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8 / 학생들의 통일관, 여론조사 / 책, 학생운동의시대 77쪽
- 61년 4월 연세대 4학년 39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22.4%
/ UN감시하 남북총선...43.7%
/ 대한민국 주권하 통일...18.8%
* 선건설 후통일 52.0%, 선통일후건설 34.4%
‘
- 위 여론조사에 따르면 4.19 이후 학생운동 일부와 혁신계가 주도한 통일운동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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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7 / 50년대말 학생운동의 이념 동향 / “학생운동의시대” / 66쪽
* 선건설 후통일 52.0%, 선통일후건설 34.4%
‘
- 위 여론조사에 따르면 4.19 이후 학생운동 일부와 혁신계가 주도한 통일운동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경우
공부7 / 50년대말 학생운동의 이념 동향 / “학생운동의시대” / 66쪽
- 50년대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한 신진회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한계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서유럽의 비공산주의적인 민주사회주의 이념에 막연한 호기심을 느꼈다.
민주사회주의는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용인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 그들은 라스키, G.H.D 콜, 시드니 웹, 베른슈타인, 네루 등 민주사회주의자들의 저서를 함께 읽고...
- 학생운동의 이념은 50년대말 민주사회주의에서
- 학생운동의 이념은 50년대말 민주사회주의에서
60년대 한일회담을 계기로 한 반외세민족주의,
70년대 민중성 강화와 마르크스주의로 발전하는 것 같다.
80년대가 되면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이다.
- 민주사회주의, 사민주의가 체제가 용인할 수 있는 최대치였던 것 같다. 60년대 이후 학생운동은 표면적으로 반독재 민주주의를 내걸면서도 사실상 반체제운동이었다.
All reactions:19김대호 and 18 others
Kim Dal-jin
수긍이 가네요. 80-90년대에도 한국사회에서 지금 처럼자유민주주의체제를 당당하게 말하기가 힘든 분위기였던것 같아요. 그렇다고 사회주의는 아니고 그 절충점으로 막연하게 유럽의 독일의 사민당을 많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민경우
공부6 / 이영일 / “4.19 혁명의 회고와 반성” / 23년 트루스포럼 강연에서
- 4.19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중요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받들어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본인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고 하야했기 때문이다”
- “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생들은 이미 지식과 정보를 선점한 사회적 신분집단이 아니었고 신진 관료집단에 지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밀리고 있었다”
- “식민지는 있었으나 신식민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 평가: 이영일 선생의 분석에 따르면 4.19 이후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로 보고 민족자립을 외치는 학생들과 나름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세계사적 질서속에서 지식과 정보를 선점한 신진 관료집단 주도하의 근대화의 길로 양분되는 것 같다.
이보숙
그렇죠? 이승만 대통령이 나 내탓이라하고 하야하신 덕이죠? 요즘은 내탓이오 하는사람은 없고 네 탓만 찾으니 안타깝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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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5 / 안병직 / 25.130 / “대한민국 정통성과 국민통합” / 펜앤마이크 기고문
-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은 세계사적 이성인 UN의 결의에 의하여 건국되고, 역설적으로 6.25 사변 중에 형성된 60만 대군을 배경으로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민주화운동과 산업화를 기반으로 민주화를 달성함으로써”라 정리하고 있다.
- 건국에 대해 / 좌파라면 UN이 아니라 상해임정과 독립운동에서 건국의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 당시 UN은 진보적 성향과 사조의 산물로 안병직에 따르면 “세계사적인 이성”
- 산업화에 대해 / 좌파라면 산업화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박정희와 군부가 아니더라도 산업화가 가능했다고 말할 것이다.
- 민주화에 대해 / 민주화운동이 박정희 산업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 / 좌파라면 민주화운동은 독립운동의 숭고한 저항,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의 고귀한 희생으로 이뤄졌다고 말할 것이다.
