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3

56년 만에 남에서 출간한 북한 고조선 연구의 고전 - 오마이뉴스

56년 만에 남에서 출간한 북한 고조선 연구의 고전 - 오마이뉴스


18.10.24 14:56ㅣ최종 업데이트 18.10.24 14:56
56년 만에 남에서 출간한 북한 고조선 연구의 고전
신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김수지(soom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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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자 리지린이 쓴 <고조선 연구>가 한가람역사문화 연구소장 이덕일 해역으로 출간되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이자 <영조와 사도> 저자이고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해설'을 강연하기도 한 나는, 이번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교열 작업에도 참여했다. 남쪽에서 이미 출간된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1995년 초판)와 제목이 같기 때문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북한에서는 1962년 출간되었고, 남한에서는 1989년에 영인본이 나왔는데, 구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용문이 번역문 없이 한문 사료 그대로 실려 있어서 일반 독자가 읽기 어려웠다.

이번에 이덕일 박사가 모든 한문 사료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후 해제까지 달았기 때문에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인지라 때맞춰 나온 중요한 책이라 하겠다.

<고조선 연구> 발표 뒤 북에서 정설이 된 대륙고조선설


▲1961년 북경대 박사논문으로 통과된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리지린은 이 책에서 일제식민사학자는 물론 봉건사학자의 사관을 비판함은 물론 중국의 사가들도 대국주의, 중화주의라 비판하면서 주체적인 사관 아래 고조선 역사를 재구성했다. ⓒ 도서출판 말관련사진보기
이 책의 저자 리지린은 북한의 과학원 력사연구소 고대사연구실에서 일하다 1958년 북경대 대학원에 들어간다. 지도교수인 고사변학파 고힐강(顧詰剛)과 학문적 견해가 달랐음에도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재요동설'을 토대로 연구를 계속해서 1961년 6월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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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도 해방 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1962년 이 책 <고조선 연구>가 간행되면서 북한학계에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추었고,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이 주류의 견해가 되었다. 장장 15년에 걸친 논쟁의 결과였다. 현재 남한 학계 일각에서는 북한 학계가 리지린의 학설을 완전히 폐기시켰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북한의 <조선전사>는 고조선의 서쪽 강역에 대해 리지린이 주장한 난하설 및 대릉하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해방 후 평양에서 근 3천여 기에 달하는 고분을 발굴해 한사군 낙랑군의 무덤이 아니라 위만 조선 이후 등장한 낙랑국(최리의 낙랑국, 일반인들에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로 잘 알려진) 유적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3천여 기 중에 한사군 무덤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북한 학계의 견해다.

남한 학계는 일제 강점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립한 '낙랑군=평양설'을 아직도 부동의 '정설'로 받들고,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신봉하면서,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은 해방 이후 계속되어 왔는데, 남한의 대표적인 고조선 연구 전문가인 윤내현 교수의 경우를 살펴보자.

리지린 논문 영향 받은 윤내현 교수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는 신채호와 같은 민족사학자, 그리고 리지린과 같은 북한 사학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만권당관련사진보기
단국대 박물관장을 지낸 윤내현은 1980년대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시절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서 리지린의 저서를 발견하고 고조선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원래 윤내현의 전공은 중국 고대 상(商)나라였다. 자신의 전공과 관련해서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한국 고대사인 고조선을 만났던 것이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러시아의 고조선 연구 학자인 유엠 부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서 러시아 학자로 하여금 대륙고조선설을 주장하는 <고조선 연구>를 출간하게 했다. 윤내현도 유엠 부찐과 마찬가지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윤내현은 주류 고대사학계 내부에서 리지린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윤내현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읽은 것은 사실이지만 표절이라고 하긴 어렵다. 두 학자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윤내현 역시 '대륙고조선' 과 '낙랑군재요동'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리지린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접근 방법이 다르고 그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이 다르다.

리지린과 윤내현이 보는 고조선 서쪽 경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 실린 기원전 5~4세기 조선 고대 국가들의 위치 약도. ⓒ 도서출판 말관련사진보기
고조선 강역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조선의 서쪽 경계 지역이 어디였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 리지린은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서기전 3세기까지는 하북성 난하였다가 서기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영토를 빼앗긴 후 요녕성 대릉하 동쪽으로 축소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오늘의 중국 요녕성 개평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역시 발해 북안 난하 유역을 고조선의 서쪽 경계지역으로 보고 있고, 중국에게 밀려서 한때 축소되었다고 보지만 진·한(秦漢) 때 다시 난하를 국경으로 삼았다고 보는 점이 다르다.

