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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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이 땅에서 21세기 르네상스가 일어나기를 꿈꾸는 인문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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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 새로운 문명을 향하여.
<공자가 위나라에 갈 때 염유가 수레를 몰았다. 공자 말하기를, “백성들이 많구나.” 염유가 말하기를, “백성이 많아졌으면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부(富)하게 살도록 해야지”
“부하게 된다면 다음엔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교(敎)다.”
子適衛冉有僕 子曰庶矣哉 冉有曰旣庶矣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又何加焉 曰 敎之(13/9)>
‘물욕(物慾)은 끝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사람이 물욕이 생기는 것은 생존의 욕구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많이 가진 사람이 물욕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물욕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오랜 세월 부족한 재화를 둘러싼 대립·경쟁·투쟁 속에서 유전 인자 속에 각인되면서 물욕은 마치 사람의 타고난 속성처럼 보일 정도로 견고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결코 고정된 본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행복을 위한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물질적 궁핍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면서도 물욕(物慾)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은 없는 것이다. 물욕이 완고한 관념으로 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상태를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두 가지 굴레에서 함께 벗어날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 하나는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충분히 생산 공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욕이라는 완고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의 형편에 따라서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일차적인 테마로 되고 있는지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결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공자가 위나라의 형(荊)이라는 사람을 찬탄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상(理想)으로 그리는 인간상은 같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모아도 모아도 부족감을 느끼는 사람과 조금만 생겨도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은 누가 더 행복해지기 쉬운가 하는 것은 자명하다.
시유(始有)에 합(合), 소유(少有)에 완(完), 부유(富有)에 미(美)라고 표현한 것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되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에게는 맞는 것이다.
특출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정신적 성숙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無理)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이런 점을 명쾌하게 말한다. 우선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고, 그다음 정신의 성숙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 순서가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공자의 이 말은 사람들의 일반적 실태를 통찰한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 이 문장을 읽으면서 물질과 정신의 조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생존에 필요한 기본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물질적 조건이 선결과제로 되겠지요. 그런 사람에게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귀에 들리지 않겠지요.
-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정신적 성숙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30여 년간 세계가 놀라는 부국화(富國化)에 성공했습니다. 그 속도는 가히 세계신기록에 가까울 정도지요. 그리고 30-50클럽(1인당 GDP 3만불 이상, 인구 5천만 이상)에 일곱 번째로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의 행복도를 높이는 것으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국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헬조선을 이야기하고 있고(실제로 3포에서 5포 지금은 7포를 말하는 형편),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인 위기 국가로 되고 있습니다. 출산율 저하로 인구가 감소하고 지방이 소멸하는 현상은 선진국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과정이라는 점도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자랑스러워했던 경제발전의 그 속도가 위기의 국면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 그 위기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이겠지만, 아주 단순화하면 정신의 붕괴에 있다고 보입니다. 공동체 정신의 붕괴와 물질 위주의 전도된 행복관이지요.
- 그렇다고 가난하고 계급적 신분적 억압 속에 있던 과거의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지요. 가난에서 해방되고 집단주의로부터 해방된 개인들이 물신의 지배와 각자도생의 차가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정신 문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이제 생존 자체의 요구로 되고 있습니다.
- 나는 이것을 인문 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새로워진 객관적인 환경 즉 물질과 제도를 행복의 조건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죠.
-공자 시대는 물론 오랫동안 행복의 일차 조건은 부(富)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부(富)를 달성한 지금은 행복의 제1 조건이 교(敎)로 옮겨 왔습니다. 물론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부(富)가 일차적인 목표인 나라들이 훨씬 많습니다만, 한국을 비롯한 이른바 선진국들의 테마는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빈곤한 사회나 나라도 결코 선진국의 뒤를 따라서는 안 되겠지요.
- 공자가 말한 ‘교(敎)’를 가르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너무 좁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것을 ‘정신적 성숙’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 서양 근대화 과정에서 부르주아가 그 주역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부(富)’와 ‘교양(敎養)’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죠.
- 이제 ‘탈근대(脫近代)’는 인류가 생존하여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인류적 테마입니다. 근대(近代)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죠. 그 물질적 토대와 제도적 진보의 성과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포월(包越)하여 근대가 제기한 위기들을 넘어서는 것이죠.
