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2

서평 : 독창적 철학체계 확립자의 인생 반추기 - 『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 ( 황장엽지음 , 도시출판 한울 , 1999 ) -

서평 : 독창적 철학체계 확립자의 인생 반추기 - 『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 ( 황장엽지음 , 도시출판 한울 ,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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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개인은 과연 왜소할까?

redbrown2001.05.30http://m.blog.yes24.com/redbrown/post/204907댓글 수 0




[도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황장엽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1999년에 나온 책이지만 최근 송두율과 관련된 부분도 있고 이제까지 월남한 북한의 최고위층 인물로서 북한의 내일을 보는 좋은 창(window)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서평을 올립니다.

황장엽의 성장기

황장엽은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지만 황장엽은 어린 시절부터 싸움을 내켜하지 않았고 몸도 약했다. 황장엽은 17세때인 전조선주산경기의 우승을 통해 사람의 정신을 흥분시키는 것은 육체이며 따라서 정신을 강화하려면 육체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이후 성장하면서 황장엽은 자주 식사를 걸렀고 잠을 덜 잤으며, 단식을 하기도 했다(p. 52). 이러한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은 그의 유학시절에도 드러나 일본과 모스크바에서의 유학 생활에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모스크바 유학 시절은 황장엽의 일생을 관통하던 사회주의의 바탕을 만든 곳이었다. 그의 개인적 성격과 모스크바 유학시절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철학에 관심을 두도록 만들었고 특히 인류의 미래는 사회주의에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p. 88).

김정일에 대한 인식

이 책에서 드러나는 김정일에 대한 황장엽의 태도는 일면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김정일에 대한 황장엽의 이중적 인식은 개인적으로 황장엽이 김정일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서 본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또다른 이유는 황장엽이 김정일의 정치적 부상을 어느 정도 도운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간간히 드러나는 부분에 의거하면 김정일도 그를 중요시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황장엽의 김정일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적 측면

정치적으로 황장엽이 김일성을 어느 정도 지도자로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책의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다. 1959년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동반한 김정일이 김일성을 보좌했다는 점이나 당시 수행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받았다는 점, 소련이 아닌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겠다는 김정일의 발언 등은 김정일이 당시 17세 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미 그의 상당한 정치적 자질을 엿 볼 수 있는 점이다(pp. 126-127). 황장엽의 회고를 빌리면 김정일의 정치적 부상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1966년(당시 24세)부터 정치적으로 자신의 경쟁자나 라이벌들(예를 들면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견제히였으며(p. 147), 1972년(당시 30세)에는 김영주와 심각한 권력 투쟁을 벌여 여기서 승리했고 이 시점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pp. 168-169). 이러한 김정일의 후계자로서의 부상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은 김정일의 후계자로서의 결정에 기존의 원로 항일투사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며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택된 것은 장기간의 일인집권과 이의 공고화때문이라고 말한다(p. 172). 특히 군 경력이 전무한 김정일이 군을 지금과 같이 철저하게 장악한 것은 김일성의 권위 때문이기도 군에 대한 그의 관심이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황장엽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p. 322). 또한 김정일의 행정 장악에 있어서도 당 중앙위원회에서 올린 보고서를 모두 읽는다는 점(p. 306)은 김정일이 행정력이나 집중력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정일은 자신에게 올라온 글은 직접도 읽지만 '216호실'(선전부)에 회람시킨다는 증언은 김정일이 독단적이지 않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p. 239). 따라서 김정일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황장엽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p. 309).

개인적 측면

그러나 개인적인 측면에서 황장엽은 김정일을 심하게 비난하고 있다. 황장엽은 김정일의 정치적 능력을 그의 권력욕 때문이라고 말하며(p. 126). 김정일이 정치적으로는 영리하지만 성격이 과격하고 질투심이 강하여 지도자 감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있다(p. 138). 특히 김일성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친 교수의 말을 빌어 김정일은 복잡하고 어려운 책은 참을성이 없고 탐구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읽지 못했다(p. 230)는 평가는, 당 중앙위원호의 보고서를 일일이 읽어보고 자신의 일을 직접했다는 평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황장엽의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김정일에 의한 개인적 서운함에 그 원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은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1988년 국제부 비서에서 밀려났던 일, 금강산 관광안의 무산, 1996년 논문에 대한 김정일의 비판 등으로 김정일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졌던 것을 회고록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김정일에 대한 비판은 북한이 김정일의 집권과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그의 비판과 유사하다. 황장엽은 74년 이전까지는 북한 체제가 그런 대로 괜찮았으나 김정일이 정권을 장악한 1974년경부터 정치·경제 모든 분야에서 북한이 실패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pp. 308-309).

대북정책

황장엽은 기본적으로 체제의 몰락은 외부적 요인이기보다는 내부적 분열에 기인한다고 말한다(p. 299). 따라서 그는 북한을 변화는 단기적이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되어야 하며 김정일 이후 김정일과 같은 지도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김정일 정권만 붕괴시키면 북한은 개혁·개방으로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p. 331). 그는 현 북한 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으면서도 당장에 붕괴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p. 18) 김정일 정권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p. 329).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남한 내 보수진영의 주장과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는 북한체제가 붕괴하지 않은 것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보면서 북한지도부가 얻은 교훈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지도부는 소련 및 동구권 붕괴의 원인으로 첫째, 스탈린의 개인 숭배를 비판하면서 독재를 약화시킨 것. 둘째, 1975년 헬싱키 회의에서 인권 문제에 대해 양보한 것, 셋째, 고르바초프가 군비를 약화시킨 것(pp. 328-329).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고 본다.

결 론

황장엽의 망명은 199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획기적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최고위층의 망명은 한국 정부 및 보수 한국인들에게 "북한 나쁜 나라론"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는 계기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내의 보수주의

[인상깊은구절]
개인의 생명은 가족의 생명보다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민족의 생명보다는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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