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2

1705 박노자 ‘레닌주의’는 신주단지인가?


‘레닌주의’는 신주단지인가?

‘레닌주의’는 신주단지인가?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2017.05.23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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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 레닌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관한 글이다. 박노자 교수는 이 글에서 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에 경직된 태도를 보이면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기는 태도를 비판하며 이론적 혁신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92734)을 옮겨 싣도록 허락해준 박노자 교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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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는 <노동자연대> 분들의 정성진 선생님 비판 (https://wspaper.org/article/18693 )에 대한 제 반박입니다.
저는 레닌주의를 진정으로 따르자면 기존 레닌주의의 미비점, 결점부터 보완하여, 레닌이 다 못한 이론적 작업들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불가에서 하는 말로 逢佛殺佛逢祖殺祖(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인지라,진정으로 불조의 혜명을 이어받자면 "지금, 여기에서" 하화중생할 수 있는 부처를 나나 타자 안에서 발견해야 되고, 굳이 이미 죽은 글자들에 옭매일 일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레닌주의의 혁명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자면 "지금, 여기에" 맞는 혁명의 논리를 지금 여기 상황에 맞게 개발해야 하고, 죽은 레닌의 글자 하나하나에 옭매일 일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정성진 선생님처럼 이 글자들을 비판적으로 볼 줄 아는 건 진정한 혁명정신에 훨씬 가까운 거죠.

레닌은 과학기술 맹신은 좀 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제2인터네셔날의 카우츠키 등 당대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기술발전과 "진보"를 동일시했죠. 사회주의를 "쏘비에트 권력과 전국 전기 보급"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단적 사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짐 필요한 건, 전기를 덜 쓰면서 사는 환경적 삶의 방식을 개발하는 거죠.

레닌은 당위론적 "여성해방"의 지지자이었지만, 젠더 문제를 이론화한 적은 거의 없죠. 그런데,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은 희대의 반여성적인 사회입니다. 마초적인 병영문화와 여성 비정규직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축적의 주된 원천으로 삼는 신자유주의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여성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구조적으로 영위할 수 없는,그런 사회죠.

이 사회의 젠더적 갈등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착취구조를 이해하는 만큼 중요합니다. "사회주의적 테일러주의"를 주장했던 레닌은 규율에 대한 맹신을 가졌지만, 이미 규율화가 지나친 병영사회에서는 이 부분은 해방성이 그다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혁명가 레닌의 정신을 계승하자면, 레닌주의에 대한 수정도 보완도 필요하죠. 레닌주의는 신주단지가 아니고 늘 상황에 따라 발전돼야 하는 혁명의 과학입니다.

며칠 전에 노동자연대라는 클리프주의(구 동구권이나 중국, 북조선 등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트로츠키주의의 별파; 트로츠키 자신은 쏘련을 "왜곡되고 관료화된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했음) 단체의 기관지에서 제 학계 동료이신 정성진 선생님에 대한 이 기사를 읽고 (https://wspaper.org/article/18693) 상당한 충격에 휩쌓였습니다.

사실 정선생님은 제가 수업하면서 맨날 하는 일과 똑같은 일을, 발표하면서 하신 거죠. 즉,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레닌의 여러 시기의 주장들을 종합하여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의 생각이 몇 번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그리고 많은 면에서 ("무산계급 독재"하에서의 국가자본주의를 "사회주의의 초보적 단계"로 본다든가, "무산계급 독재" 국가의 통제하의 신경제정책 시기의 시장경제도 사회주의로의 통로라고 보는 측면에서라든가) 맑스의 사회주의관과 다르며 차라리 카우츠키 류의 경제결정론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점을 명확히 하신 겁니다.

글쎄, 저도 대체로 수업하면서 그런 작업을 하곤 하죠. "아세아적 생산양식" 지배하의 아세아가 스스로 자본주의로 진입할 수 없다고 보면서도 중국의 태평천국이나 인도의 무장독립투쟁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 마르크스의 아세아관의 자기모순 등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곤 하죠. 역사학자에게는 맑스도 레닌도 무엇보다는 비판적 검토의 대상물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검토를 가하여 인류의 스승인 이 분들이 각종의 자기 모순 속에서 결국 당대의 유럽중심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편견들을 그래도 상당부분 극복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급진적인 세계관을 분투 속에서 형성해나간 궤적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자기 모순들의 극복과정이야말로 사상적 발전의 원천이죠.

레닌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인데, 굳이 방점을 찍자면 후자에 찍어야 할겁니다. 특히 1917년10월 집권 이후에는 인민위원 위원회(Sovnarkom, 국무원) 위원장이 된 레닌의 첫째 급선무는 "사회주의"에 대한 올바른 정의라기보다는 무엇보다는 혁명의 생존이었습니다.

