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VS 정영환, ‘위안부’ 평가 두고 화상 격돌
1일 저녁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출판기념 강연회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 부교수, 입국불허 탓 일본서 동영상 참여 “박유하, 사실 왜곡”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저자(세종대 교수)는 강연회 참석해 “명예훼손” 주장
기자한승동수정 2019-10-19
우산을 썼지만 바지 아래쪽이 금방 젖어버릴 정도로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데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1일 오후 6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펴냄) 출판기념 강연회가 열린 서울 종로구 사직로 ‘푸른역사 아카데미’는 공간 수용한계를 넘은 50여 명의 청중들로 꽉 찼다.
한 청중이 말했듯이 그 강연회는 처음부터 “이상한 강연회”였다. 우선 강연회의 주인공인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의 저자 정영환(36) 메이지가쿠인대 부교수가 자리에 없었다. 재일동포 3세인 그는 이번 강연회를 위해 도쿄에서 한국공관에 입국신청서를 냈으나 지난달 28일 ‘입국불허’ 통고를 받았다. 아마도 그의 국적 표기란에 적힌 ‘조선적’이 불허의 공식 이유일 것이다. 정 교수는 대신 실시간 쌍방소통의 동영상으로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과 만났다. 강연회 말미에 발언기회를 얻은 한 청중은 저자 정 교수에게 그의 입국금지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줬다며, “책 내용뿐만 아니라 그 점에 대해서도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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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 대신 그 자리에는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가 비판한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참석했다. 출판사 푸른역사에 따르면, 박 교수는 정영환 교수 입국불허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 정 교수 책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페이스북과 카페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미리 공지된 강연회 자체가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 주장하며 자신을 강연회에 초청해달라고 요구했다. 푸른역사는 애초에 초청이 따로 없고 관심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고 대답했고, 박 교수는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이들을 포함한 ‘일행’과 강연장에 입장했다.
이 이상한 출판기념 강연회는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의 사회로 예정된 시각에 시작됐다. 강연회 실행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정연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에 이어 위원장인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이 축사를 했다. 서 위원장은 정 교수 입국 금지조처가 “국내법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비인도적이며 민족적 손실인 ‘조선적’ 동포들 입국불허 규제를 즉각 해제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강연회 실행으로 위원회 역할은 끝나지만 앞으로 연락회의를 따로 만들어 행정소송 등 필요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강혜정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실행위원 사회로 시작된 강연의 연사는 3명. 20분씩 할애된 강연의 첫 번째 연사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였다. 영국 등 서양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략사를 긍정하는 영국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에 이르기까지 역사수정주의의 계보를 죽 훑어가던 그는 “이 자리에 박유하 교수도 참석했지만”이라는 말로 <제국의 위안부>를 역사수정주의 갈래에 속한 책이라고 분명히 규정했다. 그는 1960~70년대까지 ’대영제국’이 문명을 선도했다고 한 영국처럼, 제국주의와 파시즘, 자본주의 역사를 옹호하는 역사수정주의의 등장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일본과 한국의 역사수정주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라는 특수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예컨대 서양에서도 유대인 집단학살인 홀로코스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 극소수 있으나, “아무리 역사수정주의자라 하더라도 피해자를 가해자로 모는 경우는 없다”면서 피해자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그런 식으로 몰아가며 “모욕”하는 경우는 “세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위안부’문제의 법적인 측면을 연구해온 두 번째 연사 김창록 경북대 교수는 ‘위안부’를 제국의 일원으로 보면서 그들에 대한 ‘보상’을 포기하거나 일본의 법적 책임을 소멸시킨 게 한국정부라는 박유하 교수의 주장 등을 거론하고, 자신의 논문을 잘못 인용한 박 교수의 문제점은 “그 법적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제국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정영환 교수 차례였다. 양복차림의 그는 화상을 통해 활달하고 또렷한 한국말로 자신의 책 내용이 박유하 교수의 책 자체 분석과 그것이 일본에서 거둔 이례적인 성공의 이유를 짚어보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일본 정계와 지식계를 환호하게 만든 <제국의 위안부> 어느 구절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책의 쪽수까지 거론했다. 