- 불과 3줄 정도로 대한민국 역사를 간결히 요약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 한 세대 전체가 무려 40년 동안 해방전후사의인식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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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Jeong-Woo Lee, 김대호 and 66 others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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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
Sungjae Kim 한번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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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의 시대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부문별 민주화운동사 1
이호룡 , 정근식 엮음
선인 · 2013년 12월 20일

책 소개
오늘날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드문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의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고, 또한 최근의 경제상황이나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견해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성공이라는 명제는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그 요인들을 적절히 설명해야 할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동남아시아나 기타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이에 대해 자주 질문하고, 성공의 ‘비결’을 배우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정보
엮음 이호룡
엮음 정근식
목차
서장_학생운동 연구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정근식
1. 머리말 : 연구의 배경
2. '학생운동의 시대'라는 틀
3. 운동적합적 이론을 찾아서
4. 학생운동의 이념과 조직 그리고 문화
5. 학생운동에 대한 통제
6. 맺음말 : 과제
1장_ 1960년대 대학생 ‘이념서클’의 조직과 활동 :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중심으로 | 오제연
1. 머리말
2. 1950년대 이념서클
3. 4월혁명 직후 이념서클
4. 1960년대 전반기 이념서클
5. 1960년대 후반기 이념서클
6. 맺음말
2장_ 197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과 방식 : 서울대 이념서클과 서클연합회를 중심으로 | 신동호
1. 머리말
2. 유신체제와 학생운동의 격변
3. 긴급조치 9호 시기 학생운동의 패턴
4. 고민하고 결단하고 희생한 세대
5. 맺음말
3장_ 1980년대 상반기 학생운동 체계의 변화와 학생운동 문화의 확산 | 허 은
1. 머리말
2. 교육정책의 전환과 억압적 학원통제의 지속
3. 언더서클 기반 학생운동 체계의 구축과 해체
4. 학생운동 문화의 확산과 정체성 공유의 확대
5. 맺음말
4장_ NL(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의 주류화와 한계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 이창언
1. 머리말
2. NL계 학생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 : 반제 통일전선론 전통의 부활
3. NL계 학생운동의 확산 요인 : 조직전략을 중심으로
4. 민족해방(NL)의 분화와 한계 : 민주화 이후 혁신의 실패
5. 맺음말
5장_ 민중민주(PD)파 학생운동의 집합적 특성과 메커니즘 | 고 원
1. 머리말
2. 민중민주파 학생운동의 전반기: MT파 학생운동
3. 민중민주(PD)파 학생운동의 전개와 특징
4. 맺음말
제2부
6장_ 인민혁명당사건과 경북대학교 학생운동 : 1960-1970년대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메커니즘 | 임채도
1. 머리말
2. 인혁당 그룹의 형성과 1960년대 경북대 학생운동
3. 1970년대 경북대 학생운동과 인혁당재건위사건
4. 맺음말
7장_ 부산지역 학생운동의 메커니즘 연구 | 김희재
1. 머리말
2. 부마항쟁과 학생운동
3. 6월민주항쟁과 조직적 학생회운동
4. 학생운동 시대의 운동 메커니즘
5. 맺음말
8장_ 학생운동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역사 : 1970-1980년대 광주·전남의 경우 | 이기훈
1. 머리말
2. 주체 형성 :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의 학생운동
3. 민청학련의 경험과 197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
4. 봉기와 투쟁의 기억 : 부마민주항쟁과 5·18
5. 학생운동의 변화와 대중운동의 시대(1980년대)
6. 맺음말
제3부
9장_ 1980년대 인천대 학생운동 시각에서 본 선인학원 시·공립화 과정과 의미 | 정태헌
1. 머리말
2. 인천대 학생운동의 재단투쟁 시작과 역량 확산(1980-1986년)
3. 학생운동 대중적 조직화와 제한적 연대투쟁(1987-1991년)
4. 시민운동과의 연대 속에 마무리된 재단투쟁(1992-1994년)
5. 맺음말 /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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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오늘날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드문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의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고, 또한 최근의 경제상황이나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견해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성공이라는 명제는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그 요인들을 적절히 설명해야 할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동남아시아나 기타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이에 대해 자주 질문하고, 성공의 ‘비결’을 배우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후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는 압도적으로 학생운동의 역할이나 비중이 컸다. 학생운동은 1960년 4월혁명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 4월혁명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약 37년간의 기간을 ‘학생운동의 시대’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시도할 때 필요한 기본적 시각과 연구방법, 그리고 시기별로나 지역별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건이나 운동 사례들을 분석해보기로 하였다. 이 책이 취하는 ‘학생운동의 시대’라는 표현에 대하여 찬성하는 의견도 있고, 반대하는 의견도 있겠지만, 이 기간에 이루어진 학생운동의 이념적 선도성이나 대중적 동원능력,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이 기간에 매우 강력하고 집약적으로 표출되었지만, 항상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의 전개 과정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계. 또는 국가의 통치의 방식, 그리고 대학의 발전과 학생운동 조직의 성격에 따라 몇 개의 국면들로 구분된다. 이 연구에서는 크게 1960년의 4월혁명에서 학생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가 1961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일단락이 된 후 1979년까지 전개된 학생운동과 1980년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개된 학생운동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시기를 보여주는 학생운동 조직의 이념적 지향, 그리고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의 학생운동의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머리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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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ISBN 9788959336739
발행(출시)일자 2013년 12월 20일
쪽수 506쪽
크기
152 * 225 * 35 mm / 865 g판형알림
총권수 1권
시리즈명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부문별 민주화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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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박사 칼럼