또한 윤내현은 단군, 기자, 위만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는 리지린의 논문이 통과된 뒤 30여 년이 지나서 나온 책이기에 새롭게 발굴된 유물과 자료를 참조할 수 있었고, 때문에 리지린이 놓친 부분을 보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윤내현에 의하면, 기자는 고조선 서쪽 강역에 살던 인물이다. 상(商)나라의 제후국인 '기(箕)국'의 제후이자 실존 인물이었던 기자는 상나라가 망한 후에 이웃 나라였던 고조선으로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망명한다.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 제국의 서쪽 변방(난하 유역), 즉 고조선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서쪽 경계지역이었다. 당시 고조선은 단군이 고조선을 창업한 이래 여러 나라들을 제후국(거수국)으로 거느리고 있던 제국이었다.

기자 일족이 망명을 하자 단군은 서쪽 변방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고 당시 그 인근에 있던 도읍을 장단경으로 옮겼다. 단군이 기자일족의 거주를 허락한 지역이 바로 오늘날 발해 북안 난하 유역인데, 기자조선은 단군고조선의 제후국으로서 고조선의 서쪽 경계 지역을 확정하는 데 단초가 된다.

이후 기자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망명자 위만은 왕검성에 도읍하고, 한나라의 외신(제후국)으로 입장을 정리한 뒤에 한나라의 지원을 받아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는 단군(고조선)을 공격한다.

이 공격으로 위만조선의 강역은 현재의 요서 지역에 있는 대릉하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당연히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의 강역은 난하 유역에서 대릉하 유역으로 축소된다. 그 뒤 위만조선은 한나라 무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위만조선에 한사군이 설치된다. 따라서 당연히 낙랑군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 설치된 것이다.

윤내현의 이 논지는 고조선의 통치자는 단군에서 기자, 기자에서 위만으로 바뀐 적이 없고, 기자에서 위만, 위만에서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은 단군이 계속 통치하던 중에 전체 고조선 제국 영역의 서쪽 변방 경계지역에서 벌어졌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쪽 변방 경계 지역이 오늘날 난하 유역이라는 말이다.

윤내현은 중국 고대 문헌들과 우리의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문헌과 갑골문자의 분석을 통해 단군과 기자의 실존, 기자의 조선 망명설, 단군고조선이 제후국을 거느린 제국이었다는 것을 역사적 기정사실로 확정하고 논지를 전개한다.

예족과 맥족에 대한 견해차

반면, 리지린은 윤내현 논지와는 다르다. 리지린은 고조선을 건국한 고조선족은 예족이라고 본다. 단군을 고조선을 건국한 왕을 일컫는 칭호라고 보며, 단군사화(신화)에 조선반도와 산동지방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란생 신화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원주민이었던 조이부족과 다른 계통이었던 예족이 고조선을 건국한 고조선 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리지린은 예족과 맥족이 고조선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중국 입장에서 동이족이라고 불리는 '족'이 우리의 고대 국가 형성의 바탕으로 여겨지는데, 리지린은 이 관점에서 예족과 맥족이 고조선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세밀하게 설명한다.

또한 기자라는 명칭은 '기(箕)'국 이라는 봉지를 받은 제후의 명칭일 뿐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 왔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이라고 본다. 또 리지린은 왕검성을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봤지만 윤내현은 왕검성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지 단군조선의 도읍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안은 윤내현의 논지와 크게 다른 면들이다.

윤내현과 리지린 저술의 다른 부분은 '3장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에 대한 고찰', '4장 숙신(肅愼)에 대한 고찰', '5장 부여(夫餘)에 대한 고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지린은 동이족이 우리 고대 국가의 뿌리라고 볼 때 이들 종족들이 중국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졌던 흔적들을 찾아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와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인지 소상하게 추적하고 있다.

윤내현은 고조선은 제후국(거수국)을 거느린 제국이었다는 논리로 동이족들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에 비해 리지린은 각 부족들의 흔적을 면밀히 소개하고 있다.

리지린의 논지에는 윤내현의 주장처럼 고조선이 제후국(거수국)들을 거느렸던 제국이었다는 이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두 학자가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을 함께 주장하고 있지만 고조선의 나라 형태에 대한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리지린은 1960년대에 중국 북경대에서 수학할 때 고힐강이 인정한 것처럼 고조선 관련 자료의 95%를 보았다. 그 결과 1962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하면 경탄할 정도의 저서인 <고조선 연구>를 출간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1960년대 초반에 이미 정리된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은 남한학계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중국에서 하도 많은 고조선 유적, 유물들이 발굴되자 남한의 강단사학계도 고조선의 강역은 평안남도에서 슬그머니 지금의 요하까지 확장시켰지만 '대륙고조선설'과 일란성 쌍둥이인 '낙랑군=요동설'은 모른 체하면서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북한 리지린의 대륙고조선설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윤내현의 학문적 성과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이런 남한 현실에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출간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공부하는 학자와 한국사에 관심 많은 독자라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는 모두 읽기를 미뤄서는 안 되는 책이다.


