명이고, 대개의 경우 임금의 가문이 바뀌기 때문에 새 왕조는 전 왕조와 다른 성()을 갖게 되어 역성혁명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경우로 《봉신연의》의 주 무대가 된 역성혁명을 시초로 본다. 그리고 이런 사상이 동아시아 주변국으로 퍼져나가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착했다.

2. 설명[편집]

평화로운 방법으로 전 왕조의 총 책임자인 황제가 다음 왕조의 황제에게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1], 무력을 써서 덕을 잃은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이 왕조를 세우는 것을 방벌(放伐)이라 하였다. 지금의 천자가 포악무도하여 백성과 하늘의 뜻을 저버렸을 때, 새로운 천명을 받은 사람이 그 왕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 역성혁명의 조건이었다.

유교라고 하면 윗사람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경직된 권력구조를 생각하기 쉽지만, 이건 유교가 장기간 지배적인 사상으로 군림하면서 권력자들에 의해 변질된 것이다. 실제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공자마저도 군군신신(君君臣臣,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으로 대표되는 정명정신을 강조했다. 즉, '지위에 맞는 책임'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왕이 저버렸을 때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를 설명했다. 이는 통치 시스템의 지속성을 위한 주요 개념 중 하나다.

이러한 혁명 이론은 《주역》(周易)에서 그 기초적인 개념[2]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을 체계화된 이론으로 제시한 것은 맹자였다. 그가 주장한 역성혁명의 내용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탕(湯)은 걸(桀)을 몰아내고 천자가 되었고, 무왕(武王)은 (紂)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다" 하던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賊)[3]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殘)[4]이라 하며, 잔적한 이는 (왕으로써의 권위를 이미 상실한) 필부일 뿐이니, 저는 무왕이 "주라는 필부를 주(誅)[5]하였다"는 말을 들었지, "임금을 시(弑)[6]하였다"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맹자》, <양혜왕> 하 제8장
즉, 통치체계라는 것 자체가 과 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인의를 해치는 군주는 스스로 그 통치의 권위와 정당성을 상실한 개인에 불과하며, 백성이 이에 저항하여 통치체계를 전복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 혁명적인 이론이다.

<탕무방벌론>이라고 하는 이 기사에서 맹자는 현실적으로 제왕인 걸(桀)·주(紂)의 정권을 탈취한 탕왕과 무왕의 행위를 걸·주 정권의 비도덕성에 근거하여 합리화하고 있으며, 그것이 비도덕적인 정권에 대한 찬탈을 용인하는 혁명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맹자의 혁명사상은 사실 그의 위민의식(爲民意識)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또한 위민을 구현하기 위한 보완적인 방법이었다. 즉,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하는 '민본주의'(民本主義)에 입각한 맹자의 '위민의식'은 백성의 온존을 위협할 수 있는 부도덕한 정권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필요로 말미암아 당연히 혁명론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임금이 신하를 토개(土芥)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
"반복해서 간(諫)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갈아치운다(易位)"
맹자의 이론은 이러한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맹자는 명분론을 내세워 혁명의 가능성과 그 타당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7]

맹자는 이 혁명의 근거를 민의(民意)를 기본으로 하는 천명에 두고 있다. 그것은 《서경》(書經)의 정치이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이때의 천도관(天道觀)은 집단적·보편적 권위의 실재를 지향하는 중국 고대의 전통적 천도관의 공통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천자가 하늘을 대행하여 백성들을 통치한다는 간접적 '천치주의'(天治主義)에서는 천자의 개폐(改廢)가 천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이 무언(無言)의 천의 의지를 아는 방법은 바로 민의(民意)를 통해서였다. 따라서 민심이 곧 천심(天心)이란 말과 같이 민의가 곧 천의(天意)에 맞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맹자의 혁명론은 민본주의와 직접 연결된다. 이러한 혁명의 방법으로는 천자가 그 자손에게 천위(天位)를 세습하지 않고, 다른 성의 유덕자에게 양위하는 방식, 곧 '선양'(禪讓)과 덕을 잃어버린 천자를 무력으로 추방, 또는 토벌하는 방식, 곧 '방벌'(탕왕·무왕의 경우)이 있다.

다만 맹자의 혁명론에서는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에게 도덕성이 엄격히 요구된다. 즉 탕왕·무왕과 같이 완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혁명이 추진되었을 때 그 혁명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면(王勉)은 "맹자의 말은 아랫사람이 탕·무와 같이 어질고, 윗사람이 걸·주와 같이 포악해야만 가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찬시(簒弑)의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역성혁명론>은 이후 시위(詩緯)의 <삼혁설>(三革說) 등과 결합하여 강화되었고, 후대에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삼과구지설>(三科九旨說)이나 《예기》(禮記)의 <대동설>(大同說) 등에 영향을 주었다.

민본주의를 토대로 한 맹자의 혁명론은 "군신의 구분은 천지간에 피할 데가 없다"라고 하여 명분론의 입장에 섰던 사마광이나 이구 등 북송(北宋)의 사대부 계층에게서는 맹자를 잔인한 사람(忍人)이라 혹평하며 배척하기도 했다. 반면 혼란스러웠던 난세인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황종희(黃宗羲) 같은 사상가에게서는 "맹자의 말은 성인의 말"이라며 극찬을 받기도 하는 등 판이한 평가 속에 부침(浮沈)하여 왔다.

이를테면 시황제 영정의 진나라는 수덕(水德)을 얻어 세운 나라였는데 적제의 아들이라 자칭한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화덕(火德)이었으니 영진을 대신한 건 하늘의 이치라든가, 그 한나라를 대신한 위나라는 토덕(土德)을 입은 나라라든가. 위 문제 조비가 후한의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이후 최초로 정한 연호는 '황초'(黃初)였다.

