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4

일제시대 금광열풍

일제시대 금광열풍 : 네이버 블로그

일제강점기

일제시대 금광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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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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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현재 온 국토가 파헤쳐지고 있다원전을 정지시키고 그것을 대치하기 위해서 태양광팬널을 

설치하기 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논밭은 말할 것도 없고 지붕위나 공터만 있으면 태양관 페널이 

어김없이 덮인다육지가 모자르다 보니 저수지의 수면위까지 페널을 설치하며 태양광 열풍때문에 

온 국토가 모두 들썩이고 있다.



 - 산과 산비탈을 깎아 태양광으로 뒤덮고 있다

 - 해남의 솔라파크, 전라도 지역은 농지를 전부 이렇게 바꾸고 있다.



 - 그것도 모자라 물위까지 태양광 펜널이 덮이고 있다.

 

마치 일제시대 후반였던 1930년대에 조선8도를 휩쓸었던 금광열풍이 태양광열풍으로 

재연된다는 생각이다.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일제시대는 일본의 잔혹한 탄압과 수탈의 역사였다고 말하며전세계의 어떤 

민족도 겪어보지 못한 악날한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통해 한국으로 

부터 많은 자원물자문화재등을 수탈했다고 하는데그렇게 언급되는 단골 품목은 쌀목재(), 

금광문화재, 탄광노동자, 위안부 등등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전부 말한다쌀을 모두 수탈해

가서 한국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 만주로 이주했고목재를 모두 수탈해서 한국의 산천이 

민둥산이 되었으며매년 수만 두의 소를 수탈해서 150만 두가 넘는 품질 좋은 한국소를 일본으로 

반출하는 바람에 한국토종 소의 씨가 말랐고도굴을 해서 한국의 문화재를 모두 훔쳐갔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일제의 '금수탈' 이다금광에 대한 일제시대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동안 

신문보도를 통해 현실이 어떠했는지 많은 부분이 알려졌지만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일본이 

한국의 금광을 독식해서 금을 모두 수탈했다고 말한다마치 요시다세이지의 나의 전쟁범죄’ 에서 

200여명의 제주도처녀를 강제로 납치했다는 거짓보도가 가짜로 판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아직도 일본군이 한국처녀 수만명을 강제로 납치해서 위안부로 착취했는 것을 믿는 

것과 같다.

 

이 글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금을 모두 수탈했다는 말을 들으며과연 수탈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고

한국에서는 수탈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사실과 비교하며 생각해 보려한다.

 

우선 수탈 收奪의 사전적 의미는 네이버에서는 강제로 빼앗음’ 이라고 정의하고 비슷한 말로는 

약탈과 착취를 들고 있다정상적인 교환이 아니고 강자가 무력이나 무기를 사용해 약자로 부터 

강제로 재화를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이 말에 의하면 한국에 있는 금과 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금을 일본인들이 무력을 사용해 강제로 

빼았아 갔다는 것인데과연 이것이 사실인지 일제시대에 발행된 신문과 당시의 소설 등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서 확인해 보기로 한다.

 

 



- 1930년대 한반도의 골드러시 


골드러시’ 라고 하면 1850년대 중반 미국의 켈리포니아를 떠올리게 되지만이런 황금열풍이 

일제시대 말기인 1930년대 한반도를 휩쓸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30년대 식민지 시기 조선에도 골드러시가 있었다. 1930년대 조선은 ‘황금광 시대’였다

1934 8월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에는  “수 삼 년 내로 금광열이 부쩍 늘기도 하였거니와 

금광 때문에 졸부가 된 사람도 훨씬 많아졌다그래서 웬간한 양복쟁이로 금광꾼 아닌 사람이 

별로 없고또 예전에는 금전꾼이라 하면 미친놈으로 알았으나 지금은 금광 아니하는 사람을 

미친놈으로 부르리만치 되었다.”

