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8

전 주한미대사 릴리 회고록―긴박했던 1987년 / ″전두환 계엄령 내가 막았다″-국민일보

전 주한미대사 릴리 회고록―긴박했던 1987년 / ″전두환 계엄령 내가 막았다″-국민일보

전 주한미대사 릴리 회고록―긴박했던 1987년 / ″전두환 계엄령 내가 막았다″
입력 : 2004-07-17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 대사가 ‘중국통:아시아에서의 90년 동안 모험,첩보,외교(China Hands:Nine Decades of Adventure,Espionage and Diplomacy in Asia)’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에 근무하면서 1951년부터 20여년 동안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중국을 관찰했고,미·중 수교 이후에는 대만 대표부장과 주중 대사를 역임했던 경험을 담담하게 서술한 책이다.그는 회고록 대부분을 중국에서의 활동과 대중국 경험에 할애했지만 주한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 역시 상세하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가 주한 대사로 있었던 1986년부터 3년 동안은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체제가 민주화 운동에 의해 종식됐던 마지막 순간이자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마쳐진 시기여서 의미가 크다. 그는 스스로 주한 대사로 재직하던 1987년을 ‘보람 있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1987년 계엄령 포기 촉구=릴리의 기억은 1987년 6월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분출하는 민주화 운동을 막기 위해 계엄령 발동을 검토하고 있었다. 릴리는 전 대통령이 대통령 직접선거 대신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마자 대학생들의 시위에 탄력이 붙어 서울시청 앞에 20만∼30만명의 학생,주부,교사가 모여 시위를 벌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6월17일 릴리는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릴리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대통령 면담 요청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릴리는 우여곡절 끝에 6월19일 90분 동안 전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정치범 석방,권력남용 경찰관 처벌,언론자유 조치 권고 등을 담은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계엄이 선포되면 한·미동맹 훼손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릴리는 그날 오후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최광수 외무장관의 전화를 받았다고 적었다.
릴리는 1987년을 가장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시기로 회상했다.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서울시내에 모이자 전 대통령은 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으나 릴리는 윌리엄 리버시 주한미군사령관과 협의해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서울 진입을 막는다”고 합의했다고 회상했다. 릴리는 “1980년 광주의 경험으로 미국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직접 개입할 수 없으며 다만 자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게 됐다”고 밝혔다.
중국 전문가였던 릴리는 주한 대사로 부임할 때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86년 11월 서울에 도착했을 때 미국이 현명한 정책을 구사할 경우 한국의 변화를 촉진하고,한국이 보다 개방된 정치와 경제체 제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릴리는 회고록에서 1987년 국무부에 의뢰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료를 모두 조사했다고 적었다. 이는 그가 6·29선언 발표 직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계 지도자를 초청한 리셉션을 준비하면서 이뤄졌다. 그가 국무부를 통해 얻은 자료에는 기밀보고서,경찰자료 등이 포함돼 있었다.
릴리는 “김 전 대통령은 젊은시절 좌파적 정치인이었고,반정부 활동에 연루됐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릴리는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김 전 대통령을 공산주의자이며 선동가라고 주장했지만 나는 한국 정부가 주장한 대로 김 전 대통령이 무력반란을 선동했다는 증거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릴리는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그의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약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은 미국의 말을 쉽게 들을 타입의 지도자”라고 기술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한·중 수교를 앞두고 자신에게 수차례 자문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중국 전문가”라고 소개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미 상원에서 열린 대사 인준 청문회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언했다고 회고록에 기술했다.
◇KAL기 폭파사건=릴리는 19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실종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릴리는 곧바로 북한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묘사했다. 당시 그는 혼잣말로 “북한은 무서운 짓을 저질렀다.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사실을 밝혀내고 북한에 타격을 주자”고 말했다고 적었다. 릴리는 북한이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한 이유에 대해 “올림픽 공동개최를 요구하며 한국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고 배후에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공격을 획책했다”고 지적했다.
릴리는 당시 상황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1월31일 김현희가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됐고,함께 체포된 북한 공작원은 청산가리가 든 담배를 물고 즉사했다는 사실을 회상했다. 또 김현희를 바레인에서 서울로 데리고 간 사람은 박수길 외무차관이며,박 차관은 바레인 당국에 “북한 공작원을 오래 데리고 있으면 북한이 구출 공작을 펴 바레인 사람을 살해할 우려가 있다”며 신속히 김현희를 서울로 송환했다고 적었다.
결국 박 차관은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 김현희를 데리고 서울에 도착했으며,이는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릴리는 “노 전 대통령의 고위 보좌관은 나중에 박 차관에게 김현희의 서울 도착으로 최소 150만표를 더 얻었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KAL기 폭파 사건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서울올림픽의 안전조치를 돕기 시작했다”면서 “레이건 대통령은 1988년 3월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구 소련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올림픽에서 북한의 테러공격은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고승욱기자

■전 주한미대사 릴리 누구인가] 美대표적 중국통…동아시아 문제 해박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 대사는 중국에서 태어나 평생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에서 중국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그의 회고록 제목이 ‘중국통(China hands)’인 이유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태동하던 1928년 칭다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유회사 모빌의 중국 지사에서 근무했다. 12살 때까지 칭다오에서 살았던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예일대에 진학했고 졸업하자마자 CIA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CIA에서 뿐 아니라 후에 국무부로 옮긴 뒤에도 그는 베트남 라오스 일본 등지에서 근무하며 중국과 관련된 업무를 계속했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 협상을 진행하던 1970년대에 그는 특별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특히 1975년 구 소련이 중앙아시아에서 핵실험을 할 때 릴리는 신장 지역에 감시기지를 설치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주도,중국과 미국간 신뢰관계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 그는 주대만 미국 대표부 부장(1982∼84),주한 대사(1986∼89),주중 대사(1989∼91) 등을 역임했다. 현재 그는 워싱턴 소재 미국기업연구원의 선임연구원이다.
동아시아 정세가 급격히 변하던 시절 중국통이던 그의 회고록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의 어린시절과 정신분열증으로 일본에서 자살한 동생 이야기 등 개인사를 담담하게 서술한 뒤 자신이 경험했던 냉전시대 대중국 임무를 적었다.
권위 있는 외교잡지 포린 어페어스는 최근 릴리 회고록에 대한 서평을 게재했다. 포린 어페어스는 “그의 회고록은 지난 4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핵심적 사건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면서 “특히 이 책은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이 대만과 중국 사이에서 어떤 정책을 펴야 하고,동아시아 지역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대만에서는 이 회고록이 발간되기 전부터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릴리는 미국에서 책이 출간되기에 앞서 ‘알려지지 않은 미국,중국,대만의 관계’라는 부제를 단 중국어판을 먼저 내기도 했다.
고승욱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Detail.asp?newsClusterNo=01100201.20040717000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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