러시아와 비슷한 시기에 사회주의 지향적 혁명의 시도들은 헝가리, 핀란드, 바예른 (뮌헨) 등에 있었으며 북의태리나 애란, 노르웨이 일부지역에서까지도 소비에트를 만드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다 진압을 당하고 패배를 당하고 말았죠. 러시아만 빼고요.

학살을 피한 핀란드나 헝가리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모스크바로 망명할 수라도 있었는데, 모스크바까지 함락됐다면 레닌과 그 동지들이 망명할 수 있는 나라는 이 지구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살아남아야만 했고, 혁명의 생존을 위해서는 레닌과 그 당은 집권초기부터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일들을 막 해대야 됐습니다.

이상적이지만 당장에 "효율"을 내지 않는 노동자들의 공장관리 대신에 전국적인 중앙집권적 산업경영이 이루어지고, 볼셰비키들의 비판을 받아온 제정정권의 비밀경찰 (Okhranka)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소련 비밀경찰(Cheka)이 세워지고, 사회주의자들이 반대해온 징병제로 운영되며 그 장교 중에서는 구 제정군대의 장교가 약83%나 차지하게 된 엄청난 규모의 붉은 군대가 편성되고, 대부분의 중앙정부 부서의 중하급 기술관료들이 다"노동자 국가"의 행정관료로 재임용되고 말았습니다.

역사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레닌과 그의 당이 제정러시아 국가를 인수인계하여 몇배로 보강시킨 거죠. 전국적인 배급제가 실시된 "전시공산주의"의 현실적 모델은 제1차대전시절 독일의 전시계획-배급경제이었습니다. 레닌도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요.

이 모든 일들은 1917년의 <국가와 혁명>에서 이야기한 "국가의 사멸"이라든가, "상비군을 민병제로 대체하여 생산을 직접생산자의 통제하에 두자"는 맑스나 엥겔스 시대의 사회주의의 이해와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일당제의 국가가 사실상의 시장경제를 관리하는, 오늘날 중국이나 베트남, 북조선 모델의 원형이 된 1921년 이후의 신경제정책도 마찬가지죠.

참고로, 신경제정책은 실업이라든가 가시적 격차, 성매매 등 사회악들의 복원을 의미했으며 그 당시 많은 당원들을 아주 강하게 실망시켰죠. 그렇다면 레닌이 이끈 혁명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느냐 하면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정시절의 봉건제(황제, 귀족, 귀족들의 농장, 국교 따위)는 흔적없이 날아갔으며, 어차피 자주적 근대화 능력이 없었던 자본계급을 대신하여 당/국가가 내포적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맡은 겁니다.

이 당/국가의 관료기구들은 평등주의적 이상을 가진 농노계급 출신들로 충원됐으며,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업적주의적, 실력주의적 방식으로 운영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기층민 출신인 당원 관료들은 개발 위주로 움직이는 신사회에서는 당연히 "사회주의"를 실행할 수 없어도, 적어도 계몽주의적인 "위민"(爲民)정치를 충분히 실시할 수는 있었죠.

스딸린 시절에 들어 우여곡절들이 생겼지만, 일단 1920년대에 국내소수자들이 많은 권리들을 획득했으며, 중국, 조선을 포함한 여러 국외 해방운동들이 상당한 방조를 받아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파괴에 기여했습니다.

스딸린 때에 가장 보수적인 스딸린의 파벌이 승리하여 좌파적인 그룹들을 숙청시켜 사회 전체를 다시 보수화시켰지만, 사실 이미 1920년대초반에 공고화된 당/국가의 틀들이 스딸린 집권 이후에도 계속 계승돼온 거죠. 그 명암들을 고스란히 다 간직한 채요.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는 이상적인 사회주의적 사회의 청사진을 그렸지만, 세계체제(준)주변부의 한 국가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로는 당연히 그 구상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 전시배급경제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일당제 국가 관리하의 시장경제로 갔다가 결국 스딸린 치하의 국가독점적 "적색 개발주의" 모델을 구성해 발전시켰지만, (레닌과 같은) 급진적 방식으로든 (스딸린과 같은) 보수적 방식으로든 러시아의 통치자인 이상 개발주의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거죠.

한데 평등사회인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당을 이끄는 입장에 서 있는 이상, 또 그 동시에 배급경제든 국가관리하의 시장경제든 국가독점계획경제든 다 "사회주의로의 통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사회주의의 첫단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민 기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회주의야 아니더라도, 결국 스딸린의 공포통치 등 엄청난 곡절을 겪은 뒤에 쏘련에서 생겨난 사회는 사람으로서 살기에는 오늘날 대한민국보다 훨씬 좋은 사회이었습니다.