- 예로부터 물질적 부(富)가 불행의 원인으로 되는 일은 개인의 역사나 집단의 역사 속에 많았지요. 그러나 지금처럼 인류라는 종(種)의 테마로 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그렇다고 오히려 가난할 때가 더 나았다는 말은 할 수 없지요. 이제 정신을 더욱 고양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 물질만 풍부해지면 행복한 사람은 이미 정신이 풍부한 사람이지요. 대체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이 필요합니다.
- 우리가 ‘인간화’라는 목표를 ‘산업화’나 ‘민주화’ 이후의 테마로 이야기했을 때, 그 인간화는 결국 이런 정신적 풍요를 그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 옳은 말씀입니다. 무엇이 ‘인간화’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행복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 그것은 지난 시기의 ‘산업화’ 다시 말하면 인간의 물질적 수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큰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즉 자연과의 모순이 발생한 것이지요. 우리가 말하는 인간화는 이런 모순을 시정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 되겠지요.
- 인간의 행복은 인간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지요. 그런 면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자연 생태계와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은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당연한 기조라고 생각해요.
[이남곡의 인문의 창] 시진핑 주석에게 드리는 글 (1)
아시아경제신문 게재 2016.10.06
시진핑(習近平) 주석님께!
저는 대한민국의 남쪽 전라도에 살고 있는 71세의 인문운동가입니다. 젊어서는 한 때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과 '실천론'을 읽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사상들을 진보적인 인문운동의 활구(活句)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논어는 인류 공통의 귀한 자산이며, 특히 현대 최대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상의 보고(寶庫)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배타적인 사상이나 종교와는 전혀 다른 문화의 뿌리입니다.
저는 과거 제국주의에 대항해 어깨를 나란히 싸웠던 때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ㆍ중 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인민의 연대가 진정한 세계화의 앞장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특히 대국인 중국의 역할이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패권국가가 아닌 대국의 출현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상징입니다. 저는 중국의 굴기에서 그 희망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세계열강 간의 '힘의 질서'를 어떻게 변화시켜 가는가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보다도 중국이 어떤 사회를 건설하는가가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중국은 세기적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논어'를 통해 이 새로운 실험에 관해 제가 받고 있는 느낌을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첫째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둘러싼 인간의 행복에 대한 공자의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견해가 어떻게 지금의 중국과 만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논어 13편 9장에서 공자는 1차적으로 부(富;물질적 수요의 충족)를, 그리고 그것이 교(敎;정신적 성숙)로 이어질 때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실 사회주의는 그 1차적 조건조차 달성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좌절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일정한 수준의 생산력(富)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의식이 사회주의라는 질이 다른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상태까지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자의 통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레닌 이후 많은 성급한 사회주의자들이 인간의 실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세계 자본주의는 보편적인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물질주의에 머물러, 비인간화와 양극화 그리고 자연생태계의 파괴라는 내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의 행복은 물론 인류의 존속 자체를 보장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부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정신이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공자는 인위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이 통찰하고, 그 교(敎)의 목표까지 제시하였습니다. 논어 1편 15장에서 교(敎)의 목표를 '빈이무첨(貧而無諂, 가난하면서도 비굴하지 않다) 부이무교(富而無驕,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다)' 정도면 어떠냐는 제자의 질문에 '빈이락(貧而樂,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다) 부이호례(富而好禮,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다)'라고 상향(上向)해서 답합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정곡(正鵠)을 뚫는 말로 다가옵니다. '빈이락'은 생태주의적 삶(simple life)에, '부이호례'는 자본주의를 보다 평등하고 따뜻한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데,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가장 잘 부합하는 목표입니다.
유럽 등의 일부 국가에서는 상당한 진보가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의 중심국가나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에는 물질주의(物神의 지배)를 극복할 이러한 의식혁명의 주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주목하는 것은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중국은 부(富)는 자본주의에 , 교(敎)는 중국공산당이 맡는 그야말로 획기적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은 민족해방과정과 건국과정에서 큰 힘을 비축한 세계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결사체입니다. 그러나 해방투쟁보다 더 어려운 것이 새로운 사회의 건설 과정입니다. 이것은 아마 시 주석께서 누구보다 잘 이해하실 분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지금 세계의 보편적 시스템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세계 인류의 보편적 의식과 욕구 수준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생산력을 발전시켜 인류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자본주의의 진보적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순이 이제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 자본주의를 새로운 시스템으로 연착륙 시키는 것이 세계 인류의 최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윤동기(탐욕으로 되기 쉬운)와 비인간적 경쟁을 넘어서는 동기에 의한 생산력의 확보가 필수 조건입니다.
