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기 개신교의 적개념 형성사와 러우전쟁 - 에큐메니안
한국 초기 개신교의 적개념 형성사와 러우전쟁적의 계보학(20)
홍이표(전 야마나시에이와대학 인간문화학부 준교수) | 승인 2024.10.23
▲ 홍이표 교수는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가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등에 업고 적개념을 형성해 왔다고 파악한다.
100년 전 서방 교회 내부의 적들
영국의 작가 크로닌(A. J. Cronin)의 대표작 『천국의 열쇠』( The Keys of the Kingdom, novel, 1941.)를 보면,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 프로테스탄트인 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하던 주인공 프린세스 치셤이 등장한다. 신·구교 갈등 중에 발생한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치셤은 가톨릭 신자인 고모의 보호 아래 성장하며 훗날 가톨릭 신부가 된다. 말하자면 치셤은 종교개혁 이후 발생한 신구교 대립의 교파주의(종파주의)의 희생양인 셈이었다.
이후 중국 선교사가 된 치셤은 1차 세계 대전(1914-1918) 가운데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대립하는 수녀들(독일, 프랑스)의 모습과 마주한다. 같은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도 전쟁 앞에서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압도되고 있다. 하지만 치셤은 수녀들을 중재하며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후 전염병 확산 속에서도 미국 감리교회 피스크 박사 부부와 교파를 초월한 협렵의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페스트 발생 당시 도우러 온 무신론자 의사 탈록과의 우정을 통해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이상적 관계성까지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는 ‘교파주의’(종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유신론과 무신론 등, 근세 이후 세계가 속에서 인류가 서로를 ‘적’으로 상정하도록 만든 여러 요소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열쇠’는 무엇인지 묻고 있는데, 2024년 이 순간에도 그 질문의 의미는 유효하다.
초기 한국 개신교회의 적개념 형성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회는 다른 종교보다도 훨씬 목소리가 크고, 행동이 과격하며, 호전적이기까지 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달리 좋게 말하자면,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서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저항(프로테스탄트)하며 탄생한 교회라는 점에서 개신교회는 솔직하고, 실천적이며, 목숨을 각오할 정도로 열정적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분명 그러한 역동적 에너지는 구습을 혁파하여 신분제를 없앴고, 근대 교육을 통해 천부인권과 주권재민 사상을 전파하며 역사에 공헌했음이 틀림 없다. 하지만 과유불급인 것일까? 열정의 과도함은 불필요한 적개심과 혐오, 차별과 배제 등의 분출에 사용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한 개신교회는, 역사 발전을 추동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발목을 잡기도 한다. 더 이상 종속변수가 아닌 독립변수적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개신교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이나 공동체를 극도로 혐오하거나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주변적 현상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면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어떤 ‘적개념 형성’의 여정이 녹아 있을까? 이는 한국 개신교회의 현주소를 성찰하여 한국 사회와 세계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중요한 성찰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개항기(1885-1894): 가톨릭을 향한 적대감
크로닌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서방교회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며 가톨릭과 적대 관계를 형성했던 개신교회는 한국에서도 유사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특히 미국의 개신교가 한국의 초기 선교를 주도한 가운데, 개신교는 ‘이체선언’(異體宣言)을 통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인 가톨릭과는 다르며 오히려 국가 발전에 공헌하는 충군애국의 종교임을 강조했다. 그 결과 가톨릭과는 선의의 경쟁관계를 넘어서 어떤 면에서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남궁억 사장을 납치한 ‘황성신문사 사건’(1889)이나, 감리교 정동제일교회 교인들과 가톨릭의 명동성당 신자들이 충돌하여 아펜젤러 선교사(감리교)와 가톨릭 뮈텔 주교가 서로를 ‘마귀의 종들’, ‘악당’이라 칭하며 비난한 ‘명동성당구타사건’(1894), 황해도에서 발생한 ‘해서교안’(海西教案, 1900-1903)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유럽에서 신구교 간에 일어난 30년 전쟁이나 소종파 탄압 등의 불행한 역사가 극동의 한반도에서 재현된 측면이 있다.
