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손양원 목사님...!! 누가 진정 강한 사람인가?>
序 :
중국 가기 전에 집안 친척의 한 장례식장에서 한 어르신이 제게 이런 질문하셨다.
"목사가 되었다면서?"
"예"
"진짜 목사여? 가짜 목사여?"
"예! 가짜 목사입니다."
本 :
1. 출생과 이름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에서 손종일(孫宗一, 칠원교회) 장로와 김은수 집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이름은 손연준이었는데 훗날 그가 애양원을 시무하면서부터 손양원으로 개명했다.
2. 기독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다.
1917년 호주에서 온 맹호은(孟虎恩, Frederick John Learmonth Macra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19년에는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도중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가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창원 교도소에 투옥되자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3. 일본에서 나카다 쥬지 목사를 만나다.
1921년 19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스가모(巢鴨)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1923년 졸업하였다.
그 당시 그는 성결교회인 도쿄중앙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곳에서 나카다 쥬지 목사의 노방전도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위한 급식과 전도활동에 감명을 받아서 후에 자신도 이런 사역의 전도자가 되고자 결심하였다.
4. 귀국 후 결혼과 신학생 시절
1923년 귀국한 후 부모의 권유로 정양순(본명 정쾌조)과 결혼. 이후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에 입학, 1925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남구 감만동에 위치한 나환자 보호시설의 노블 메켄지(Noble Mackenzie) 선교사를 돕는 전도사로 일하면서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양산 원동교회, 그리고 밀양 수산교회를 차례대로 개척하였다.
33세에 전도사로서 평양 능라도교회를 담당한 후 1938년 3월 16일 장로회신학대학교(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5. 나환자 병원 나환자촌 애양원을 섬기는 사람
애양원은 1909년 포사이트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병환자를 치료한 것이 설립동기가 되었으며, 1911년 4월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서 광주 나병원으로 시작하였다가 광주에 있던 나병 치료소의 환자 수가 600여 명에 이르자 1925년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닦고 1928년 한센병 환자 600여 명이 이곳으로 옮겨와 1935년 3월 애양원으로 개칭하였다.
1938년 졸업 후 과거 부산 나병환자보호시설에서 경험한 손양원은 여수 나병원 애양교회에 부임하여 나병환자를 위한 전도자가 되다.
6.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르다
그는 이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 후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서 10개월 구금된 후에 광주구치소와 광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형기를 마치고 1943년 5월 17일에 광주형무소에서 출옥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종신형을 받고 1943년 10월 서울구치소와 청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이하고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다시 여수 애양원으로 돌아가서 1946년 3월 주기철 목사가 목회하던 마산문창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일제시대 사람들은 일장기 히노마루에 허리를 굽혀 절했었다. 광복 후에는 히노마루가 태극기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은 여전히 허리를 90 도로 굽혀 절했다.
이에 손양원 목사 등이 이승만 장로를 만나 지금의 가슴에 손을 얹는 국기에 대한 경례 예식을 제정했다.
7. 제주 4.3 사태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김달삼 이덕구를 중심으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 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13-14개라는 설이 있음)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주 4.3 사태이다!
이 4.3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를 제주도에 파병할 계획이었으나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8. 두 아들의 죽음
반란군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는데 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도 학살당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 당시 반란군인 안재선(안경선 목사의 부친)이라는 사람이 친미, 예수쟁이란 이유로 그의 두 아들인 손동인과 손동신을 총살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외지 집회에 나갔기에 화를 면하였다.
9. 사람의 원자탄
그러나 여수 순천 반란 사태는 곧 진압되었고 반란범들은 잡혀서 모두 처형 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는 장녀 손동희를 시켜서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이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기 직전 안재선을 용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학생을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구명활동을 하여 결국 그를 살려서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여 가족으로 함께 살도록 하였다.
"부친은 자신이 5년간 감옥생활을 견뎌내며 1, 2계명을 지켰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도 지켜야 하지 않느냐,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과거 5년 동안 헛고생만 한 것이 아니냐, 그를 살리고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 장녀 손동희 -
출처 : 고신뉴스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의 9가지 감사>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
3. 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하셔서 감사.
4. 한 아들 순교도 귀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 (臥席終身)하는 것도 큰복이라 하거늘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하였으니 주님께 감사.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두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안심되어 감사.
7. 내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감사.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
10. 순교자 손양원
1950년 손양원 목사는 6.25 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 가지 않고 나병환자를 계속 돌보았고 이후 공산군이 쳐들어와서 1950년 9월 13일 체포당해 15일간 여수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공산군이 퇴각할 당시 공산군은 그 과정에서 손양원 목사를 여수시 둔덕동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 결국 1950년 9월 29일 향년 49세의 나이로 순교!
