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7

한국 외교의 ‘조용한’ 붕괴 < 손민석의 털어놓고 말하자면 < 연재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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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한국 외교의 ‘조용한’ 붕괴

손민석의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국 외교의 ‘조용한’ 붕괴기자명손민석
입력 2024.06.25

▲ 손민석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조용하다.” 채 상병 사건과 같이 보다 시급한 국내 현안에 밀려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조용하다. 지난 19일에 있었던 러시아와 북한의 정상회담에 관한 반응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북·러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맺으면서 상대방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지원하겠다며 사실상의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미 푸틴이 방북을 하기로 할 때부터 예견된 사태였건만, 막상 그 결과를 마주하니 지난 30여년간 제6공화국을 뒷받침하던 외교정책의 붕괴가 실감됐다.

이번 북러 관계 개선은 현재의 세계 정세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레드팀’ ‘블루팀’ 같은 용어로 북·중·러를 하나로 묶어 이해하는 일각의 관점과 달리 북러의 관계개선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래 서방의 경제제재에 맞서 러시아는 지난해 3월31일 '신(新)동방정책'이라는 새로운 외교정책 기조를 발표했다.

특히 이 정책에서 돋보였던 점은 중국·인도 등과의 경제적 연대 강화에 따른 외교관의 변화였다. 전통적인 서방권(The West)과 동방권(The East) 간의 대립적 관점이 붕괴되고 '서방'이 러시아 외교에서 후순위로 밀려버렸다. 한국·일본 등을 포함하는 서방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한·미·일과 연관된 북한조차도 아예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의 외교정책의 중심은 서방권에서 중국·인도·이란·튀르키예 등의 국가들로 옮겨졌으며, 미국조차 무수히 많은 비서방국가들 뒤에 위치하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러시아의 새로운 외교정책은 중국과의 관계로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제재로 인해 입은 손실액을 중국·인도와의 교역을 통해 상쇄시키던 러시아로서는 심화해 가는 대중 경제 의존도를 우려스럽게 볼 수밖에 없다. 이미 인도는 러시아가 석유 할인폭을 줄이자마자 곧바로 수입량을 감축시키는 등 자국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푸틴-시진핑 정상회담에도 천연가스 공급에 관한 협상은 중국의 가격후려치기로 결렬됐다.

러시아로서는 중국에 종속돼 가는 상황을 어떻게든 되돌릴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은 러시아가 이용하기 좋은 수단이다. 핵무장 고도화를 꾀하는 북한의 존재는 미국을 한반도로 부를 가능성이 높고, 이는 중국의 지역적 이해를 침해한다. 러시아는 이를 적절하게 활용해 중국을 견제하거나 자신의 불만을 표출할 수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푸틴 대통령에게 방북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는 보도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신동방정책'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북한의 몸값이 서방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중국과, 그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 간의 알력 관계 속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북한으로서도 대외고립을 타파하고 러시아로부터 식량·비료 등을 지원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별다른 지원을 해 주지 않는 중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도 있다. 과거 중소분쟁을 활용해 전략적 입지를 다졌던 것과 같이 북한의 전략적 입지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몽골에서 수교를 위한 일본과의 비밀접촉이 있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반면 한국의 전략적 입지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북방정책·통일정책·남방정책 간의 유기적 연관관계는 윤석열 정부가 ‘자유주의적 국제연대’ 운운하며 ‘레드팀’ ‘블루팀’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붕괴했다. 미·일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와중에 이제는 같은 ‘블루팀’이라는 일본에 라인을 강탈당하고 독도·위안부 등의 문제에서도 양보를 요구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와 북러 관계 개선을 교환한 상황 모두를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실책이라 비판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이 정부가 지금의 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지 의심스럽다. 예상 외의 이 ‘조용한’ 붕괴는 좁아지는 한국의 전략적 입지를 반영하는 건 아닐지 우려되는 요즘이다. ‘레드팀’ ‘블루팀’ 방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북·중·러 사이에 생긴 틈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복합적인 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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