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돌봄의무제 도입이 필요하다[복지국가SOCIETY]
입력2024.08.12. 오후 3:00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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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제대로 된 인권 보호 위한 돌봄의무청을 고민할 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젊은 층에 신세를 지고 살아야 하는 법은 없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하고 술 담배 마약 등 무책임한 생활 습관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노년에 들어서도 젊은 신체 나이를 즐길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공익을 선사하는 사회활동으로 뿌듯함을 느끼며 살 수도 있다.
문제는 노년기에 비자발적으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돌봄이 필요한 경우이다. 치매 노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리적, 정신적, 사회심리적,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기 위해 돌봄을 주고받는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노인돌봄 서비스의 필요성
특별한 건강 문제나 재정적 어려움 없이 은퇴한 개인으로서 평안한 노년을 즐기는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돌봄 능력은 필수이다.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한 건강한 자아상이 없고 균형이 깨진 삶의 패턴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노년에 평안한 정신세계와 물질적인 안정감을 누리기 어렵다. 온전한 노년의 삶을 바란다면 세계보건기구에서 정의한 대로 건강의 의미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체적으로 실천하는 균형이 있는 삶을 목표로 해야 한다.
건강한 생활 습관과 같은 개인 책임의 영역을 넘어서 국가가 사회구성원 전체의 안전을 위해 도입한 사회제도는 이미 많다. 우선 국민의 세금을 쓰면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제도가 있다. 타국으로부터 오는 가상적인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 안전을 담당하는 군인제도도 있다. 그 밖에도 국민 전체의 신체적 안녕과 건강한 사회역할을 위한 국민건강보험제도와 의무교육제도는 보편적인 복지 차원에서 수용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동, 장애인, 노인과 같은 취약계층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집단의식수준에서 보편적인 인간 욕구(니즈, needs)로 인정받았을 때 사회구성원 모두가 차별 없이 세금 재정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차원의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
많은 경우에 노년기에 이르러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어린아이일 때 네발로 기고, 어른이 되어 두 발로 걷다가, 노인이 되면 세 발로 다닌다는 표현은 지팡이 없이 걷기가 불편한 노년기를 의미한다. 죽음이 모든 인간이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생애과정이듯이 노년기의 신체적 정신적 쇠퇴 현상은 보편적이다. 개인의 재정 상황, 건강 상태, 가족관계, 사회적 지위 등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노년기를 맞게 된다.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받는 돌봄 필요가 당연한 것처럼 노인도 차별 없이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개인차가 있지만, 노년기에 누구나 보편적으로 필요한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돌봄을 사회적 차원에서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2008년 4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울리히 벡이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은 아주 특별하게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회이다. 조선왕조 사회체제를 공화정 신체제로 조화롭게 변혁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에 의한 근대화를 경험한 탓이 크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훨씬 더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높은 이혼율 문제 외에도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결혼해도 자녀 출산을 피하는 등 기본적 가족제도가 무너지고 있다. 친자식이나 며느리 등 가족관계에 의존하는 노인 돌봄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졌다. 그래도 자본 중심 사회의 돌봄 서비스 시장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여전히 여성 중심으로 경제적 취약계층이 담당하고 있다. 어린이집과 요양원에서 종종 아동이나 노인학대 사건이 생기는 일을 거시적 사회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 많은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서비스 질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정치이념과 돌봄의 권리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통일사회당, 사회당,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는 김철이라는 사회민주주의자 정치인 사상가는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통해 실현되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해 완성된다"라는 믿음을 고수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 개념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아직도 어려운 것 같다. 돌봄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시민이 이념의 스펙트럼 한쪽 끝에 서서 자유민주주의만 주장할 때 기회균등의 가치가 무너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사회민주주의만 강조하느라 개인의 자유를 소홀히 하면 개인의 선택권과 존엄성이 위협받게 된다. 평등과 자유가 서로 그 가치이념을 존중하여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인권이 보장받게 된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만 내세우거나 신자유주의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만 주장할 때 인권은 무너지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게 된다.
