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워야”… 퇴임 앞둔 이시바 ‘전후 80년’ 견해 발표
김현예 기자
2025.10.10.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10일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개인 생각이 담긴 전후 80년 견해를 10일 내놨다. 퇴임을 앞둔 총리가 역사 문제에 대해 개인 생각을 내놓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시바 총리의 전후 80년 견해 발표에 대해 자민당 보수파 의원들이 반발을 인식해 이시바 총리는 이날 ‘일본이 왜 전쟁을 피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내용에만 집중했다. 온건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시바 총리는 이날 모두 발언에서 “전후 50년, 60년, 70년 총리 담화를 바탕으로 역사 인식은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중국에 대한 침략이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 발언 이후 질의 응답에서 이시바 총리는 역사인식에 대한 질문을 받자 자신의 견해가 “50년, 60년, 70년 담화를 계승하는 것”이라며 “기본 인식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반성과 사죄를 새롭게 더할 계획은 없다”는 말도 보탰다.
무라야마 도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1995년 일본의 패전(종전) 50주년을 맞은 8월 15일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담은 담화를 발표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10년에 한번꼴로 각의(국무회의) 결정을 거친 총리 담화를 내놨다. 전후 60주년 담화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2005년) 당시 총리가, 70주년 담화는 아베 신조(安倍晋三·2015년) 당시 총리가 내놓은 바 있다. 아베 전 총리는 담화에서 “후대에 계속 사죄하는 숙명을 지울 수는 없다”며 더 이상의 담화가 필요치 않다고 발언한 바 있다. 자민당 강경파들은 아베 담화를 근거로 전후 80년을 맞은 올해 이시바 총리의 담화를 반대한 바 있다.
이시바 총리는 이날 A4 용지 7장 분량으로 일본이 왜 전쟁을 피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일본 제국 헌법과 정부, 의회, 미디어(언론), 정보수집·분석의 5가지 관점으로 정리했는데, 그간 자신이 접한 책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감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와 군사를 통합하는 구조가 없었고, 정부가 군부 통제를 잃어버린 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군을 통제하려 했던 정치인이 살해되고 미디어 역시 ‘적극 전쟁 지지’에 나서면서 일본에 내셔널리즘이 높아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취지로 일반 국민들이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시바 총리는 이후 질의 응답에서 ‘사죄하는 숙명’을 언급한 아베 담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자주 언급해오던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와의 일화를 꺼내들었다. 리콴유 총리가 자신에게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느냐”고 물었지만 “교과서 레벨의 지식만 있어”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원점’이 된 이 일화를 꺼내들면서 그는 “우리는 잊어도 그 지역 사람들은 잊지 앉는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역사에 대해 성실히 마주하는 국가라는 인식을 각 나라들이 갖도록 하는 것은 국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시바, 전후 80주년 개인 메시지 발표 “역사인식 역대 내각 입장 계승”
군부 폭주 원인 검증에 대부분 할애
홍석재기자 Hani
수정 2025-10-10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10일 도쿄에서 전후 80주년 총리 개인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
이시바 총리는 이날 ‘전후 80년 소감’이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소감문을 보면 이시바 총리는 서두에 “전후 50주년, 60주년, 70주년 총리 담화가 그동안 나왔다. 역사인식에 관한 역대내각의 입장을 나도 계승한다”고 밝혔다. 일본 역대 총리들은 일본의 2차대전 패전 50주년이었던 1995년을 시작으로 10년 주기로 각의(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전후 담화를 발표해 일본 정부 공식 역사 인식을 나타내왔다.
-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전후 50주년 담화(무라야마 담화)에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반성하고 사죄했고
- 10년 뒤인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이를 계승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 2015년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역대 담화를 계승하면서도 “후대 아이들에게 사죄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며 ‘더이상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표명했다.
- 일본 보수파는 아베 담화로 충분하다며 이시바 총리에게 전후 80주년 담화를 내지 말라고 주장했고, 정권 기반이 취약했던 이시바 총리는 공식 담화가 아닌 개인 메시지를 낸 것에 그쳤다.
- 이시바 총리는 소감문에서 무라야마 담화 등을 계승한다고 했으나, 구체적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 등 역사 인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소감문 발표와 함께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는
- “과거 일본이 중국에서 아시아에서 어떤 것을 했는지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잊어도 그 지역 사람들은 잊고 있지 않다는 점을 잘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어 “일본이 외국에서 ‘역사에 성실히 마주하고 있는 나라다’라고 인식받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도 꼭 필요하다고 확신한다”고 발언했다.