고조선 연구 - 상 - 개정판

윤내현 지음, 만권당(2015)


이 책의 다른 기사"김정배·최몽룡의 연구, 동의하지 않지만"


고조선 연구 - 하 - 개정판

윤내현 지음, 만권당(2016)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2018)


#리지린#윤내현#고조선 연구#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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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angco.net/new0822/?doc=bbs/gnuboard.php&bo_table=2kor_0&page=1&wr_id=21

이덕일의 해역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운영자











일반








[이덕일의 ‘역사의 창’] 남한의 역사학, 북한의 역사학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의 핵심은 한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조 단군을 부인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가짜라고 주장해 반만년 한국사를 1500년 역사로 축소시켰다. 대륙성과 해양성의 역사에서 대륙과 해양을 잘라내 반도사의 틀에 가두었다. 그나마 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란 중국의 식민지, 남쪽은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은 한국사의 필연이란 논리였다.
그렇게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에 설치하고 그 핵심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평양설’을 유포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고대 사료는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낙랑군=요동설’을 말하고 있다. 남한 강단사학계는 광복 후 이 문제에 대해서 단 한 차례의 학술토론회도 없이 ‘낙랑=평양설’이 하나뿐인 ‘정설’이라면서 학생들에게 외우라고 강요했다. ‘낙랑군=평양설’이 일체의 사료적 근거가 없는 조선총독부의 정치 선전이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21세기 남한 강단사학계는 반성 대신 역습을 택했다.
2017년 한때 진보를 표방했던 ‘역사비평’은 이른바 ‘나이는’ 젊은 역사학자들을 대거 동원해 ‘낙랑=평양설’을 주창했고, 조선일보는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한겨레·경향신문 등이 이에 가세했고, 한국일보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무서운 아이들)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2017년 6월 5일)고 힘을 실어 주었다.
북한학계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무서운 아이들’ 중 한 명인 안정준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의 수는 190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00기에 달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낙랑군 관련 유적의 대다수는 일제 시기가 아닌 해방 이후에 발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역사비평사, 2017)라고 단언했다. 북한도 ‘낙랑군=평양설’이라는 것이다.
‘한겨레 21’의 전 편집장 길윤형은 ‘국뽕 3각연대’라는 칼럼에서 “지금까지 북한 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결과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2600여 기의 낙랑 고분이 확인됩니다.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합니다”라고 가세했다. 북한학계도 ‘낙랑군=평양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북한 학자 리순진은 거꾸로 “지난 시기 일제 어용사가들과 봉건 사대주의 사가들의 력사 위조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 ‘한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이다”라고 비판했다. 리진순은 해방 후 약 3000기의 무덤을 발굴한 결과 한나라 무덤은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남한의 강단사학자와 언론들은 북한학계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속인 것이다.
북한학계는 광복 직후부터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한 토론을 전개했다. 문헌 사학자들은 주로 ‘낙랑군=요동설’을 지지했고 고고학자 일부는 ‘낙랑군=평양설’을 지지했다. 열띤 토론회 도중인 1958년 경 북한 학자 리지린은 북경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가서 고조선사를 연구했고, 1961년 9월 경 북한에서 그간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고조선연구’(1962년)가 출간되면서 북한은 ‘낙랑군=요동설’로 정리되었다. 문헌 사료는 물론 만주의 여러 유적·유물도 ‘낙랑군=요동설’을 말하는 판국에 ‘낙랑군=평양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남한 강단사학계와 일부 언론은 21세기 백주 대낮에 북한학계도 ‘낙랑군=평양설’로 정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하는 남한 학자들을 ‘유사·사이비 역사학자’라고 매도하는 매카시 사냥을 일삼았다. 여기에 보수 언론뿐만 아니라 이른바 진보 언론까지 가세해 남한 식민사학의 막강한 카르텔을 입증했다. 북한의 역사학도 물론 문제는 있다. 그러나 북한 바로 알기는 북한의 역사학 바로 알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를 남한 강단사학이 잘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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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인생의 책’으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년~기원전 19년)가 쓴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꼽은 적이 있다. 멸망한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생존한 일족과 함께 갖은 고초를 이겨내고 마침내 티베르 강 언저리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다는 얘기다. ‘아이네아스의 노래’라는 뜻의 이 말년 대작은 새로 지어낸 건국신화다. 베르길리우스는 위대한 제국 로마가 로물루스라는 ‘근본’ 불명의 목동이 아니라 고대 문명국가 트로이의 후예가 세운 ‘뼈대’ 있는 나라라고 주장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화려한 건국신화를 꿈꾸는 욕망은 고대 로마 시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유라시아 호령한 고조선 기마군단…8000㎞ 초원길에 한민족 디엔에이(DNA)/세계 4대문명보다 1000년 앞선 고대 ‘훙산문화’ 존재”라는 한 신문의 칼럼 제목은 최근 역사학자인 듯 역사학자가 아닌 일부 인사들이 앞장서고 정부가 적극 후원하고 있는 ‘상고사 열풍’의 진면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단군과 고조선의 재포장은, 저커버그처럼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신화를 사실로 확정하려 든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한국역사연구회 주최로 지난 19일 열린 심포지엄에서 ‘최근 한국상고사 논쟁의 본질과 그 대응’이라는 소논문을 발표한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고조선 강역, 낙랑군의 위치 등을 논쟁의 영역으로 집요하게 끌어들여 한국 고대사를 다시 쓰려고 하는 일부 인사들을 재야사학자와는 다른 ‘유사역사학자’로 규정하고 그들의 움직임과 인식, 의도를 찬찬히 분석·비판했다. 송 교수는 고조선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단군, 만들어진 신화> 등의 연구서를 낸 한국 고대사 분야의 중견 학자다.

