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9

남민전 사건 - 1976-1979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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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남민전 사건(南民戰事件)은 1979년 대한민국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
이자 논란은 있지만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사건이다. 1978년부터 1979년 4월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의 자택 등 서울 강남 일대에서 벌어진 강도·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확대됐다.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 조직한다. 1977년 1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여러 차례 배포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을 위시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한다.

무장 혁명을 목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밀반출해 비축하고 폭탄을 사제하던 중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수사당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안재구, 이수일, 김남주, 이재오를 비롯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구속당하였다. 공안 기관은 이것을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 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하면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의 협의로 처벌하였다.

후일 KBS에서 방영되었던 인물현대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늘푸른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재오나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들이 한 증언을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등한 처지에서 협상하려고 했던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 성향 단체였다고도 한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역할 모델로 삼은 자생한 사회주의자,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자의 조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더라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당시로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 중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재오 자신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가 아니고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소속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유신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와 엮었던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남민전 주도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한 이재문과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되었다.

홍세화는 이 사건이 알려지기 전 모 기업의 프랑스 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이 사건이 알려진 뒤 프랑스로 정식으로 망명하였다. 홍세화 처지에서 바라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

사건[편집]

당시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1979년 10월 9일 건국 후 반국가 활동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74명이 가담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의 총책 이재문(45)을 위시한 20명을 경찰이 검거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잔당 54명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이들이 "북괴의 적화통일 혁명 노선에 따라 폭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지하에 반국가단체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학생, 지식인, 긴급조치 위반 수형자 등을 포섭하여 대정부 투쟁을 선도 조종하고 도시게릴라 방법에 의한 납치·강도 행위를 자행, 학원 및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고 민중 봉기에 의한 국가 변란을 획책해 온 자들로서 이들이 사용한 사제폭탄 소총 및 실탄 도검류 통신 문건 공작 장비 등 증거물 1374점을 압수했다."라고 밝혔다.

구체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당시 대한민국의 군사독재정권을 전복하려고 점조직으로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10대 강령, 9대 규약, 10대 생활 규범, 4대 임무 , 3대 의무 등을 제정한 후 인공기를 모방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깃발을 만들고 혁명 투사로서 가입할 때 선서하게 했다고 하면서 5명에서 12명을 일당으로 한 혜성대라는 결사 행동대를 조직하고 봉화산작전, 땅벌작전 등 암호를 사용해 서울시 강남구의 재벌 집과 동대문구 휘경동의 G모 사장 집에 침입하여 3회의 강도 행위로 당시 500,000여 원에 상당한 금품을 털고 추적하는 수위를 단도로 찌르기도 하였다.

구성[편집]

이재문 1964년 7월 인민혁명당 중앙상위조직부책으로 군사독재정권 전복 획책하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민청학련 사건을 주모한 여정남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1976년 2월 이만성(가명), 김병권(가명 김경인) 등과 함께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으로서 취임하여 점조직으로 학생, 교직자 등 74명을 포섭했다.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조직 기구로 중앙위원회와 그 아래에 총무, 조직, 교양선전선동, 출판, 통일전선, 무력, 대외연락, 정보, 재정 등 9부, 검열위원회, 서기, 서울과 경북, 호남 등 3개 지역책을 두고 중앙위원회 직속 하부 조직으로 민주투쟁국민위원회(한민성 가명)을 설치하여 산하에 청년,농민, 노동, 학생, 연합, 교양 등 6부와 지도요원 및 221개조 편성 암약하며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라는 서신을 보냈다.