이시바 총리 소감문 대부분은 일본이 왜 무모한 전쟁에 돌입하고 멈추지 못했는지를 검증하는 데 할애됐다. 그는 “과거 3번의 담화에는 왜 그 전쟁을 피하지 못했냐는 점에 대해서는 별달리 언급하지 않았다”고 운을 뗐다. 이어 당시 일본의 헌법 및 제도상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어려웠고 언론도 전쟁 여론에 편승해 군부가 폭주했다는 내용을 역사적 사례를 들며 길게 언급했다.
이시바 총리는 ‘오늘날의 교훈’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소감문 마지막 부분에 “전쟁 당시 언론이 여론을 선동해 국민을 무모한 전쟁으로 이끌었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상업주의에 빠지지 말고, 배타적 민족주의·차별·배외주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또한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함, 타자의 주장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는 관용이야말로 진정한 리버럴리즘”이라며 “건전하고 강인한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적었다.
이시바 총리는 이달 중순 이후 열리는 국회 총리 선거 뒤 공식 퇴임할 예정이다.
홍석재 특파원
==
김종민
·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가 쓴 전후 80년 소감. 정치인으로서의 역사인식과 통찰, 전쟁을 막지 못한 의회와 언론의 책임에 대한 부분은 우리도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할 때 어떤 참화가 발생하는지
지금 대한민국 정치가 고스란히 보여준다. 5공
전두환 정권 보다 더한 폭주를 하고 있는 이재명과
민주당은 역사 앞에 어떤 책임을 지려는가.
망국의 운명을 맞은 구한말 조선 정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 앞에 무기력한 국민, 무능하고 무책임한 언론은 언제 각성할 것인지
...........
전후 80년에 즈음하여
(시작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이 되었습니다.
이 80년 동안 우리 일본은 줄곧 평화국가로서의 길을 걸어왔으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진력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비롯하여, 모든 분들의 고귀한 목숨과 고난의 역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올해 3월의 이오지마 방문, 4월의 필리핀 카리라야 전몰자 위령비 참배, 6월의 오키나와 전몰자 추도식 참석과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방문, 8월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추도식 참석, 그리고 종전기념일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참석을 통해, 지난 전쟁의 교훈과 반성을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길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전후 50년, 60년, 70년의 시점마다 역대 내각총리대신 담화가 발표되어 왔으며,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이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세 차례의 담화에서는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후 70년 담화에서도 “일본은 외교적·경제적 교착을 힘의 행사로 해결하려 하였고, 국내 정치 체제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였다”는 한 구절이 있으나, 그 이상의 상세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국내의 정치 체제는 그 제동장치가 되지 못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세계가 총력전의 시대로 들어선 가운데, 개전 이전 내각이 설치한 ‘총력전연구소’나 육군성이 설치한 이른바 ‘아키마루(秋丸) 기관’ 등의 분석에 따르면, 패전은 이미 필연이었습니다. 많은 지식인들 또한 전쟁 수행의 어려움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군부의 수뇌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쟁을 피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모한 전쟁으로 돌진하여 국내외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는가.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전 총리가 “서서히 가난해지는 것을 피하려다 급격히 가난해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경고했음에도, 왜 우리는 그 큰 노선의 전환을 이루지 못했는가.