<돌봄민주주의>(원저: Caring Democracy)의 저자 조안 C. 트론토(Joan C. Tronto)에 의하면 돌봄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현재 한국과 미국의 민주주의는 허울만 좋은 이념에 불과하다.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인권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본을 가진 계층의 자유를 지나치게 보호하는 사회경제체제는 불평등사회의 비극을 창출했다.
다른 한편 북한에 엄연히 인권법이 존재하지만, 통일부에서 2023년에 발간한 '북한인권보고서'에 의하면, 북한 주민들은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들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남한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느냐와 관계없이 북한 주민들이 겪는 인권유린과 그 참상에 눈감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맞서 인권을 말살하는 '악의 세력'으로 비판받아 온 북한은 자본주의사회 내의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비난해 오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 미국과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더욱 심화해 온 불평등 문제와 마약과 도박 등 도덕적 해이 문제는 줄곧 북한의 비판대상이 되어왔다. 결론적으로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모두 취약한 인권 보호의 실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든 북한이든 최상의 가치로서의 인권존중이념을 실천하는 정치적인 의지 없이 돌봄민주주의 체제로의 발전은 어렵다. 남북이 공동으로 추구하는 인권주의 체제를 도입하려면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자와 개인의 자유를 더 우선시하는 자본주의자가 만나서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이 험악한 현실에서 돌봄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먼저 우리의 가치관부터 새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이를테면 인권 중심의 사회자본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 인권주의는 <정치발전담론, 2024>의 저자 박한식 교수가 평화체제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는 새로운 이념이다.
조안 C. 트론토는 <돌봄민주주의, 2024>에서 돌봄을 제공할 권리와 돌봄을 받을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평등하게 돌봄 서비스를 주고받으려면 국방의무제와 같은 선상에서 돌봄의무제를 새로 구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헌법에 따라 만 18세 이상의 남성에게 부여된 병역의무는 국민의 의무로서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노인을 비롯한 장애인 등 취약자를 돌보는 법제화된 의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지난 1월 10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원각사 노인 무료급식소 인근 식당가에서 점심식사를 위해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돌봄의무청의 수립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중산층이 줄어들고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부모와 자식 간 또는 친척과 지인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교류가 줄어들고 자연스러운 돌봄을 위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인 상호연계망과 대인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도 무관심해지는 개인 중심 사회 분위기 속에서 노인의 고립감은 제도화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노인의 고독을 문제시하여 소위 취약계층만을 대상으로 혜택을 주는 선별적 복지프로그램은 오히려 수치스러움을 유발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영국은 혼자서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사회문제가 심각하여 '고독청'이라는 정부 기관을 설립했다. 우리나라도 이를 모방하여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역문화진흥원이 2023년에 실행한 사업으로서 전국적으로 5개 단체의 '연결사회 지역거점 프로그램'을 선정했다. 외로움을 느끼는 주민을 발굴하여 인문문화예술과 상담서비스 등 사회적 연결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이 프로그램들의 주요 목적이다.
나는 한국 정부가 '고독청'보다는 '돌봄의무청'을 설립하기를 제안한다.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동료 시민을 보호하는 국민의 의무를 완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현재 요양원이나 아동보호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취약계층 대상의 근로자는 대개 여성들이고 전문직보다 훨씬 낮은 보수액을 받고 있다. 돌봄 노동직의 급여가 간호사, 의사, 사회복지사 등 전문직보다 낮다는 것은 돌봄노동을 그만큼 가치 있게 보지 않는다는 사회적 동의의 결과이다. 앞으로 인공지능 로봇이 교수,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을 대체하게 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직업으로서 돌봄 전문직이 주로 남게 될 것이라는 미래 전망이 있다. 현재는 돌봄직종인 요양보호사, 어린이집 교사 등에 대한 처우가 매우 낮은데 전통적으로 여성과 이민노동자 등 비전문직 노동자들이 담당해 왔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꺼리는 소위 4D(위험하고, 더럽고, 천대시하고, 하기 어려운) 일에 대한 보수가 높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주로 돌봄노동을 하는 상황을 바꾸려면 돌봄에 대한 가치관부터 변화해야 한다.