완결된 복지국가가 태어난 측면도 그렇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경쟁 대신 협동적인 관계가 지배적이었다는 점이라든가, 개인에게 여유가 많았다는 점에서 개개인 차원에서 (일과 돈의 압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었다든가,이런 차원에서는 소련사회에는 오늘날 제가 경험하는 한국 내지 서방 자본주의보다는 훨씬 인간적이었습니다.

그게 엄격한 의미에서는 맑스의 사회주의는 아니었다 해도 저는 만약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사회로 돌아갈 수만 있었다면 저는 당장에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리고 레닌은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 없는 사회 형태들(배급경제, 신경제, 계획경제, "무산계급독재" 즉 일당지배사회 등등)을 억지로 "사회주의"와 연결시키는 견강부회를 저질렀다는 점을 알아도 저는 레닌을 대단히 존경합니다.

그러나 또 존경하는 만큼, 레닌의 한계도 뛰어넘어야 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과학기술이 인제 지구를 거의 망가뜨린 이 시대에는 레닌의 과학기술맹신은 전혀 맞지 않으며, 인간의 소외라든가 젠더 문제 등에 대해 레닌이 거의 이론화적업을 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맑스나 레닌의 결점을 보완하는 작업을 우리가 해야죠. 이거야말로 창조적인 맑스-레닌주의라고 봅니다.

(기사 등록 2017.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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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 유행을 열심히 따르는 정성진 교수의 우경화

이정구 경상대학교 대학원 정치경제학 강사
208호
2017-05-18 | 주제: 이론 좌파
https://wspaper.org/article/18693

이광일 교수의 논평 문장을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하여 수정했다.

2017년 5월 12~14일 성공회대학교에서 제8회 맑스코뮤날레가 러시아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며 ‘혁명과 이행’을 부제로 열렸다. 메인 세션 중 청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인물은 정성진 교수였다. 그가 마침내 레닌주의를 공개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정 교수의 입장 변화를 보며, 그동안 레닌주의를 비난하던 많은 교수들이 흐뭇해 했다. 예를 들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광일 교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논쟁들에서 이미 다 나왔던 것을 정성진 교수가 정리했다면서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던 적이 없고 좌파적 개혁주의자였던 그가 정성진 교수의 최종 전향에 보내는 찬사였다. (혹시 자유주의자나 심지어 우익으로까지 변하랴 하는 남은 기대 속에서 ‘최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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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정작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레닌과 볼셰비키를 비난하는 자리가 됐으니 이보다 역설적인 일은 없을 듯하다.

물론 정 교수의 공개적 전향은 사반세기 이상 현실의 계급투쟁과 거리를 둔 채 순전한 이론적 논의만 일삼은 한 책상물림의 우경화일 뿐이다. 정 교수가 이번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한 ‘레닌의 사회주의론 재검토’의 머리말에서 한 말이 명징한 사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역사 또는 이와 관련된 레닌의 정치적 실천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어떠한 객관적 조건 속에서 어떠한 실천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지 않은 채 한 혁명가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개념을 정 교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실 이는 단지 정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술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일반적 문제이다. 그래서 정 교수의 주장을 다루기에 앞서 근래 좌파 교수들의 행보를 간략히 돌아보고자 한다.

좌파 교수들의 최근 우경화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라면 항상 현실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다루고 논의해 이를 다시 운동으로 피드백 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근래 많은 좌파 교수들은 현실의 계급투쟁에 관여하기를 삼가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논의를 전개하다가도 정치적으로는 너무도 손쉽게 개혁주의에 빠져들곤 한다.

특히, 노무현 정권에 대한 억압받는 대중과 진보진영의 환멸을 이용해, 2006년 이후 지배계급과 우파의 공세가 집요했다. 더구나 노조 지도자들과 진보 정치인들은 갈수록 점점 개혁주의적이 돼 왔다. 여기에 우파 정권 10년이라는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돼 좌파 교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시장 지향적 대학 구조조정과 교수들에 대한 실적 압박도 대학의 교수 채용과 재임용 등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정 교수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2015년 정 교수는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과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에 희망을 나타내는 것을 넘어, 그 정당들이 ‘21세기 사회주의’의 현실적 대안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미 그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던 것이다.

맥락에서 떼어 낸 거두절미

정 교수 발표의 주된 요지는 레닌의 사회주의관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레닌의 전체적 사상과 특별한 강조에 모두 유념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 말들의 파편을 거두절미 식으로 짜깁기해 비판을 하는 정 교수의 논법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일국사회주의’론이 스탈린의 발명품이 아니라 1915~17년에 레닌이 주창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 교수는 레닌이 1915년 8월에 쓴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에서 한 다음 말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독립된 슬로건으로서의 세계합중국은 전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 이 슬로건은 사회주의와 합치되기 때문이며, 둘째,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해석과 그와 같은 국가와 다른 국가들의 관계에 관한 잘못된 해석을 낳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말만 보고 이 구절을 일국사회주의론의 함축으로 해석한 듯하다. 그러나 레닌은 이 구절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혁명은 한두 나라에서 먼저 시작해 나머지 나라들로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문맥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노동자 국가 수립을 뜻하고, ‘일국사회주의’ 비판자들에 대한 맞비판은 세계합중국을 위한 동시다발 혁명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해야 한다. 당시에는 국제 혁명을 동시다발 혁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 구절 하나만 갖고 레닌을 일국사회주의 주창자라고 보는 것은 우습다. 레닌은 생애 내내 자본주의는 세계적 체제이므로, 노동자 혁명도 국제적으로 확산돼, 사회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세계적 차원’은 선진 자본주의 세계를 의미했다.)