송 교수에 따르면, 유사역사학자들은 고대사에 포괄돼야 할 고조선 시대를 굳이 상고사라고 따로 떼어 부른다. 배경에는 “단군조선 시기만을 부각시켜 우리 역사가 출발부터 만주지역을 지배한 웅대한 역사였음을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고조선의 강역과 낙랑군의 위치를 자꾸 들고나와 쟁점화하는 것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유사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랴오닝(요령)성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고조선 중심지 재요령성설’은 조선 시대 이익·안정복에서 발원해 신채호를 거쳐 북한의 리지린이 종합 정리한 것이다. 리지린은 <고조선 연구>에서 <산해경>을 비롯한 중국 문헌들에 나오는 요수, 패수 등 강 이름을 언어학적으로 추적해 그런 결론을 냈다. “리지린의 주장은 남한 학계의 윤내현에 의해 그대로 확대 해석” 됐다. 윤내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조선이 조-중 국경인 허베이성 난하 이동 지역에서 한반도 서북에 걸쳐 있었으며, 이미 고대 제국의 단계까지 발전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윤내현의 계승자가 이덕일이다. 90년대에 윤내현, 2000년대 초반 최재인이 있었다면, 지금은 이덕일의 전성시대다. 그는 중국 문헌 <위략>에 나오는 ‘서방 2천리 상실’ 기사를 절대적 사실로 전제하고서 고조선의 강역을 요하 서쪽 일대라고 확언한다.

그러나 동호를 밀어내고 요동(요하 동쪽)까지 장성을 설치했다는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을 보면 요서(요하 서쪽) 지역을 고조선의 중심으로 설정하긴 어렵다. ‘비파형동검문화’ 분포지역을 곧바로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는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이 문화의 객관적 분포 범위를 볼 때 고조선이라는 구체적인 국가나 주민 집단과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청동기 시대 이후 중국 문헌들엔 요서 지역이 동호·산적 등 융적의 거주지라는 기록도 나온다. 2000년대 들어 유사역사학자들이 부쩍 내세우고 있는 4천년전 신석기 시대 요하문명론, 즉 ‘훙산문화’는 고조선보다 2천년이나 앞선 신석기 문화로 아직 이를 뒷받침할 문헌 기록이 전무하다.

유사역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도 만주라고 한다.(‘낙랑군 재만주설’) 그들은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1차 사료가 단 한 건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 <후한서> ‘최인열전’ 등을 보면 낙랑군은 중국 본토에서 가장 동쪽~한반도 서북지방에 설치돼 “요동군의 관할 범위”에 있었다. 더욱이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설치됐다는 것은 “논의가 필요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각종 문헌 기록과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고고학 자료들이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정 역사 교과서 추진과 함께 이덕일 등이 역사 교과서에 상고사 부분을 대거 보완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한반도를 시원부터 ‘순결한 땅’으로 포장하려 드는 것일까. 송 교수는 “이민족 식민통치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한반도 밖으로 밀어내려는” 국수주의적 열등감, 일제 식민 경험에 따른 피해의식의 산물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이덕일 등은 자신들의 환상을 반박하고 한반도의 식민 경험을 인정하는 강단 역사학계를 “(친일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 제자들의 식민사학 카르텔, 사피아(사학 마피아)”라고 싸잡아 매도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시대착오적 애국주의와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현 정부의 논리와 연결되는 부분이 크다.”