학생운동의 시대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부문별 민주화운동사 1
이호룡 , 정근식 엮음
선인 · 2013년 12월 20일

책 소개
오늘날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드문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의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고, 또한 최근의 경제상황이나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견해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성공이라는 명제는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그 요인들을 적절히 설명해야 할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동남아시아나 기타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이에 대해 자주 질문하고, 성공의 ‘비결’을 배우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정보
엮음 이호룡
엮음 정근식
목차
서장_학생운동 연구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정근식
1. 머리말 : 연구의 배경
2. '학생운동의 시대'라는 틀
3. 운동적합적 이론을 찾아서
4. 학생운동의 이념과 조직 그리고 문화
5. 학생운동에 대한 통제
6. 맺음말 : 과제
1장_ 1960년대 대학생 ‘이념서클’의 조직과 활동 :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중심으로 | 오제연
1. 머리말
2. 1950년대 이념서클
3. 4월혁명 직후 이념서클
4. 1960년대 전반기 이념서클
5. 1960년대 후반기 이념서클
6. 맺음말
2장_ 197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과 방식 : 서울대 이념서클과 서클연합회를 중심으로 | 신동호
1. 머리말
2. 유신체제와 학생운동의 격변
3. 긴급조치 9호 시기 학생운동의 패턴
4. 고민하고 결단하고 희생한 세대
5. 맺음말
3장_ 1980년대 상반기 학생운동 체계의 변화와 학생운동 문화의 확산 | 허 은
1. 머리말
2. 교육정책의 전환과 억압적 학원통제의 지속
3. 언더서클 기반 학생운동 체계의 구축과 해체
4. 학생운동 문화의 확산과 정체성 공유의 확대
5. 맺음말
4장_ NL(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의 주류화와 한계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 이창언
1. 머리말
2. NL계 학생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 : 반제 통일전선론 전통의 부활
3. NL계 학생운동의 확산 요인 : 조직전략을 중심으로
4. 민족해방(NL)의 분화와 한계 : 민주화 이후 혁신의 실패
5. 맺음말
5장_ 민중민주(PD)파 학생운동의 집합적 특성과 메커니즘 | 고 원
1. 머리말
2. 민중민주파 학생운동의 전반기: MT파 학생운동
3. 민중민주(PD)파 학생운동의 전개와 특징
4. 맺음말
제2부
6장_ 인민혁명당사건과 경북대학교 학생운동 : 1960-1970년대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메커니즘 | 임채도
1. 머리말
2. 인혁당 그룹의 형성과 1960년대 경북대 학생운동
3. 1970년대 경북대 학생운동과 인혁당재건위사건
4. 맺음말
7장_ 부산지역 학생운동의 메커니즘 연구 | 김희재
1. 머리말
2. 부마항쟁과 학생운동
3. 6월민주항쟁과 조직적 학생회운동
4. 학생운동 시대의 운동 메커니즘
5. 맺음말
8장_ 학생운동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역사 : 1970-1980년대 광주·전남의 경우 | 이기훈
1. 머리말
2. 주체 형성 :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의 학생운동
3. 민청학련의 경험과 197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
4. 봉기와 투쟁의 기억 : 부마민주항쟁과 5·18
5. 학생운동의 변화와 대중운동의 시대(1980년대)
6. 맺음말
제3부
9장_ 1980년대 인천대 학생운동 시각에서 본 선인학원 시·공립화 과정과 의미 | 정태헌
1. 머리말
2. 인천대 학생운동의 재단투쟁 시작과 역량 확산(1980-1986년)
3. 학생운동 대중적 조직화와 제한적 연대투쟁(1987-1991년)
4. 시민운동과의 연대 속에 마무리된 재단투쟁(1992-1994년)
5. 맺음말 /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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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오늘날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드문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의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고, 또한 최근의 경제상황이나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견해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성공이라는 명제는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그 요인들을 적절히 설명해야 할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동남아시아나 기타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이에 대해 자주 질문하고, 성공의 ‘비결’을 배우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후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는 압도적으로 학생운동의 역할이나 비중이 컸다. 학생운동은 1960년 4월혁명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 4월혁명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약 37년간의 기간을 ‘학생운동의 시대’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시도할 때 필요한 기본적 시각과 연구방법, 그리고 시기별로나 지역별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건이나 운동 사례들을 분석해보기로 하였다. 이 책이 취하는 ‘학생운동의 시대’라는 표현에 대하여 찬성하는 의견도 있고, 반대하는 의견도 있겠지만, 이 기간에 이루어진 학생운동의 이념적 선도성이나 대중적 동원능력,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이 기간에 매우 강력하고 집약적으로 표출되었지만, 항상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의 전개 과정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계. 또는 국가의 통치의 방식, 그리고 대학의 발전과 학생운동 조직의 성격에 따라 몇 개의 국면들로 구분된다. 이 연구에서는 크게 1960년의 4월혁명에서 학생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가 1961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일단락이 된 후 1979년까지 전개된 학생운동과 1980년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개된 학생운동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시기를 보여주는 학생운동 조직의 이념적 지향, 그리고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의 학생운동의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머리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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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ISBN 9788959336739
발행(출시)일자 2013년 12월 20일
쪽수 506쪽
크기
152 * 225 * 35 mm / 865 g판형알림
총권수 1권
시리즈명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부문별 민주화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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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 칼럼
4.19 혁명의 회고와 반성 -이영일
4.19 혁명의 회고와 반성 -이영일
이글은 이영일이 2023년 10월 30일 19시 서울대학교 우석경제관 223호에서 열린 트루스 포럼에서 행한 특강전문이다. 강연에 앞서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영화상연이 있었다.
1. 들어가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시국의 병리의 치유를 위해 끊이지않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는 트루스 포럼의 김은구 회장과 김회장의 초청에 동참한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다. 나는 나이만 놓고 본다면 여러분들의 선배가되지만 여러분들 앞에 나서서 큰 소리를 낼만한 업적이나 경륜을 갖춘 사람은 아니다. 다만 1960년 4월의 거리에서 불의에 항거한 시위에 참가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를 초청해 주신 트루스 포럼에 우선 감사 한다. 지금 수유리 4.19국립묘지에는 함께 시위에 나갔다가 먼저 가신 509위의 옛 동료들이 잠들고 있다.