돌봄의무제를 통한 평등한 인간관계
자본주의식 물질문명이 창출한 폐해는 전쟁의 위험뿐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체제이다. 돌봄 사업의 운영 면에서 현재 평등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민 보호를 위한 보편적인 돌봄의무제를 도입한다면 주로 저학력 여성과 이민노동자가 열등한 처우를 감수하면서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돌봄 직업에 종사하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돌봄의무제 도입으로 모든 유형의 불평등을 한꺼번에 극복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혜택을 받는 기회 면에서 평등한 인간관계를 촉진할 수 있다.
사회주의식 돌봄체제에서는 돌봄 서비스의 질 면에서 그 다양성이 다소 희생될 여지가 있겠으나 누구나 의무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겠다. 이를테면 모든 성인이 일생에 한 번 원하는 시기에 6개월이나 1년 동안 아동, 노인, 장애인 등 돌봄 수혜자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기회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남녀노소 모든 국민에게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기회와 수혜 자격이 동시에 주어지는 개념이다.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서로 돌보고 돌봄을 받는 상호혜택의 개념은 현재 남성들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국방의무보다 훨씬 평등한 인간관계 구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국방의무를 거부하는 남성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공적 서비스로 대체할 기회가 주어진다. 돌봄의무를 거부하는 시민을 위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세금이나 대체 공공서비스 방안을 마련할 수 있겠다.
돌봄민주주의를 위한 이념과 상생문화
현재 인류사회는 폭력적이다. 전쟁을 통해 자국의 경제 상황을 개선한 경험이 있는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는 군수산업이 얼마나 큰 이득을 선사하는지 익히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도 국방이라는 이름 아래 군사력과 전쟁 무기산업부흥에 앞장서 왔다. 사람을 죽이는 문명에서 사람을 살리는 평화체제로 변화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생명권과 인권을 존중하는 정신문화의 기반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근본 이유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신문화가 파괴적인 물질문명에 맞대응할 정도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 체제이든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든 대부분 현대사회에서 인권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독재정권은 오랫동안 인권탄압 면에서 전 세계 국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그에 못지않게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명의 경제적 불평등문제와 퇴폐적인 문화적 약점을 비난해 왔다. 양측 체제 모두 평등과 자유를 균형 있게 구현해 오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사람을 살리고 인권을 존중하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
과연 한국 사회는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돌보는데 더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얼빠진 좀비처럼 제국주의 세력에 아부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문명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가? 돌봄민주주의 실천에 관심이 있는 일반 시민은 이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 한다. 상생과 공존 그리고 언젠가 이룰 한민족 통일을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은 인권주의 중심의 사회자본주의이다.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노인보호의무제
한국 사회의 전통적으로 상생적인 정신문화가 보유한 생명보호 원칙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인간의식을 깨우고 양심세력을 발달시키는 책임과 직결한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서 헌법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부모에게는 아이를 돌볼 의무뿐이 아니라 양육권이 주어진다. 양육권은 의무이자 권리이다. 부모로서 자기 아이를 돌볼 권리를 사회적 차원에서 보장받는 것이다. 부모의 의무를 저버리는 비극적인 사례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모는 아이를 돌봄으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추구권으로서의 양육권이 보장되는 이유이다. 헌법 질서의 최고 가치로 해석되는 제2장 제10조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 조항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돌봄의 가치를 사회적 차원에서 행복추구권으로 인식하는 것을 돕는 법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성인 인구 모두가 결혼하지 않고, 결혼한 모든 부부가 아이를 가지지 않는 사회에서 많은 수의 노인은 가족관계에서 돌봄을 기대할 수 없다. 설사 자식이 있는 경우에도 요즘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돌봄조차 하기 어려운 바쁜 생활을 한다. 대부분 현대인은 직장생활과 개인적 삶의 자유에 필요한 시간 이외에 부모를 돌볼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다. 다른 한편 치매 인구의 증가는 세계적 추세다. 특히 우리나라는 고령사회로의 진입 속도가 매우 빨라 향후 노인치매환자는 2040년에는 2백만 명 그리고 2050년에는 3백만 명을 넘기게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치매 노인을 비롯한 모든 노인이 누릴 기본권리로서 돌봄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헌법에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실제로 치매노인들과 같이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지 않다.