이어 비판에 대해 늘 자신의 책을 ’오독’했다고 반박하는 박 교수의 주장이야말로 근거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박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한 일본인 르포라이터 센다 가코의 <종군위안부-‘목소리 없는 여성’ 8만명의 고발>(1973)에서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이 ‘동지적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한 조선인 위안부들의 얘기들(89쪽)은 실은 모두 일본인 위안부들이 한 얘기거나 그것을 전한 업자들 얘기들이었다며 박 교수에게 “그 책에서 그게 아닌 조선인 위안부 얘기가 있다면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그는 박 교수가 ‘동지적 관계’ ‘동지의식’의 입증사례로 거론한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98쪽) 내용에 대해서도 사실과 소설(픽션)을 동렬로 취급하는 것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설사 그 묘사가 체험에 근거를 둔 것이라 하더라도 박 교수가 인용한 조선인 위안부 하루에 등의 얘기는 실은 일본인 군인의 말이고 저자 자신의 말임을 확인하면서, “그것은 ‘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이 아니라 ‘위안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본인) ‘나’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에만 나오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모든 걸 ‘운명’으로 체념하며 상대를 원망도 규탄도 하지 않고 용서하며 화해로 이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황순이 할머니의 증언도 ‘과잉해석’에다 오히려 박 교수의 주장을 허물어뜨릴 만한 중요한 부분은 인용에서 제외해버리는 등 ‘증언의 찬탈’(109쪽)을 자행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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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군 무죄론과 업자 책임론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인들의 가부장적 순결주의 소산이라 비판하기 위해 페미니즘적 관점을 앞세우며 박 교수가 예시한 ‘평화의 소녀상’ 관련 위안부 평균연령 오인도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일본 패전 뒤 미군 신문을 받던 당시 나이 25살(실제 23.1살)로 적시했지만, 실상은 끌려갈 당시 20살 미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이름을 밝힌 피해자 52명 중 46명이 20살 이하 미성년자였고, 한국정부 신고자 175명 중 156명이 미성년자)(66쪽). 그리고 한국정부가 거부함으로써 위안부 피해자들의 ‘보상’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박 교수가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도 실은 피징용자 미수금 부분을 위안부 문제로 오인한 결과이며 일본이 ‘보상’했다는 것도 근거없는 말이라는 점(116, 125쪽) 등을 짧지만 명확하게 지적했다. 정 교수의 지적은 <제국의 위안부>에서 펼친 박 교수 주장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내용들에 대한 반박이다.
정 교수는 박 교수에게 타인들의 비판을 ‘오독’이라고만 주장하지 말고 그런 주장의 근거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기존의 연구수준에 못미칠 뿐 아니라 문제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에서 절찬받고 있는 것은 일본사회가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화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뒤이어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 양현아 서울대 교수, 번역자인 임경화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등 지정 토론자들이 박 교수가 얘기하는 ‘반일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의 실체, 무엇을 위한 어떤 ‘화해’인지, 왜 박 교수는 정 교수가 재일조선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유독 강조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정 교수는 일본 내의 ‘반일 내셔널리즘’은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 이래 일본이 새로운 ‘국제국가’로의 부상을 지향하면서 이에 대한 주변국들의 반발을 의식하면서 국익 차원에서 ‘사죄론’과 함께 떠오른 것이라며,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맥락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식민지근대성론”이이라고 했다. 또 아베 정권의 최근 움직임은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까지 포섭하는 좌우합작적 측면이 있다면서 <제국의 위안부>에 환호하는 일본 내 움직임을 “우파들의 책동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강연회 뒤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하려던 청중들과의 질의응답 맨 첫 질문자는 박유하 교수였다.
박 교수는 “어제(6월30일)야 이 모임을 알았고 참석 여부를 오늘(1일) 오후에야 결정했다”면서 “모든 비판은 본인 있는 데서 해야 옳다”는 이상한 논리를 폈다. 메일로 참석 요청을 했다는 그는 그러면서 자신에게 “발언기회를 달라”면서 “얼마나 줄 수 있느냐” “몇 분을 줄 수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정영환 교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이나 반론을 듣고 싶었던 참석자들은 여기저기서 “그냥 말씀을 하시라”고 했고, 강연회 실행위 쪽도 그냥 얘기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박 교수는 정영환 교수의 주장들은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정 교수의 모든 주장에 대해 반론을 가할 수 있다면서 지난해 <역사비평> 등에 쓴 자신의 글을 얘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책이 “일본에서 어떤 평을 받았는지 보라”면서, 그 평판은 “일본책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 생각이 잘못된 일본인들이 보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라고 했다.
