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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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7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 1945~1950 - 2
손세일 (지은이) 조선뉴스프레스 2015-07-01
7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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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세트 - 전7권
판매가 270,900원

이승만과 김구 4 -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 1919~1945 - 2
판매가 38,700원

이승만과 김구 3 -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 1919~1945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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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5 -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 1919~1945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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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7 -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 1945~1950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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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6 -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 1945~195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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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2 -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1875~1919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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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1 -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1875~1919 - 1
판매가 38,700원
책소개
언론인 손세일이 2001년 8월부터 12년 동안 111회에 걸쳐 「월간조선」에 연재 했던 <이승만과 김구>(전7권)가 드디어 완간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라는 한국현대사의 양대 거인을 중심으로 구한말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역사적 사실들을 꼼꼼히 기술하고 있다.
1부에서는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두 사람이 구한말의 격동기를 거쳐 3.1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2부에서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여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3부에서는 1945년 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의 전개 속에서 통일독립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행동했는가를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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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7권>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Ⅱ)
제92장 마침내 유엔총회로
제93장 유엔총회의 결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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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손세일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이승만과 김구 세트 - 전7권>,<이승만과 김구 4>,<이승만과 김구 3> … 총 10종 (모두보기)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저널리즘스쿨과 일본도쿄대학 법학부대학원(국제정치전공)에서 수학했다. 《사상계》 편집장, 조선일보 기자, 동아일보사 《신동아》 부장과 논설위원, 《뿌리 깊은 나무》 편집위원, (사)서울언론문화클럽 이사장 등 언론인으로 활약하다가 정계에 투신하여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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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 1945~1950 - 2
손세일 (지은이) 조선뉴스프레스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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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세트 - 전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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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4 -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 1919~1945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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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1 -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1875~1919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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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언론인 손세일이 2001년 8월부터 12년 동안 111회에 걸쳐 「월간조선」에 연재 했던 <이승만과 김구>(전7권)가 드디어 완간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라는 한국현대사의 양대 거인을 중심으로 구한말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역사적 사실들을 꼼꼼히 기술하고 있다.
1부에서는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두 사람이 구한말의 격동기를 거쳐 3.1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2부에서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여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3부에서는 1945년 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의 전개 속에서 통일독립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행동했는가를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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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7권>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Ⅱ)
제92장 마침내 유엔총회로
제93장 유엔총회의 결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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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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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이승만과 김구 세트 - 전7권>,<이승만과 김구 4>,<이승만과 김구 3> … 총 10종 (모두보기)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저널리즘스쿨과 일본도쿄대학 법학부대학원(국제정치전공)에서 수학했다. 《사상계》 편집장, 조선일보 기자, 동아일보사 《신동아》 부장과 논설위원, 《뿌리 깊은 나무》 편집위원, (사)서울언론문화클럽 이사장 등 언론인으로 활약하다가 정계에 투신하여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저서로 《이승만과 김구》(1970년), 《인권과 민주주의》(1980),《한국논쟁사(Ⅰ~Ⅴ)》(편)(1976) 등이 있고, 역서로 《트루먼회고록(상,하)》(1966) 등 이 있다.
손세일(지은이)의 말
이승만과 김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든 대표적인 두 지도자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연간 기획특집 「100인의 20세기」(1998)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김일성(金日成) 두 사람을 다루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이러한 평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과 시각에 따른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승만과 김구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큰 두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는 물론 빚도 있다.
나는 1970년에 단권의 『이승만과 김구』를 출판하면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이 책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 또는 정치전기학의 시발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해 주었다.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및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두 사람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기초자료들이 속속 공개되어 이제 자료 부족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연구자들도 크게 불어나서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에서 발표되는 관련 분야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과 연구성과들을 힘자라는 대로 활용하고, 또 한때 이 나라의 정치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안 깨우친 정치의 이치 같은 것도 유념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 쓰기로 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는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사회화 과정의 요인으로는 가족, 학교, 종교기관, 동류집단(peer group), 직업, 대중매체, 정당, 정부조직과의 직접 접촉,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 등을 꼽는다.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는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또 한 사람은 심한 ‘상놈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치사회화 과정의 하나로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의 감옥생활의 경험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스물다섯살부터 서른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4년 반 넘게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의 감동적인 감옥생활은 그들이 각각 다른 모습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아주 특별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하고 신문 논설을 썼다. 김구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에 서양학문의 습득을 통하여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다. 두번째의 식민지 감옥은 그를 저항적 민족주의의 쇳덩어리로 달구어 낸 ‘불가마’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라스웰(Harold D. Lasswell)이 말한 정치적 인간형의 인물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적 인간형은 사적 동기를 공적 목적에 전위하여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고 정의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3?1운동 때까지는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사건이나 운동의 실상과 두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면서부터 1945년8월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 행태와 그 관계를 그들이 처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의 활동이었던 만큼 그 행동양식은 어디까지나 정치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절대적인 규범은 법률이며, 법률의 권위와 효력은 정치권력의 독립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인 법질서의 운영이 불가능했던 임시정부의 주도권 경쟁은, 국권회복이라는 숭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와 자금문제였다.