돌봄을 제공할 젊은 층 인구가 감소하는 초고령사회에서 돌봄의무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치매 노인을 포함하는 취약계층의 인권보장과 학대 방지를 효과적으로 제도화할 수 있다. 병역의무제에 참여함으로써 국민의 보호받을 권리와 책임을 실현하는 것과 같이, 노인의무돌봄제를 통해 노년에 이르러 시민 모두 돌봄을 받을 권리를 국가 차원에서 보장할 수 있다.
▲도영인 전 우송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영인 전 우송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도영인 컬럼] 내 사랑,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시사앤피플 기사입력 2024/06/04
▲ 도영인 전)우송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시사앤피플] 작년 몇 달 동안 나는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남양주 별내 신도시에 있는 고층 아파트를 팔고 제주시의 신축 빌라로 이사하게 되었다. 부동산 시세의 하락과 건축업계의 재정난 때문에 원래 공지되었던 날짜보다 몇 달씩 입주일이 지연된 것이다.
임시거처에서 새 빌라의 완공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지인들이 내게 자주 물었다. 은퇴 후 삶의 터전으로 비교적 살기 좋은 지역에 잘 정착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왜 번거롭게 다시 이사를 결정했냐고 의아해했다. 그것도 차로 왕래하기 어려운 제주도까지 꼭 이사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내 응답은 간단했다. 자연의 품 가까이 살겠다고. 일 위주로 살아온 내가 은퇴할 때까지의 바쁜 생활을 돌아다보니 집 주변 자연환경 속에서 큰 행복을 누렸었던 기억이 뚜렷했다. 나는 미국 동부의 아름다운 해변마을에서 만끽했던 지구 어머니의 평온한 생명 에너지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 나는 제주도의 푸근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자연에 대한 감사함을 누리려고 내 생애 마지막 이사를 감행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섬, 사회적 동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1938~), ‘섬’
인간(人間)은 서로 간격을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 인간의 사전적인 의미는 ‘언어를 사용하고 사고할 줄 알고 사회를 이루며 사는 지구상의 고등 동물’이라고 정의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와 분리된 몸으로 섬에 비유될 수 있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갖고 산다. 동시에 다른 인간과의 거리감을 줄이고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려는 내면의 욕구가 있다.
의식주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각자 다른 모습의 몸을 생산적으로 쓰는 가운데 자기 피부의 안팎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창조한다. 아직 미성숙한 사춘기이거나 외모만 돌보기에 바쁜 경우에 눈에 보이는 모습이 진정한 자신인 줄로 아는 사람도 많다. 자기 몸의 모양새가 진정한 자신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사용하는 삶의 임시도구일 뿐이라는 걸 모르고 사는 경우도 많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인 걸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인간은 겉모습보다는 자기만의 은밀한 내면 정체성이 훨씬 더 중요한 동물이다. 표층적인 동물의식을 갖고 먹고사는 욕구에만 집중하는 동물과 인간이 서로 다른 점이다.
‘단세포적인’ 인간이라든가 의식 수준이 낮은 ‘파충류’ 인간이라는 표현은 단연코 모욕적인 언사일 수밖에 없다. 인간 욕구는 생존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의 몸이 홀로 선 섬과 같다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세계라는 미묘한 섬을 각자 만들어낸다. 사람은 자기만의 의식세계를 보전하기 위한 서로의 거리가 필요한 존재이다. 보통 인간은 혼자만의 심리세계와 동기부여의 방향에 따라 감성적 특성을 가진 내면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정현종의 시적 표현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개인은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를 가진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욕구를 가진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정현종 시인의 마음에서 나는 섬이 주는 물리적인 거리감보다는 심리적인 고립을 먼저 읽는다. 언어라는 개념 도구를 가진 고등한 존재로서 사람들에게는 고립된 섬 (즉 물리적 정체성)과 또 다른 서로 다른 내면세계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있다.