전후 80년의 이 시점에서, 저는 이러한 물음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문제점)
우선, 당시의 제도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전(戰前) 일본에는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장치가 없었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 아래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인 ‘통수권’이 독립된 것으로 간주되어, 정치와 군사의 관계에서 항상 정치, 곧 문민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원칙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권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국헌법하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각 국무대신이 대등한 관계로 규정되어 있었고, 총리가 내각의 수반이긴 했으나 내각을 통솔하기 위한 지휘·명령 권한은 제도상 부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러일전쟁 무렵까지는 원로들이 외교·군사·재정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사로서 군사에 종사한 경력을 지닌 원로들은 군사를 깊이 이해한 바탕 위에 이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말을 빌리면, “원로·중신 등 초헌법적 존재의 매개”가 국가 의사의 일원화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원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이러한 비공식적 장치가 약화된 뒤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아래에서 정당이 정치와 군사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세계적 격변을 초래하는 가운데 일본은 국제협조의 주요한 담당자 중 하나가 되었고,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을 맡았습니다. 1920년대 정부의 정책은 ‘시데하라(幣原) 외교’가 보여주었듯 제국주의적 팽창을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의 여론은 군에 엄격했고, 정당들은 대규모 군축을 주장했습니다. 군인들은 위축감을 느꼈고, 이에 대한 반발이 쇼와기에 군부가 대두하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종래 통수권은 작전 지휘에 관한 군령으로 한정되고, 예산이나 체제 정비에 관한 군정은 내각의 일원인 국무대신의 보필(輔弼) 사항으로 해석·운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문민통제 부재라는 제도상의 문제를 원로가, 이어서 정당이, 일종의 ‘운용’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부의 문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통수권의 의미는 점차 확대해석되었고, 그 ‘통수권의 독립’이 군의 정책 전반과 예산에 대한 정부 및 의회의 관여·통제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군부에 의해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당내각의 시대에는 정권 획득을 둘러싼 정당 간 스캔들 폭로전이 벌어지며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1930년에는 야당인 입헌정우회가 입헌민정당 내각을 흔들기 위해 해군의 일각과 손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간범(干犯: 침해한 자)’이라 주장하며 정부를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정부는 가까스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비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35년, 헌법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천황기관설’을 두고 입헌정우회가 정부 공격의 재료로 삼아 비난하면서, 군부까지 휘말린 정치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은 학설상의 문제는 “학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하여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으나, 결국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종래의 통설로 여겨지던 천황기관설을 부정하는 ‘국체명징 성명’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였고, 미노베의 저작은 발행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갔습니다.
(의회의 문제)
원래는 군에 대한 통제 기능을 수행해야 할 의회 또한 그 본래의 역할을 잃어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이토 다카오(齊藤隆夫) 중의원 의원 제명 사건입니다.
사이토 의원은 1940년 2월 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전쟁의 장기화를 비판하고, 전쟁의 목적에 대해 정부를 강하게 추궁하였습니다. 이른바 ‘반군(反軍) 연설’입니다.
이에 대해 육군은 “연설이 육군을 모욕했다”며 격렬히 반발하였고, 사이토 의원의 사임을 요구했습니다. 다수의 의원들이 이에 동조하여, 찬성 296표 대 반대 7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사이토 의원은 제명되었습니다.
의회 안에서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려 했던 드문 사례였지만, 당시의 회의록은 지금도 그 3분의 2가 삭제된 채 남아 있습니다.
군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한 예산 심의 기능에서도 의회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1937년 이후 ‘임시군사비특별회계’가 설치되어, 1942년부터 45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군사비를 그 아래에 편성하였으나, 예산서에는 세부 내역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고, 중의원·귀족원 모두 기본적으로 비밀 회의에서 짧은 시간 동안 심의를 진행하였으며, 그것은 ‘심의’라 부르기조차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전황이 악화되고 재정이 궁핍해지는 가운데서도, 육군과 해군은 조직의 이익과 체면을 걸고 예산을 둘러싸고 격렬히 다투었습니다.
다이쇼 말기에서 쇼와 초기에 걸쳐 15년 동안, 현직 총리 3명을 포함한 다수의 정치인들이 국수주의자나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암살된 인물들은 모두 국제협조를 중시하고 정치로써 군을 통제하려 했던 정치가들이었습니다.
5·15 사건과 2·26 사건을 비롯한 이러한 연쇄적 정치 테러들은 이후 의회와 정부 관계자를 비롯한 문민들이 군의 정책이나 예산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근본적으로 위축시켰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론의 문제)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언론의 문제입니다.
1920년대에 언론은 일본의 대외 팽창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언론인 시절의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은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 언론의 논조는 적극적인 전쟁 지지로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전쟁 보도가 잘 팔렸기 때문이었고, 각 신문사는 발행 부수를 대폭 늘렸습니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을 계기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자, 주요국들은 국내 산업 보호를 내세워 고율 관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수출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불황을 배경으로 내셔널리즘이 고조되었고, 독일에서는 나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당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주요국 가운데 오직 소련만이 발전하고 있는 듯 보이면서, 사상계에서도 자유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났고, 영미의 시대는 저물었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그 결과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수용하는 토양이 형성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불과 1년 반 만에 일본 본토의 몇 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신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많은 국민은 그 성과에 열광하며 내셔널리즘이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일본 외교에 대하여,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만주사변에서의 군부의 자의적 행동을 비판하였고, 기요사와 기요시(清沢洌)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의 국제연맹 탈퇴를 강하게 비판하는 등 일부 예리한 비판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1937년 가을 무렵부터 언론 통제가 강화되면서 정책에 대한 비판은 봉쇄되었고,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논조만이 국민에게 전달되게 되었습니다.