송 교수는 유사역사학의 배후로 정부를 지목한다. 실제로 정부는 2013년 말 ‘식민사학 극복, 상고사 연구’를 위한 예산 수십억원을 편성하고, 교육부에 ‘역사교육지원팀’을 만드는가 하면 ‘한국사 연구 종합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국회도 ‘동북아역사왜곡대책 특별위원회’라는 특별 기구까지 만들어 유사역사학자들에게 활동 무대를 제공했다. 과장된 영토관과 중심지 논쟁은 국수주의의 온상이 되거나 이웃 나라들과 외교적 마찰 등 과도한 정치화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송 교수는 “전문 역사학자들이 용감하게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함으로써 유사역사학이 설 자리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초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전 완성하지 못한 <아이네이스>의 원고를 폐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의 이름으로 이 작품을 발표하도록 ‘명령’한다. 위대한 건국신화와 현실 정치의 함수관계는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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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운영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북경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

<서평> 전형배 21세기민족주의포럼 기획위원

전형배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8.10.26 


▲ 1962년 평양에서 발행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이덕일의 역해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도서출판 말에서 57년 만에 재발행됐다.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남쪽에서 57년 만에 발간된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리지린 지음/이덕일 역해, 도서출판 말 발행)는 내게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1958년 43세의 원숙한 학자 리지린은 단기필마로 누천년 지속되어 온 대국주의의 화신 중국의 한복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중국 고사변학파의 대표학자라 할 고힐강 교수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 명목은 박사학위를 놓고 벌이는 것이지만, 그 내용인즉슨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동아시아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치열한 논전이었다. 과연 우리 역사 상 옛 조선의 지리와 국경은 어떠하며, 어떤 모습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가? 그것은 곧 중국민족과 우리민족의 평화와 전쟁의 새 이정표를 세우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다.

리지린은 구체적으로 수많은 사료와 유물을 토대로, 옛 조선은 적어도 BC12세기 이전부터 큰 세력의 국가체제를 이뤘으며, BC5세기 이래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난하 일대까지도 옛 조선의 영토였음을 입증했다. 그리고 진개의 침략(BC300년경으로 추정), 위만의 쿠데타(BC194년), 한 유철(무제)의 침략(BC108년) 등 일련의 사태가 벌어진 뒤에야 지금의 대릉하까지 물러났음을 확인했다.


▲ 리지린은 수많은 사료와 유물을 토대로 옛 조선은 적어도 BC12세기 이전부터 큰 세력의 국가체제를 이뤘으며, BC5세기 이래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난하 일대까지도 옛 조선의 영토였음을 입증했다.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 많은 유물 중 무기(위)와 무덤(아래)의 분포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고힐강 교수는 논문 심사서에 “리지린이 고대 조선족이 현재 중국 영토에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그 중심을 요서와 요동 일대라고 주장”했다고 서술하며, “객관적 연구를 표방했으나 민족주의적 속박에 사로잡혔다”고 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리지린의 학문적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료와 역대 학자들의 연구결과까지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과학과 이성’의 주장 앞에, 지금의 북경까지도 옛 조선의 품 안에 있었다는 논문을 그는 결국 승인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기에 “오늘의 시험은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다. 국제적인 우호관계를 위해서 그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써넣었다. 이것은 마치 안시성에 쳐들어왔던(645년, 고구려 보장 4년) 이세민(당 태종)이 사나운 고구려인들에게 철저히 패배당하고 마침내 화살에 맞아 눈까지 꿰이고 만 사실을 호도하며 “그대(성주 양만춘)가 성을 잘 지키고 임금에 충성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준다”라고 해놓았던 것과 진배없는 군더더기말이다. 한마디로 리지린의 논문은 북경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것이나 다름없는 쾌거이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낙랑군재평양설’ 종식!

이 책과 관련해 몇 가지 쟁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먼저 북한 쪽 사정이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남북한 모두 해방을 맞이했다. 식민지 시기 강도일본은 우리민족에게 ‘일본인의 눈으로 보는 조선사’를 강요했다. 그들은 우리민족의 시간을 잘라내고, 공간을 축소하고, 민족을 분열시켰다.

무슨 소리냐? 시간적으로는 단군을 허구의 인물로 만들어 옛 조선의 역사를 신화화해 버리고, 공간적으로는 반도에 가두어두고(한반도 안에 한나라의 4군이 들어섰고,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가라가 설치된 후 한국사가 시작되었다는 주장), 인간적으로는 온 겨레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려는 책동을 부렸다. 당연히 남북한 모두 강도일본의 반도 타율성론을 극복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낙랑군의 위치 문제가 가장 첨예했다. 왜냐하면 중국민족과 우리민족 사이의 최대 격전지였던 낙랑군의 위치만 제대로 잡히면, 당시의 역사적 실체가 드러나는 ‘매듭 중의 매듭’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남한 사회는 아직도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설(樂浪在平壤說)을 정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북한의 리지린은 1961년8월~9월 평양에서 개최된 ‘고조선의 생산력과 국가형성에 대한 토론회’에 참석해, 북경대에서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의 성과를 제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북한에서는 ‘낙량재평양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와중인 1962년에 이 책은 정식으로 북한 땅에서 출간된다. 책을 일람하면 바로 알아보겠지만, 리지린의 연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내에서 발굴된 여러 고고학적 유물까지도 섭렵했다.