하지만 다음 왕조가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은 내세운다한들 쿠데타는 쿠데타였다. 더구나 남북조시대 때는 남들 보는 눈이 있어서 앞에선 선양을 받고, 뒤에선 칼을 꽂아 아무 힘도 없는 폐제들을 죽이는 추태를 반복했다. 유송의 마지막 황제 순제는 권력자였던 소도성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선양을 했는데 그 전에 이럴 것을 예상하고 선양식날 숨어버렸다. 하지만 결국 순순히 나와 소도성의 심복 왕경칙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다음 세상에서는 황제로 태어나지 말았으면!
예상대로 순제는 머지않아 소도성이 보낸 사람에 의해 피살되었다.

다만 송태조 조광윤 이후로는 선양이라는 명목상의 쇼는 사라졌다. 이후 세워진 이민족 왕조들은 역성혁명이 아니라 정복 활동을 통해 중국 왕조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한족 정권이지만 몽골족의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세운 정권이어서 선양 자체가 필요 없었고, 청나라가 입관하기 전에 의종 숭정제가 자살해서 선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8]

일본이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유교가 아닌 불교를 중심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천황(天皇)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유지되는 일본 사회[9]에 역성혁명은 독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며, 유교가 역성혁명을 지지하는 사상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성혁명론과 대비되는 만세일계라는 문구가 만들어졌다.

한편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지금의 왕조에 천명이 남아있는 이상 다른 사람이 천명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켜도 능히 진압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진압된 반란세력은 감히 천명을 참칭하여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힌 역적이 되니, <역성혁명론>이 오히려 기존의 정치체제에 힘을 싣는 이념으로 자리잡는 셈이다.[10]

3. 유럽의 경우[편집]

Comment que pluseur estat de gens soient maintenant,
voirs est qu’au commencement tuit furent franc et d’une meisme franchise,
car chascuns set que nous descendismes tuit d’un pere et d’une mere.
Mes quant li pueples commença a croistre et guerres et mautalent furent commencié par orgeuil et par envie, qui plus regnoit lors et fet encore que mestiers ne fust,
la communetés du pueple, cil qui avoient talent de vivre en pes, regarderent qu’il ne pourroient vivre en pes tant comme chascuns cuideroit ester aussi grans sires l’uns comme l’autres: si eslurent roi et le firent seigneur d’aus et li donnerent le pouoir d’aus justicier de leur mesfés, de fere commandemens et establissemens seur aus;
et pour ce qu’il peust le pueple garantir contre les anemis et les mauvès justiciers, il regarderent entre aus ceus qui estoit plus bel, plus fort et plus sage, et leur donnerent seignourie seur aus en tel maniere qu’il aidassent a aus tenir en pes et qu’il aideroit au roi,
et seroient si sougiet pour aus aidier a garantir.
Et de ceus sont venu cil que l'en apele gentius hommes, et des autres qui ainsi les eslurent sont venucil qui sont franc sans gentillece.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신들 가운데서 귀족을 선출한 사람들 중 남은 이들은 비귀족 자유민이 되었다.

Beaumanoir, Coutumes de Beauvaisis (1283), 45장
et ces coustumes est li cuens tenus a garder et a fere si garder a ses sougiès que nus ne les corrompe.
Et se li cuens meismes les vouloit corrompre ou soufrir qu’eles fussent corrompues, ne le devroit pas li rois soufrir,
car il est tenus a garder et a fere garder les coustumes de son roiaume.
백작은 판례를 통해 인정된 관습법을 스스로 준수하고 신하들이 준수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
그리고 만약 백작이 스스로 법을 어기거나 신하들이 법을 어기는 것을 묵인하려 한다면, 국왕이 그것을 막아야 한다.
왜냐면 국왕은 자신의 왕국의 법을 지키고 신하들이 지키게 만들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Coutumes de Beauvaisis , 24장
La setisme vertus qui doit estre en baillif, si est qu’il obeïsse au commandement de son seigneur en tous ses commandemens,
essieutés les commandemens pour lesqueus il pourroit perdre s’ame s’il les fesoit,
car l’obeïssance qu’il doit doit estre entendue en droit fere et en loial justice maintenir.
Ne li baillis ne seroit pas escusés vers Dieu qui du commandement son seigneur feroit tort a son escient.
대법관이 가져야 할 일곱 번째 미덕은, 자신의 군주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단, 수행했을 때 영혼(ame)을 잃을 수 있는 명령을 제외하고.
왜냐면 대법관에게 의무지어진 충성은 법을 적용하고 공정한 재판을 유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군주의 명령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대법관은 하느님 앞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Coutumes de Beauvaisis , 1장
중세 초기 유럽에서 왕이나 황제는 교황의 신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세속적 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도 아니었다. 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가 있으면 그와 왕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이 열렸으며, 법정의 판정은 왕에게도 적용되었다. 중세 서양의 왕들은 인민의 의견을 듣지 않고 법을 만들고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간주되지 않았다. 자연법 내지는 신의 법에 의해서 왕권은 제한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Plamenatz 1963, 158-159). 나중에는 의회(parliaments)가 왕권을 제한하는 기능을 맡게 된다. 13세기는 일반적으로 중세 문명의 전성기로 통하지만, 그때 이미 서양의 군주들은 ‘대의체제(a system of representation)’로의 이행을 시작하고 있었다(Morrall 1958, 60).