지난 세월동안 나는 4.19 이야기를 외부강연에서 별로 한 일이 없었는데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나선 것은 옛날이야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대사에 관한 우리들의 역사의식을 올바로 정립해야겠다는 필요에서 여러분들과 생각을 나누기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
2.학생운동의 회고
가. 성공한 학생운동
역사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될 사건들이 몇 있었다. 3.1운동이 그렇고 6.10만세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 등은 식민지 민족주의 시대의 학생운동이었으며 대개 중고등 학생들이 주류였고 지도부는 독립운동 선각자들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에는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생운동이 주류를 이룬다. 4.19로부터 6.3을 거쳐 1970년대와 80년대에 기승을 부렸고 90년대에 잔영이 사라지는 소위 운동권 학생운동들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공한 학생운동은 4.19혁명뿐이다. 까닭은 1960년당시까지만 한국사회의 전체 분위기가 <전 민주주의 시대로부터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 상황이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은 헌법조문상의 규정이고 실제로는 경무대나 관료의 손에 있었다. 민주경찰이라기보다는 관치경찰이었다. 국민들의 수준도 중졸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의 수효가 전체 인구중 26,000명 정도였고 국민소득도 60달러 이하 수준이었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기 어려운 환경에서 실시된 민주정치였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은 관치행정 앞에 항의한다거나 저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민주적인 것과 비민주적인 것을 명확히 구별할 능력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대학생들만은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가 실생활에서 적용되지 않고 왜곡되거니 이탈되고 있음을 잘 알았다. 학생들만이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정비리 척결에 용기있게 앞장설 수 있었다. 헌법이 보장한 시위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 국민들이 적극 호응했기 때문에 4.9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
나 성공의 진짜 이유
혁명의 주도세력인 학생들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결사항쟁, 이에 호응한 다수 국민들의 동참이 4.19혁명을 성공시킨 주인이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받들어 3.15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본인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주고 하야했기 때문이다.
독재자로 평가된 건국대통령이 국민의 하야요구를 수렴, 이승만 대통령 처럼 스스로 하야한 독재자는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모든 독재자는 자기운명과 정권의 운명을 일치시키면서 버티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달랐다. 본인이 하야하고 다시 공정한 선거를 통해 새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이승만 자신이 만든 주권재민의 원칙이 확실히 지켜졌고 '대한민국은 만주공화국'이라는 국체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왜 이처럼 자기에게 불리한 결단을 내렸을까. 이것은 그분이 하와이 망명시절 부터 그려온 한반도에 세워질 국가관에 기인한다. 그는 망명지 하와이에 오래 머물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3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태평양쪽으로 열려있기 때문에 결코 대륙에 붙어있는 꼬리가 아니라 해양세력의 대륙진출 교두보라고 보았다. 자기운명을 대륙세력의 꼬리로 보고 대륙의 강대국을 섬겨야만 생존을 유지한다는 5000년의 전통지정학적 관념을 거부하고 해양세력의 대륙진출 교두보로 인식을 바꾸고 해양세력을 끌어드려야 큰 발전을 도모할 수있다는 새로운 지정학이론을 구상했다. 이런 지정학적 요구에 맞는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해양세력을 한반도로 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세워질 국가가 정치적 가치면에서 해양세력들과 소통할 수있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자유민주국가가 되어야만 우리가 발전할 수있는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신탁통치를 반대학고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한 것은 그분의 이런 지정학적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하야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분에게는 자유민주주의가 통치의 수단이 아니었고 한반도에 세워진 독립국가 한국이 세계열강과 어께를 나란히 하고 생존 발전을 도모할 목표였다. 이것이 4.19혁명성공의 결정적 이유였다.
언젠가 5.16주도세력인 김종필 씨가 나에게 학생들이 먼저 나서지 않았으면 군인들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는 한마디로 착각이라고 반박하면서 학생이 아닌 군인들이 불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했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하야하지않고 그의 국군 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가지고 5.16을 확실히 진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학생들의 궐기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던 것이다 또 그 자신이 민주주의자로서 오래동안 훈련된 분이었기 때문에 시위의 자유, 반대의 자유, 책임정치의 본질을 존중할 줄 알았던 분이였다.
다. 관료들에게 뒤진 학생운동
4.19이후의 학생운동들도 한국정치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지만 결론적으로 성공한 운동들은 아니었다. 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생들은 이미 지식과 정보를 선점한 사회적 신분집단이 아니었고 신진 관료집단에 지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밀리고 있었다.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은 명분상 국민적 공감은 샀지만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려는 정부로서는 대일협상에서 파탄이냐 성공이냐를 판가름하는 형식의 벼랑끝 협상을 펼칠 처지가 아니었다. 경제개발계획목표달성에 필요한 투자재원확보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제1차5개년계획에 필요한 투자의 마중물을 일본으로부터 얻어냈다. 제2차 3차, 계획이 목표를 달성한 후에는 정부는 투자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대기업을 육성하여 정부를 대신할 투자의 주체로 만들어 세웠다.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군의 탄생이었다. 시장경제 속에서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라. 좌파의 낡은 이론
이때 좌파이론에 오염된 학생운동가들의 일부는 모든 외자기업들을 모조리 매판자본이라고 매도하고 현 정부를 미국의 독점자본에 매달린 신식민지 체재라고 비판하면서 반정부시위를 주도했다. 미문화원 점거나 방화사건을 주도한 삼민투(三民鬪)의 반미투쟁 역시 지식과 정보를 선점한 학생운동은 아니었다. 낡은 좌파이념이나 주장에 오염된 학생운동이었다. 매판자본 이론은 시대적으로 아주 낡은 체제비판이론이고 신식민지이론 역시 좌파들이 자기들 존재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조작한 주장이다. 식민지는 있었으나 신식민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판자본은 아편전쟁 시기에 중국 상인들의 영리 행위를 비난한 용어였는데 실체 역시 애매하다.