논어 4편 15장에서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한다는 충(忠)과 서(恕)야말로 자타(自他)의 생명력을 최고로 실현할 수 있는 의식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이며 자율적이고 그 과정이 기쁨이어야 진짜입니다. 중국공산당이 이러한 동기를 인민의 앞장에 서서 체현하여, 생산력으로 전화(轉化)시킬 수 있다면, 그야말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이 종래의 권력기관이 가진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소강(小康)사회를 넘어 대동(大同)사회로 나아가는 인류의 오래된 이상을 실현하는 데 새로운 이정표를 인류사의 한 페이지에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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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亂世)를 극복할 정치를 진실로 원한다면, 먼저 철학(哲學)을 학습하라!
[난세(亂世)에 정치를 한다는 것.
난세에 살아남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난세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정치를 한다는 것.
그런 정치 주체라면, 개인이든 정당이든 ‘철학(哲學)’을 해야 한다.
이런 난세에 무슨 철학을 한단 말인가?
나는 반대로 이야기한다.
진정으로 난세를 넘어 새로운 길을 열어가려는 정치를 원한다면, 난세일수록 ‘철학’을 하라!
그것은 시간이 남으면 여유 부리는 양념이나 교양이나 선택과목이 아니다.
가장 우선순위로 시간을 배정할 ‘필수 과목’이다.
이 철학은 거리에서 만나는 ‘철학관’ 같은 것이나 실증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이 아니라, 시대를 읽고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명확하다. 난세를 넘어설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급할수록 철학하라!
2023년 3.1절 새벽 단상이다.]
<자로가 말하기를,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을 맞아들여 정치를 하게 된다면, 선생님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반드시 정명(正名)을 하겠다.” 자로가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선생님은 너무 먼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찌 명(名)을 먼저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
공자 말하기를, “유(由)야, 너는 생각이 참 얕구나. 군자는 모르는 일은 제쳐놓는 법이다. 명(名)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불순하고, 말이 불순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고,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면 백성은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명을 바로 하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실행하게 될 것이니, 군자는 그 말에 있어 조금도 구차함이 없다.”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奚其正 子曰 野哉由也 君子於其所不知蓋闕如也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無所苟而已矣(13/3)
- 그 유명한 정명론(正名論)이 여기서 나오는군요. 이 대화가 오고 간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당시 위나라의 영공이 죽고 손자인 첩(輒)이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그 아버지인 괴외(蒯聵)가 왕권을 둘러싼 전쟁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그 과정에 영공의 부인이었던 남자(南子)가 개입된 복잡한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나온 자로와의 대화라 ‘정명(正名)’을 왕권의 명분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서, 제경공과 공자의 대화에서 나오는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를 정명(正名)으로 보는 해석이 나옵니다.
- 물론 그런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나는 정명(正名)을 단순히 왕위를 둘러싼 투쟁에서 명분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공자의 진의(眞意)를 너무 좁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명론은 절대군주세습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되고 말아, H.G.크릴 같은 학자는 이 장(章)은 공자의 말이 아닌데 나중에 끼워 넣은 대표적인 위작(僞作)으로 보고 있습니다.
- 또 다른 면에서는 도덕경 1장에 나오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과 관련해서 공자의 생각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는 공자의 정명이 정명(定名)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자는 일관되게 어떤 개념을 단정적으로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공자의 정명(正名)도 노자의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공자의 정명에 대해 자로는 ‘그것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먼 생각’이 아니냐고 반문하지요.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난제들이 너무 많은데 한가하게 명분을 세우는 일이나 하고 있을 수 있느냐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공자는 단호한 어조로 자로를 나무라지요.