(정보 수집·분석의 문제)
당시 정부를 비롯한 우리나라가 국제 정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련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동맹을 독일과 협의하던 중이던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 사이에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고, 당시의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 내각은 “유럽의 천지는 복잡하고 기괴한 새로운 정세를 낳았다”고 하며 총사직하였습니다.
국제 정세와 군사 정세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는가, 얻은 정보를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적절히 공유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위한 교훈)
전후 일본에 있어 문민통제는 제도로서 정비되어 있습니다. 일본국 헌법에는 내각총리대신과 기타 국무대신은 문민이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위대는 자위대법상 내각총리대신의 지휘 아래에 두어져 있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이 내각의 수장임과 동시에, 내각은 국회에 대해 연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이 일본국 헌법에 명기되어 있어, 내각의 통일성이 제도적으로 확보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설치되어 외교와 안전보장의 종합 조정이 강화되었습니다. 정보 수집과 분석에 관한 정부의 체제도 개선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더욱 발전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구조가 없고, 통수권의 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군부가 독주하였던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제도적 보완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제도에 불과하며, 그것이 적절히 운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정치 쪽은 자위대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식견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현재의 문민통제 제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운용해 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굴하지 않고, 대세에 휩쓸리지 않는 정치가로서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위대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 군사 정세와 장비, 부대 운용에 대해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입장에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치는 조직의 칸막이를 넘어 이를 통합할 책임이 있습니다. 조직이 할거하거나 대립하여 일본의 국익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육군과 해군이 각자의 조직 논리를 우선시하며 대립하고, 그 내부에서조차 군령과 군정이 연계되지 않아 국가로서의 의사를 일원화하지 못한 채 전쟁으로 향했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는 언제나 국민 전체의 이익과 복지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합니다. 책임의 소재가 불명확하고 상황이 교착될 때에는 성공 가능성이 낮고 위험이 크더라도, 호전적인 목소리나 대담한 해결책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입니다.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군령부 총장은 개전을 수술에 비유하며, “상당한 걱정은 있지만 이 큰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대결심을 가지고 국난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싸우지 않으면 망국이라 판단했지만, 싸움 또한 망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나라가 망한다면 혼까지 잃는 진정한 망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에 대해 “사람은 가끔은 기요미즈 무대(淸水舞臺: 교토의 유명한 청수사 높은 곳)에서 눈을 감고 뛰어내리는 결단도 필요하다”고 압박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보다 정신적·감정적 판단이 중시됨으로써 국가의 진로를 잘못 선택했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제동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의회와 언론입니다.
국회는 헌법에 의해 부여된 권능을 행사함으로써 정부의 활동을 적절히 감시하는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정치는 일시적인 여론에 영합하거나 인기 위주의 정책으로 국익을 해치는 당리당략과 자기보호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명감을 지닌 저널리즘을 포함한 건전한 언론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대전(大戰)에서도 언론이 여론을 선동하여 국민을 무모한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과도한 상업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며, 편협한 내셔널리즘이나 차별, 배외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아베 전 총리가 귀중한 생명을 잃은 사건을 포함하여, 폭력에 의한 정치의 유린이나 자유로운 언론을 위협하는 차별적 언사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역사로부터 배우는 자세입니다.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함, 타인의 주장에도 겸허히 귀 기울이는 관용을 지닌 본래의 자유주의, 그리고 건전하고 강인한 민주주의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갈파(喝破)했듯이,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한 정치 형태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비용과 시간이 들며, 때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언제나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하며, 그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자위(自衛)와 억제를 위해 실력을 가진 조직을 보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억제론을 부정하는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현재의 안보 환경 속에서 그것은 책임 있는 안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현실입니다.