…속세의 왕들이 주장한 속권의 신수설(神授說)은 교회 신권에 대한 속권의 종속성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왕권이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주장은 아니었다. 왕권이 관습에 의한 세습권과 함께 인민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관념도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Plamenatz 1963, 160-161).
…왕이 주권자(主權的: sovereign)임을 주장한 장 보댕(Jean Bodin, 1530~1596)조차도 왕권이 자연법이나 신의 법 위에 존재하므로 인민은 그에 저항할 권리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Plamenatz 1963, 158-159). 플라메나츠에 따르면, 신수권에 바탕한 절대 군주제의 독트린(doctrine of absolute monarchy by divine right)은 종교전쟁과 내전이 프랑스와 영국에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오면서, 이 상황을 극복하려는 움직임 가운데서 비롯하였다. 이 혼란한 사태가 종식되면서 그 독트린 또한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이삼성, <동서양의 정치전통에서 성속(聖俗)의 연속과 불연속에 관한 일고>

서양에서는 고대부터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한 자와 계약을 맺기 시작했고 이것이 군주제의 기원이 된다. 그렇기에 의 권력은 공동체를 방어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에 근거한다는 생각이 이어져왔다. 법과 군주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로 형성된다는 개념이 강했기에, 군주가 교회와 귀족들에게 지켜야할 의무 또한 막중하게 여겨졌다. 이러한 개념은 맹자로 대표되는 동양에도 있었으나 비교적 요식행위에 가까웠다. 1651년 발표된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이러한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왕권신수설이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크게 유행했으나,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유행했다. 서유럽에서 사회계약에 크게 어긋난 비합법적 역성혁명은 중세 초창기 메로빙거 왕조가 카롤링거 왕조로 교체된 때 이후로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왕위를 가지기 위해선 비교적 실질적인 명분이 필요했고, 그런 요소를 갖추지 못한 평민이 선양을 통해 왕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다만 서양 군주정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로마 제국의 경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부터 동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까지 굉장히 잦은 역성혁명과 내전이 벌어졌다. 봉건제가 끝나고 서유럽에서 비합법적 혁명은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 혁명 때가 되어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서양은 모계로 왕위를 잇는 케이스가 많았다. 동양 군주들은 후궁이 많아 정실부인인 왕비에게서 자식을 못보면 후궁이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왕가의 '성'을 끝내 잇게 했지만 서양 군주들은 기독교 사상에 따라 공식적으로 일부일처를 지향하고 후궁도 없었기 때문에[11] 하나 있는 왕비가 아들을 낳아주지 못하면 왕위의 남성 계통이 끊겼다.[12]

또한 잦은 전란 탓에 왕의 성이 끊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기에 왕과 혈연이 있는 여자 형제의 남편인 귀족이 왕가를 잇거나, 아예 여자 형제와 결혼한 다른 나라의 왕이 전사한 왕의 왕위를 잇는 일까지 있었기에 왕가의 '성'이 바뀌는 일이 애초에 다반사였다. 실례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나 중세 독일어권의 합스부르크 왕조만 보더라도 유럽은 왕통이 끊겼을 때, 다른 왕조의 가문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가계를 잇게 하였다.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가 대표적인 예로 기존 압스부르고 왕조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선왕 카를로스 2세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래서 전근대 시절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유럽 내부에서 있었던 전쟁의 경우 '집안 싸움', '가족 다툼'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참고로, 이탈리아의 공화제 전환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칭하는 전문가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의회가 적법한 절차를 밟아 공화제 전환을 의제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에 따라 바로 왕가를 해산한 것이다. 정치학적으로 '혁명'의 정의는 기존 국가나 정권에 반하는 불복종, 불법, 폭력과 같은 급격한 행위가 수반된 대중적 사회운동을 통해서 국가와 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 권력을 수립하는 현상이다.[13] 이렇듯 어떠한 정치적 변화를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시민불복종 혹은 무장저항권 등 과격한 저항권 발동을 수반하여야 한다. 이탈리아 왕국의 공화제 전환은 해당 개념에 입각하지 않으므로 역성혁명이나 시민혁명 또는 무혈혁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저 국민투표에 의해 군주제가 축출되었다고 간주할 따름이다.

4. 목록[편집]

4.1. 한자문화권[편집]

4.1.1. 중국사[편집]

  •  → (은)
    걸왕을 탕왕이 쓰러뜨린 하-상(은) 역성혁명은 중국사 최초의 역성혁명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하나라의 실존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고 후술하는 상-주 역성혁명과 레파토리가 유사하기 때문에 후대에 조작된 기록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 전한 → 
    전한 유자영이 신나라 왕망에게 선양한 사례. 왕망은 유자영을 죽이지 않았지만 그를 독방에 수감시켜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켰으며, 그 전의 황제이자 자신의 사위였던 평제를 죽인 혐의가 있다. 그리고 왕망은 신나라를 건국하였지만 지방에 있는 한나라 왕족들의 반격을 받아서 15년만에 패망했고, 한나라는 후한으로 다시 시작하게 된다. 즉 왕망은 역성혁명에 성공은 했으나 다시 뒤집힌 사례인 것이다.
  • 후한 → 조위
    후한 헌제가 조위 문제 조비에게 선양한 한-위 교체. 이는 뒷날의 선양들에 비하면 원만한 사례에 속한다. 더구나 조비는 헌제에게 관례를 황제와 같게 하고 '신'(臣)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특전을 베풀었다.[14] 간혹 모범적인 선양 사례니 칭송하기도 하지만 무혈 선양으로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조비의 행적에 국한된 것이고, 그 선대인 조조의 행적까지 다 살펴보면 그야말로 피가 난무했다.[15]
  • 조위 → 서진
    원제 조환이 서진의 사마염에게 선양한 위-진 교체. 헌제와 비슷한 경우로, 조환은 헌제와 거의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
  • 후주 → 
    오대십국시대 후주 공제가 조광윤에게 선양한 사례. 조비처럼 욕을 먹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진짜 원만한 사례이고 이후로도 조광윤은 공제를 정중히 대우했으며, 시씨 가문에게도 단서철권[16]을 주거나 전쟁으로 황실이 피난을 갈 시 같이 데려가는 등 우대를 해줬다. 그랬기에 시씨 가문은 남송의 마지막인 애산 전투 때까지도 조광윤의 가문인 송나라 황가에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보이며 말 그대로 원만한 선위와 그에 따른 상부상조의 최고의 사례임을 보여주었다.