- 흔히 정명(正名)을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번역하고, 명분이라는 말이 형식적이거나 자기합리화 또는 반동적인 세력의 권력 유지와 결합하여 왔던 과거의 기억들이 연상되다 보니까 이 말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 그러나 그런 이미지를 떠나 그 말의 진의(眞意)를 찾아본다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풀어야 할 난제들이 너무 많을수록, 또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법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수록 먼저 할 일은 ‘시대정신을 올바로 실현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사상과 비전을 바로 세우는 일’이 아닐까요?
- 언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중국의 대장정 기간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철학을 학습할 것을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엄혹한 시기에 철학을 학습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라고 말하자 마오쩌둥은 ‘이런 시기야말로 철학을 학습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공자를 누구보다 더 비난 공격한 마오쩌둥이 나름대로 공자의 정명(正名)을 체득 응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오늘날은 과거의 진보니 보수니 하고 한 면 만을 강조하면서 서로 투쟁하고 대립하며 역사를 발전시켜온 그런 패러다임과는 질이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산적한 난제들, 서로 해결책이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문제들을 풀어나가 인류의 존속과 진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정명(正名)’이 절실한 것입니다.
- 정명(正名)을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인간 진화를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제도>, <다툼이 필요 없을 정도의 물질적 생산력>, <서로 양보하고 싶어지는 정도의 정신적 성숙> 등이 조화되어야 하겠지요.
-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등의 관점으로는 이에 대한 종합적 시각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것이 꼬이지요. 예컨대 물질적 생산력을 높이려면 사람들의 이기적 동기를 높여야 하고 따라서 불평등이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지요. 불평등이나 양극화를 해결하려 하면 이번에는 생산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과거의 시각으로는 여러 가지 관점을 봉합(縫合)하는 수밖에 없지요. 좌파 신자유주의 같은 단어가 그렇게 해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양쪽에서 비난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자기주장의 정합성(整合性)을 찾기 어렵습니다.
공자의 말로 하면 언(言)이 불순(不順)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言)이 불순(不順)하면 실행력을 갖기 어렵지요. 그 결과 양극화도 잡히지 않고, 생산력도 떨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문화(禮樂)가 제대로 발달하기 힘들고, 도덕이 붕괴되어 사람들이 법망(法網)을 피하기에 급급하게 되고, 대중들이 삶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게 되겠지요.
-일견 모순되게 보이는 요소들이 이제 상호보완적이며 인간 진화를 위한 길에서 함께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관점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종합철학일 것입니다.
민주화와 물질적 생산력의 진보 등은 과거에 비해 이런 종합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비할 수 없이 발전시켰습니다.
이 길에서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등의 고정 관념이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 이런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을 추구할 때 우리 시대의 정명(正名)이 가능할 것이고, 이것을 앞서서 이루는 곳이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게 될 것입니다.>
Chul Hyoung Lee
좋은 말씀 감사함으로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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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과 권력욕(탐욕)은 설득이 불가능하다.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하다.
망상ㆍ의심암귀ㆍ공포 ㆍ공격성은 탐욕을 불쏘시개로 결국 갈데까지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뻔히 보이는 망국의 길인데,
어쩌다가 나라가 이지경까지 왔는가?
이미 사라졌거나 의미 없어진 실재하지 않는 적들을 불러내어 죽기살기로 편갈라 싸우는 집단적 광기와 어리석음에 대한 각성이 파멸을 겪고나서야 때늦은 통탄으로 오지 않기를 바란다.
유혈 내전으로 번지지 않기만을 바란다.
반전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낡아 쓸모 없어진 허구의 진영을 벗어나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세력이 이 망국적 내전을 끝내기 위해 총궐기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고 싶다.
개헌과 선거라는 민주주의를 통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 난국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새 역사와 새 문명의 주체가 형성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나 자신도 그 일원이 될 것이다.
새롭게 형성되는 건강한 진영 간의 협동(연합)정치를 통해서 지정학의 저주를 넘어 웅비하는 대한민국과 한반도를 그리며.
·
오랫만에 체육 공원을 찾았다.
아직은 겨울 풍광.
여기저기 봄이 오는 감촉을 느끼며.
답답한 마음에서 챗지피티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역시 앞으로 인간이 개척해가면서 AI에 새로운 정보들을 입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새 정보들을 한국에서, 한반도에서 창조할 수는 없을까요?