 

당시 금광열풍은 숫자로 봐야 실감이 난다

   

   1933년 통계수치

개발광산 숫자 - 5025개소 (한 도당 250개의 금광이 개발됨)

개발출원 건수 – 5972(1934년 개발예정)

                               5813(1935년 개발예정)

                               [* 1년에 5-6000개의 새로운 금광이 문을 열었다]


      - 조선일보 1931.01.07 연휴 후 총독부광산과 금광출원인파


  기타사항

          금 생산량 매년 50% 증가

          1939 31톤으로 최고점

          조선총독부 광산과 공무원 2명 과로사

          전국에 무허가 광산 난립

   [*허가받은 광산이 1930년대에 35,000곳 정도이고, 무허가를 합치면 4만개가 훨씬 넘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광목과에는 금광개발건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실제 개발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일단 확보해놓고 비싸게 팔겠다는 투기심의 발로였다.

 

[박기주 교수-성신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금값이 몇년사이에 3배로 오릅니다 5년사이에

그건  다른 물가는 정체하고 있는데 금값만 뛰어오른다고 생각해보세요집값이 3배로 

오른다고 생각해보세요 뛰어들죠."

 

금광열풍이 도를 넘으면서 세간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도 일어난다도둑은 멀쩡한 금니를 뽑아 

도망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황금부족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어갔다.

식칼들고 침입했으나 현금이라고는 74전 밖에 없었으므로 주인의 금니 네 개, 시가 60여 원어치 

뽑아 도주했던 것이다. - 동아일보, 1933.12.3 -


                    - 조선일보 황금광시대 시대상






- 금광열풍의 배경 


이렇게 1930년대 조선 금광열풍이 일어나게 된 배후에는 일본 군부의 산금정책이 있었는데

당시 일본은 세계 경제가 금본위제이던 당시 금이 있어야 자신들이 필요한 군부의 무기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조선총독부는 대대적인 산금정책을 세웠고금광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생산된 금은 고가에 매입했다그래서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수확한 금을 중국등에 

유출하지 않고 전부를 고가에 매입하는 총독부에 팔게된다. 

[* 참고자료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다>(작가정신), <황금광시대>(살림)

   2011.09.20ㅣ주간경향 942  [특집인간 욕망의 아이콘]

 



- 금광에 빠진 사람들


금광으로 돈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옆에서 금광으로 돈벌었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보게되니 

노동자농민자본가는 물론 의사와 변호사전향한 사회주의자까지 금광을 찾아 산골을 헤매게 

되었다.


일제시대 대표적 지식인이며 작가인 채만식도 글쓰는 대신 금을 찾아나선 적이 있었는 데

친형과 함께 큰 돈만 날리고 꿈을 접었다그 후 채만식은 글쟁이조차 금광으로 내몰았던 

시대의 일그러진 초상을 수필 ‘금과 문학’(1940)에 담으며 사람들이 황금의 노예가 되어가는 

세태를 뼈아프게 받아들였다.


도적놈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돈 때문이요.

이수탁이 살부공판을 받는 것도 돈 때문이다.

돈, 황금 얼마나 좋은 것이냐 얼마나 위력이 있는 괴물이냐

그리하여 세상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돈을 부르짖는다.

- 채만식, 황금무용론 1933.2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산파인 팔봉 김기진은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1933 1월 금광재벌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황금왕 방응모와 같이 일할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스스로 신문사를 차리겠다던 그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뛰어든 곳은 금광사업

이었다그는 이듬해 평남 안주로 갔다낮에는 광부들과 금을 캐고밤에는 ‘청년 김옥균’ 

장덕대’ 같은 작품을 쓰는 고된 생활을 보냈다.