북한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임나=가야설’까지도 폐기시켜, 역사에 관한 한 자주적인 입장에 서려고 한 태도가 한층 강화되었다. 아마도 친일 부역 혹은 반역의 무리에 대해 철퇴를 가하고자 한 분명한 입장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대국주의에 물든 중국 학자나 침략적 제국주의에 광분하는 일본 학자 들에 대해 학문적, 역사적 단죄를 한 것이라고 본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책이 ‘역사의 이정표를 세운 위대한 저작’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리지린의 연구는 맥맥한 역사적 흐름에서 봐야

이 책에는 눈여겨 볼 또 하나의 맥락이 있다. 그것은 단재 신채호라는 위대한 역사가의 존재이다. 일찍이 단재는 ‘진개(秦開)’라는 연나라 장수에 주목하며, 그가 침략한 동호(東胡)가 옛 조선임을 갈파했으며, 한4군이 반도내에 있었다는 설을 전면 부정했다. 우리민족의 활동 무대는 압록강 이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며, ‘크지도 작지도 않아 임금노릇하기에 딱 알맞다’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의 위축된 섬나라 사고방식을 비판했다.

만일 단재가 제대로 시대를 얻었다면 중국의 내로라하는 학자들 모두 입을 벌린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그가 쓴 『조선상고사』나 『조선사연구초』 등은 그저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그는 5천년 우리역사 전체를 놓고 포효했던 것이다. 일본은 그저 지나가는 강물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끝내 순국한 단재의 학문적 역할은 후대로 넘어갔다.

어떤 학자가 내게 말하길 “가끔 단재 신채호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차라리 역사에 관한 글을 더 많이 남겼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단재가 아니겠지?”라고 했다. 맞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앎과 삶이 하나가 된 단재의 글은 반드시 이 땅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리지린은 이런 단재의 사상과 시대적 역할을 계승했다. 곧 단재가 있었기에 리지린이 존재했고, 리지린이 존재했기에 훗날 러시아의 U.M.부틴이 태어났고 한국의 윤내현이 태어났다(두 사람 모두 리지린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 연구에 매진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일군의 학자들은 평지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거대한 뿌리’에서 태동한 새로운 생명체라는 사실을 인식함이 보다 역동적이지 않을까. 바위를 뚫는, 혹은 진창에 휘감긴 그 뿌리를 보라. 단단하다고 기죽지 않으며 더럽다고 회피하지 않는다. 그 모두를 휘감아내며 생명을 밀어 올린다.

인용된 원전 사료에 번역과 해제 담아

이번에 출간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인용된 사료에 번역을 달고, 필요한 곳에 해제를 달았다. 실로 재탄생이라 할 만하다. 20여년 전인가, 북한에서 나온 이 책의 복제본이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되었다. 그때 반가운 마음에 책을 구했지만, 낯선 인명과 지명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책은 장정도 산뜻하거니와, 번역문이 읽기 쉽고, 간략한 해제는 역사적 안목을 키워준다.

12세기에 『삼국사기』를 찬술한 김부식이 천하의 온갖 자료들을 구해다 놓고는 행여 남들이 볼새라 꼭꼼 숨겨 놓고는 자기 혼자만 보았다고 한다. 이건 학문의 독점 폐해다. 지금은 그 소중한 자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우리민족은 제대로 된 우리역사를 우리 손으로 남기지 못한 패착을 빚고 말았다.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민족의 통사가 겨우 천 년 전의 『삼국사기』만으로 남아 있다니,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 아쉽기 짝이 없다. 역사를 뭇 사람들에게 건네주지 않고, 자신만 아는 ‘비장의 레시피’로 삼고자 했던 못난 성품에서 생겨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750쪽이 넘는 이 책을 다 소화하여 읽기란 버거워 그저 활자를 좇아가기 바빴다고 해야 하겠다. 그나마 나같은 사람도 읽어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시비판별을 상아탑에 갇힌 학자들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눈뜬 시민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소중하다. 그리고 촛불혁명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우리민족의 저력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이런 작업이 쌍방향 소통으로 이어져, 학자와 시민 간의 협력 작업이 이뤄지길 소망해본다.