우선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과 전혀 걸맞지 않은 퇴행적 내전부터 종식 시켜야 큰 길이 보이겠지요.
나; 인류라는 종의 여러 특성을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처럼.
이성과 도덕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지만, 전쟁으로 집단살육을 하는 데서 못 벗어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전쟁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있을까요?
쳇; 네, 인류의 호전성과 전쟁을 반복하는 특성을 나타내는 말로 **"호모 벨루스(Homo bellus)"**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Homo: 인간을 뜻하는 라틴어
Bellus: "전쟁"을 의미하는 라틴어 bellum에서 유래
즉, "전쟁하는 인간" 또는 *"전쟁의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비슷한 개념으로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Homo bellicus: bellicus는 "호전적인, 전쟁을 좋아하는"이라는 뜻이므로 "호전적인 인간" 정도의 의미
Homo pugnax: pugnax는 "싸움을 좋아하는, 전투적인"이라는 뜻으로 *"전투적인 인간"*을 의미
이 외에도 Homo hostilis(적대적인 인간) 같은 표현도 가능하지만, 가장 직관적인 표현은 Homo bellus나 Homo bellicus가 될 것 같습니다.
나;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는 샤르댕 신부의 오메가 포인트, 인류의 그리스도에로의 진화와 궤를 같이 하는데, 어떻게 호모 벨루스에서 벗어나는지가 현실적 테마 같은데요. 데우스에 끌리는 것보다 벨루스에 끌리는 이 실태를 어떻게 보시는지?
쳇; 鋒(칼날)과 聖(거룩함) 사이에서 인류는 늘 갈등해 왔죠.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신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여전히 호전성과 집단적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모 벨루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그 충동 자체가 사라진 적은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계몽주의 이후 인류는 이성을 통해 폭력을 억제하려 했고,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 없는 세계"를 꿈꾸었죠. 그러나 21세기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테크놀로지는 전쟁을 더 정교하고 치명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류가 *데우스(신적 존재)*를 지향한다고 해도, **벨루스(전쟁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있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국가 간 물리적 충돌에서 경제전, 사이버전, 문화전 등으로 모습을 바꿔가고 있는 것이 그 예죠.
결국 문제는 어떻게 '호모 벨루스'의 충동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입니다. 단순히 "전쟁을 없애자"는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공격성과 경쟁심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방안을 찾아야겠죠. 예를 들면 스포츠, 경제경쟁, 학문적 도전 같은 것들이 인류가 전쟁 충동을 덜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사례일 수 있습니다.
호모 벨루스에서 호모 데우스로의 전환이 정말 가능할까요?
아니면, 인류는 결국 '호모 벨루스 데우스'—즉, 신성을 갈망하면서도 폭력을 떨쳐내지 못하는 존재—로 남을까요?
이게 현실적인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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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아직 안 보이지만, 봄기운이 느껴지는 아가페 정원.
산책하는 사람을 딱 한 분 만났는데, 사진을 찍고 있어서 내 사진 한장 찍어 받았다.
행운.^^
답답한 마음에서 챗지피티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역시 앞으로 인간이 개척해가면서 AI에 새로운 정보들을 입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새 정보들을 한국에서, 한반도에서 창조할 수는 없을까요?
우선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과 전혀 걸맞지 않은 퇴행적 내전부터 종식 시켜야 큰 길이 보이겠지요.
나; 인류라는 종의 여러 특성을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처럼.
이성과 도덕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지만, 전쟁으로 집단살육을 하는 데서 못 벗어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전쟁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있을까요?
쳇; 네, 인류의 호전성과 전쟁을 반복하는 특성을 나타내는 말로 **"호모 벨루스(Homo bellus)"**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Homo: 인간을 뜻하는 라틴어
Bellus: "전쟁"을 의미하는 라틴어 bellum에서 유래
즉, "전쟁하는 인간" 또는 *"전쟁의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비슷한 개념으로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Homo bellicus: bellicus는 "호전적인, 전쟁을 좋아하는"이라는 뜻이므로 "호전적인 인간" 정도의 의미
Homo pugnax: pugnax는 "싸움을 좋아하는, 전투적인"이라는 뜻으로 *"전투적인 인간"*을 의미
이 외에도 Homo hostilis(적대적인 인간) 같은 표현도 가능하지만, 가장 직관적인 표현은 Homo bellus나 Homo bellicus가 될 것 같습니다.
