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9

손민석 -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



(6) 손민석 -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

6월 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간단하게 고찰하자면 한국의 근대화가 질적인 전환이 이뤄지는 계기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근대가 서유럽, 그 중에서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어떤 권역 속에서 나타났다고 했을 때 우리는 후발주자로 독일과 일본을 꼽으며 그 후후발주자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을 꼽는다.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의 탄생이라는 ‘첫번째 16세기’와 세계자본주의의 완성인 19세기, 즉 ‘두번째 16세기’ 외에도 20세기에 ‘세번째 16세기’를 맞이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21세기 초반부터 진행되고 있는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세안 지역의 자본주의화를 “네번째 16세기”라 명명하고 싶다. 그런데 앞선 두 16세기와 달리 세번째 16세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함은 자신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 점진적으로 근대를 추구해나갔다기보다는, “체제 경쟁”이라는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선도적으로 근대적 형식이 도입된 뒤에 그 내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찾아져야 한다. 예컨대 한국은 1948년 건국헌법에서 이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보장이 이뤄진 상황에서 출발했다. 당위로서의 헌법과 실재간의 간극에서 이미 모순이 나타나고 있던 셈이다.

여기서 민주주의와 경제개발간의 관계에 관한 지난한 논쟁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 현대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어떻게 6월 항쟁의 조건이 성숙해졌는지, 또 그러한 과정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와 어떠한 연관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지 권위주의가 필연적이였는지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의 필연성에 대해 왜 논하지 않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이고자 해도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자의적인가. 바로 근대화의 종료 시점을 설정한다는 지점에서 자의적이게 된다. 이 근대화의 종료 시점은 쉐보르스키의 연구를 빌어 소득이 5천불 이상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전복되지 않기에 5천불 이상으로 잡아야 하는가? 한국의 국민소득이 5천불을 달성한 시기는 내 기억으로 노태우 정부 시기이다. 이미 민주화가 달성된 뒤인데, 이때를 근대화의 종료 시기로 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권위주의와 경제개발간의 관계성도 달리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3천불, 5천불 등으로 나눠서 보는 이 기준 자체도 상당히 자의적이다. 권위주의와 경제개발간의 ‘필연성’을 논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자의성”의 극대화로 귀결된다.

덧붙여 권위주의와 경제개발간의 필연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어째서 권위주의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는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지도력 등을 이유로 내걸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당시 한국에 근대화에 반대할 세력이 존재했는가인데,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부르주아에 대항했던 계급은 귀족을 포함한 지주계급이었다.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이 사실상 소멸된 한국에서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적 계급이 존재했다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가 필연적이라면 어떤 사회적 계급을 제압하기 위해 그 권위주의가 필요했는가를 물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춘 사회적 계급이 있었다고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실재와 상당히 유리된 인식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근대화’라는 명분에 반대하는 사회적 집단이 존재했는가 이 점에서도 상당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몇 가지 지점에서 권위주의와 경제개발의 필연성을 논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지난하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 현대사의 전개 속에서 어떻게 6월 항쟁의 조건이 성숙해졌는지 또 그러한 과정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와 어떠한 연관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이뤄진 경제개발의 특징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식의 경제개발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박정희의 표현처럼 “지도받는 자본주의”라 표현할 수 있다. 이 체제는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박정희가 주최한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를 두 축으로 삼아 진행되었다. 1965년 1월부터 시작한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는 1979년까지 총 147회가 개최되었는데, 박정희가 참여하지 않은 회의는 1972년 5월 단 한 차례였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1966년부터 1979년까지 거의 매월 개최되어 총 152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중 박정희가 참여하지 않은 회의는 고작 5번이었다. 이렇듯 박정희의 열성적인 참여와 지속적인 관심 하에서 한국의 경제는 국가의 지도 아래 발전해나갔다. 이 경제기획원을 많은 이들은 부정적으로 보지만 나는 이것이 한국과 같은 소규모 국가에 경우에 매우 필요한 기구라 생각한다. 경제기획원 국장급 인사가 되면 따로 세미나를 하면서 한국 경제 전체 현황에 대해 거시적인 시각을 기르는 교육과 함께 세계 경제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한국 경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논의하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이들의 거시적인 시야 속에서 행정부와 재벌을 비롯한 각종 이해관계자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경제기획원은 어찌됐든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와 그를 뒷받침하는 군사정권의 물리력에 어느정도 의존하고 있었기에, 다시 말해 스스로를 정당화할 논리를 갖추지 못했기에 박정희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몰락해가게 된다.

이 경제기획원의 몰락과 해체의 과정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진행된 경제개발의 결과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례 연구를 보다 더 진행할 필요가 있지만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른 반발이 무엇보다도 가장 직접적으로 경제기획원에 대한 반발을 키웠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조정이 권위주의라는 조건 하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발은 경제기획원이 속해 있는 행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경제기획원의 무용성을 은연중에 유포했으며 결정적으로 79년의 박정희 정권의 붕괴는 박정희식 계획경제가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다는 광범위한 동의를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은 박정희식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진행이 한국 사회에서 6월항쟁을 낳는 주요한 조건이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전두환 정권의 여러 자유화 정책과 몰락은 민주화 세력의 도전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이전의 경제개발 과정 속에서 누적된 모순이 표출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경제체제의 전환 과정 속에서 경제기획원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종국에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민주화의 진행과정이란 동시에 국가에 의한 개입을 보장하던 통로, 즉 경제기획원을 해체해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적인 계기는 역시나 6월 항쟁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형성된 모순을 전두환 정권이 해소하는 과정에서 자유화 정책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틈과 함께 지속적으로 성장한 민주화 세력이 종국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을 포함한 권위주의의 종말이라는 6월 항쟁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자유화 과정은, 경제기획원의 해체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경제기획원 국장조차도 경제기획원의 필요성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못했고 민주화 세력 출신의 정치인들은 경제기획원을 권위주의=관치와 등치시켜 그것으 해체가 민주화인양 발언했다) 그 이후의 한국 사회에 경제기획원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논하지 못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오직 마르크스의 이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작업은 별개로 쓰고 있는 책이 있다. 그 책과 후속 작업에서 많이 해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한국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간의 갈등, 정부의 행정부 부처간의 갈등과 통합의 부재, 거시적인 시야에서의 한국 경제를 조정할 집단의 부재 등등이 현재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를 비롯해 많은 정부가 사회통합을 내세우며 집권했던 것도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계급투쟁 및 갈등을 조정할 사회적 기구가 없다는 점에서 찾아야 하고 그것의 기원은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잉태된 모순의 전개 과정을 통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일본의 통산성과 같은 기구를 보며 정부 부처와 각종 이해당사자를 조정하고 거시적인 시야에서 경제와 사회를 바라보는 기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이전처럼 권위주의에서 그 기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당에 의한 민주적인 통제 속에서 그 기반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기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이 한국사회가 당면한 과제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6월 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찾고자 한다. 요약하자면 6월 항쟁은 민주화 세력의 대두와 함께 이전의 박정희 정권의 계획경제의 붕괴 과정에서 나타난 경제체제의 전환이라는 조건이 충족이 낳은 의미 있는 결과이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사회통합력 혹은 사회조정력을 담당할 사회적 기구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의 갈등과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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