"나덕환, 박재봉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가 피신하기를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아버지는 목자가 양떼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하셨고, 기독교는 잘살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잘 죽기위한 종교라며, 죽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애양원 식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장 10절, ‘죽도록 충성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습니다.
공산당에게 잡혀, 유치장에서도 자신의 밥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한 부친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여수 미평과수원에서 공산당들의 총에 맞아 48세로 순교하신 것입니다." - 손동희 -
"아버지가 순교했을 때에 가장 슬프게 울던 사람이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 손동희 -
출처 : 고신뉴스
<2010년 8월 15일 조선일보>
-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안경선 목사 이야기 -
高 3 겨울 아버지의 유언
"신학교에 가거라" 그리고…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진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故손양원 목사 그분은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학생을 양아들로 키웠던 겁니다 그분의 땅 '애양원' 내 '양할아버지'의 묘소를 이제서야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다.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원자탄'을 교회에서 단체로 보러 갔었어요. 여학생들 보려고 친구 따라 막 교회 나가던 즈음인데, 풋내기 어린 신자의 눈에도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손 목사님 생애는 크나큰 감동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하게 되었지요."
영화의 절정은 손양원 목사가 1948년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에서 두 아들을 잃는 대목이다. 반란군 쪽에 선 공산주의 추종 학생들에 의해 예수쟁이에 친미파라는 이유로 두 아들이 총살당하는 장면. 반란이 진압된 뒤 두 아들을 죽인 학생들 중 한 명이 체포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손 목사는 이 학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탄원한다.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고 애원하면서.
고교생이던 안씨는 이 대목에서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1년 뒤, 안씨는 손양원이라는 이름과 다시 만난다. 후두암을 앓던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4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979년 12월 19일. 빈소를 지키던 상주인 그에게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안씨의 손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책을 안겨주고 돌아갔다. "내가 네 작은 아버지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그제야 안씨는 아버지의 유언이 떠올랐다. "신학교에 가거라."
평소 맏아들이 교회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던 아버지였다. 당황스러웠는데 그 책이 모든 의문을 풀어줬다.
"영화의 원작이었어요. 저분이 아버지와 어떤 사이기에 장례식에 온 걸까, 이 책을 왜 나에게 준 걸까 의아해하다가 상을 치른 뒤 책을 찬찬히 읽어내려갔지요.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손양원 목사와 내 아버지의 관계를…. 그러니까…,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그 학생이 나의 아버지 안재선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양아들인 아버지가 목회하기를 원하셔서 부산고려고등성경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아버지도 신학 공부를 즐거워하셨고, 동기들과 교수들로부터 총명하고 유머러스한 신학도로 인기가 많았답니다. 빈민촌 공부방 교사로서도 열심히 활동했고요."
신학을 포기한 아버지 안씨는 손양원 목사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로 들어가 양식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한 뒤 일가족을 데리고 상경했다. 서울 상계동에 정착해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結 :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교 교정에 세워진 손양원 목사님 순교 시비
시인 고훈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당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워 남은 자의 아픔이 되겠습니다.
버림받은 한센병자들 아픔으로 쏟아내는 피고름
사랑으로 빨아낸 때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인 동신 두 아들
공산당의 총에 쓰러져 순교제물로 돌아온 날
자식 하나 순교자로 바침도 영광인데
둘이나 받으시니 하나님 실로 감사합니다.
눈물 흘리실 때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칠
두 아들 살해한 그 학생 양자로 삼던 날
사랑의 원자탄은 메마른 이 땅에 터지고
순교 십자가 지고 서서
기뻐 하늘 보던 날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남해가 보이는 애양원 동산에
당신 마저 순교자 되어
두 아들과 나란히 누우셨을 때
당신은 이 땅이 차마 감당치 못한 하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당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워 남은 자의 눈물이 되겠습니다.
1. 누가 가장 강한 사람인가? 누가 가장 존귀하고 높으신 분인가? 누가 가장 부유하신 분이신가? 누가 가장 복이 많으신 분이신가?
2. 성공신학 번영신학을 경계하라! 복음인 듯 하지만 복음이 아닐 수 있다.
3. 누구를 가장 닮고 싶으십니까?
나는 손양원 목사님을 닮아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나는 차마 못한다. 그래서 나는 가짜 목사이다.