[출처]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 황금광 시대 - 역사스페셜|작성자 JULI

 




- 금광주제 시대소설


김유정의 ‘금따는 콩밭’(1935), 채만식의 ‘금의 정열’(1938), 이태준의 ‘영월영감’(1939) 등 당시 

소설과 신문·잡지 기사는 금광열풍을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금광 열풍을 주제로 한 이 시기 작품들은 황금을 향한 한국인들의 집념이 얼마나 집요한 것이

었는지또한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김남천의 <미담>에서는 아내와 

며느리에게 함지를 지워주고 집에서 노느니 강바닥 모래라도 일궈 몇 톨이라도 사금을 찾아오라고 

등 떠미는 고약한 가장이박노갑의 <>에서는 아버지가 키우던 채 영글지도 않은 보리를 밭 째 

팔아먹고 금광하러 내뺀 후레자식이김유정의 <>에서는 삼엄한 감시를 뚫고 광구 안의 노다지를 

빼돌리려고 멀쩡한 다리를 작살내는 광부가이태준의 <영월영감>에서는 금광 한답시고 전답이며 

가산을 탕진하고 결국에는 광산사고로 병상에서 쓸쓸히 죽어가면서도 노다지가 났다는 조카의 

거짓말에 행복한 임종을 맞게 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금광소설의 무대다시 말해 금광 열풍에 부화뇌동하는 주인공들의 금을 캐던 장소는 무척이나 

다채로웠다황금광들은 다이너마이트로 돌산을 깨서 금맥을 찾기도 했고시냇가나 개천바닥을 

뒤져 사금을 건져 올리기도 했으며멀쩡한 논을 갈아엎어 곡식대신 금을 건져 올리기도 했다.

 

방인희의 단편 <황금광 시대> 1934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이다. 3등 당선작은 

옥혈천의 <금광>이었다같은 신문에 다음해 가작으로 당선된 작품이 김유정의 <노다지>였으니

바야흐로 황금광시대는 젊은 예술가들의 상상력 속에서도 화려하게 꽃피고 있었다.

 

방인희의 <황금광 시대>는 황금광 시대의 농촌 퐁경과 농사짓던 밭을 파헤치고 곡식대신 금을 

찾으려 했던 농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이었다.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 보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오백원에 팔려 나갔다가 도망하려는 것을 알게 된 그 청년은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금광을 해가지고 번 돈을 가지고 달려와서 그자의 앞에 내어 던지니 포주는 어리둥절

하고 있을 새그 청년과 애인은 둘이서 빨리 그곳을 나온지라...”

 

동네 사람들은 금광을 해가며 사창가로 팔려간 애인을 구한 청년의 이야기를 넋이 빠져라 들었다

순복도 물론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때는 바야흐로 황금광 시대였던 것이다청년의 사랑과 행운을 

놓고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날 밤 복덕방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금광 이야기로 옮겨졌다이 이야기 

저 이야기 오가는 가운데한 구석에 앉아 조용히 짚신을 삼던 사람이 최주사네 논이 금광으로 개발

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여 유랑골도 금이 꽤 많이 묻혔다는데 그래서 여 정주사네 논이 있는 개울가에는 아주 허가를 맡아

가지고서 한 자리씩 팔기도 하고 모레부텀은 자기네두 판다는걸.”농촌에 찾아온 금광열풍은 이런 

모습이었다논바닥에 내뒹굴던 돌멩이 하나 들고 광무소로 찾아가 성분 분석을 맡겨 금가루가 조금이나마 섞여 있으면 농사고 뭐고 다 치워버리고출원하여 금광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금이 제법 

나올 만한 곳은 자신이 직접 경영하고돈만 잡아먹을 것 같은 시원찮은 곳은 분광이라 하여 개발권의 일부를 양도했다유랑골 정주사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금광을 차렸던 것이다.

금값은 하루가 다르게 ‘파충하게’ 오르고여기저기 금광을 차려서 부자가 됐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는 이때화투장잡고 하루하루를 죽이는 대신 삽자루를 쥐고 금광을 해 볼 결심을 한 순복은 진정 성실한 사람이었다


황금을 향한 욕망은 절제되는 법이 없다도박으로 돈 벌어 생활수준을 높였다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먹고 사는데 아쉽지 않을 만큼 적당히 돈 벌었다는 투기꾼들을 본적이 있는가.