과세권도 검찰권도 없이, 범죄자 처결 방법은 김구의 말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일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의 위계의식은 국무위원회 주석과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귀국한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두 사람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오늘날의 남북분단체제 고착의 원인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는 1945년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속에서 독립정부 수립의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냉전이란 본질적으로 미소 양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었던 동시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분단체제는 미소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에 따라 국제냉전체제의 최전방 보루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5월에 내한하여 드물게 남북한을 다 여행할 수 있었던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대일배상특사 폴리(Edwin W. Pauley)의 말을 상기시킨다.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큰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대한민국은 어떻게 세워졌는가?
- 원로 언론인 손세일의 45년에 걸친 Life Work! 200자 원고지 2만 3000여매!
- 현대 한국정치사, 대한민국 건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 이승만과 김구라는 두 산봉우리에 올라가 봐야 한국현대사가 보인다! 신화(神話)도 미화(美化)도 아닌, 대한민국의 두 국부(國父)의 초상
원로 언론인 손세일씨가 2001년 8월부터 12년 동안 111회에 걸쳐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연재 했던 《이승만과 김구》(전7권)가 드디어 완간됐다. 200자 원고지 2만 3000여장, 전 7권 각권 800면 내외의 대작이다. 하나의 역사적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연재한 것은 한국 잡지사상 초유의 일이다. 2013년 7월 연재를 마친 후에는 1년여 동안 《월간조선》에 연재했던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거쳐 이번에 전 7권을 출판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미 1970년에 한 권으로 된 《이승만과 김구》를 출간한 바 있다. 이때로부터 기산하면 45년만에 책이 완간되어 나온 셈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한국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노재봉 전 국무총리), ‘한국 최초의 정치전기학 저서’(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라는 평가를 받았다. 《월간조선》에 연재할 때에는 ‘우리나라 전기문학의 큰 업적’(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으로 평가 받았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서 나온 방대한 기초자료를 두루 섭렵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신화(神話)와 미화(美化)를 넘어서는 지적 정직함이다. 이승만이나 김구, 둘 중 한 사람만을 경애(敬愛)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들도 여러 군데 나오지만, 저자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 개의치 않는다.
저자는 두 사람의 네 가지 키 워드로 ▲ 애국심 ▲ 반일감정 ▲ 반공주의 ▲ 기독교 사상을 꼽으면서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대표적인 두 정치지도자이다. 그런 뜻에서 ‘한 나라에 국부(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이승만과 김구라는 한국현대사의 양대 거인을 중심으로 구한말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역사적 사실들을 꼼꼼히 기술하고 있다. 단순히 이승만과 김구라는 두 사람의 비교평전이라는 차원을 넘어, 두 사람을 중심에 놓은 한국현대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현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절제되고 정확한 문장,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쓰려는 노력 등도 돋보인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한국현대사, 특히 대한민국 건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책의 구성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제1, 2권)
1부에서는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두 사람이 구한말의 격동기를 거쳐 3?1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사람이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 이승만은 과거를 보려다가가 실패를 거듭하던 끝에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좌절한다. 이후 배재학당에 입학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독립협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고종 폐위음모에 연루되어 25살~30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다. 이 기간 동안 이승만은 일반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습득과 저술활동을 하고 신문논설을 쓴다. 이후 러일전쟁 후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프린스턴대학 등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지만, 105인 사건의 여파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자리잡는다.
같은 시기에 김구는 동학란에 가담했다가 좌절한 후 한때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에게 의탁한다. 이후 치하포 나루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해 1년 10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 탈옥한다. 이후 전국을 방랑하다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으나, 경술국치 후 105인 사건으로 다시 4년 반 동안 감옥생활을 한다. 첫 번째 감옥생활에서 개화파로 변신한 김구는 두 번째 감옥생활을 거치면서는 불굴의 저항적 민족주의자로 거듭난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제 3, 4, 5권)
2부에서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여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행태와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처했던 국제정치 및 독립운동자 사회의 상황을 정밀하게 살핀다. 상황변화에 대한 임시정부의 대응은 다섯 차례에 걸친 개헌으로 나타났는데, 저자는 그 개헌의 과정과 문제점을 자세히 분석했다. 대표적인 것이 1925년에 있었던 임시대통령의 탄핵과 면직을 둘러싼 ‘정변’과 개헌이었다.