1918년 브레스토-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둘러싼 논쟁에서나 1918~23년 독일 혁명에 대해 레닌이 주장한 것을 보면, 그가 일관된 국제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스탈린이 주창한 일국사회주의론은 1923년 독일 혁명의 실패와 그에 뒤이은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화에 대한 패배주의적 대응이었다. 즉, 러시아에서 점차 득세하고 있던 관료 집단은 국제 혁명이라는 위업에 도전하기보다는 사태의 안정화를 바랐는데, 그들의 상태와 염원을 반영한 이데올로기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었다.

둘째, 정 교수는 레닌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아나키즘이라고 비판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레닌이 1905년 혁명 와중에 쓴 ‘임시혁명정부에 대하여’에서 한 다음 말을 근거로 들었다. “원칙적으로 혁명적 행동을 아래로부터의 압력으로 제한하고 위로부터의 압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이 말에서 “위로부터의 압력을 거부하는 것”은 혁명적 지도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 뿐,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즉, 노동자 계급의 자력해방)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레닌은 위 인용 문구의 몇 줄 밑에 혁명적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진정한 혁명적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봉기를 지도하고 혁명을 조직하며 모든 혁명적 세력을 집중시키고 군사적 공세를 과감하게 펼치며 혁명정부의 힘을 가장 정력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셋째, 정 교수는 레닌의 사상이 1914년 즈음해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변화했다”고 다소 과장스럽게 주장한다. 그 전까지는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와 인식을 완전히 공유했다는 것이다.

물론 1914년 이전에 레닌이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를 정설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제1차세계대전의 개전, 독일 사민당을 포함한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의 배신, 헤겔의 《논리학》 독해, 제국주의론 정립 등을 거치며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과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러나 1914년 이전 레닌의 사상이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와 똑같았다고 할 수는 없다. 레닌은 다가올 혁명의 과제가 부르주아적일 것이라고 본 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과 견해가 같았지만, 그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레닌은 특별히 선진 노동자들과 유기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연계를 맺고 있는 혁명가들의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카우츠키주의와 달랐다.

넷째, 정 교수는 국가의 분쇄·소멸 테제에 관해 레닌과 마르크스의 견해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마르크스와 달리 레닌은 사회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전화된 형태로 보아, 사회주의 단계에서 국가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는 것으로 봤다고 주장한다. 그가 근거로 제시하는 레닌의 말은 《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이다. 또는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전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된, 또 그러한 한에서 자본주의적 독점이기를 중지한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일 뿐이다.” 정 교수는 이 말을 근거로 “레닌이 노동자계급의 자기 활동, 자기 조직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을 일관되게 견지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주장했다.

먼저 마르크스와 레닌의 노동자 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개념을 간단히 살펴보고 나서 정 교수의 견해를 비판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초기 국면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로 나아가기까지 이행기(과도기)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국가(노동자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점차 소멸돼 갈 것이다. 그러나 과도기에는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에 대해 지배를 행사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레닌은 《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1917년 9월 중순에 썼다. 그때는 내전이 임박했을 때였다. 그는 내전 중에는 주요 산업들을 노동자 국가가 통제할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국가의 독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사회주의”라는 그의 표현은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의 초기 국면으로서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국가를 뜻했다. 노동자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가 바로 그것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혁명 성공 즉시 무계급 사회를 이룩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 교수는 용어 사용의 문맥도 파악하지 못한 채 레닌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정성진 교수는 레닌이 말년에는 협동조합의 확대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 경로를 제안했고, 이는 이전의 그의 주장, 즉 국유화와 계획의 확대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 전망에서 상당히 달라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도 레닌의 사상에 대한 완전한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시도를 공상적이라고 비판했었다. 레닌주의에 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인 닐 하딩은 이렇게 지적한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협동조합은 공상적 사회주의의 가장 강력한 피난처 중의 하나다.” 1921년 1월에 쓴 《협업》에서도 레닌은 로버트 오언에서 비롯한 구식 협동조합 계획이 계급투쟁과 노동자 계급의 권력 장악을 근본적 문제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런 비판은 대기업이 자본주의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참말이다.