나;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는 샤르댕 신부의 오메가 포인트, 인류의 그리스도에로의 진화와 궤를 같이 하는데, 어떻게 호모 벨루스에서 벗어나는지가 현실적 테마 같은데요. 데우스에 끌리는 것보다 벨루스에 끌리는 이 실태를 어떻게 보시는지?
쳇; 鋒(칼날)과 聖(거룩함) 사이에서 인류는 늘 갈등해 왔죠.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신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여전히 호전성과 집단적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모 벨루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그 충동 자체가 사라진 적은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계몽주의 이후 인류는 이성을 통해 폭력을 억제하려 했고,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 없는 세계"를 꿈꾸었죠. 그러나 21세기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테크놀로지는 전쟁을 더 정교하고 치명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류가 *데우스(신적 존재)*를 지향한다고 해도, **벨루스(전쟁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있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국가 간 물리적 충돌에서 경제전, 사이버전, 문화전 등으로 모습을 바꿔가고 있는 것이 그 예죠.
결국 문제는 어떻게 '호모 벨루스'의 충동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입니다. 단순히 "전쟁을 없애자"는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공격성과 경쟁심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방안을 찾아야겠죠. 예를 들면 스포츠, 경제경쟁, 학문적 도전 같은 것들이 인류가 전쟁 충동을 덜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사례일 수 있습니다.
호모 벨루스에서 호모 데우스로의 전환이 정말 가능할까요?
아니면, 인류는 결국 '호모 벨루스 데우스'—즉, 신성을 갈망하면서도 폭력을 떨쳐내지 못하는 존재—로 남을까요?
이게 현실적인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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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길을 행하는 사람을 얻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견(狂狷)’한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는 사람이다.”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실제로 중용의 길을 체득하여 실천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 길은 줏대가 없이 타협하거나 적당히 섞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봉합이 아니라 창조의 길이며, 진실한 힘이 필요하다.
대단히 성숙한 인격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관념으로는 추구해도 실행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런 사람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6/27)
그래서 그다음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광자나 견자라고 하는 공자의 이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광자(狂者)는 뜻은 높고 커서 진취적인 사람인데 그 뜻을 실천하기에는 아직 중용의 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고, 견자(狷者)는 비록 생각이 진취적으로 열려 있지 않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 지조(志操)가 있는 사람이다.
둘 다 중용의 덕을 실행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차선(次善)으로 같이 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으로 본 것이다.
지금으로 이야기한다면 광자(狂者)는 비록 넓게 세상을 담지는 못하여 현실적 실행력이 떨어지더라도 대단히 창조적이고 순수한 열정적인 진보주의자를 연상하게 되고, 견자(狷者)는 고집은 강한 편이지만 자신의 도덕적 신념이 체화(體化)된 부패할 수 없는 보수주의자를 연상케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은 중용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를 알기 어렵게 정치 현상과 정치 문화가 혼란스럽다.
제대로 정명(正名)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모난 그릇이 모나지 않으면 모난 그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모난 그릇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子曰 觚不觚 觚哉觚哉(6/23)
공자가 지금 이 땅에 온다면 그의 정치 노선은 제대로 된 진보와 제대로 된 보수의 연합정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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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인 2007년 경에 쓴 글입니다.
그 이 후 네 사람의 대통령이 출현했지만,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퇴행적 편가름이 심화되어 급기야 유사 내전 상태로 악화되었습니다.
곧 다가올지 모르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번만은 국민의 집단지성이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의지와 비전과 덕성을 갖춘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25 을사년이 대한민국 역사의 대전환점이 되게 하소서.
한반도에 영구 평화와 새로운 문명의 서광이 비추게 하소서.
지정학의 저주에서 벗어나 새 문명을 선도하는 중심국가가 되게 하소서.