중국에선 왕조가 바뀔 때마다 정통 사서를 다시 만들었다는데, 어찌하여 우리민족은 사대주의의 허물을 벗지 못한 『삼국사기』를 재편찬하지 않는 것일까? 고구려의 멸망을 서술하면서 “거대한 중화대국에 대들다가 망했으니 이제라도 늦었지만 다행이다”라는 취지로 적어놓은 책을 어찌 우리민족의 정사(正史)라며 후인들에게 내민다는 말인가?

옳은 것은 살리고 그른 것은 없애며, 누락된 중요한 사실은 보태며 터무니없는 망발은 거두어야 한다. 나는 리지린의 이 책을 계기로 이런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고대해본다.

기원전5~2세기의 대륙 고조선 재조명

리지린이 다룬 역사무대는 대략 BC 5세기부터 BC 2세기 초(BC400~BC100년)까지의 기간이다. 당시 유라시아 동부 지역은 크게 흉노 제국, 한 제국, 옛 조선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방(한 고조)이 중국 전역을 제압한 전후의 시기(BC202년)부터 100여년간 흉노가 군사적 패권을 장악하면서, 한나라는 지속적으로 흉노에 수모를 당한다.

그러다 유철(한 무제, 재위 BC141~87년)이 등장하면서 현상타파를 위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고, 반면 그 시기에 옛 조선 제국은 고난에 찬 시기를 맞이한다. 건국 100여년을 맞이한 한나라로선 국가재정 및 인심은 흉흉해졌지만, 일단 흉노 패권체제를 뒤흔들어 새로운 판을 짜는 데 비교적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옛 조선은, 앞서 언급한 세 차례의 전화(戰禍)를 겪어야 했는데, 곧 진개전역, 위만침탈, 한과 위씨조선의 전쟁(이른바 한사군전역)이었다. 그 무대는 대략 오늘날의 산서성 태원으로부터 하북성의 영평부 및 창려현 일대까지였다. 결국 옛 조선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비껴가지 못해 넓은 영토를 상실한다. 리지린의 추정에 따르면, 오늘날 요하의 동편에 소재한 개평현에 수도를 둔 상태로 위축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지역을 무대로 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 20년(AD37년)에 “낙랑을 침습하여 멸망”시키고, 모본 2년(AD49년)에는 “(고구려의) 왕이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습”하며, 다시 태조 3년(AD55년)에는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을 방비”했다는 기록이 잇달아 나온다.

이로써 보면 이 지역이 한나라 침략 이후에도 100년이 넘도록 중국민족과 우리민족의 처절한 항쟁지였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곧 흉노의 힘이 주춤해지면서, 거침없이 성장한 중국과 기력을 회복해가는 옛 조선의 대결은 훗날 수.당 대 구고려의 대결로까지, 위만 때부터 9백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항쟁은 좁게 보면 황하 이동의 싸움판이요, 넓게 보면 유라시아의 패권을 놓고 중국민족과 우리민족이 충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남쪽에서 재탄생한『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왼쪽)와 2010년부터 북한이 출간 중에 있는 총38권으로 구성된 역사 시리즈물 『조선단대사』 중 고조선사가 나란히 놓여있다.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역사는 일진일퇴한다. 하루살이가 춘하추동의 삶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옛 조선의 일시적 패퇴라는 사태를 견강부회해 우리민족을 압록 이남의 유사 섬나라 안으로 가두는 것은 온당치 않다. 2천 2,3백년 전에 발생한 파란은 그 전에도 있었고, 그 후로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역사의 진실을 추적하려는 노력을 ‘상상의 공동체’요 ‘침략적인 민족주의’라고 비판하곤 한다. 물론 최근의 학문적 성과로는 ‘용감하게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사피엔스 한 무리가 유라시아를 거쳐 아메리카로 퍼짐으로써 온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언젠가 모든 인류가 한 뿌리에서 나왔고, 그래서 평등하며, 공동의 평화를 위해 큰 걸음을 실제로 내디딜지도 모른다. 실로 70억 인류 누구나가 시대의 주인 되는 평등한 세상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각 인류의 생존은 힘겨운 현실이며, 대략은 민족 단위로 그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우리는 세계에서 최강의 민족주의라 할 중국의 중화주의와 지칠 줄 모르는 일본의 황국사관을 대적해야 한다. 중국은 호모 사피엔스 공동조상설을 부인하며 ‘중국원인설’(中國原人說)을 주장하고, 일본은 ‘만세일계의 천황 정통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상상의 소산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우리를 압박하는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에서 우리의 ‘아이덴티티(주체성)’를 바로세우지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의 학자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갇혀 버리게 되면, 필시 전세계 곳곳의 약소민족처럼 험한 핍박을 받거나 소멸되고 말 운명에 처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시간, 공간, 인간의 시야를 한껏 틔워줄 역사적 노력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그 연구결과를 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런 성과물에는 필연적으로 이설(異說)이 따르게 마련이며, 경우에 따라선 다시금 패러다임의 개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학문뿐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 필연이다. 달리 말해 그 성과물을 창조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못난 후학이요 못난 후인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면에서 리지린의 고조선사는 위대한 성취지만, 필시 극복될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민족주의 대국들 사이에서 치밀한 생존전략 필요