그런데 정 교수는 레닌이 협동조합을 새로 고민했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협동조합에 대한 그의 새로운 논의를 1921년의 신경제정책과, 심지어 더 나아가 시장사회주의와도 관련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정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신경제정책 시기 레닌의 협동조합 사회주의론은 … 시장경제 확대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시장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했다.” 시장사회주의는 1960~70년대에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 등의 전면적 국가자본주의 나라들이 경제 위기에 직면해 부분적으로 시장(특히 ‘자율경영’)을 도입해 위기를 해결하고자 한 시도로, 지역간·인종간 분열만 낳으며 실패했다.

그러나 레닌은 신경제정책 이전 시기에도 노동자 국가 하에서의 협동조합 설립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1918년 3월에 작성된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한 과제’ 문건의 원판》에서 레닌은 이렇게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은 섬으로서의 협동조합은 소상점이다. 토지가 사회화되고 공장들이 국유화된 사회에서 협동조합이 사회 전체를 모두 포괄하면 그것은 사회주의다.” 1921년 1월에 쓴 《협업》에서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 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있고 이 정치 권력이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이지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과제는 인구를 협동조합 사회들로 조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닌의 협동조합 논의는 노동자 국가의 존재와 생산수단의 국영화 현실을 전제로한 주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협업》에서 레닌이 협동조합을 지지한 맥락은 신경제정책에 대해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신경제정책은, 내전을 거치면서 피폐화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후퇴였다. 이 후퇴를 견제하고자 레닌은 협동조합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장의 확대보다는 낫다고 봤던 것이다. 정 교수는 이런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레닌의 협동조합 논의를 사회주의 건설 경로의 (‘시장사회주의’로의) 변질로 오해하고 있다.
비레닌주의적 공산주의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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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학자로서의 엄밀함도 결여한 주장들을 걷어 내면 정 교수의 진의(眞意)가 드러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정 교수는 레닌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전위당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레닌이 “대중을 주체가 아니라 전위당의 정치공학 대상으로 간주”했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이 아니라 볼셰비키당의 쿠데타였다고 비난하는 진부한 통속적·통념적 주장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은 1917년 10월 봉기를 주도한 군사혁명위원회가 볼셰비키당의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기구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모순된다. 상식적인 주장들이 틀렸음은 비마르크스주의자인 역사학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혁명의 시간》(교양인)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물론 정 교수는 더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소비에트는 1920년대 말 스탈린 반혁명 이후가 아니라 이미 레닌이 집권했던 시기부터 노동자 인민의 다양한 층의 정책이 조율되는 포럼이 아니라 ‘당=국가 지도부’의 지시를 집행하는 행정기구로 전락했다.”(강조는 필자) 1917년 10월 혁명 직후부터 소비에트가 노동자 권력을 표현하는 기구가 아니라 당의 지배를 받는 하위 기구였다는 주장이고, 더 나아가 10월 혁명 직후 러시아에는 사실상 일당 지배적 억압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교수는 레닌이 “볼셰비키의 권력과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동일시”했고, 그 근거가 바로 《국가와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와 혁명》 어디에도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즉 자신들의 행동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노동자 계급에 관한 개념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국가와 혁명》 어디를 봐도 정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정 교수 자신도 《국가와 혁명》의 어느 부분인지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율주의자 조정환 씨는 레닌의 저작 중 유일하게 《국가와 혁명》만이 정당의 구실에 대한 강조 없이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했다며 그 저서를 반겼다.

정 교수는 결론으로 비(非)레닌주의적 공산주의를 복원하고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주의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나 노동자 계급의 자력해방 사상 등과 거리가 멀고,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생겨난 체제는 일당 독재 체제였고,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고, 아예 일국사회주의론이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의 작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정 교수가 재조명하고자 하는 ‘비레닌주의적 공산주의’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 귀결은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좌파적?) 개혁주의인 듯하다.

사실 이 글에서 비판한 정성진 교수의 주장들은 일찍이 20여 년 전부터 그의 글에서 힐끗힐끗 비치듯이 선보였던 것이라고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최일붕 씨는 필자에게 귀뜸을 해주었다. 그는 정성진 교수가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였’던 때부터 가장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에르네스트 만델(그리고 콘드라티예프)의 장기파동론, 데이비드 고든 등의 사회적 축적구조 이론 등등 ‘마르크스주의’ 학계의 유행을 필사적으로 좇으며 자신이 아카데미의 품위 있는 학파들에 속해 있다는 외양을 한사코 취하려 애썼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정성진 교수는 알튀세르를 비판했어도 사실상 알튀세르의 핵심 문제점인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일관되게 실행했던 진정한 학술주의자였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년 간 정 교수는 “초좌파에 속했지, (좌파적) 개혁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면서, “그가 최근 변했다 해도 그는 ‘좌파적 개혁주의자’라는 라벨에 걸맞지 않은 그냥 학문적 명성을 추구하는 교수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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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헤매던 레닌의 뒤를 그대로 쫓을 것인가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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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윤



정성진 교수에 대한 노동자연대 이정구 동지의 비판글(http://wspaper.org/article/18693)을 읽으면서 안타깝고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당연히 누군가의 의견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언제든 필요한 일이다그런데 이정구 동지의 글은 앞부분과 결론에서 단지 정치적 비판을 넘어선 날선 언어와 표현으로 정성진 교수를 비난하고 있다.