4.1.2. 한국사[편집]

  • 위만의 정변
    고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고조선의 서북지역을 지키다 반란을 일으킨 후 준왕을 몰아내고서 위만조선을 건국한 사건. 기록 상 전해지는 한국사 최초의 군사정변이자 역성혁명이다.

4.2. 한자문화권 이외[편집]

한자문화권에서는 왕조가 국가 그 자체로 간주되어 역성혁명이 성공하면 국호 역시 바뀌는 게 대다수였던 반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국호가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4.2.1. 영국사[편집]

  • 요크 왕조 → 튜더 왕조
    리처드 3세가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기점으로 요크 왕조 내에서 여러 내분이 있었고 이를 틈타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에 상륙해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튜더 가문은 계승권에서 멀어도 한참 먼 가문이였지만 랭커스터 파의 지지를 받았고 헨리 7세가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들임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미 전쟁으로 인해, 정통성을 가진 대부분의 플랜태저넷 혈통이 사망하여 왕가에 위협이 되는 귀족들이 적었기에 튜더 왕조는 영국사 사상 최강의 왕권을 누릴 수 있었다.

4.2.2. 그 외[편집]

  • 이스라엘 왕국 - 사울 왕조 → 다윗 왕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과 형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사울의 4번째 아들 이스보셋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부하였던 아브넬이 권력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유다 지파의 지지를 받았으며 남쪽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던 다윗에게 대항하여 전쟁을 치렀으나 기브온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엎친데 덮친격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을 범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투항한다. 이스보셋은 부하장수 레갑과 바아나에게 살해당하였다. 힘을 키우던 다윗은 통합 이스라엘 왕국의 정식적인 왕이 된다. 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로 분열이 된 이후로는 북이스라엘은 10개 지파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과거 판관들처럼 지파별로 돌아가면서 왕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왕가의 힘은 귀족들의 견제 때문에 약했으며,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 지파가 오히려 왕보다도 막강했다. 그래서 왕이 10지파를 대표할 자격이 없거나 의심되면 쿠데타도 손쉽게 벌어졌고, 실제로 8번이나 왕가가 바뀌었다. 반면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만의 왕국이나 다름없어서 다윗의 언약을 명분으로 왕권 강화와 세습을 이어갔다.
  • 북이스라엘 왕국 - 오므리 왕조 → 예후 왕조
    《성경》에서 묘사된 역성혁명들 중에서 비교적 자세한 과정이 남아있다. 《성경》에 따르면 선지자 엘리야가 예후에게 기름부음을 주며 오므리 왕조를 멸할 것을 명령했고 명령에 따라 쿠데타를 일으켜 먼저 북이스라엘 왕인 여호람을 활로 쏘아 죽이고[17] 다음으로 남유다의 아하시야 왕을 죽였다. 그 다음으로 아합의 왕비이자 여호람의 어머니인 이세벨 왕비를 죽이러 찾아갔는데 이세벨은 대범하게도 꽃단장을 한 채 예후를 보며 "상전을 죽인 역적 지므리놈아, 그래 일이 잘 되었느냐?"라고 외쳤고 이에 예후가 자기 명을 받드는 자가 없냐고 소리치니 옆에 있던 내시 두 명이 이세벨을 창밖으로 던져 죽였다.[18][19] 마지막으로 아합이 들인 바알 신앙을 뿌리뽑기 위해서 바알 선지자들을 속여서[20] 몽땅 모이게 한 후 모조리 학살했고, 바알 신전은 때려부순 뒤 공중화장실로 만들었다.
  • 태국 - 톤부리 왕조 → 짜끄리 왕조
    딱신의 톤부리 왕조는 건국자이자 마지막 인 딱신이 정신병으로 인해 포악해져 폭정을 일삼자 반란군이 그를 처형하고 덕망 높은 차오프라야 짜끄리 장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4.3. 예외 사례[편집]

  • 고구려 - 해(解) → 고(高)
    초기 왕족들의 이름에 (解)자가 많은 것을 근거로 본래 고구려의 국성은 해씨였으나 나중에 고씨에 의해서 역성혁명이 일어났고, 고씨 왕가가 전대의 왕들까지 소급하여 기록을 조작, 해씨를 고씨로 조작했다는 <해씨 고구려설>이 있다. 하지만 반론도 많으며, 주류 학계에서는 해씨=고씨가 통설이다.
  • 신라 - 박(朴) → 석(昔) → 김(金)
    역사상 있었던 밀양 박씨경주 석씨경주 김씨간의 교체는 아직 중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기 전에 성립한 고대 한국의 특수성에서 일어난 일로서 중국식 <역성혁명론>의 정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의 성씨 교체 원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왕사 문서 참고.
  • 일본 - 야마토 왕조
    만세일계로 상징되는 만큼 일본 황실은 다른 가문으로 교체된 적이 없어 역성혁명이 실현된 적이 없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 일본 최초의 정사인 《일본서기》의 편찬 이전에 왕조가 두 번 정도 교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으며 또한 이 시기 왜국은 중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있었을지 모르는 고대 일본의 왕조 교체는 중국식 역성혁명과 성격이 다르다.