이승만은 이 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지만, 위임통치론 주장 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다가 결국 1925년 탄핵된다. 독립운동 시기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략은 흔히 ‘외교독립론’으로 일컬어지는데, 그 정점은 1933년 제네바회의 참석이었다. 이승만은 1933년1월부터 8월까지 만주사변문제를 다루는 제네바의 국제연맹 회의에 가서 여러 나라의 대표들을 만나고, 《만주의 한국인》이라는 팸플릿을 저술하여 배포하고, 방송과 신문을 통하여 선전활동을 벌인다. 이승만은 제네바 여행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이후 하와이에서 교육 및 경제사업에 힘쓰지만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Japan Inside Out》을 출간하고,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는 단파방송을 통해 해방이 머지않았음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알리면서 오랜 망각에서 벗어나 다시 ‘민족의 지도자’로 떠오른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 정보기관 OSS 및 미 군부와 접촉해 냅코 작전 등 비밀공작을 추진한다.
‘문지기’ 역할을 자처하면서 경무국장으로 임시정부 활동을 시작한 김구는 이후 독립운동가 사회의 알력으로 여러 번 좌초의 위기에 처할 때에도 임시정부를 굳건하게 옹호한다. 김구는 1932년1월과 4월에 잇달아 있었던 이봉창(李奉昌) 의거와 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영도자로 떠오른다. 김구는 장개석(蔣介石)과 회담하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한국청년들을 훈련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충칭에 이르기까지 중국대륙을 표랑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켜냈고, 독립운동세력 내 좌우합작, 광복군의 통수권을 둘러싼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갈등 등을 이겨내면서 결국 해방을 맞는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제 6, 7권)
3부에서는 1945년 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의 전개 속에서 통일독립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행동했는가를 기술한다. 저자는 “동유럽제국의 붕괴 이후에 열람이 가능해진 구소련정부문서를 비롯하여 《슈티코프일기》 등 여러 가지 기초자료를 이용하여 정확한 사실 규명에 노력했다”고 말한다. 특히 1946년 10월 폭동, 1948년 4~5월의 남북협상이 철저하게 소련의 지원과 설계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 대목이 눈길을 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좌익세력으로부터도 주석으로 추대받는 등 좌우파를 막론한 민족지도자로 인정받는다. 이승만 자신도 공산주의에서 취할 점을 강조하는 등 한때 좌익세력까지도 포용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신탁통치반대 투쟁 등을 거치는 동안 공산주의를 콜레라에 비유하면서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정읍발언,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하지 군정 장관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1947년의 도미(渡美)외교 등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으로 가는 길을 연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정읍발언 이후 일관되게 38선 이남에서만이라도 독립정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이 기간 동안 일관되지 모습을 보인다. 해방에서 1947년 말에 이르는 대부분의 시기 동안 김구는 이승만과 협력하면서 반공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기간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엔이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결의한 후, 김구는 이에 대한 찬성과 반대 사이를 오고가다가 결국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만다. ‘국가’를 중시한 이승만과는 달리 그는 ‘민족’을 중시했던 것이다. 저자는 “김구가 1948년4월의 남북협상의 결과에 크게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었다”면서, 1948년7월11일에 경교장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인 유어만(劉馭萬) 중국공사와의 긴 대화록을 소개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남북관계에 대한 김구의 인식을 솔직히 말해주는 문서이다. 결국 1949년 김구는 안두희의 총에 쓰러진다.
손세일(지은이)의 말
이승만과 김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든 대표적인 두 지도자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연간 기획특집 「100인의 20세기」(1998)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김일성(金日成) 두 사람을 다루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이러한 평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과 시각에 따른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승만과 김구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큰 두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는 물론 빚도 있다.