사진 : 애양원을 찾은 안경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 순교 시비
序 :
중국 가기 전에 집안 친척의 한 장례식장에서 한 어르신이 제게 이런 질문하셨다.
"목사가 되었다면서?"
"예"
"진짜 목사여? 가짜 목사여?"
"예! 가짜 목사입니다."
本 :
1. 출생과 이름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에서 손종일(孫宗一, 칠원교회) 장로와 김은수 집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이름은 손연준이었는데 훗날 그가 애양원을 시무하면서부터 손양원으로 개명했다.
2. 기독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다.
1917년 호주에서 온 맹호은(孟虎恩, Frederick John Learmonth Macra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19년에는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도중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가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창원 교도소에 투옥되자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3. 일본에서 나카다 쥬지 목사를 만나다.
1921년 19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스가모(巢鴨)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1923년 졸업하였다.
그 당시 그는 성결교회인 도쿄중앙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곳에서 나카다 쥬지 목사의 노방전도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위한 급식과 전도활동에 감명을 받아서 후에 자신도 이런 사역의 전도자가 되고자 결심하였다.
4. 귀국 후 결혼과 신학생 시절
1923년 귀국한 후 부모의 권유로 정양순(본명 정쾌조)과 결혼. 이후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에 입학, 1925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남구 감만동에 위치한 나환자 보호시설의 노블 메켄지(Noble Mackenzie) 선교사를 돕는 전도사로 일하면서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양산 원동교회, 그리고 밀양 수산교회를 차례대로 개척하였다.
33세에 전도사로서 평양 능라도교회를 담당한 후 1938년 3월 16일 장로회신학대학교(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5. 나환자 병원 나환자촌 애양원을 섬기는 사람
애양원은 1909년 포사이트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병환자를 치료한 것이 설립동기가 되었으며, 1911년 4월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서 광주 나병원으로 시작하였다가 광주에 있던 나병 치료소의 환자 수가 600여 명에 이르자 1925년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닦고 1928년 한센병 환자 600여 명이 이곳으로 옮겨와 1935년 3월 애양원으로 개칭하였다.
1938년 졸업 후 과거 부산 나병환자보호시설에서 경험한 손양원은 여수 나병원 애양교회에 부임하여 나병환자를 위한 전도자가 되다.
6.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르다
그는 이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 후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서 10개월 구금된 후에 광주구치소와 광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형기를 마치고 1943년 5월 17일에 광주형무소에서 출옥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종신형을 받고 1943년 10월 서울구치소와 청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이하고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다시 여수 애양원으로 돌아가서 1946년 3월 주기철 목사가 목회하던 마산문창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일제시대 사람들은 일장기 히노마루에 허리를 굽혀 절했었다. 광복 후에는 히노마루가 태극기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은 여전히 허리를 90 도로 굽혀 절했다.
이에 손양원 목사 등이 이승만 장로를 만나 지금의 가슴에 손을 얹는 국기에 대한 경례 예식을 제정했다.
7. 제주 4.3 사태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김달삼 이덕구를 중심으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 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13-14개라는 설이 있음)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주 4.3 사태이다!
이 4.3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를 제주도에 파병할 계획이었으나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8. 두 아들의 죽음
반란군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는데 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도 학살당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 당시 반란군인 안재선(안경선 목사의 부친)이라는 사람이 친미, 예수쟁이란 이유로 그의 두 아들인 손동인과 손동신을 총살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외지 집회에 나갔기에 화를 면하였다.
9. 사람의 원자탄
그러나 여수 순천 반란 사태는 곧 진압되었고 반란범들은 잡혀서 모두 처형 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는 장녀 손동희를 시켜서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이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기 직전 안재선을 용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학생을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구명활동을 하여 결국 그를 살려서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여 가족으로 함께 살도록 하였다.
"부친은 자신이 5년간 감옥생활을 견뎌내며 1, 2계명을 지켰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도 지켜야 하지 않느냐,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과거 5년 동안 헛고생만 한 것이 아니냐, 그를 살리고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 장녀 손동희 -
출처 : 고신뉴스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의 9가지 감사>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
3. 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하셔서 감사.
4. 한 아들 순교도 귀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 (臥席終身)하는 것도 큰복이라 하거늘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하였으니 주님께 감사.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두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안심되어 감사.
7. 내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감사.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
10. 순교자 손양원
1950년 손양원 목사는 6.25 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 가지 않고 나병환자를 계속 돌보았고 이후 공산군이 쳐들어와서 1950년 9월 13일 체포당해 15일간 여수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공산군이 퇴각할 당시 공산군은 그 과정에서 손양원 목사를 여수시 둔덕동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 결국 1950년 9월 29일 향년 49세의 나이로 순교!