제목부터 우경화라며 매도하고 있고 최종 전향”, “이론적 논의만 일삼은 한 책상물림”, “진정한 학술주의자”, “개혁주의자같은 딱지를 붙여대고 있다. “혹시 자유주의자나 심지어 우익으로까지 변하랴하는 비아냥까지 덧붙였다거의 인신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다.

정성진 교수가 계급투쟁과 거리를 둔 채 순전한 이론적 논의만 일삼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도 아니다물론 정성진 교수는 사회운동에 투신한 활동가는 아니다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연구>,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대학원 정치경제학과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교육의 제도화에 힘썼다.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와 출판 등에 기여했고현실 투쟁과 연관된 글이나 칼럼 등도 써 왔다당장 이번 이정구 동지가 비판한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에 대한 정성진 교수의 글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적 논의가 아니었다.

정성진 교수는 이명박근혜 시대에 각종 반동적 정책에 반대하는 기자회견과 성명에도 자주 이름을 올린 실천적 지식인이었고재능교육 투쟁 현장에서 강연을 한다거나 국가보안법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 탄압받는 활동가를 방어했던 것도 기억난다.

무엇보다 최근까지 노동자연대 동지 자신들도 매년 자신들의 맑시즘 행사에 고정 연사로 초청해 왔던 사람을책상물림이라고 모욕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정성진 교수가 3년전 노동자연대에서 내가 몇 가지 이견 제시로 징계를 받을 때방어 서명을 해줬던 것도 이 상황에 영향을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이미 노동자연대 동지들로부터 개혁주의기회주의민중주의’ 등 온갖 딱지가 붙고 가슴 아픈 말들을 많이 들었으며 그것이 책 두 권으로까지 묶어 나왔지만이제 더 많은 사람에게 그런 공격이 확대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이런 태도가 노동자연대 안팎에서 토론을 뒤틀리게 하고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어느 한 가지 노선과 해석만 고집하며그것에 어긋나는 주장을 펴면 매도를 당하는 분위기에서는 건설적인 토론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레닌주의를 신성불가침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이견을 제시했다가는 정통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몰릴 것이 걱정 될테니 말이다사실 이것은 많은 급진좌파가 빠져들었던 막다른 골목이기도 하다당장 볼셰비키가 그랬다.

물론 볼셰비키는 짜르의 탄압을 이겨내며 헌신적으로 활동한 투사들이었고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교훈을 남긴 선배들이기도 하다무엇보다 볼셰비키는 1917년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의 요구와 정서를 누구보다 잘 대변하며 거기서 배우려고 한 혁명가들이었다하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 볼셰비키는 길을 잃어 갔다.

한때 볼셰비키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던 빅토르 세르주는 이렇게 돌아 본다. “볼세비키는 자신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신했고 다른 생각은 반동적이라고 보면서 이단 심문관처럼 변해 갔다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권위주의가 탄생했다.” 그런 권위주의는 스탈린주의로 이어졌다그런데 스탈린의 박해를 당하며 추방당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 속에서도 같은 문제가 나타났다는 게 세르주의 탄식이다.

트로츠키주의 저널들은 나의 반론과 정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박해자들의 태도와 똑같았다… 그들이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다 가루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얄궂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모든 사태에 가슴이 미어졌다… 4인터내셔널의 서클들에서는 트로츠키의 입장에 반대하면 누구든 쫓겨났다소련의 관료들이 우리를 겨냥해 사용하던 것과 동일한 언어로 비난이 퍼부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는 자신의 정설에 사로잡혔다.” (빅토르 세르주, <한 혁명가의 회고록>)