미국의 한 유행가 가사 구절인 “Bridge over troubled water”에서처럼 섬을 잇는 다리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우리 인간은 모두가 하나라는 인류의식을 가져야 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신체적인 정체성을 넘어 각기 다른 내면의 존재감을 존중하는 배려심과 상대방을 돌보려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한다.
오랜 타국 생활 후에 내가 2010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보고 느낀 바에 의하면 한국 사회는 지난 수 십년 동안 개인주의 체제로 무지막지하게 변화했다. 이제 일인 가구가 거의 25%에 달한다. 한국전쟁 이후 너도나도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경제 시스템 속에서 매우 열정적으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경쟁 위주의 일상패턴에 빠져 ‘나 몰라라’ 하는 개인 중심적 인간관계는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체제가 낳은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통계조사 결과들을 보면, 한국인 대부분은 고립되어 정서적으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급히 연락할만한 지인이 있다는 대답을 하는 사람들보다 아무도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고립성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등 거시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지역공동체 삶의 방식에서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홀로 선 섬과 같은 존재이면서도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연계되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돌보는 ‘돌봄 공동체’가 가능한가?
화상회의와 SNS 소통방식으로 상징되는 비대면 인간관계가 점점 더 보편화 되는 가운데 우리는 이제 기술적인 방식으로나마 사회적인 연대감을 유지하고 산다. 이미 ‘가상공동체’라는 현실이 일반인들에게도 점점 더 익숙해진 세상이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각자 처한 시간과 공간이 큰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글로벌 차원의 가상공동체인 시공간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화상회의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내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한국시간으로 밤 12시부터 전 세계 지구인들과 함께 다양한 주제를 논하는 이라는 웨비나 토론에 참여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증가하는 기술적 교류로 인해 인간관계의 질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지 않나 우려하기도 한다. 현란한 속도의 정보교환에 의존하는 가운데 개인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화상회의 방식의 학술대회나 소그룹 모임이 증가함에 따라 친분 있는 동료와 지인들을 오랜만에 만나 악수하고 미소짓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다. 현시대의 비대면 생활패턴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좀 더 인간적인 관심이나 배려심을 나누는 시간을 없애고 있다. 기계화되는 사회에서 인간관계에서조차 사회적 효과성보다는 기회비용, 가성비 혹은 시간 효율성에 더 신경 쓰게 된 현실이 씁쓸하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공감과 연대감을 나누기를 원하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상 가운데 ‘우리’를 잊고 사는 개인 중심 일상에 갇히게 되었다. 기계화된 체제 속에서 인구 대부분이 자기도 모르게 외로운 느낌과 삭막한 고립감의 늪에 빠진다면 그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이제 사람들이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의 감성과 영성적 존재감을 깊이 인식하는 사회체제로 과감한 변화를 시도할 때가 되지 않았나?
다행히 일부 지식층과 깨어있는 시민들 중심으로 과감한 혁신을 시도하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다. 다중위기 시대로 접어든 한국에서 현재 직접민주주의연대, 상생돌봄공부방, 마을공화국, 지역자치당, 시민사회위원회 등 온갖 유형의 시민연대를 증대시키려는 사회활동이 활발하다. 집단협력을 통해 개인이 느끼는 위기감에서 벗어나고 더 안정된 사회생활을 실현하려는 지혜로운 집단지성이 왕성하게 표출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밝히는 희망의 촛불들이 많이 있다.