"나덕환, 박재봉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가 피신하기를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아버지는 목자가 양떼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하셨고, 기독교는 잘살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잘 죽기위한 종교라며, 죽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애양원 식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장 10절, ‘죽도록 충성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습니다.
공산당에게 잡혀, 유치장에서도 자신의 밥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한 부친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여수 미평과수원에서 공산당들의 총에 맞아 48세로 순교하신 것입니다." - 손동희 -
"아버지가 순교했을 때에 가장 슬프게 울던 사람이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 손동희 -
출처 : 고신뉴스
<2010년 8월 15일 조선일보>
-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안경선 목사 이야기 -
高 3 겨울 아버지의 유언
"신학교에 가거라" 그리고…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진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故손양원 목사 그분은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학생을 양아들로 키웠던 겁니다 그분의 땅 '애양원' 내 '양할아버지'의 묘소를 이제서야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다.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원자탄'을 교회에서 단체로 보러 갔었어요. 여학생들 보려고 친구 따라 막 교회 나가던 즈음인데, 풋내기 어린 신자의 눈에도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손 목사님 생애는 크나큰 감동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하게 되었지요."
영화의 절정은 손양원 목사가 1948년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에서 두 아들을 잃는 대목이다. 반란군 쪽에 선 공산주의 추종 학생들에 의해 예수쟁이에 친미파라는 이유로 두 아들이 총살당하는 장면. 반란이 진압된 뒤 두 아들을 죽인 학생들 중 한 명이 체포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손 목사는 이 학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탄원한다.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고 애원하면서.
고교생이던 안씨는 이 대목에서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1년 뒤, 안씨는 손양원이라는 이름과 다시 만난다. 후두암을 앓던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4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979년 12월 19일. 빈소를 지키던 상주인 그에게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안씨의 손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책을 안겨주고 돌아갔다. "내가 네 작은 아버지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그제야 안씨는 아버지의 유언이 떠올랐다. "신학교에 가거라."
평소 맏아들이 교회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던 아버지였다. 당황스러웠는데 그 책이 모든 의문을 풀어줬다.
"영화의 원작이었어요. 저분이 아버지와 어떤 사이기에 장례식에 온 걸까, 이 책을 왜 나에게 준 걸까 의아해하다가 상을 치른 뒤 책을 찬찬히 읽어내려갔지요.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손양원 목사와 내 아버지의 관계를…. 그러니까…,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그 학생이 나의 아버지 안재선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양아들인 아버지가 목회하기를 원하셔서 부산고려고등성경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아버지도 신학 공부를 즐거워하셨고, 동기들과 교수들로부터 총명하고 유머러스한 신학도로 인기가 많았답니다. 빈민촌 공부방 교사로서도 열심히 활동했고요."
신학을 포기한 아버지 안씨는 손양원 목사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로 들어가 양식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한 뒤 일가족을 데리고 상경했다. 서울 상계동에 정착해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結 :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교 교정에 세워진 손양원 목사님 순교 시비
시인 고훈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당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워 남은 자의 아픔이 되겠습니다.
버림받은 한센병자들 아픔으로 쏟아내는 피고름
사랑으로 빨아낸 때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인 동신 두 아들
공산당의 총에 쓰러져 순교제물로 돌아온 날
자식 하나 순교자로 바침도 영광인데
둘이나 받으시니 하나님 실로 감사합니다.
눈물 흘리실 때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칠
두 아들 살해한 그 학생 양자로 삼던 날
사랑의 원자탄은 메마른 이 땅에 터지고
순교 십자가 지고 서서
기뻐 하늘 보던 날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남해가 보이는 애양원 동산에
당신 마저 순교자 되어
두 아들과 나란히 누우셨을 때
당신은 이 땅이 차마 감당치 못한 하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당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워 남은 자의 눈물이 되겠습니다.
1. 누가 가장 강한 사람인가? 누가 가장 존귀하고 높으신 분인가? 누가 가장 부유하신 분이신가? 누가 가장 복이 많으신 분이신가?
2. 성공신학 번영신학을 경계하라! 복음인 듯 하지만 복음이 아닐 수 있다.
3. 누구를 가장 닮고 싶으십니까?
나는 손양원 목사님을 닮아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나는 차마 못한다. 그래서 나는 가짜 목사이다.
사진 : 애양원을 찾은 안경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 순교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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