이 책을 일독하며 뜬금없이 ‘독도’ 생각이 났다. 우리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독도는 결코 빼앗겨선 안 될 소중한 섬이다. 다만 독도는 누구의 땅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다. 힘있는 집단이 오래도록 차지하고 살아온 증거가 있는 한에서만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당사자 혹은 관전자 들이 내놓으라 하는 ‘역사적 증거’이다.

보편적으로 한 민족 혹은 국가의 토지 관념은 일관돼야 한다. 즉 자기 집단이 역사적으로 오래도록 살아왔던, 그리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는 땅에 대해 철두철미한 관점을 지녀야 한다. 얼마 전 중국산 인삼을 들여와 파는 어느 조선족에게서 “중국에선 흙 묻은 인삼은 반출허가를 안 해준다. 왜냐면 흙은 소중한 중국의 토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씻은 것만 가져온다”라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중국은 토지(영토)에 대해 이렇게까지 철저한가 싶어서였다. 중국이 타이완이나 댜오위타오(일본명 센카쿠 제도), 남사군도 등에 보이는 집착은 굉장하다. 거기에 덧붙여 서남공정을 통해 티벳의 역사를,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 옛 역사를 다 중국 역사에 붙이려 한다.

일본 또한 홋카이도 정복, 오키나와 합병 등을 이룬 뒤, 청일전쟁 뒤 차지한 센카쿠 제도를 지키겠다고 안간힘을 쓴다. 만일 중국에 티벳과 만주와 타이완을 제외한 ‘중국전도’를 유통시킨다고 하면, 공안당국이 가만 있을까? 일본에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독립시키고, 센카쿠 제도를 중국에 반환하라면 얼씨구나 할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텔레비전의 방송을 통해 남한 땅만을 그려놓은 ‘전국지도’를 공공연하게 화면에 송출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의 내용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그 이전에 민족과 통일에 대한 관점이 부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남북한으로 나뉜 한민족의 정치적 영토는 압록강 이남으로 국한되었을지 모르나, 수천년 역사적 영토는 결코 그렇지 않다. 『맨얼굴의 중국사』를 저술한 타이완의 저명한 역사가 백양(柏陽)은 “만주족이 중국을 차지했다. 그들은 중국에 만주라는 땅을 혼수품으로 가져왔다”고 말하며, 만주족 지배라는 굴종을 견뎌내고 비로소 중국이 만주를 차지했다고 평가했다. 그게 겨우 100년 전의 일이다.

나는 가끔 “중국이 동북공정을 수행하는 까닭은 북한 붕괴 시 북한을 차지하기 위한 역사적 명분을 쌓기 위해서다”라며 기염을 토하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중국이나 일본이 대격변을 치르는 상황이 닥쳤을 때를 대비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지 못하는가?

혹시 우리나라의 일부 학자들이 총론으로는 독도 수호에 앞장선다면서도, 각론으로는 지도마다 독도를 빼놓는 행동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입으로는 식민사관과 사대사관을 극복하자며 거품을 물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민족으로선 용도폐기해야 할 ‘한사군재평양설’이나 ‘임나일본부설’ 따위에 목매고 있지는 않은가? 오히려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처럼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 한 역사의 ‘그 이채로운 보물들’을 파묻어 버리려는 것은 아닌가?

섬나라 의식을 극복하고 세계를 꿈꿔야 한다

우리 민족의 머리 위에 마치 유리장막처럼 ‘압록강 이남 한민족설’이 놓여 있는 것은 비극이다. 그리고 이 비극은 근세에 중국과 일본의 치열한 공작이 끼어든 측면도 있지만, 우리민족 스스로가 ‘내재화한 잘못’이 큼을 인식해야 한다. 사대적 입장에서 우리역사를 쓴 김부식이나, 진보적이었지만 우리의 역사적 영토를 압록강 이남으로 규정한 정약용 모두 우리의 선인(先人)들이다.

우리는 선인들이 남긴 무수한 역사적 성과물을 창조적으로 도약시킬 책임이 있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밖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주장을 바로잡고, 안으로는 우리 안의 위축된 사고방식을 재검토하라 요구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대의 주역의 자리에 올라갈 가능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한번쯤 이 책에서 그가 무슨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 눈길을 돌려봐 주었으면 한다. 분명 민족의 기원과 내력,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특별한 상상을 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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