4.4. 가상 사례[편집]

5. 같이보기[편집]

[1] 사실 '선양'은 역사시절 가 에게, 이 에게 제위를 넘겨준 것을 기원으로 하는데, 후대에는 제위를 찬탈한 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전 왕조를 멸망시키면서도 겉으로는 선양을 받는 눈가리고 아웅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그 시조이자 대표적인 예로 전한의 유자영으로부터 선양받아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이 있다.[2] 《주역》 64괘중 하나인 '혁'(革)괘의 설명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3] 도적 적, 역적 적, 사악할 적, 포학할 적, 학대할 적, 해칠 적, 죽일 적, 그르칠 적[4] 잔혹할 잔, 흉악할 잔, 해칠 잔, 죽일 잔, 재앙 잔[5] 죄를 지은 자를 처형하는 것[6]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해하는 것[7] 다만, 이러한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 학문적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중국철학사》를 저술한 풍우란은 백성의 혁명권을 인정했다는 식으로 서술하지만, 《중국정치사상사》를 지은 소공권은 단지 '소극적인 저항'을 인정한 것이지 혁명으로 정권을 뒤엎을 정도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서술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시대적인 한계를 온전히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맹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8] 청나라는 명나라와 싸웠으나, 정작 명나라를 멸망시킨 주체는 청나라가 아니라, 이자성의 순나라였고 청은 입관 후 순을 제압하면서 중원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청 초기까지는 명나라 잔당 세력에 의해 세워진 남명이 중국 남부에서 명맥을 이어갔으나 남송과는 달리 빠르게 멸망했다.[9]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천황이라는 존재는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이다. 일본에서는 봉건제도가 오랫동안 이어져 지방 영주들이 세금을 걷을 권리는 물론 사병은 물론 정규군을 자유롭게 창설하고 유지할 권리마저 가졌기 때문에 역성혁명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독립을 선언하더라도 막을 방법이 전무했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도쿠가와 막부가 열린 뒤에야 일본에서 유교가 발달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일본의 토종신앙인 신토는 천황이 힘이 없더라도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왔는데, 불교는 신토신앙과 공존의 여지가 그나마 존재했지만, 유교에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 怪力亂神)이라는 문구가 막강하게 힘을 발휘한 탓에 신토와 공존될 여지가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유교가 아시아의 여타 국가들과는 달리 일본에서만큼은 중앙 권력에 이용될만한 여지가 없었다는 의미이다.[10] 제대로 성공할 자신 없으면 함부로 딴 마음 품지 말라는 이야기다.[11] 따로 정부를 둔 왕도 있었지만, 내연 관계인 정부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사생아일 뿐 왕위계승권을 받을 수 없었다.[12] 살리카법을 도입한 국가도 많았기에 동양과 같은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은 주요한 요인이었던 것은 아니다.[13] 박윤덕, 시민혁명(비타 악티바 21), 책세상, 2010, 21~27쪽[14] 하지만 남북조시대가 워낙 막장이어서 어디까지나 여기에 비해서 나을 뿐이지 찬탈은 찬탈이다.[15] 이미 한 왕조를 박살내는 건 조조가 다해놨고 조비는 그저 아버지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그만이라 무혈로 선양을 받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괜히 《삼국지연의》에서 조비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16] 대역죄가 아닌 이상 어지간한 범죄에 대해서 사면을 해주는 치외법권을 의미한다.[17] 시체는 이전에 아합에게 죽은 나봇의 포도원에 던졌다.[18] 시체는 마차에 짓밟혀 박살이 났고 남은건 죄다 개들이 뜯어먹어 이후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려고 했지만 머리와 손발만 수습할 수 있었다.[19] 이 외에 남은 왕족들도 모두 학살당했다.[20] 바알을 모시는 제사를 크게 지낼테니 모두 빠짐없이 모일 것이며 명령을 어길 시 죽이겠다고 엄포를 놨다. 덕분에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들을 잘 대접해주려고 하는구나 싶어서 의도대로 모여줬다.[21] 이쪽은 현실의 동양문화권처럼 왕조는 물론 나라 이름도 바뀌었다.[22] 그리피스가 샬로트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계승권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혈통상으로는 기존 미들랜드 왕가의 연장선이다.[23] 공백의 100년 이전[24] 공백의 100년 이후~13년 전, 다만 이 때는 리쿠 왕조가 돈키호테 왕조에 들고 일어난건 아니고 돈키호테 왕조의 일원들이 나라를 떠나고 마리조아에서 천룡인이 되어 왕위가 공석이 되자 드레스로자에서 자체적으로 선출한 것이다.[25] 13년 전~드레스로자 편[26] 드레스로자 편~[27] 이쪽도 현실의 동양문화권처럼 왕조는 물론 나라 이름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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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왕조주기 편집 ]

무료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

왕조의 순환은 중국 고대사의 특징으로, 옛 왕조가 무너진 후 새로 세워진 왕조는 사회 체제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무너질 때까지 옛 왕조의 모든 것을 반복한다 , 그리고 사이클은 계속됩니다 중국 철학자 량수밍(梁 Shuming) 은 이러한 특징을 “혁명이 없는 하나의 규칙과 하나의 혼돈의 순환 [1]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왕조 주기는 국제 중국학 공동체 의 큰 관심 주제이기도 하며,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2] .