주사파의 아류들은 지금도 미국을 신식민지주의 모체로, 한국은 그 예속하에 있는 신식민지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이 아직까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간 북한공산당들의 침투가 얼마나 집요했던가를 실감케한다. 오늘날 한국이 미국, 일본 등과의 자본과 기술 협력을 통해 세계경제랭킹 10위에 오른 것은 주사파들이 뇌까리는 신식민지론의 허구성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요즈음 잘난체하는 주사파의 어떤 이론가도 주권을 국민이 아닌 수령에게 맡긴 북한이 남한과 민족은 같으면서도 지구최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4.19가 이룩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털끝만큼도 기여한 바 없다. 오히려 4.19가 만들어 놓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이용하여 북한의 대남공작에 이용되는 바보짓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모든 반정부투쟁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호도했다. 주사파들이 대학에 침투하여 대학가를 학문 부재의 수라장으로 만들고 정부와의 투쟁을 업적으로 과시하는 행위에 국민들은 공감과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운동권출신의 정치인들은 가끔 “우리가 민주화투쟁을 할 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덤빈다. 4.19와 같은 진정한 민주화운동이라면 온 국민들이 열화같은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세뇌되어 폭력투쟁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동조할 국민은 없었다.
바. 쓸모있는 바보들.
국내의 엘리트 관료들은 좌파들의 모든 주장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일축한다. 더욱이 최근에 학생층의 일부가 이른바 대깨문이나 개딸들에 끼여 있는데 이것은 학생운동아닌 정치패거리들의 하수인 집단의 폭력행위일뿐 학생운동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흔한 말로 팬덤정치의 장식품들이다. 이제는 국민들도 학생운동의 필요성에 공감과 지지를 보내기보다는 주사파 학생들이 민주화나 통일 구호를 내세우면서 빗나가고 있는데 대해 우려하고 오히려 이를 위험시하고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학생운동의 성공조건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선점에서 나왔다면 4.19 이후의 학생운동은 지식과 정보획득에서 관료나 대기업들에게 항상 뒤졌다. 학생운동이 낡은 이론이나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현실을 비판하고 도전하다 보니 이들에 대한 민중적 지지의 비축은 고갈되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고르바쵸프가 소련의 실패는 공산주의 이념의 결함 때문이 아니고 경제발전을 주도할 기업가 군을 만들지 못한 데 있었다고 개탄했다.
앞으로의 학생운동이 더이상 민주냐 반민주냐, 주사파냐 비 주사파냐를 외치거나 친통일이냐 반통일이냐로 구호를 바꾸면서 대중에게 호소하고 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는데 앞장서면 설수록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고 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는데 앞장서는 학생운동은 북한이나 중공에 이용당하는 운동으로 전락, 성공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주사파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눈에는 레닌이 말한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로 평가받을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그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국민들에게 필요가 없는 학생운동은 성공할 전망이 없다.
2000년대의 광우병시위나 2010년대의 촛불시위는 학생운동의 범주에 속하지 않고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 속에서 기획되고 실행되었다. 그 안에서 주도권을 잡은 주사파들이 문재인 정권탄생에 기여,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이 성공을 뒷받침할 논리와 철학의 빈곤으로 국민들의 지속적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아직도 주사파사고에 자기를 묶어 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역사의 폐품이다. 지금까지 한때 날렸던 수많은 학생운동가들이 역사의 폐품으로 사라진 것은 한때 반짝했다가 용도가 사라져버린 낡은 가치를 팽개치지 못하고 거기에 자신을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갱신없는,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사람도 짐승과 마찬가지로 도태된다. 역사의 폐품이 되는 것이다. 자기 존재가 역사의 쓰레기 통에 버려지는 존재가 되지않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3. 학생운동과 사관(史觀)문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념적인 대중운동에는 사관(史觀)문제가 따른다. 4.19혁명에는 불법부정선거를 바로잡자는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혁명목표설정의 이념적 좌표가 필요 없었다. 구태여 붙인다면 자유 민주주의 발전사관이라고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대중운동을 평가하는 역사의 명분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킨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그것을 비판하고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과의 싸움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거기에 실린 글들이 사관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이른바 민족사관 내지 통일사관을 전제로 역사를 본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기에는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면서 민족의 독립에 기여하는 것만이 우리 역사에 포섭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것을 흔히 민족사관으로 불렀다. 그러나 민족을 뭉뚱그러진 개념으로 보고 민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처지나 상황은 고려치 않고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개념이 포용하는 구호로서의 민족을 역사발전의 주체라고 보는 견해를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는 속칭 민족사관이라고 한다. 나치즘이나 파시즘도 이러한 민족사관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해방을 갈구하는 독립운동기에는 민족의 대의를 위하여 개개인의 생명을 초개같이 여길 수 있다는 식의 민족사관도 통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하나는 전체를 위한다는 논리 위에 세워진 민족사관은 존립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는 한, 민족의 독립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면서 민족독립을 완성할 통일에 도움이 되는 가치와 행동만이 우리 역사에 포섭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른바 통일사관이다. 여기서는 어떤 통일이냐는 묻지 않는다. 공산화라도 그것을 통일로 본다. 이 논리대로라면 북한 대남간첩은 통일투사로 변한다. 반면 소련의 위성정권으로 대한민국보다 2년 먼저 세워진 북한 공산당 단독정부에 맞서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반통일 정권이 된다. 쉽게 말해서 노무현이 말한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 안될 나라’로 되는 것이다.