▲ 기독교의 본산지와도 같은 서구 유럽에서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전쟁은 거의 일상일 정도였다. ⓒWikipedia
청일전쟁(1894)과 을미사변(1895): 청국과 일본을 향한 적개념 형성
청일전쟁은 두 외세가 다름 아닌 한반도에서 벌인 전쟁이다. 이 과정에서 오랜 간섭과 통제를 일삼던 청국에 대한 적개심은 개신교도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후 ‘비전론자’(非戦論者), ‘절대적 평화주의자’가 되는 일본이 대표적 개신교 지식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조차 청일전쟁 당시에는 그것을 ‘의로운 전쟁’이라 칭송할 정도였다. 서재필과 윤치호, 배재학당 관계자 등 다수의 개신교도가 참여한 독립협회(1896), 그리고 그들이 세운 독립문(1898)도 다름 아닌 ‘청국’으로부터의 자주성 확보를 강조한 것임과 동시에 청국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강한 적대감의 산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후 또 다른 외세 일본에 의해 근본적인 문제가 온전히 해소될 리 없었다. 일본은 곧바로 러시아 세력을 지지하던 민왕후를 살해하며 야만성을 드러냈고, 그것은 고종과 왕후를 통해 다양한 선교사업의 희망적 전개를 기대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과 개신교도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을미사변은 한국 개신교회 안에 ‘반일’이라는 일본을 향한 적개념을 싹을 틔웠다.
러일전쟁 시기(1903-4): 반러 적개념과 러우전쟁에 향한 시선
청과 일본 모두가 물러 난 한반도의 진공 상태에는 러시아가 밀고 들어 왔고. 10년간 친러파 세상을 이어진다. 대표적인 부정적 사건이 바로 1900년 11월에 미국인 선교사들의 살해를 도모했던 이용익의 ‘도륙밀지사건’(屠戮密旨事件)이다. 그 직후 촉발된 ‘러일전쟁’에서 한국 개신교회 측은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따라서 1903-4년 발발한 러일전쟁 당시 한국 개신교회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러시아의 추방을 선호하며 일본의 승리를 기원한다. 심지어 수년 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가톨릭 신자 안중근조차 1904년에 러시아를 경계하며 일본을 지지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만약 러시아가 패권을 쥐게 되면 오랫동안 한국에서 쌓아온 우리의 사역은 멈추게 될지 모릅니다. (…) 우리 미래에는 여러 장해가 생길 겁니다”(H. G. Underwood, Nov. 28. 1903.)라며 러시아의 전쟁 승리를 염려했고. 대표적인 개신교도 윤치호는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한 것은 기쁜 일이다. 이 섬나라 사람들은 황인종의 명예를 옹호했다”(일기, 1905년 6월 5일.)라고 말했다.
한국 개신교 인물들의 이러한 러시아에 대한 적개념은, 로마의 분열로 야기된 동서 교회의 분열(1054년, 가톨릭과 정교회)로 형성된 적대 관계가 동아시아에서도 영향을 미친 결과일 수 있다. 이러한 정서는 최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서도 서유럽 기독교 문화권과 결합하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호적 정서와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 적대적 정서의 형성과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또한 러시아와 대립하는 G7과 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의 조직 등이 모두 가톨릭과 개신교를 주요 종교적 배경으로 하는 것처럼, 과거 러일전쟁 시기에는 서로 적대하던 한반도 내의 가톨릭과 개신교가 동일한 적개념을 공유하며 제휴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이 개신교 내에 지배적인 것은 구 소련이라는 레드 컴플렉스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일 수 있다. 100년 전 서방 교회 역사를 피로 물들인 ‘교파주의’에 기반한 적개념이, 100년 뒤 한국 개신교 안에서는 교파주의적 거부감에 반공주의까지 뒤섞여 더욱 뿌리 깊은 적개념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
(다음에 계속)
홍이표(전 야마나시에이와대학 인간문화학부 준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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