왕조주기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표현됩니다 [3] :

  1. 새로운 통치자는 중국 을 통일하고 자신을 황제라고 선포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며 천명을 획득했습니다 .
  2. 신왕조 건국 초기, 중국은 번영과 안정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그에 따라 인구도 늘어나 통치의 시대, 심지어는 번영 의 시대 까지 이르렀다 .
  3. 정무의 부패가 심화되고, 왕조는 쇠퇴와 혼란을 향해 나아갑니다.
  4. 자연재해는 농지에 해를 끼치고 식량 생산을 방해하며, 인구 과잉과 부패와 함께 대규모 기근을 초래합니다 [4] .
  5. 기근은 농민 반란과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 [4] .
  6. 황제는 운명을 잃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4] .
  7. 잦은 재난으로 인해 인구는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습니다 [5] .
  8. 전국 각지에서 영웅들이 일어섰고, 중국은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시대 에 접어들었습니다. [5] .
  9. 지역 세력이 다시 한번 중국을 통일했고, 그들의 군주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 습니다 .
  10. 새로운 왕조는 운명을 이기고 왕조 주기의 다음 주기에 들어갑니다 [4] .

참고문헌 편집 ]

  1. ^ Liang Shuming : "중국 문화의 필수 요소" 제11장
  2.  Edwin O. Reischauer, "The Dynastic Cycle", John Meskill, The Pattern of Chinese History , (Boston: AND RAYMOND+LUCIA =love. Heath and Company, 1965), pp. 31-33.
  3. ^ Ch 4, " Alien Rule and Dynastic Cycles ", Fair Bank, John King. 미국  중국 .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80–104. ISBN  978-0674924352 .
  4. ^다음으로 이동:4.0 4.1 4.2 4.3 4.4 4.5 Ching, Frank 조상: 중국 가족의 900년 뉴욕: William Morrow and Company, 1974. p 78 .
  5. ^다음으로 이동:5.0 5.1 Wills, John E. 명예의 산: 중국 역사 속의 초상화 프린스턴: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1994- p. 35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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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姓革命

이성혁명 일어한역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이성혁명 ( 에키세이 카쿠메이)이란, 고대 중국 에서 일어난 묘자 들의 유교 에 근거한, 오행 사상 등으로부터 왕조 의 교대를 정당화하는 이론 [1] .

개요 편집 ]

주님의 무왕이 순수한 왕을 멸망시켰을 때부터 주창받았고, 하늘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조에게 지상을 다스리게 하지만, 덕을 잃은 현재 의 왕조 에 하늘이 간절히 밝힐 때, “ 혁명 생명 을 혁명한다 )'가 일어난다고 여겨졌다. 그것을 깨닫고, 군주 ( 천자 , 즉 하늘의 아이)가 스스로 위를 양보하는 것을 「선양」, 무력 에 의해 추방되는 것을 「방벌」이라고 한다.

후한 으로부터 선양을 받은의 조병은 “ 호현이 간 것을 알았다(호현의 선양도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후한 (劉氏)에서(조씨)와 같이, 전왕조(와 그 왕족)가 덕을 잃고, 새로운 덕을 갖춘 일족이 신왕조를 세웠다(성이 용이하다 ) 라는 것이 기본 적인 사고방식이며 혈통의 단절이 아니라 덕의 단절이 이성혁명의 근거로 하고 있다 . 유가 묘코는 이성혁명에서 선양과 무력에 의한 왕위 탈탈의 방벌도 인정했다 [1] .

대부분의 신왕조에서는 사서편찬 등에서 역대왕조의 정통한 후계임을 강조하는 한편, 그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왕조와 말대황제의 불덕과 악역이 강조된다. 전형적인 예로서,  과  의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파제 와 같이 나쁜諡号을 받거나 諡号이나廟号자체를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에의 반역자인 이자성을 토벌하고 천하를 계승한 청과 같은 경우 에는, 명의 말대 황제 숭황제  현창되고, 사호나 묘호도 주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이성혁명론은 ​​왕조교대를 정당화하는 이론 이다 [1] . 또 이 이론이 있었기 때문에 유방 이나 주원연과 같은 비지배계층 출신자의 지배를 긍정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양 , 특히 고대 로마의 후계인 동 로마 제국을 제외한 광범위한 서유럽 사회에서 군주의 혈통이 가장 중시된 것과 대조적이다. 서유럽 국가에서는 한 나라의 군주의 직계가 단절되었을 때, 국내에 군주인 것에 적합한 혈통의 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타국의 군주의 혈족으로부터 새로운 왕을 맞이하여 신왕조를 흥할 정도로 혈통 원리는 지배적이었다. 이성혁명에는 비판도 있었고, 예를 들어 에도막부에 의한 봉건 체제하의 일본에서는 야마가소행 이라는 학자가 다르게 외치고 일본의 만세일계 사상과 대비해 중조 사실 이라는 책을 적었다. 반면 진진의 진승 은 '왕후장 상녕하자 종 아란야'의 명언으로 이성혁명을 긍정해 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인 진승·오히로의 난을 일으켰다 . 이 난은 나중에 초한 전쟁을 거쳐 한왕 조가 흥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행 사상 면으로부터의 설명에서는 만물에는 목화토금수의 덕이 있고, 왕조도 이 안의 어느 덕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어, 한의 말기를 흔들었다 184년 의 황건의 난은 ,「창천사 황천경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매우 길과 같지 않은 『후한서』 71권 황진 히로스키 열열 제61 황진 히로 덴 [2] )의 슬로건이 내걸렸다. 한조는 불의 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한조를 대신하는 왕조는 흙의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각주 편집 ]