전통 방식대로 반찬을 따로 자기 접시에 담지 않고 한 상에서 나누어 먹는 식습관이 아직 건재하다. 개인들 사이의 거리감을 함께 나누는 음식문화로 좁혀온 한국인의 오랜 집단의식을 엿볼 수 있다. 코로나 사태 후로 바뀐 면이 있지만, 한국 사회에는 나눔과 돌봄의 문화가 아직 진하게 남아있다. 나라 전체의 빡빡한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5개월 전에 제주도로 이사 온 후 한국문화 속 풍요로운 연대감과 푸근한 인간관계를 더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꿈속의 내 고향이 제주도는 아니다
연약한 날개로 장거리 여행을 감행하는 나비들과 고향 땅에 두고 온 둥지를 잊지 않고 찾아 돌아가는 황새와 같은 생명은 고귀한 존재들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표출하는 끈질긴 사랑 에너지와 생명 존재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일상의 삶 속에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우주적 힘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고등 동물이 아닌 생명체들조차도 사랑과 생명의 보금자리를 보전하려는 본능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은 신비한 우주적 원리에 기반하여 타고난 생명 에너지를 발휘하면서 고유한 존재의미를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서울이나 육지의 큰 도시에서 살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제주도민들을 지난 몇 달 사이에 여럿 알게 되었다. 내가 제주도에 안착한 것은 태어난 고향이 제주도이기 때문은 아니다. 돌아보건대 30년이라는 타국 생활 동안에 여러 번 직장을 옮긴 건 마음의 고향을 찾으려는 매우 인간적인 본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에게 있어서 출생한 지역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정붙이고 살만한 마음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나는 2010년도에 한국에서 얼마간만 살아 보려는 생각으로 임시로 귀국했었다. 그리고 결국 퇴직 후에 한국에 정착하기로 하고 미국 집을 팔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끊임없이 중요시해 온 ‘공동체 정신’을 실천하며 살만한 지역공동체를 찾으려는 무의식적 욕구(needs)가 남아있었던 것 같다.
1960년대 한국이 너무 가난했던 시절에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미국식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서 이민행을 감행하는 인구가 많았다. 군사독재와 국가폭력을 피해서 1980년대에도 줄줄이 이민 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2024년 현재 ‘헬조선 신계급사회’를 탈출하려는 젊은 청장년층이 느는 추세다. 최근에 카이스트 연구원을 포함하는 최고급 기술인력이 R&D 예산을 삭감한 권위주의 정부의 무도한 정책에 실망하여 미련 없이 이민하는 사례들이 생기고 있다.
지난 이삼십 년 동안의 역이민 추세를 역행하며, 불안정한 교육정책을 포함한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국가 차원의 인구절벽 시대에 제주도 인구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데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제주도는 희망의 섬
은퇴자의 천국이라 할만한 제주도에서의 내 개인 생활은 여러모로 매우 만족스럽다. 검소한 채식 생활이지만 도심의 나쁜 공기와 불쾌한 인구 조밀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축복이다. 나는 가까이 해변에서 건강에 최고라는 맨발 걷기도 하고 숲속 산책도 하는 호강을 누리고 산다. 도시개발로 많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제주도에서는 아직 풍성한 자연의 신비와 생명력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나는 제주도 특유의 자연환경의 고귀함을 실감하며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영어소통이 가능하므로 사실 나는 지구 어느 곳에 살더라도 새 지역사회에 적응하면서 잘 살 수 있다는 기본적인 자신감이 있다. 작년에 2개월 가까이 칠순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두 여성 친구와 함께 유럽여행을 했을 때 그 자신감이 허황한 오만함이 아니었음을 체험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사회의 못남과 자랑스러움을 모두 함께 사랑하는 한국인이자 세계인이다. 판소리와 고전무용을 포함하여 한국문화를 즐기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 본래부터 내게는 딱히 이름 지을 수 없는 일종의 ‘한국사랑’ 같은 의식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나는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 정신을 추종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인류 하나됨’을 추구하는 지구인이다. 영성 면에서 ‘하나됨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형이상학적으로 외롭지 않지만 내 삶의 실존이 온전한 것은 아니다. 한국 시민으로서, 미국 시민권자로서, 그리고 이제 제주도민으로서 나는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개인적인 자신감이 있다. 그러나 분열의식으로 끊임없이 상처받고 있는 지구 어느 구석에서도 온전히 평안한 의식세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만한 온전한 공동체는 아직 계속 진화하고 성취되어야 할 이상향으로 남아있다. 일상에서 소소한 만족감을 느끼고 항상 고마움이 있으나, 나는 아직 큰 소원이 있다.