1930년대 황금광들도 금을 캐서 번 돈으로 대부분 금을 캐다 날렸다한때나마 금광으로 짭잘한 이익을 본 사람들도 결국은 가진 밑천 다 들어먹고빚을 지고 빚을 지고재기 불능 상태에 이를 때까지 금광 주위를 서성였다.


순복도 그랬다이대로 허무하게 과거의 구질구질한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에라 빌어먹을 놈에게본래 없는 놈이 망하면 얼마나 망하겠나. 살던 집까지 팔아서 “되면 되고 말려면 말아라. 는 심정으로 또 다시 땅을 파보았다그러나 역시 금은 나오지 않았다아내의 ‘세루치마’는커녕살던 집에서 쫓겨나 당장에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참담한 결과였다.



이렇게 조선의 신문,잡지는 금광을 주제로 한 기사와 소설이 뒤덮었고, 신춘문예에 당선된 모든

작품들 또한 금광 소재 뿐이었다. 이렇게 한가지 사건에 모든 국민이 과도하게  몰입되어 버리는 

상황은 21세기에도 흔히 보는 광경인데, 일제시대에도 이런 상황은 벌어졌고,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일은 벌어졌었다. 





- 금광재벌 


최창학-  ‘금광왕’ ‘황금귀(黃金鬼)’로 불리며 1940년대 서울에서 가장 호화롭던 개인저택 

경교장’(종로구 평동)의 원주인.

최고급 저택 한 채 값과 맞먹는 18,000원짜리 뷰익 리무진 승용차를 몰고 다니던 

최창학은 일제 말기 육군에 비행기 8대를 헌납하기도 했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자금 요청을 거절하다 광복이 되자 불이익을 피하려 이 집을 김구 선생에게 기증했다.

 

문명기- 1935년 사비로 전투기 2대를 구입해 조선총독부에 헌납한 인물일제는 이 전투기를 

          ‘문명기호’라 명명했다.

 

정명선- 1954년 당선된 제3대 자유당 국회의원국회에 금을 기부하며 “의원 배지를 금으로 

          만들자”고 제안해 금배지를 탄생시켰다.

 

방응모 - 2의 금광왕으로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계초 방응모를 손꼽는다동아일보 

지국장으로도 일했던 방응모는 마흔 살이던 1924년 금을 찾아 평안북도 교동금광에 

들어갔다가 3년 만에 금맥을 찾아내 조선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올랐다계초는 금광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장학회를 만들어 백석김기림 등의 일본 유학비를 댔고한용운을 위해 

성북동의 ‘심우장’을 말년의 안식처로 내줬다방응모는 벌 만큼 벌었을 때 전 재산을 

기울여 영리사업에 힘썼다. 현재의 조선일보도 일제시대 금광의 소산인 것이다.


 

 

- 황금광 시대의 승자


일본은 황금광 열풍을 일으켜 조선인들로 하여금 온 조선국토를 파헤쳐 금을 채굴하고 그것을 

국제시세 보다 높은 고가에 사들였다하지만 미국은 힘안들이고 운산금광에서 많은 금을 

채굴하고 생산량이 떨어질 즈음 금광을 일본에게 팔고 나가게 된다.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는 운산금광은 2위보다 산금액이 10배나 많은 동양 최대의 금광이었

당시 세계 2위의 생산량을 보였.

 

 
 - 운산금광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노동자들, 구한말          - 운산광산 전경 




"아국(我國산금액(産金額)은 재작년에 500여만 환이요작년에 600여만 환인데산액의 최다한 

자는 운산(雲山)금광이니 매년 약 300만 환을 산출하고그 다음은 순안(順安)금광이니 매년 

 30만 환을 산출한다더라."('황성신문', 1910. 2. 20.)

 

운산금광은 고종이 갑신정변때 중상을 입었던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했던 의료선교사 알렌에게 

10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운산금광 개발권을 주었지만현직 외교관 

신분으로 직접 이권 사업에 나설 수 없어 무역상 모스와 광산개발전문가 헌트(L.S. Hunt)를 내세웠다.