재판[편집]

대법원(주심 이일규)은 남민전 피고인 58명 중에 이재문 등 57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신동규에 대해 원심파기 환송하였다. 이에 따라 신향식과 이재문 사형, 안재구, 최석진, 이해경, 박석률, 임동규 5명에게 무기징역, 차성환, 이수일, 김병권, 김남주, 박석삼, 황금수, 김종삼에게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 임규영, 노재창, 김부섭, 김영옥에게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 이문희, 윤관덕, 김봉권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이계천, 이재오, 임준열, 심영호, 이학영, 김흥, 최광운, 김명, 백정호, 정만기에게 징역5년 자격정지5년, 임기묵, 전수진, 최평숙, 권영근, 김정길, 이강, 김재슬, 김특진, 황철식, 최강호, 권오헌에게 징역3년 자격정지3년이 선고되었으며 남민전 관련 전체 피고인 73명 중에서 김세원 등 6명은 상고를 포기했고 상고한 67명 중에 김승균 등 9명은 상고이유서를 기한 내에 제출하지 않아 항소심 형량이 확정됐다.

같이 보기[편집]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남민전 강도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남조선로동당
사회로동당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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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민전깃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깃발. 인공기와 베트콩의 단기를 참조해서 만든 깃발이다.

1. 개요2. 관련자3. 출처4. 관련 문서


南民戰事件

1. 개요[편집]

1979년 10월 9일에 내무부가 발표한 공안사건. 당시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지하당 성격의 예비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南朝鮮民族解放戰線)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정부는 이들 일당 74명 중 20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및 간첩혐의로 검거했으며, 54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하지만 이는 고문이 자행되어 신빙성 논란이 있다.# 또한 훗날 이 단체의 성격 등에 대해서 당사자들은 반대되는 진술을 하였다.

2004년 의문사위는 남민전이 당시 검찰과 경찰의 주장처럼 북한 정권과 직접 연계하고 그들로부터 지령을 받아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과거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통해서도 확증된 바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생전의 이재문도 검찰의 그 같은 공소사실을 시종일관 부인했고, 다른 남민전 관련자들도 오늘날까지 동일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직접 연계되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해당 조직이 극좌 혁명적 사회주의좌익 민족주의 지향성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김남주(시인) 등은 폭력 혁명을 긍정하고 민중 혁명이 일어나면 "민족반동세력" 200만명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민투위 강도 사건 등 실제로 강도, 협박, 상해 등 폭력을 행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불어 안재구 등 최소한 일부 조직원들이 종북 성향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며, 실제로 안재구의 경우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후에 1994년 구국전위 간첩단 사건에 또다시 연루되었고, 이후 2011년에도 북한 대남공작조직에 전달할 대북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이적행위를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수사를 받았으며, 2017년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2006년 3월 13일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하경철)는 남민전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활동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그러나 이 사건은 북한과의 연계 여부는 불분명할지언정 구성원들이 극좌, 공산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살인미수, 강도 등 폭력 행사까지 한 사건이기 때문에 2006년 당시에도 이들의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을 두고 큰 논란이 있었다.

2. 관련자[편집]

  •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대표. 이중에서 이재문이 1976년 2월 2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 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장에 취임했다.
  • 이문희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안재구: 장손이 KBO 리그 NC 다이노스 소속 투수인 안인산이다. 인산이란 이름도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고. 그리고, 수학자라 구속되었을 당시에 세계 수학자들이 항의를 했다고 한다.
  • 차성환
  • 이수일
  • 최석진(崔錫鎭): 법륜 스님의 친형이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 졸업 후 당시 한국경제개발협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3. 출처[편집]

4. 관련 문서[편집]

[1]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남민전에서 활동했었으며, 사건 발표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던 중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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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南朝鮮民族解放戰線 事件)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접기/펼치기내용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으로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비밀 지하조직이다. 1979년 10월 9일과 16일 그리고 11월 3일 등 3차례에 걸쳐 구자춘 내무장관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민전 결성을 주도한 이재문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민족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가담해왔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1974년 민청학련과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자 신분이 된 상황 하에서 남민전을 결성한 것이었다.