동시에, 한 나라에서 비할 데 없는 힘을 가진 실력 조직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폭주한다면,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붕괴될 수 있는 취약한 것입니다. 반대로, 문민인 정치가가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으로 향하는 일도 결코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민통제, 적절한 정군(政軍) 관계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부, 의회, 실력 조직, 언론 모두가 이를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이토 다카오 의원은 ‘반군(反軍) 연설’에서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는 것이 전쟁이다”라고 논하며, 이를 무시하고 ‘성전(聖戦)’이라는 미명 아래 국가 백년의 대계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하여, 현실주의에 기반한 정책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그 결과 중의원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이듬해 중의원 방공법(防空法) 위원회에서 육군성은 공습 시 시민이 대피하는 것은 전쟁 지속 의지의 붕괴를 의미한다며 이를 부정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먼 과거의 일이지만, 의회의 책임 포기, 정신주의의 팽배, 그리고 생명과 인권을 경시하는 공포를 전하기에 충분합니다.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밝은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중요성은, 우리나라가 전후 가장 엄중하고 복잡한 안보 환경에 놓여 있는 지금이야말로 다시금 인식되어야 합니다.
전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기억의 풍화가 우려되는 지금이기에, 젊은 세대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과거의 대전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미래에 살려 나감으로써, 평화국가로서의 초석이 더욱 굳건히 다져질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지난 전쟁의 다양한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고, 다시는 그러한 참화를 반복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
==
이충원
·
이시바 일본 총리가 하고 싶었던 말
약간의 배경 설명을 덧붙이자면...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그리고 패전으로 이어진 일련의 일들이 '군(軍)'의 폭주 탓에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전후 일본 헌법에서 9조(군대 보유 금지)를 요구했을 때 이를 받아들인 것은 천황제 유지와의 교환조건이기도 했지만,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폭주하는 군을 있어도 없는 것처럼 만들려는 의도이기도 한 것이죠.
하지만 미국이 더이상 일본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우리는 빠질 테니(혹은 역할을 줄일 테니) 동북아 안보에서 일본이 더 역할을 하라'라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개헌 논의('자위군 명기')가 불거진 것인데요.
이때 고민은 헌법에 명기된 기관이 될 군의 폭주를 어떻게 막을까 하는 점이죠.
이시바 총리는 그걸 '문민 통제의 강화'에서 찾으려고 한 듯하네요. 일본의 개헌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김동규
·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수상의 전후 80년 소감 (전문번역)
* 명문입니다. 꼭들 읽어보세요.
전후 80년에 즈음하여
(시작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이 되었습니다.
이 80년 동안 우리 일본은 줄곧 평화국가로서의 길을 걸어왔으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진력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비롯하여, 모든 분들의 고귀한 목숨과 고난의 역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올해 3월의 이오지마 방문, 4월의 필리핀 카리라야 전몰자 위령비 참배, 6월의 오키나와 전몰자 추도식 참석과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방문, 8월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추도식 참석, 그리고 종전기념일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참석을 통해, 지난 전쟁의 교훈과 반성을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길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전후 50년, 60년, 70년의 시점마다 역대 내각총리대신 담화가 발표되어 왔으며,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이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세 차례의 담화에서는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후 70년 담화에서도 “일본은 외교적·경제적 교착을 힘의 행사로 해결하려 하였고, 국내 정치 체제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였다”는 한 구절이 있으나, 그 이상의 상세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국내의 정치 체제는 그 제동장치가 되지 못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세계가 총력전의 시대로 들어선 가운데, 개전 이전 내각이 설치한 ‘총력전연구소’나 육군성이 설치한 이른바 ‘아키마루(秋丸) 기관’ 등의 분석에 따르면, 패전은 이미 필연이었습니다. 많은 지식인들 또한 전쟁 수행의 어려움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군부의 수뇌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쟁을 피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모한 전쟁으로 돌진하여 국내외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는가.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전 총리가 “서서히 가난해지는 것을 피하려다 급격히 가난해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경고했음에도, 왜 우리는 그 큰 노선의 전환을 이루지 못했는가.