<정공이 묻기를, “한마디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는데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 대답하기를, “한마디 말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사람들의 말에 ‘임금 노릇하기도 어렵고, 신하 노릇하기도 쉽지 않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 안다면 그 한마디가 나라를 흥하게 하는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나라를 망칠 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말 한마디로 그렇게 되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의 말에 ‘나는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고, 내가 말만 하면 아무도 나를 어기지 못하는 것이 좋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 말이 선하여 아무도 어기지 않는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그 말이 선하지 아니하여도 어기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한마디로 나라를 망치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定公問一言而可以興邦有諸 孔子對曰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爲君難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一言而喪邦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13/15)>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을 지낼 때의 임금인 정공과의 대화다.
사람들의 말을 빌려 ‘나라를 흥하게 하는 자’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역할)을 즐기는 자’와 ‘권세를 즐기는 자’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그것을 잘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면 그것은 나라를 흥하게 하는 위정자인 것이다.
반면에 자기 말을 사람들이 거스르지 않는 것을 즐기는 자, 즉 자기의 권세와 위력을 즐기는 위정자는 나라를 망치는 위정자인 것이다.
시대를 넘어 정치의 요체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공자의 시대보다는 현대에 와서 더욱 현실적인 테마로 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권세를 즐기는 위정자는 금방 심판을 받게 된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정치의 목적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으로부터 상생과 조화를 만들어내는 작용으로 변해가야 하는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동물계의 질서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정치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사람들의 의식이 그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옛날과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의식 특히 권력 지향적 정치인의 의식은 그 제도의 변화에 비해 낡은 욕구나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지도자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선거에 의해 국민이 선택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시점에서 국민이 판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민이 선택의 안목을 더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위정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자질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길이다.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드는 길이다.
공자가 생각하는 좋은 위정자는 남을 지배하려는 위력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 아집이 없이 상하가 소통하면서 정치 본연의 역할을 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위정자상(爲政者像)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본격적인 대권(大權)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자천 타천으로 그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사람들은 ‘나는 왜 대통령이 되고 싶은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국민들도 여러 가지 판단기준으로 선택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대권주자들이 이 물음에 얼마나 진지한가를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아서 그것을 판별하는 안목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른바 이것이 ‘진정성’인 것이다.
얼마 전에 지금의 대통령이 ‘대통령 노릇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이 공자가 말한 지위군지난(知爲君之難)과 통하는 것이라면 훌륭한 위정자의 품성을 표현하는 말로 들린다.
그런 의미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만일 자기 말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것은 좀 생각해 볼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정자의 가장 큰 덕목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나 집단들과 소통할 수 있는 품성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유약한 지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진정한 권위나 진정한 힘을 가진 위정자로 되는 것이다. ‘대통령 노릇의 힘듦’을 아는 것은 그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정치의 목적이 권력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행복 증진이라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집이나 지배욕이 강한 사람은 지도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시대로 점점 가고 있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민도가 높아지면 이런 지도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하나의 표지(標識)다.
아집이나 독선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자유로울수록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힘을 갖게 된다. 공자가 일관되게 자기를 바르게 한다(正其身)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힘이 들 수는 있지만 이런 태도를 일관성 있게 견지한다면 그 역할은 그 자신에게도 진정한 보람(樂)을 선물할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 역할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지도자를 대망(待望)한다.
==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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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길을 행하는 사람을 얻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견(狂狷)’한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는 사람이다.”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실제로 중용의 길을 체득하여 실천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 길은 줏대가 없이 타협하거나 적당히 섞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봉합이 아니라 창조의 길이며, 진실한 힘이 필요하다.
대단히 성숙한 인격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관념으로는 추구해도 실행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런 사람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6/27)
그래서 그다음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광자나 견자라고 하는 공자의 이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광자(狂者)는 뜻은 높고 커서 진취적인 사람인데 그 뜻을 실천하기에는 아직 중용의 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고, 견자(狷者)는 비록 생각이 진취적으로 열려 있지 않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 지조(志操)가 있는 사람이다.
둘 다 중용의 덕을 실행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차선(次善)으로 같이 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으로 본 것이다.
지금으로 이야기한다면 광자(狂者)는 비록 넓게 세상을 담지는 못하여 현실적 실행력이 떨어지더라도 대단히 창조적이고 순수한 열정적인 진보주의자를 연상하게 되고, 견자(狷者)는 고집은 강한 편이지만 자신의 도덕적 신념이 체화(體化)된 부패할 수 없는 보수주의자를 연상케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은 중용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를 알기 어렵게 정치 현상과 정치 문화가 혼란스럽다.