남민전은 1977년 1월 반(半)합법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반유신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청년학생위원회와 함께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주요 활동은 유인물 살포 등과 같은 선전전이었으나 혜성대라는 별동대를 만들어 자금조달을 위한 강탈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활동이 꼬투리가 되어 1979년 10월 4일 공안기관에 의해 이재문(李在汶),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이 체포되고 그해 11월까지 84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재문은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남주 이수일 등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관련자들은 형 만기 등으로 1988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으며 2006년에는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 활동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현대한국 사회운동과 조직』(조희연, 한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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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이 정확하게 기록되는 역사가 만들어지길”
‘통일열사 이재문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 열려
기자명 김익흥 기자
입력 2023.10.07 20:41




“일상생활에서 그는 /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신분을 잊은 적 없었다.“
(전사 I - 김남주)
남민전동지회가 주최한 ‘통일열사 이재문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가 7일 정오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이병인 통신원]

남민전동지회가 주최한 ‘통일열사 이재문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가 7일 정오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남민전 생존 동지들과 추모인사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 서기 이재문 선생과 남민전 중앙위원 신향식, 김병권 선생을 비롯해 이해경, 박석률, 김희상, 김충희 선생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남민전을 이끈 고 이재문 선생(1934-1981)은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배자로 1976년 남민전을 결성해 서기를 맡았고, 1979년 구속돼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옥중 단식과 고문으로 1981년 옥사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병인 통신원]

박석률 열사의 동생 박석삼 선생의 사회로 진행된 합동추모제에서 “박정희 독재보다 더한 윤석열 검찰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은 선생님들의 책임이 아니고 살아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라고 자탄한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은 “모든 세계혁명과 1970년 이전의 모든 투쟁을 낱낱이 연구한 이재문 선생님은 놀라운 혁명가였다”고 회상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됐던 임헌영 소장은 “여러 동지들의 뜻이 어떠한 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기왕의 연구자료에 더해 여러 동지들의 회상기 등도 모아 남민전이 정확하게 기록되는 역사가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사월혁명회 전덕용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병인 통신원]
범민련 남측본부 이태형 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병인 통신원]

사월혁명회 전덕용 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피를 먹지 않은 혁명이 어디 있는가? 구호만으로 미제국주의와 독재권력이 물러나는 법은 없다”며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이재문, 남민전 선생들과 같은 목숨 건 투쟁을 해야 한다”고 과감한 반미투쟁을 촉구했다.

범민련 남측본부 이태형 의장은 “세대는 변하고 시대는 전진했다”며 “목숨 걸고 몇십 장씩 뿌렸던 유인물을 이제는 수십만 장 대중적으로 살포하는 시대”로 변화된 상황을 지적하고 “선배열사들의 뜻을 이어 변화된 시대에 맞게 새로운 세대가 민족해방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황금수 선생이 남민전동지회를 대표해 인사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병인 통신원]

황금수 선생은 참석한 남민전 동지들을 대표해서 “미제국주의 일극지배체제의 몰락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으며, 미제국주의는 전 지구 인민들에게 못되고 죽일 짓만 골라하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위적인 이치”라고 성토하고, 해방이후 가장 깊고, 폭넓은 조직과 투쟁의 역사를 지닌 남민전의 정당성과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하며 찾아온 추모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남민전동지회가 주최한 이날 합동추모제는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경북대학교민주동문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사월혁명회, 서울대학교민주동문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한국진보연대가 후원했다.
합동추모제는 남민전동지회가 주최하고 6.15남측위원회 등이 후원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병인 통신원]

한국전쟁 이후 최대 지하조직 사건으로 알려진 ‘남민전 사건’은 유신 말기 반유신투쟁에 앞장서다 1979년 10월 4일 이재문 등의 구속으로 시작돼 84명이 구속됐고, 공안 기관은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 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사건’이라 규정했지만 2006년 3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사건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재문은 옥사했고, 신향식은 사형이 집행됐고, 전수진은 병보석 후 병사했고 김남주 시인 등도 병사했다.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오늘 밤 또 다시 하나의 별이 / 인간의 대지위에 떨어졌다...
그 죽음이 결코 /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것이고...”
(전사 II – 김남주)


김익흥 기자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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