전후 80년의 이 시점에서, 저는 이러한 물음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문제점)
우선, 당시의 제도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전(戰前) 일본에는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장치가 없었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 아래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인 ‘통수권’이 독립된 것으로 간주되어, 정치와 군사의 관계에서 항상 정치, 곧 문민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원칙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권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국헌법하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각 국무대신이 대등한 관계로 규정되어 있었고, 총리가 내각의 수반이긴 했으나 내각을 통솔하기 위한 지휘·명령 권한은 제도상 부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러일전쟁 무렵까지는 원로들이 외교·군사·재정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사로서 군사에 종사한 경력을 지닌 원로들은 군사를 깊이 이해한 바탕 위에 이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말을 빌리면, “원로·중신 등 초헌법적 존재의 매개”가 국가 의사의 일원화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원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이러한 비공식적 장치가 약화된 뒤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아래에서 정당이 정치와 군사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세계적 격변을 초래하는 가운데 일본은 국제협조의 주요한 담당자 중 하나가 되었고,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을 맡았습니다. 1920년대 정부의 정책은 ‘시데하라(幣原) 외교’가 보여주었듯 제국주의적 팽창을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의 여론은 군에 엄격했고, 정당들은 대규모 군축을 주장했습니다. 군인들은 위축감을 느꼈고, 이에 대한 반발이 쇼와기에 군부가 대두하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종래 통수권은 작전 지휘에 관한 군령으로 한정되고, 예산이나 체제 정비에 관한 군정은 내각의 일원인 국무대신의 보필(輔弼) 사항으로 해석·운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문민통제 부재라는 제도상의 문제를 원로가, 이어서 정당이, 일종의 ‘운용’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부의 문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통수권의 의미는 점차 확대해석되었고, 그 ‘통수권의 독립’이 군의 정책 전반과 예산에 대한 정부 및 의회의 관여·통제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군부에 의해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당내각의 시대에는 정권 획득을 둘러싼 정당 간 스캔들 폭로전이 벌어지며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1930년에는 야당인 입헌정우회가 입헌민정당 내각을 흔들기 위해 해군의 일각과 손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간범(干犯: 침해한 자)’이라 주장하며 정부를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정부는 가까스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비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35년, 헌법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천황기관설’을 두고 입헌정우회가 정부 공격의 재료로 삼아 비난하면서, 군부까지 휘말린 정치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은 학설상의 문제는 “학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하여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으나, 결국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종래의 통설로 여겨지던 천황기관설을 부정하는 ‘국체명징 성명’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였고, 미노베의 저작은 발행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갔습니다.
(의회의 문제)
원래는 군에 대한 통제 기능을 수행해야 할 의회 또한 그 본래의 역할을 잃어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이토 다카오(齊藤隆夫) 중의원 의원 제명 사건입니다.
사이토 의원은 1940년 2월 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전쟁의 장기화를 비판하고, 전쟁의 목적에 대해 정부를 강하게 추궁하였습니다. 이른바 ‘반군(反軍) 연설’입니다.
이에 대해 육군은 “연설이 육군을 모욕했다”며 격렬히 반발하였고, 사이토 의원의 사임을 요구했습니다. 다수의 의원들이 이에 동조하여, 찬성 296표 대 반대 7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사이토 의원은 제명되었습니다.
의회 안에서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려 했던 드문 사례였지만, 당시의 회의록은 지금도 그 3분의 2가 삭제된 채 남아 있습니다.
군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한 예산 심의 기능에서도 의회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1937년 이후 ‘임시군사비특별회계’가 설치되어, 1942년부터 45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군사비를 그 아래에 편성하였으나, 예산서에는 세부 내역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고, 중의원·귀족원 모두 기본적으로 비밀 회의에서 짧은 시간 동안 심의를 진행하였으며, 그것은 ‘심의’라 부르기조차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전황이 악화되고 재정이 궁핍해지는 가운데서도, 육군과 해군은 조직의 이익과 체면을 걸고 예산을 둘러싸고 격렬히 다투었습니다.
다이쇼 말기에서 쇼와 초기에 걸쳐 15년 동안, 현직 총리 3명을 포함한 다수의 정치인들이 국수주의자나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암살된 인물들은 모두 국제협조를 중시하고 정치로써 군을 통제하려 했던 정치가들이었습니다.
5·15 사건과 2·26 사건을 비롯한 이러한 연쇄적 정치 테러들은 이후 의회와 정부 관계자를 비롯한 문민들이 군의 정책이나 예산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근본적으로 위축시켰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론의 문제)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언론의 문제입니다.