제대로 정명(正名)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모난 그릇이 모나지 않으면 모난 그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모난 그릇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子曰 觚不觚 觚哉觚哉(6/23)
공자가 지금 이 땅에 온다면 그의 정치 노선은 제대로 된 진보와 제대로 된 보수의 연합정치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인 2007년 경에 쓴 글입니다. 그 이 후 네 사람의 대통령이 출현했지만,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퇴행적 편가름이 심화되어 급기야 유사 내전 상태로 악화되었습니다.
곧 다가올지 모르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번만은 국민의 집단지성이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의지와 비전과 덕성을 갖춘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25 을사년이 대한민국 역사의 대전환점이 되게 하소서.
한반도에 영구 평화와 새로운 문명의 서광이 비추게 하소서.
지정학의 저주에서 벗어나 새 문명을 선도하는 중심국가가 되게 하소서.
<정공이 묻기를, “한마디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는데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 대답하기를, “한마디 말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사람들의 말에 ‘임금 노릇하기도 어렵고, 신하 노릇하기도 쉽지 않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 안다면 그 한마디가 나라를 흥하게 하는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나라를 망칠 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말 한마디로 그렇게 되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의 말에 ‘나는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고, 내가 말만 하면 아무도 나를 어기지 못하는 것이 좋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 말이 선하여 아무도 어기지 않는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그 말이 선하지 아니하여도 어기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한마디로 나라를 망치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定公問一言而可以興邦有諸 孔子對曰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爲君難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一言而喪邦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13/15)>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을 지낼 때의 임금인 정공과의 대화다.
사람들의 말을 빌려 ‘나라를 흥하게 하는 자’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역할)을 즐기는 자’와 ‘권세를 즐기는 자’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그것을 잘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면 그것은 나라를 흥하게 하는 위정자인 것이다.
반면에 자기 말을 사람들이 거스르지 않는 것을 즐기는 자, 즉 자기의 권세와 위력을 즐기는 위정자는 나라를 망치는 위정자인 것이다.
시대를 넘어 정치의 요체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공자의 시대보다는 현대에 와서 더욱 현실적인 테마로 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권세를 즐기는 위정자는 금방 심판을 받게 된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정치의 목적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으로부터 상생과 조화를 만들어내는 작용으로 변해가야 하는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동물계의 질서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정치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사람들의 의식이 그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옛날과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의식 특히 권력 지향적 정치인의 의식은 그 제도의 변화에 비해 낡은 욕구나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지도자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선거에 의해 국민이 선택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시점에서 국민이 판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민이 선택의 안목을 더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위정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자질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길이다.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드는 길이다.
공자가 생각하는 좋은 위정자는 남을 지배하려는 위력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 아집이 없이 상하가 소통하면서 정치 본연의 역할을 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위정자상(爲政者像)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본격적인 대권(大權)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자천 타천으로 그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사람들은 ‘나는 왜 대통령이 되고 싶은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국민들도 여러 가지 판단기준으로 선택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대권주자들이 이 물음에 얼마나 진지한가를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아서 그것을 판별하는 안목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른바 이것이 ‘진정성’인 것이다.
얼마 전에 지금의 대통령이 ‘대통령 노릇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이 공자가 말한 지위군지난(知爲君之難)과 통하는 것이라면 훌륭한 위정자의 품성을 표현하는 말로 들린다.
그런 의미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만일 자기 말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것은 좀 생각해 볼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정자의 가장 큰 덕목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나 집단들과 소통할 수 있는 품성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유약한 지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진정한 권위나 진정한 힘을 가진 위정자로 되는 것이다. ‘대통령 노릇의 힘듦’을 아는 것은 그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정치의 목적이 권력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행복 증진이라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집이나 지배욕이 강한 사람은 지도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시대로 점점 가고 있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민도가 높아지면 이런 지도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하나의 표지(標識)다.
아집이나 독선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자유로울수록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힘을 갖게 된다. 공자가 일관되게 자기를 바르게 한다(正其身)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힘이 들 수는 있지만 이런 태도를 일관성 있게 견지한다면 그 역할은 그 자신에게도 진정한 보람(樂)을 선물할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 역할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지도자를 대망(待望)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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