“삼촌은 소원이 뭐예요?”
삼촌은 곰곰이 생각하다 낮은 목소리로 쑥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조국 통일.”
세상에나 소원이 조국 통일이라니, 신문에서나 보던 말을 실제로 들은 건 그때가 처 음이었습니다. 그런 게 소원인 사람도 있구나, 신기했습니다.
- [없는 층의 하이쎈스] 김멜라 장편소설 (2023, 327쪽)에서
그렇다. 다시 찾은 내 고향 한국은 절대로 반쪽인 체제로 계속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남북분단을 극복해야 한다. 제주도 내에서의 환경문제 등 여러 산적한 공적 이슈들과 함께 해결되어야만 할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의식이다. 위에 인용된 것처럼 요즘 젊은 층에서 다소 신기하게 들리겠으나 내 소원은 “‘조국 통일’”이다. 일부 극우 그리스도교인들이 꿈꾸는 “빨갱이” 때려잡고 성취하는 흡수통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독일에서 불완전하게 이룬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자본주의 중심의 통일도 아니다.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무엇보다 인권이 존중되는 그런 통일을 원한다. 같은 동포를 부자연스럽게 양편으로 갈라놓은 DMZ 경계선을 넘나들며 왕래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소통하기를 바란다. 소통과 왕래를 통해 한민족이 공통으로 갖는 크고 밝은 공동체 정신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면 언제라도 한 국가체제로서의 정치적 통일까지도 점차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제주도에는 섬이라는 특수한 제약을 극복하면서 제주도민이 함께 겪어낸 몽고항쟁과 일제 수탈과 같은 고난의 역사가 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험과 처참한 4.3항쟁에서 흘린 피눈물을 제주 곳곳에서 흔히 보이는 검은 돌들이 끌어안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잘못된 이념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의 오랜 슬픔과 한을 공기처럼 숨 쉬게 된다. 그래서 제주도는 어느 지역공동체보다도 더욱 세계평화에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새내기 제주도민으로서 나는 조만간 우리 민족끼리 서로 왕래하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바란다. 북한에서든 남한에서든 한국(조선)인 모두 인권 중심의 새로운 체제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본다. 정치적 조작으로 오염된 근대역사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본성은 원래 평화로운 돌봄 문화의 가치를 추구한다.
사랑 에너지가 동백나무처럼 꽃 피어 나는 온전한 생명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제주도는 ‘평화의 섬’ 특유의 세계적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인생 후반기 70대에 들어선 나는 제주도에서 그런 희망의 걸음마를 새로 시작한 셈이다. 제주도는 이제 내게 희망의 섬이 되었다.(출처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6월 3일 컬럼)
* 도영인 전)우송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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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인
사회학자
사회/시민운동가
영국 University of Wales에서 사회경제학 석사학위 (1984)를 받고 미국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 (1989)를 받았다. 미국 University of Southern Maine, School of Social Work의 Director직을 마지막으로 30년간의 해외동포 생활을 접고 2010년에 귀국하였다.
사회복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사회의 제반 문제의 근원이 남북분단에 있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또한,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성적 진보에 기반해서 이루어질 때 지속 가능한 평화와 한민족 및 인류사회의 번영이 가능하다고 봤다.
국제사회복지학회와 영성과 보건복지학회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다양한 주제의 사회복지 관련 논문들 이외에 대표 공저서로
- 『일상의 빅퀘스천-호모 스피리투스의 여정』이 있고
- 대표 번역서로 『SQ21: 온전한 삶을 위한 21 영성지능기술』이 있다.
은퇴 후에 인권 보호 및 공익확장을 위한 사회활동가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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