이처럼 생산적 토론을 가로막는 비판의 태도와 방식을 넘어서정성진 교수에 대한 이정구 동지의 비판 내용을 보자그러면 일부 일리있는 지적들도 담고 있다사실 나도 정성진 교수의 주장에 이정구 동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몇 가지 이견도 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론을 또 다른 정설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라거나, 1914년 이후 레닌과 카우츠키의 단절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 등이 그렇다하지만그 핵심 내용에서 정성진 교수에 대한 이정구 동지의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정구 동지는 정성진 교수가 레닌주의를 공개적으로 포기했다고 질타하면서, “그 귀결은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좌파적?) 개혁주의라고 단정하는데 설득력도 근거도 없다왜냐하면 정성진 교수는 레닌주의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하나씩 논박하면서 오히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공산주의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레닌주의에서 벗어나면 개량이라는 식으로 딱지붙이며제시하는 근거는 일찍이 20여 년 전부터 그의 글에서 힐끗힐끗 비치듯이 선보였던 것이라는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최일붕 씨의 귀뜸이다사적인 자리에서 한 개인적 귀뜸이 공식적인 비판의 근거가 된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정성진 교수의 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근거와 설득력이 있다이정구 동지는 정성진 교수가 레닌의 전체적 사상과 특별한 강조에 모두 유념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 말들의 파편을 거두절미 식으로 짜깁기해 비판했다고 했다하지만레닌의 주장을 단편적으로 가져와서 주장을 펴는 것은 정작 이정구 동지 자신이다.

누군가의 사상을 평가하려면 그가 특정 시기에 내놓은 일반적이고 듣기 좋은 말들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의 생각의 흐름과 변화무엇보다 실천을 종합해서 봐야 한다그렇게 볼 때 레닌의 실천과 사상에 대한 정성진 교수의 핵심적 지적들은 타당하다.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레닌주의스탈린주의

첫째, “레닌이 노동자계급의 자기활동자기조직에 기초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개념을 일관되게 견지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정성진 교수의 주장을 보자정성진 교수는 카우츠키의 영향력이 뚜렷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의 관점이 명백히 아래로부터 사회주의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사회민주주의 의식은 노동자들 외부로부터만 도입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은자신들의 노력만으로는,단지 노동조합 의식만을 발전시킬 수 있다… 사회주의의 이론은 … 교육받은 유산 계급의 대표자들지식인들이 정교화한 철학역사 및 경제이론으로부터 생겨났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이정구 동지는 레닌의 생각이 변했다는 근거로 <국가와 혁명>을 제시하거나레닌이 말한 위로부터는 혁명적 지도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한다물론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이상주의가 잘 나타난 저작이다하지만 <국가와 혁명>은 1917년 혁명이 지나고 나서 출판됐을 뿐 아니라, 1920년에 레닌 자신이 동화 속의 이야기라며 그 의미를 깍아내린 저작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변화한 주장을 실천과 종합하면서 검토해야 한다특히 1917년 10월 혁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시험대에서 레닌이 진정으로 아래로부터 피억압자들 스스로의 조직과 행동민주적 토론과 판단을 가장 중요시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1917년 혁명에서 노동자들의 자치조직은 소비에트였다그런데 당장 레닌은 가장 저돌적으로 소비에트의 민주적 승인없이 10월 봉기를 추진한 장본인이다정성진 교수는 바로 그것을 지적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대회를 기다릴 수 없다볼셰비키는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지체는 범죄이다소비에트대회를 기다리는 것은 형식성으로 아이들 장난하는 것이며부끄러운 형식성 놀음이며혁명을 배반하는 것이다.”

물론 이정구 동지의 지적처럼 결과적으로 봉기는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가 주도했다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첫째형식적으로는 소비에트 산하였지만 내용적으로 군사혁명위원회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기구였다둘째군사혁명위원회의 병사들 다수는 자신들이 참가하고 있는 게 무장봉기라는 것을 몰랐다.

셋째군사혁명위원회의 행동은 소비에트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니라봉기 이후에 사실을 알게 된 소비에트의 사후 승인을 받았다넷째사후승인마저도 소비에트에서 상당수 노동자·농민을 대변하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항의 퇴장한 상황에서 얻어낸 것이다다섯째그 소비에트마저도 여전히 지방의 수많은 농민들을 포괄하지 못한 상태였다.

절박한 혁명적 상황에서 민주적 토론과 주체적 참여가 잘 되기는 어렵다고 말할지 모른다그렇다면 적어도 나중에라도 소비에트에서 다수의 동의와 지지동참을 얻어내기 위한 설득과 노력이 있어야 했다더 많은 지방의 농민들을 소비에트로 끌어들여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퇴장하자 곧바로 권력 독점에 나선다볼셰비키가 장악한 소비에트 집행위에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좌파 야당의 신문은 검열받았고 당원들은 체포됐다이에 대해 특히 지방에서는 큰 반발과 충돌들이 벌어졌다.

결국 이 모든 상황전개는 레닌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보았는지 말해 준다아직 충분히 준비·설득되지 않은 노동대중을 소수의 단호한 혁명가들이 대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이것을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식화와 비교해 보라.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둘째, “일국사회주의론은 스탈린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1915~17년 레닌에 의해 이미 정식화되었다는 정성진 교수의 지적을 살펴보자스탈린이 주장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 자본주의 나라들에서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는 말이 사실은 레닌이 이미 1915년에 한 말이라는 것이다.