이 논리를 한국현대사에 대입해보면 김구는 통일에 기여한 사람이고 이승만은 민족분열의 원흉으로 몰린다. 민족지상의 민족족사관이나 통일지상의 통일사관 공히 자유민주주통일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사관에 역행하는 반동(反動)역사관이다. 결국 “쓸모있는 바보”의 범주에 포함될 사관으로 평가해야 한다. 민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생명, 재산, 인권을 부정하는 사관은 그것이 민족사관이든 통일사관이든 모두 부정되어여 할 말장난이고 공산당의 대남파괴공작의 대행에 불과하다.
4. 결론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사회는 반정부투쟁을 주도하는 학생운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준 높은 지식과 정보는 전문인들의 수중에 있고 학생들에게는 우리 국민들이나 국가를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 지금은 전문인으로 고차원의 기술을 개발하거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갖는 지식인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그러나 지구촌이 탈냉전시대로 진입하면서 국가공동체의 균열과 파괴를 겨냥하는 허위와 괴담, 분열유도 심리전이 대두하고 있다. 전체주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 간에 진영대결이 가중되면서 SNS를 통한 심리전쟁, Hacking을 통한 심리전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자기가 포함된 공동체로서의 국가이익을 위해 능력과 지혜를 구사하고 필요한 발언을 하는 대학운동은 오히려 바람직하다. 나는 트루스 포럼이 바로 역사가 부여하는 이러한 작업에 앞장서고 있다고 평가한다. 큰 성취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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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의 4.19혁명의 회고와 반성(2)
이영일의 4.19혁명의 회고와 반성(2)
(당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58학번 이영일)
1. 들어가면서
지난 세월동안 나는 4.19 이야기를 외부강연에서 별로 한 일이 없었는데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나선 것은 옛날이야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대사에 관한 우리들의 역사의식을 올바로 정립해야겠다는 필요에서 여러분들과 생각을 나누기 위해 나왔다.
4.19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에는 우리 사회에는 두 개의 영향력 있는 사회의 신분(SOCIAL STATUS)집단이 있었다. 학생들과 군인들이다. 두 집단은 계급집단은 아니다. 경제적 이해관계로 맺어진 계급적 속성이 없기 때문에 사회계층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 사회적 신분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 두집단은 학습과 훈련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전달받으면서 졸업하거나 제대(除隊)한 후 사회의 계급집단으로 흡수되지만 그 이전의 학습과 훈련단계에 있을 때는 사회적 계급아닌 신분집단이라고 한다.
1960년대는 한국사회는 근대화를 향하여 변화가 태동되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사회계층 상 대학생들이 국가가 움직이는 흐름이나 정치동향, 지식과 정보를 선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 정치현실에 대해 민감한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갖는다. 특히 가정경제를 책임지지 않는 나이이기 때문에 불의와 부정을 보면 못 본 체하거나 가만있지를 못한다. 가정을 갖거나 가족부양책임을 지는 나이라면 불의를 보고도 못본 체하고 부정을 보고도 가능한 한 시비를 피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학생들일 때는 그렇지 않다.
1919년의 3.1운동, 6.10만세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사건 등을 학생들이 주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항거는 독립운동에 나선 기성세대들도 많았지만 국내에서 일어난 집단투쟁의 주체는 항상 학생들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국왕의 잘못이 발견되면 당시 최대의 지성인 집단인 유생들이 머리풀어 산발하고 덕수궁이나 돈화문 밖에 꿇어 앉아 연좌시위를 벌인 예는 허다하다.
당시 이들만이 국가와 사회를 이끄는 지식과 정보를 선점할 수 있는 집단들이었기 때문에 해방전에는 식민지조국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민주주의 시대에는 부정선거를 막아야 민주정치를 발전시킬 수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청년 학생들은 식민지 민족주의 운동시기에는 독립투쟁의 대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한국의 해방공간에서도 좌우익 간의 사상전쟁, 투쟁상황 속에서 청년 학생들의 참여도 많았고 그들의 희생도 엄청났다.
2. 한국사회와 민주발전
해방과 동시에 유엔감시자유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당시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민적 정체성이 확립되어 감에 따라 사상대립에 기인하는 학생운동도 거의 침잠해졌다. 전제군주정치나 총독부의 폭압정치가 사라지고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내손으로 국가지도자를 뽑는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이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민주질서를 기쁘게 수용했고 너나없이 공부와 연찬을 통해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한 경쟁에 매진했다. 또한 당시 한국사회는 산업혁명을 향한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경제발전의 중요성이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는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3.15부정선거가 터졌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라이벌인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암으로 사망함에 따라 무투표로 당선되었지만 전번 선거에서 부통령을 야당의 장면 씨에게 빼앗겼던 자유당 정권은 재5대부통령 선거에서만은 필승하겠다는 절박감에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미국은 정부통령을 같은 당이 공천하는 런닝메이트제이기 때문에 정부통령 선거를 따로 하지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제도상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기 따로 뽑기 때문에 제4대 부통령선거에서는 야당후보인 장면씨가 여당후보인 이기붕씨를 이겨 대통령과 당이 다른 부통령이 탄생했다. 대통령과 다른 당의 후보로 당선된 부통령은 직위만 있을 뿐 대통령이 유고가 아닌 한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지만 이 당시 여당이 개헌을 통하여 런닝메이트제를 실시했다면 부정선거 없이도 자유당 부통령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런닝메이트제로 선거제도를 고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은 지지하나 야당부통령이라도 선출해야 늙은 대통령에 대한 유고시 대비도 되고 정권교체의 준비세력으로서 야당이 존재한다는 것도 증명하기 때문에 당시 국민들의 법 감정은 런닝메이트 제를 선호하지않았다.