나는 1970년에 단권의 『이승만과 김구』를 출판하면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이 책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 또는 정치전기학의 시발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해 주었다.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및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두 사람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기초자료들이 속속 공개되어 이제 자료 부족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연구자들도 크게 불어나서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에서 발표되는 관련 분야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과 연구성과들을 힘자라는 대로 활용하고, 또 한때 이 나라의 정치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안 깨우친 정치의 이치 같은 것도 유념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 쓰기로 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는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사회화 과정의 요인으로는 가족, 학교, 종교기관, 동류집단(peer group), 직업, 대중매체, 정당, 정부조직과의 직접 접촉,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 등을 꼽는다.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는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또 한 사람은 심한 ‘상놈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치사회화 과정의 하나로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의 감옥생활의 경험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스물다섯살부터 서른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4년 반 넘게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의 감동적인 감옥생활은 그들이 각각 다른 모습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아주 특별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하고 신문 논설을 썼다. 김구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에 서양학문의 습득을 통하여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다. 두번째의 식민지 감옥은 그를 저항적 민족주의의 쇳덩어리로 달구어 낸 ‘불가마’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라스웰(Harold D. Lasswell)이 말한 정치적 인간형의 인물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적 인간형은 사적 동기를 공적 목적에 전위하여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고 정의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3?1운동 때까지는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사건이나 운동의 실상과 두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면서부터 1945년8월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 행태와 그 관계를 그들이 처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의 활동이었던 만큼 그 행동양식은 어디까지나 정치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절대적인 규범은 법률이며, 법률의 권위와 효력은 정치권력의 독립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인 법질서의 운영이 불가능했던 임시정부의 주도권 경쟁은, 국권회복이라는 숭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와 자금문제였다.
과세권도 검찰권도 없이, 범죄자 처결 방법은 김구의 말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일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의 위계의식은 국무위원회 주석과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귀국한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두 사람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오늘날의 남북분단체제 고착의 원인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는 1945년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속에서 독립정부 수립의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냉전이란 본질적으로 미소 양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었던 동시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분단체제는 미소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에 따라 국제냉전체제의 최전방 보루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5월에 내한하여 드물게 남북한을 다 여행할 수 있었던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대일배상특사 폴리(Edwin W. Pauley)의 말을 상기시킨다.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큰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대한민국은 어떻게 세워졌는가?
- 원로 언론인 손세일의 45년에 걸친 Life Work! 200자 원고지 2만 3000여매!
- 현대 한국정치사, 대한민국 건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 이승만과 김구라는 두 산봉우리에 올라가 봐야 한국현대사가 보인다! 신화(神話)도 미화(美化)도 아닌, 대한민국의 두 국부(國父)의 초상
원로 언론인 손세일씨가 2001년 8월부터 12년 동안 111회에 걸쳐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연재 했던 《이승만과 김구》(전7권)가 드디어 완간됐다. 200자 원고지 2만 3000여장, 전 7권 각권 800면 내외의 대작이다. 하나의 역사적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연재한 것은 한국 잡지사상 초유의 일이다. 2013년 7월 연재를 마친 후에는 1년여 동안 《월간조선》에 연재했던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거쳐 이번에 전 7권을 출판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미 1970년에 한 권으로 된 《이승만과 김구》를 출간한 바 있다. 이때로부터 기산하면 45년만에 책이 완간되어 나온 셈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한국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노재봉 전 국무총리), ‘한국 최초의 정치전기학 저서’(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라는 평가를 받았다. 《월간조선》에 연재할 때에는 ‘우리나라 전기문학의 큰 업적’(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으로 평가 받았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서 나온 방대한 기초자료를 두루 섭렵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신화(神話)와 미화(美化)를 넘어서는 지적 정직함이다. 이승만이나 김구, 둘 중 한 사람만을 경애(敬愛)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들도 여러 군데 나오지만, 저자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 개의치 않는다.
저자는 두 사람의 네 가지 키 워드로 ▲ 애국심 ▲ 반일감정 ▲ 반공주의 ▲ 기독교 사상을 꼽으면서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대표적인 두 정치지도자이다. 그런 뜻에서 ‘한 나라에 국부(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이승만과 김구라는 한국현대사의 양대 거인을 중심으로 구한말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역사적 사실들을 꼼꼼히 기술하고 있다. 단순히 이승만과 김구라는 두 사람의 비교평전이라는 차원을 넘어, 두 사람을 중심에 놓은 한국현대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현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절제되고 정확한 문장,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쓰려는 노력 등도 돋보인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한국현대사, 특히 대한민국 건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책의 구성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제1, 2권)
1부에서는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두 사람이 구한말의 격동기를 거쳐 3?1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사람이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 이승만은 과거를 보려다가가 실패를 거듭하던 끝에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좌절한다. 이후 배재학당에 입학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독립협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고종 폐위음모에 연루되어 25살~30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다. 이 기간 동안 이승만은 일반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습득과 저술활동을 하고 신문논설을 쓴다. 이후 러일전쟁 후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프린스턴대학 등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지만, 105인 사건의 여파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자리잡는다.