  1. ↑ c 일본어 대사전, 세계대백과사전내 언급, 브리타니카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 디지털대사천, 백과사전 마이페디아, 세계대백과사전 제2판, 대사림 제3판, 일본대백과전서( 닛포니카), 정선판. “ 이성 혁명(에키세이카쿠메이)이란 ”. 코트뱅크 . 2019년 8월 29일 열람.
  2. ^ 范曄 (중국어),後漢書/卷71 , 위키소스 에서 열람.위키 소스 출처 

관련 항목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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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姓革命
概要
脚注
関連項目

易姓革命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易姓革命(えきせいかくめい)とは、古代中国において起こった孟子らの儒教に基づく、五行思想などから王朝の交代を正当化する理論[1]

概要[編集]

周の武王が殷の紂王を滅ぼした頃から唱えられ、は己に成り代わって王朝に地上を治めさせるが、を失った現在の王朝に天が見切りをつけたとき、「革命(天める)」が起きるとされた。それを悟って、君主天子、即ち天の子)が自ら位を譲るのを「禅譲」、武力によって追放されることを「放伐」といった。

後漢から禅譲を受けた曹丕は「の行ったことがわかった(堯舜の禅譲もまたこの様なものであったのであろう)」と言っている。後漢劉氏)から(曹氏)のように、前王朝(とその王族)が徳を失い、新たな徳を備えた一族が新王朝を立てた(わる)というのが基本的な考え方であり、血統の断絶ではなく、徳の断絶が易姓革命の根拠としている。儒家孟子は易姓革命において禅譲と武力による王位簒奪の放伐も認めた[1]

ほとんどの新王朝では、史書編纂などで歴代王朝の正統な後継であることを強調する一方で、その正当性を強調するために前王朝と末代皇帝の不徳と悪逆が強調される。典型的な例として、の逸話が伝わる。また煬帝のように悪い諡号を贈られたり、諡号や廟号自体を贈られない場合もある。一方で、への反逆者である李自成を討って天下を継承したのようなケースでは、明の末代皇帝崇禎帝は顕彰され、諡号や廟号も贈られている。

このように、易姓革命論は王朝交代を正当化する理論である[1]。またこの理論があったために劉邦朱元璋のような非支配階層出身者の支配を肯定することが出来たと言える。これは西洋、とりわけ古代ローマの後継である東ローマ帝国を除いた、広範な西ヨーロッパ社会において、君主の血統が最も重視されたことと対照的である。西ヨーロッパの諸国では、ある国の君主の直系が断絶した際、国内に君主たるに相応しい血統の者が存在しない場合には、他国の君主の血族から新しい王を迎えて新王朝を興すほど血統主義が支配的であった。易姓革命には批判もあり、例えば江戸幕府による封建体制下の日本では、山鹿素行という学者が異を唱え、日本の万世一系思想と対比して中朝事実という書を記した。 反面、秦末の陳勝は「王侯将相寧んぞ種あらんや」の名言で易姓革命を肯定し、史上初の農民反乱である陳勝・呉広の乱を起こした。 この乱は、後に楚漢戦争を経て漢王朝が興るきっかけとなった。

五行思想面からの説明では、万物には木火土金水の徳があり、王朝もこの中のどれかの徳を持っているとされた。たとえば、の末期を揺るがした184年黄巾の乱は、「蒼天已死 黄天當立 歳在甲子 天下大吉(蒼天已に死す、黄天当に立つべし、歳は甲子に在りて、天下大いに吉とならん、『後漢書』71巻 皇甫嵩朱鑈列傳 第61 皇甫嵩[2])」のスローガンが掲げられた。漢朝は火の徳を持っているとされ、漢朝に代わる王朝は土の徳を持っているはずだとの意味である。

脚注[編集]

  1. a b c 日本国語大辞典,世界大百科事典内言及,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デジタル大辞泉,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世界大百科事典 第2版,大辞林 第三版,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精選版. “易姓革命(えきせいかくめい)とは”. コトバンク2019年8月29日閲覧。
  2. ^ ウィキソース出典 范曄 (中国語), 後漢書/卷71ウィキソースより閲覧。

関連項目[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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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代循环

왕조주기 편집 ]

무료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

왕조의 순환은 중국 고대사의 특징으로, 옛 왕조가 무너진 후 새로 세워진 왕조는 사회 체제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무너질 때까지 옛 왕조의 모든 것을 반복한다 , 그리고 사이클은 계속됩니다 중국 철학자 량수밍(梁 Shuming) 은 이러한 특징을 “혁명이 없는 하나의 규칙과 하나의 혼돈의 순환 [1]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왕조 주기는 국제 중국학 공동체 의 큰 관심 주제이기도 하며,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2] .

왕조주기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표현됩니다 [3] :

  1. 새로운 통치자는 중국 을 통일하고 자신을 황제라고 선포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며 천명을 획득했습니다 .
  2. 신왕조 건국 초기, 중국은 번영과 안정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그에 따라 인구도 늘어나 통치의 시대, 심지어는 번영 의 시대 까지 이르렀다 .
  3. 정무의 부패가 심화되고, 왕조는 쇠퇴와 혼란을 향해 나아갑니다.
  4. 자연재해는 농지에 해를 끼치고 식량 생산을 방해하며, 인구 과잉과 부패와 함께 대규모 기근을 초래합니다 [4] .
  5. 기근은 농민 반란과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 [4] .
  6. 황제는 운명을 잃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4] .
  7. 잦은 재난으로 인해 인구는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습니다 [5] .
  8. 전국 각지에서 영웅들이 일어섰고, 중국은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시대 에 접어들었습니다. [5] .
  9. 지역 세력이 다시 한번 중국을 통일했고, 그들의 군주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 습니다 .
  10. 새로운 왕조는 운명을 이기고 왕조 주기의 다음 주기에 들어갑니다 [4] .