헌트는 뉴욕에 본사를 둔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를 설립하고 

1897년 본격적인 개발에 나선다

당시 고종은 동양광업의 주식을 25%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헌트는 1899년 고종에게 10만달러를

제시하자, 고종은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모두 헌트에게 양도한다. 그리고 계약기간을 25년으로 연장

하는 조건으로 생산량에 상관없이 매년 $12,000를 받기로 한다. 그 후 고종은 두 차례 계약기간을 더

연장해줘 1954년까지 늘어났다

헌트(L.S. Hunt)가 운영하는 동양광업 1903년부터 이익 배당을 시작했다. 12.5%의 배당률로 지급된 

첫해 배당금만 533000달러만약 고종이 지분을 양도하지 않았으면첫해에 133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종은 1년 배당금보다 적은 돈으로 지분을 모조리 넘긴 셈이었다

주식회사의 주주제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눈앞에 보이는 10만달러에 모든 것을 넘긴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동양광업은 매년 100만달러 이상의 금을 생산했고 1달러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1903년부터 

1938년까지 36년간 매년 10% 이상의 고율의 배당을 실시했고배당금 총액은 투자금의 3배에 

육박하는 1467만여달러에 달했다.

이렇게 헐값으로 운산금광을 넘긴 고종은 받은 돈으로 제일 먼저 리무진을 사서 타고 다니고 커피 

마시고 쵸코렛 먹는 생활을 즐겼다.  

 

일본이 만주국을 침략하면서 미일관계가 악화되었고 미국은 일본의 군비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고철금수조치를 하면서 전쟁준비에 필요한 금의 수요가 없어지게 되자 조선에서 일어났던 

노다지광산의 광풍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동양광업은 일본의 운산광산을 

차지하려는 집요한 공격과 생산량이 급감하게 되자 1939년 일본광업에 800만달러를 받고 

운산금광의 권리 일체를 양도하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이렇게 조선반도의 황금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하지만 힘안들이고 가장 많이 조선의 

황금을 차지한 사람들은 고종의 어리석음의 덕을 본 미국이었다한국에서는 일본이 모두 수탈

했다고 하지만 고종의 봉사활동으로 한국황금을 합법적으로 모두 미국이 수주해 갔고, 일본은 늘 

그렇듯이 필요에 의해 국제시세 보다 높은 고가로 한국사람에게서 사갔지만강제로 수탈했다고 

모든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하겠다. 



한껏 투기로 치닫았던 조선의 골드러쉬는 1941년을 기점으로 막을 내린다.

민족의 독립 요구보다 근대화의 열망보다 더 뜨거웠을지도 모르는 조선인의 황금 열풍그것은 

결국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제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식민지 조선에서의 

골드러쉬는 막대한 금이 필요했던 일제의 수탈정책과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했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열망이 맞물리면서 탄생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황금만능주의와 일제 식민지 정책을 

경계했던 지식인들마저도 폭주기관차의 편승했던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열병이 얼마나 깊었던 

것인가 다시 한번 짐작해볼 수 있다. ‘ 

          [일제강점기식민지 조선 황금광 시대 - 역사스페셜|작성자 JULI

 




- 금광을 수탈당했나?


이렇게 금을 수탈했다고 하면 돈을 안주고 빼았아 간 것을 의미하지만일본은 틀림없이 

조선인의 금을 국제싯가 이상으로 고가에 매입을 했고, 미국은 합법적인 권리를 고종으로 

부터 부여받아 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모든 돈을 챙겼다. 한국사람들 목에 총칼을 들이대고 

금덩이를 빼았아가는 방식의 수탈을 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받았어도 금을 가져가지 말았어야 수탈이 안되는 것이 일제시대를 보는 

한국식 셈법이라는 것이다일제는 2차대전 말기에 전쟁이 막바지에 달해서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도 놋쇠를 공출할때 동네마다 저울을 가지고 다니며 무게를 달아서 돈을 주고 

매입을 했지만한국사람은 돈을 받았어도 물건을 가져갔으면 모든 것을 수탈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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