1920년대에 언론은 일본의 대외 팽창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언론인 시절의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은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 언론의 논조는 적극적인 전쟁 지지로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전쟁 보도가 잘 팔렸기 때문이었고, 각 신문사는 발행 부수를 대폭 늘렸습니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을 계기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자, 주요국들은 국내 산업 보호를 내세워 고율 관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수출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불황을 배경으로 내셔널리즘이 고조되었고, 독일에서는 나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당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주요국 가운데 오직 소련만이 발전하고 있는 듯 보이면서, 사상계에서도 자유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났고, 영미의 시대는 저물었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그 결과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수용하는 토양이 형성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불과 1년 반 만에 일본 본토의 몇 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신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많은 국민은 그 성과에 열광하며 내셔널리즘이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일본 외교에 대하여,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만주사변에서의 군부의 자의적 행동을 비판하였고, 기요사와 기요시(清沢洌)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의 국제연맹 탈퇴를 강하게 비판하는 등 일부 예리한 비판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1937년 가을 무렵부터 언론 통제가 강화되면서 정책에 대한 비판은 봉쇄되었고,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논조만이 국민에게 전달되게 되었습니다.
(정보 수집·분석의 문제)
당시 정부를 비롯한 우리나라가 국제 정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련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동맹을 독일과 협의하던 중이던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 사이에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고, 당시의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 내각은 “유럽의 천지는 복잡하고 기괴한 새로운 정세를 낳았다”고 하며 총사직하였습니다.
국제 정세와 군사 정세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는가, 얻은 정보를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적절히 공유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위한 교훈)
전후 일본에 있어 문민통제는 제도로서 정비되어 있습니다. 일본국 헌법에는 내각총리대신과 기타 국무대신은 문민이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위대는 자위대법상 내각총리대신의 지휘 아래에 두어져 있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이 내각의 수장임과 동시에, 내각은 국회에 대해 연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이 일본국 헌법에 명기되어 있어, 내각의 통일성이 제도적으로 확보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설치되어 외교와 안전보장의 종합 조정이 강화되었습니다. 정보 수집과 분석에 관한 정부의 체제도 개선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더욱 발전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구조가 없고, 통수권의 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군부가 독주하였던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제도적 보완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제도에 불과하며, 그것이 적절히 운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정치 쪽은 자위대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식견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현재의 문민통제 제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운용해 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굴하지 않고, 대세에 휩쓸리지 않는 정치가로서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위대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 군사 정세와 장비, 부대 운용에 대해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입장에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치는 조직의 칸막이를 넘어 이를 통합할 책임이 있습니다. 조직이 할거하거나 대립하여 일본의 국익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육군과 해군이 각자의 조직 논리를 우선시하며 대립하고, 그 내부에서조차 군령과 군정이 연계되지 않아 국가로서의 의사를 일원화하지 못한 채 전쟁으로 향했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는 언제나 국민 전체의 이익과 복지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합니다. 책임의 소재가 불명확하고 상황이 교착될 때에는 성공 가능성이 낮고 위험이 크더라도, 호전적인 목소리나 대담한 해결책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입니다.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군령부 총장은 개전을 수술에 비유하며, “상당한 걱정은 있지만 이 큰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대결심을 가지고 국난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싸우지 않으면 망국이라 판단했지만, 싸움 또한 망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나라가 망한다면 혼까지 잃는 진정한 망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에 대해 “사람은 가끔은 기요미즈 무대(淸水舞臺: 교토의 유명한 청수사 높은 곳)에서 눈을 감고 뛰어내리는 결단도 필요하다”고 압박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보다 정신적·감정적 판단이 중시됨으로써 국가의 진로를 잘못 선택했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제동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의회와 언론입니다.
국회는 헌법에 의해 부여된 권능을 행사함으로써 정부의 활동을 적절히 감시하는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정치는 일시적인 여론에 영합하거나 인기 위주의 정책으로 국익을 해치는 당리당략과 자기보호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명감을 지닌 저널리즘을 포함한 건전한 언론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대전(大戰)에서도 언론이 여론을 선동하여 국민을 무모한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과도한 상업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며, 편협한 내셔널리즘이나 차별, 배외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아베 전 총리가 귀중한 생명을 잃은 사건을 포함하여, 폭력에 의한 정치의 유린이나 자유로운 언론을 위협하는 차별적 언사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역사로부터 배우는 자세입니다.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함, 타인의 주장에도 겸허히 귀 기울이는 관용을 지닌 본래의 자유주의, 그리고 건전하고 강인한 민주주의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갈파(喝破)했듯이,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한 정치 형태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비용과 시간이 들며, 때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언제나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하며, 그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자위(自衛)와 억제를 위해 실력을 가진 조직을 보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억제론을 부정하는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현재의 안보 환경 속에서 그것은 책임 있는 안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현실입니다.