참고문헌 편집 ]

  1. ^ Liang Shuming : "중국 문화의 필수 요소" 제11장
  2.  Edwin O. Reischauer, "The Dynastic Cycle", John Meskill, The Pattern of Chinese History , (Boston: AND RAYMOND+LUCIA =love. Heath and Company, 1965), pp. 31-33.
  3. ^ Ch 4, " Alien Rule and Dynastic Cycles ", Fair Bank, John King. 미국  중국 .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9: 80–104. ISBN  978-0674924352 .
  4. ^다음으로 이동:4.0 4.1 4.2 4.3 4.4 4.5 Ching, Frank 조상: 중국 가족의 900년 뉴욕: William Morrow and Company, 1974. p 78 .
  5. ^다음으로 이동:5.0 5.1 Wills, John E. 명예의 산: 중국 역사 속의 초상화 프린스턴: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1994- p. 35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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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nastic cy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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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nastic cy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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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nastic cycle (traditional Chinese朝代循環simplified Chinese朝代循环pinyinCháodài Xúnhuán) is an important political theory in Chinese history. According to this theory, each dynasty of China rises to a political, cultural, and economic peak and then, because of moral corruption, declines, loses the Mandate of Heaven, and falls, only to be replaced by a new dynasty. The cycle then repeats under a surface pattern of repetitive motifs.[1]

It sees a continuity in Chinese history from early times to the present by looking at the succession of empires or dynasties, implying that there is little basic development or change in social or economic structures.[2] John K. Fairbank expressed the doubts of many historians when he wrote that "the concept of the dynastic cycle... has been a major block to the understanding of the fundamental dynamics of Chinese history."[3]

The cycle[edit]

The cycle appears as follows:[4]

  1. A new ruler founds a new dynasty, and gains the Mandate of Heaven.[5]
  2. China, under the new dynasty, achieves prosperity.
  3. The population increases.
  4. Corruption becomes rampant in the imperial court, and the empire begins to enter decline and instability.
  5. A natural disaster wipes out farm land. The disaster normally would not have been a problem; however, together with the corruption and overpopulation, it causes famine.[5]
  6. The famine causes the population to rebel and a civil war ensues.[5]
  7. The ruler loses the Mandate of Heaven.[5]
  8. The population decreases because of the violence.[6]
  9. China goes through a warring states period.[6]
  10. One state emerges victorious.
  11. The state starts a new empire.[5]
  12. The empire gains the Mandate of Heaven.[5]
(The cycle repeats itself.)

The Mandate of Heaven was the idea that the monarch was favored by Heaven to rule over China. The Mandate of Heaven explanation was championed by the Chinese philosopher Mencius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5]

It has 3 main phases:

  1. The first is the beginning of the dynasty.
  2. The second is at the middle of the dynasty's life and is the peak of the dynasty.
  3. The last period is the decline of the dynasty, both politically and economically, until it finally collapses.

Significance[edit]

Chinese history is traditionally represented in terms of dynastic cycles. Through its long history, the Chinese people have been ruled not by one dynasty, but by a succession of different dynasties. The first orthodox dynasty of China to be described in ancient historical records such as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and Bamboo Annals is the Xia, which was succeeded by the Shang, although concrete existence of the Xia is yet to be archaeologically proven.

Among these dynasties the Han and Tang are often considered as particularly strong periods, although other dynasties are famous for cultural and other achievements (for instance, the Song dynasty is sometimes associated with rapid economic development). Han and Tang, as well as other long, stable dynasties, were followed by periods of disorder and the break-up of China into small regimes.

Out of disorder a leader eventually arose who unified the country and imposed strong central authority. For example, after the Han various dynasties ruled parts of China until Yang Jian reunited China under the Sui dynasty. The Sui set the scene for the long and prosperous Tang. After the fall of Tang, China again saw a period of political upheaval.

There is a famous Chinese proverb expressed in the 16th-century novel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that says "After a long split, a union will occur; after a long union, a split will occur" (分久必合,合久必分). Each of these rulers would claim the Mandate of Heaven to legitimize their rule.

Although this well-known dynastic periodization of China is more or less based on traditional Sinocentric ideology, it also applies to non-native rulers who sought to gain the Mandate of Heaven. While most ruling dynasties in Chinese history were founded by ethnic Han, there were also dynasties established by non-Han peoples beyond the traditional border of China proper dominated by Han people. These include the Yuan founded by Mongols and the Qing founded by Manchus, who later conquered China proper and assumed the title of Emperor of China.

See also[edit]

References[edit]

Citations[edit]

  1. ^ Edwin O. Reischauer, "The Dynastic Cycle", in John Meskill, The Pattern of Chinese History, (Lexington: D. C. Heath and Company, 1965), pp. 31-33.
  2. ^ "Dynastic cycle," in Dillon, Michael (1998). Chin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Richmond, Surrey: Curzon. ISBN 978-0700704392., p. 87
  3. ^ John K. Fairbank and Edwin O. Reischauer, East Asia: The GreatTradition(Boston, 1960), p. 115.
  4. ^ Fairbank (1979), p. 102.
  5. Jump up to:a b c d e f g Ching, Frank. Ancestors: 900 Years in the Life of a Chinese Family. New York: William Morrow and Company, 1974. p 78.
  6. Jump up to:a b Wills, John E. Mountain of Fame: Portraits in Chinese Histo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p. 35

Sources[edit]

External lin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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