같은 시기에 김구는 동학란에 가담했다가 좌절한 후 한때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에게 의탁한다. 이후 치하포 나루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해 1년 10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 탈옥한다. 이후 전국을 방랑하다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으나, 경술국치 후 105인 사건으로 다시 4년 반 동안 감옥생활을 한다. 첫 번째 감옥생활에서 개화파로 변신한 김구는 두 번째 감옥생활을 거치면서는 불굴의 저항적 민족주의자로 거듭난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제 3, 4, 5권)
2부에서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여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행태와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처했던 국제정치 및 독립운동자 사회의 상황을 정밀하게 살핀다. 상황변화에 대한 임시정부의 대응은 다섯 차례에 걸친 개헌으로 나타났는데, 저자는 그 개헌의 과정과 문제점을 자세히 분석했다. 대표적인 것이 1925년에 있었던 임시대통령의 탄핵과 면직을 둘러싼 ‘정변’과 개헌이었다.
이승만은 이 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지만, 위임통치론 주장 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다가 결국 1925년 탄핵된다. 독립운동 시기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략은 흔히 ‘외교독립론’으로 일컬어지는데, 그 정점은 1933년 제네바회의 참석이었다. 이승만은 1933년1월부터 8월까지 만주사변문제를 다루는 제네바의 국제연맹 회의에 가서 여러 나라의 대표들을 만나고, 《만주의 한국인》이라는 팸플릿을 저술하여 배포하고, 방송과 신문을 통하여 선전활동을 벌인다. 이승만은 제네바 여행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이후 하와이에서 교육 및 경제사업에 힘쓰지만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Japan Inside Out》을 출간하고,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는 단파방송을 통해 해방이 머지않았음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알리면서 오랜 망각에서 벗어나 다시 ‘민족의 지도자’로 떠오른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 정보기관 OSS 및 미 군부와 접촉해 냅코 작전 등 비밀공작을 추진한다.
‘문지기’ 역할을 자처하면서 경무국장으로 임시정부 활동을 시작한 김구는 이후 독립운동가 사회의 알력으로 여러 번 좌초의 위기에 처할 때에도 임시정부를 굳건하게 옹호한다. 김구는 1932년1월과 4월에 잇달아 있었던 이봉창(李奉昌) 의거와 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영도자로 떠오른다. 김구는 장개석(蔣介石)과 회담하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한국청년들을 훈련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충칭에 이르기까지 중국대륙을 표랑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켜냈고, 독립운동세력 내 좌우합작, 광복군의 통수권을 둘러싼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갈등 등을 이겨내면서 결국 해방을 맞는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제 6, 7권)
3부에서는 1945년 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의 전개 속에서 통일독립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행동했는가를 기술한다. 저자는 “동유럽제국의 붕괴 이후에 열람이 가능해진 구소련정부문서를 비롯하여 《슈티코프일기》 등 여러 가지 기초자료를 이용하여 정확한 사실 규명에 노력했다”고 말한다. 특히 1946년 10월 폭동, 1948년 4~5월의 남북협상이 철저하게 소련의 지원과 설계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 대목이 눈길을 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좌익세력으로부터도 주석으로 추대받는 등 좌우파를 막론한 민족지도자로 인정받는다. 이승만 자신도 공산주의에서 취할 점을 강조하는 등 한때 좌익세력까지도 포용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신탁통치반대 투쟁 등을 거치는 동안 공산주의를 콜레라에 비유하면서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정읍발언,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하지 군정 장관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1947년의 도미(渡美)외교 등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으로 가는 길을 연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정읍발언 이후 일관되게 38선 이남에서만이라도 독립정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이 기간 동안 일관되지 모습을 보인다. 해방에서 1947년 말에 이르는 대부분의 시기 동안 김구는 이승만과 협력하면서 반공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기간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엔이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결의한 후, 김구는 이에 대한 찬성과 반대 사이를 오고가다가 결국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만다. ‘국가’를 중시한 이승만과는 달리 그는 ‘민족’을 중시했던 것이다. 저자는 “김구가 1948년4월의 남북협상의 결과에 크게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었다”면서, 1948년7월11일에 경교장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인 유어만(劉馭萬) 중국공사와의 긴 대화록을 소개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남북관계에 대한 김구의 인식을 솔직히 말해주는 문서이다. 결국 1949년 김구는 안두희의 총에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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