동시에, 한 나라에서 비할 데 없는 힘을 가진 실력 조직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폭주한다면,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붕괴될 수 있는 취약한 것입니다. 반대로, 문민인 정치가가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으로 향하는 일도 결코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민통제, 적절한 정군(政軍) 관계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부, 의회, 실력 조직, 언론 모두가 이를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이토 다카오 의원은 ‘반군(反軍) 연설’에서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는 것이 전쟁이다”라고 논하며, 이를 무시하고 ‘성전(聖戦)’이라는 미명 아래 국가 백년의 대계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하여, 현실주의에 기반한 정책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그 결과 중의원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이듬해 중의원 방공법(防空法) 위원회에서 육군성은 공습 시 시민이 대피하는 것은 전쟁 지속 의지의 붕괴를 의미한다며 이를 부정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먼 과거의 일이지만, 의회의 책임 포기, 정신주의의 팽배, 그리고 생명과 인권을 경시하는 공포를 전하기에 충분합니다.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밝은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중요성은, 우리나라가 전후 가장 엄중하고 복잡한 안보 환경에 놓여 있는 지금이야말로 다시금 인식되어야 합니다.
전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기억의 풍화가 우려되는 지금이기에, 젊은 세대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과거의 대전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미래에 살려 나감으로써, 평화국가로서의 초석이 더욱 굳건히 다져질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지난 전쟁의 다양한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고, 다시는 그러한 참화를 반복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
==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전후 80년 소감' 커멘트>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전후 80년을 맞아 발표한 이 소감문은, 일본의 과거 전쟁에 대한 인식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텍스트입니다. 특히, 역대 총리 담화와는 달리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깊이 천착하려는 시도가 돋보입니다.
1. 담론의 구조와 강점: '제도적 실패'에 대한 집요한 분석
근본적인 질문의 던짐: 역대 담화가 주로 전쟁의 피해와 반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소감문은 '왜'라는 질문, 즉 **전쟁을 막지 못한 '일본 내부의 구조적, 제도적 실패'**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부적인 원인 분석: 실패의 원인을 <대일본제국헌법의 문제점(문민통제 부재, 통수권 독립)>, <정부의 문제(군부 통제력 상실)>, <의회의 문제(사이토 다카오 제명 등 책임 포기)>, <언론의 문제(전쟁 선동)>, 그리고 <정보 수집·분석의 문제>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막연한 '군국주의' 비판을 넘어선,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정신주의'에 대한 경계: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이나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의 발언을 인용하며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보다 정신적·감정적 판단'이 국가의 진로를 잘못 이끌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현재 일본 사회에도 남아있는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2. 한계와 아쉬운 지점: '가해'와 '책임'의 모호성
'식민지배'와 '침략'의 명시성 부족: 소감문 전체에서 '침략'이나 '가해 행위', '식민지배'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국내외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는 했지만, 전쟁의 성격(침략 전쟁)과 피해자(주변국 국민)에 대한 책임 인정의 강도가 역대 담화에 비해 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내부 문제에 집중하는 시각: 전쟁을 막지 못한 '내부의 제도적 결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일본이 취했던 '대외적인 정책', 즉 제국주의적 팽창 욕구 자체가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음은 다소 희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내부의 제동장치만 잘 작동했더라면 전쟁을 피했을 것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겨, 근본적인 '사상적/정책적 잘못'에 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집니다.
3. 현재와 미래에 대한 함의: '운용의 중요성' 강조
문민통제의 재강조: 현재 일본의 문민통제 제도가 제도적으로는 잘 갖춰져 있음을 설명하면서도, '제도에 불과하며, 그것이 적절히 운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현재의 일본 정치인과 자위대에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건강한 민주주의와 언론의 역할: 국회, 언론, 국민에게 '역사로부터 배우는 자세', '건전하고 강인한 민주주의', '사명감을 지닌 저널리즘'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촉구합니다. 이는 최근 일본 정치 상황에서 불거진 다양한 논란(특정 정치인에 대한 폭력, 언론의 기능 약화 우려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총평:
이시바 총리의 소감문은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전쟁으로의 경로'를 가능하게 한 일본 내부 시스템의 결함을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현재의 민주주의와 문민통제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교훈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측면(일본 국민의 희생)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 주변국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책임과 침략 전쟁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 모호한 점은 외교적 논란의 여지를 남길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 국내의 지지층과 국제 사회의 평가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 노력의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