그러나 런닝메이트제를 실시했더라면 부정선거를 강행, 국민적 공분을 폭발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안가했을 것이다. 당시 여당 형편으로는 85세의 노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후계문제를 밝히지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궐위 시 후계권을 갖는 제5대 부통령만은 기필코 여당후보를 당선시켜야 후계대비가 된다는 절박감을 갖지않을 수 없었다.
3. 부정선거의 양상
선진민주국가에서도 선거에 불공정 시비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는 규모와 질 면에서 국민적 분노를 유발하였다. 군부대의 사전투표나 공개투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방에서는 사실상 공개투표를 강요했고 관권을 동원, 3인조, 4인조로 투표인단을 묶어 여당에 차질없이 투표하게 만들었다. 돈을 뿌리는 매표로서의 부정선거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을 앞세워 공공연히 행하면서 선거부정에 대한 일체의 항의를 경찰이 실력으로 저지하면서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경찰이 발사한 체류탄을 맞고 숨진 고등학생의 시신이 물에 떠오르는 사태발생은 전 국민의 분노에 점화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경제적 낙후성속에서 취업문제로 고민하면서도 세습군주제의 시대가 끝나고 내손으로 국가원수를 뽑는 정치민주화 시대의 도래를 환영한 터이기 때문에 조만간 경제난국이 풀리면 취업기회가 늘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도시지역을 제외한 전국각처에서 1인1표라는 민주주의의 최소의 권리마저 정권의 폭압으로 무너지고 힘없는 국민들은 경찰의 폭압에 눌려 저항조차 제대로 할 수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땅의 대학생들은 마치 새벽에 숯닭의 울음소리를 신호로 모든 닭들이 한꺼번에 울어대는 것처럼 약속이나 한 듯 전국 도처에서 반정부시위를 일으켰고 시위의 물결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4.19선언문에 나타난 대로 ”진리의 상아탑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 나온 것“이다. 자유당 정권의 파수군으로 변한 경찰은 시위를 실력 저지하려다가 발포,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때부터 학생시위는 혁명사태로 발전했다. 겁에 질린 경찰들은 경찰서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계엄령을 선포, 군인들이 진압에 나섰으나 시위군중들은 ”군인은 우리 편“이라면서 탱크에 올라타고 환호하자 계엄군은 더이상 시위진압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대학교수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프락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시위의 절정이었다.
4.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
당시 노령(老齡)으로 부정선거의 진상을 몰랐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대사와 주한 유엔군 사령관과 이들과 함께 경무대로 따라 들어온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게서 뒤늦게 진상보고를 받은 후 서울대학교 병원등 몇 개 병원을 방문, 부상당해 입원 중인 학생들을 위문하면서 불의를 보고 궐기할 줄 아는 대학생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나라의 장래가 안심된다면서 3.15부정선거를 무효라고 선언하고 이러한 사태를 미리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국민들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 후 하야했다. 제2차 대전후 신생 민주국가 중에서 독재자로 비판받던 지도자가 국민의 하야 요구를 수렴, 권자에서 스스로 물러난 예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 데 이승만 대통령만은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따랐다. 부정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새로운 선거를 통해 자기가 만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에 흠결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오늘날까지도 주권재민이라는 대한민국의 정체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비교정치학의 안목에서 보면 개헌으로 집권 기간을 연장한 대통령이긴 하지만 독재자로 정의되거나 매도될만한 허물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정적들이나 공산당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독재자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선동일 뿐 역사적, 볍률적 평가는 아니다. 어떻든 4.19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종결되고 7.29선거를 통하여 제5대 극회의원 선거를 통해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어 헌법을 대통령제에서 의원원내각제로 바꾸었다. 원내다수당인 된 민주당은 신구파로 나누어 내각수반인 국무총리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신구파로 분당했다. 신파의 대표로서 내각수반인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4.19혁명 이후의 정국안정과 새롭게 부과된 혁명과업을 수행해야할 운명을 맞게 되었다.