거기서 정영환 교수가 “<역사비평>에 쓴 것 잘 읽어봤다”며, “한일회담 때 개인 청구권을 한국정부가 스스로 포기했다는 <역사비평> 기고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이미 지적했는데, 거기에 대한 생각을 들려달라”고 했다. 아울러 센다 가쿠와 후루야마 소설에 대한 과잉해석 부분에 대한 얘기도 부탁했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박 교수는 "전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면서 자신은 위안부 보상 문제를 “포기했다고 쓰지 않았다, 한일 대표들간 대화에서 그런 말이 오갔다는 얘기”라고 했다. 자신의 비판이나 질문에 대한 설명이나 반론을 원했던 정 교수는 그 지점에서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대화를 포기했다.
박 교수는 “센다 얘기는 그렇게 읽을 수 있다는 내 해석”이라며 ‘제국에 동원된 위안부’ 얘기를 “일본에서 나온 평들은 정확하게 읽어주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중요한 것은 누구와 연대해서 어떤 동아시아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시아 여성기금이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사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 국민들 중에 사죄의식이 없어졌다. 운동을 해온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양국의 적대감이 커지고,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이 점점 싫어진다고 얘기한다”고 덧붙였다.
여러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일본인들의 사죄의식을 끌어내고 키우기 위해서는 과거사는 덮어둬야 한다는 것인가. 그야말로 ‘화해’는 진상규명과 재발방지가 아니라 오직 망각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문제는 과거사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있다?
“합리적으로 역사를 청산해온 일본” 대 “감정적이고 무리한 요구만 내세우는 한국인의 반일 민족주의”라는 <제국의 위안부> 설정 기본 대립구도가 그 연역적 사고의 결과라고 정 교수도 참석자들도 지적했다.
이처럼 그렇게 된 원인이 모두 한국 쪽에 있다고 보는 듯한 박 교수와, 일본 내의 ‘지적 퇴락’과 부도덕성, 결과적으로 그것을 부추기는 잘못된 내용의 <제국의 위안부> 등 박 교수의 저작들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는 정 교수와 그 지지자들. 그들간 인식의 간극은 유의미한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벌어져 있었다.
이렇듯 질의응답 시간은 박 교수가 질문자로 나서면서 사실상 그것으로 시종하며 더는 진전이 없었다.
정 교수는 일본에서 혼자 블로그에 글을 써온 자신을 한국에서 이렇게 평가해주고 책까지 번역 출간 해준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면서 “박유하 교수 홈피도 있고 <제국의 위안부>도 공개돼 있으니, 내 책(누구를 위한 화해인가)과 비교해 달라, 어느 편에 서 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내 것만 보지 말고 둘 다 읽고 비교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모임을 후원하고 장소를 제공한 푸른역사 아카데미 관계자는
“박 교수가 이제까지 해오던 말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정 교수 질문에 제대로 응답하고 의미있는 토론이 벌어졌다면, 발언시간이야 몇 시간, 아니 밤을 새워서라도 제공할 수 있었다”며
“박유하 교수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강연회를 지켜본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자 장신은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더 이상의 학문적 논쟁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생산적일 수도 없다”고 했다. “<제국의 위안부> 현상 또는 박유하 현상일 뿐이지 애초부터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제국의 위안부>를 이용하거나 지지하는 일본과 한국의 ‘지식사회’를 분석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강연회를 지켜본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자 장신은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더 이상의 학문적 논쟁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생산적일 수도 없다”고 했다. “<제국의 위안부> 현상 또는 박유하 현상일 뿐이지 애초부터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제국의 위안부>를 이용하거나 지지하는 일본과 한국의 ‘지식사회’를 분석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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