5. 혁명의 유발태가 된 민주당의 내각제정부
민주당이 4.19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실시된 7월 29일의 선거에서 압승한 것은 사실상 제1야당이 얻은 프레미엄이었다. 자유당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학생들의 응원으로 자유당정권타도에 성공한 혁명의 주체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1야당이었지만 자유당정권에 눌려 여당의 사상유례없는 부정건거에 대해 비판성명을 넘어서는 투쟁을 주도하지 않았고 정권을 교체해야겠다는 비전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다. 정구너은 굴러 떨어진 호박같았다. 정권타도에 앞장섰던 학생들은 학생운동이 갖는 역사적 한계성에 묶여 혁명정권을 수립할 수 없었다. 정권장악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고 의거라고 부르는 소이다. 그러나 학생의 피로 정권교체를 가져왔고 또 민주당 정권에게 학생들이 바랐던 혁명과업을 완수할 것을 요구하고 과업수행을 감시하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성공한 민주혁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는 세계혁명사를 계명군주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von Oben)인가, 무산계급인 민중이 주도하는 아래로 부터의 혁명(Revolution von Unten)으로 분류하는데 한국은 군주도 무산계급도 아닌 사회적 신분집단인 대학 지성인들이 주도한 점에서 측면으로부터의 혁명(Revoltion von Seiten)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견해는 외견상의 논리이고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1인당 국민소들 60달러의 조국을 하루속히 근대화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고 취업 공포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1960년대의 시대정신은 한마디로 근대화였다. 민주화는 근대화로 국력을 모아가는 수단적 의미, 절차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집권민주당의 비극은 신파, 구파로 갈라진 후부터 시작된 내분, 집권한 신파 내부에서 일어난 감투싸음으로 국민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던 것이다.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으면 부정선거책임자 부정축재자들에 대해 혁명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학생들과 국민들츠이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혁명적 요구를 비혁명적 방법, 그들이 말하는 민주적 방법으로 해결한다면서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국민적 기대에 부응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새 정부에 꿈과 희망을 갖도록 국가근대화의 비전과 정책을 내놓으면서 어려움을 함께 견디면서 국력배양이 국민들이 동참하도록 유도 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민주주의를 국가발전의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정권의 존립명분으로 알고 운영했다.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는 이러한 정권을 발길로 차버렸다. 민주주의는 국민들에게 밥을 주고 일자리를 주는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4.19직후의 혁명적 상황에서 민주당 정부는 민주주의를 수단 아닌 목적으로 삼고 상황에 대처하다가 붕괴되었다.
6. 군사쿠데타의 성공
민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 노출되자 정권을 장악할 사회적 신분집단으로서의 군인들이 쿠데타로 민주당 정부를 붕괴시켰다. 이들은 처음에는 3.15부정선거에 가담한 군장성들의 교체를 요구하는 정군(整軍)운동을 일으켰다. 청년장교들이 앞장선 정권운동은 그 자체로서 명분도 있고 국민적 공감도 얻었다. 그러나 장면정부는 이러한 요구도 제대로 수렴, 처리하지 못했다. 결국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쿠데타 세력이 궐기 정권을 쟁취했다. 군인들의 신속성, 효율성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군인들은 정치명분으로 반공, 부패청산 빈곤탈출을 구호로 내세웠다. 바꾸어 말하면 4.19주역들이 바랐던 근대화라는 시대정신을 명분으로 궐기한 것이다.
군인은 조선조이래 흔히 무식한 집단으로 얕보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은 미군 교관아래, 또 미국의 원조로 교육 훈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직관리와 조직운영관리 면에서 한국사회의 어느 집단보다도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선점했고 효율과 능력을 중시하는 리더십 훈련을 받고 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만해도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1년이상 교육연수를 받았고 군장교들도 고급장교일수록 영어에 능하고 미국에서 교육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점에서 당시 우리 군은 한국사회의 신분집단 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집단이었다. 미국군당국에서는 1960년 4월 월간 인문 시사종합지인 사상계(思想界)에 게재된 콜론아소시에이츠보고서를 통해 신생국에서 군대가 새로운 능력집단으로 국가근대화를 주도할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민간정부를 대체할 쿠데타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정부에서는 군부동향을 경시하거나 외면했다. 왜냐하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군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19혁명후 한국사회의 사상적 혼미, 무질서의 일상화, 가중되는 경제적 어려움, 계속되는 신구파 갈등과 집권층 내부에서 격화되는 권력싸움 등은 민주당 정권 스스로가 혁명의 유발태로 변했다. 이런 와중에서 쿠데타가 발생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올 것이 왔다“고 환호했고 4.19혁명을 주도했던 대학생들도 민주당정권을 올바른 혁명과업계승정권으로 보지않았기 때문에 묵시적으로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던 것이다.
7. 맺는말
4.19혁명과 5.16쿠데타는 한국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1년이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발생했는데 두 혁명 모두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성공했다. 전자가 정권쟁취라는목적을 갖지 않은 학생이라는 신분집단이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불의 부정의 독재 권력을 타도했다면 후자는 무능정권을 뒤엎고 권력을 장악, 국가근대화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국민들이 일견 대립되는 것 같은 구호를 표방한 두 사건을 똑같이 지지한 것은 두 사건 모두 혁명의 이유나 동기나 명분과는 관계없이 국가근대화를 통해 빈곤을 탈출하는데 기여하리라는 전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4.19혁명이 원했던 혁명목표를 정권을 장악한 군사쿠데타세력에 의해 혁명과업이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음을 교시한다. 개인적 경험이긴 하지만 5.16혁명을 젊은 장교집단을 이끌고 참여하여 쿠데타를 주도한 김종필씨는 나에게 학생들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군은 자유당정권을 타도하기위해 궐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말에 바로 응수했다. 학생이 아닌 군이 쿠데타로 등장했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하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군작전지휘권을 가진 주한민군과 제휴하여 불법 쿠데타를 저지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리더십이 약한 민주당 정부였기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응수했다. 결국 목적과 형식은 달랐지만 4.19와 5.16은 국가근대화를 위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정부“를 원하는 국민의 뜻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지지받았고 성공했다. 따라서 4.19와 5.16은 국민적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국가발전이라는 긴 역사의 맥락에서 일란성(一卵性) 쌍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상호대립 아닌 상호보완의 혁명으로 평해야 할 것이다.
[출처] 이영일의 4.19혁명의 회고와 반성(2)|작성자 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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