이정구 동지는 레닌이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강조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이를 논박한다하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문구에 얽매이는 게 아니다스탈린조차 혁명의 국제적 확산과 국제주의를 강조한 수많은 말들을 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실제로 레닌이 스탈린에 앞서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경쟁과 축적이것을 더 효과적으로 할 독재적 권력의 강화를 추진했느냐 여부이다여기서도 구체적 상황에서 레닌의 말과 행동을 종합해서 볼 때 그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물론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노동자 생산관리’ 포고령 등 아래로부터 요구를 반영한 의미있는 포고령들을 내린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그것은 3~4개월만에 종이조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18년 1월부터 공장위원회는 사실상 해체의 압력에 놓여졌다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규율을 부과하고 생산성 증진을 강요하며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가하는 기구로 변화해 갔다작업반장을 선출하던 관행도 점차 사라졌다.

1919년부터는 여성아동노동에 대한 보호들이 폐지되고야간노동과 초과노동이 합법화됐다. 12시간 노동제가 도입되고 강제노동 징집이 시행됐다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불평등한 성과배급제가 도입됐다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런 조치들을 앞장서 정당화했다.

노동자들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 이익을 희생하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트로츠키), “우리의 과제는 독일의 국가자본주의를 학습하고그것을 모방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 야만주의와 투쟁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야만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레닌)

이것은 사기저하된 노동자들이 엄혹한 상황에서 불가피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채택한 노선이고 볼셰비키는 그것을 따라간 것일까노동자들은 이것에 반대저항하지 않았던가그렇지 않다레닌과 볼셰비키가 앞장서서 채택한 노선이고아래로부터 반대와 저항이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그것을 억누르고 추진했다.

예컨대 평등한 배급을 요구하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구속·처벌됐다권력에서 배제된 야당이기에당시 노동자들의 반대와 저항은 주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의해 대변됐다그런데 볼셰비키는 1918년부터 소비에트에서 이들을 밀어내갔다.

소비에트 선거 자체도 제도적으로 볼셰비키에게 유리하게 설계됐다도시 노동자에게 더 인기있는 볼셰비키가 더 많은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도시에서는 25천명당 1농촌에서는 125천명 당 1명의 대표자를 뽑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또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에게서 투표권과 참정권을 박탈했다.

그럼에도 노동자·농민들 내에서 불만과 분노가 거세지면서 소비에트 선거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파가 될 가능성이 갈수록 커졌다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왜냐면 얼마 안가서 그들은 불법화되고 입후보 자체가 금지됐기 때문이다내전 말기의 수많은 반란에서 자유선거와 소비에트 민주주의 부활’ 요구가 터져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소비에트는 노동자·농민의 아래로부터 요구와 의견이 분출하는 민주적 자치기구로서 성격이 사라져 갔다.모든 결정권을 볼셰비키로만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독점했고인민위원회는 소비에트에 보고하거나 승인받지 않고 법령을 공표했고지방소비에트는 중앙소비에트가 하달한 명령을 집행하는 기구로 성격이 변해갔다.

셋째정성진 교수는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자원은 레닌의 모순적 사회주의 개념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1991년 이후 스탈린주의, ‘역사적 공산주의의 파산은 … 레닌의 사회주의론의 한계를 지시한다고 주장했다즉 일부 급진좌파들이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단절성을 강조해 왔다면그 연속성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대변한다고 가정된 당이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사상이다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파괴노동자 희생 등은 부수적 피해로 간주되고노동계급은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계몽돼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이것은 명백히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대치된다.

스탈린 자신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는 온갖 메마른 말과 글을 남겨놓았다그런데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막상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1917년에 권력을 잡고나서 이미 같은 취지의 말과 글을 무수히 내놓았다는 것을 잘 보지 않는다이것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다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고 정당화하며 이론적 기초를 놓기 시작했다는 것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이 당시 레닌은 노동계급의 능력을 불신했다. “너무나 분열되고 타락하고 부분적으로 부패해 있어서 …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포함하는 조직으로는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행할 수 없다그것은 전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1920)

이에 따라서 레닌은 자주관리는 환상이고 유해하다과도기에는 1인경영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했고,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헛소리들은 쓸어버려야 한다”(1920)거나 반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1921)고 주장했다.

공장 경영자의 뜻에 대중의 무조건적 복종이 요구된다독재자가 노동계급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게 레닌의 생각이었다. “강철같은 독재없이는 소비에트 지배는 유지될 수 없다노동자 독재는 당 독재일 수 밖에 없다.”(지노비에프), “총검은 공산주의를 도입하는 데 필수품이다”(칼 라덱등의 주장도 이 시기에 나왔다.

트로츠키가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등에서 내놓은 말들도 분명했다

우리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칸트적종교적채식주의적 지껄임에 관심없다문제는 피와 강철로만 해결될 수 있다.” “불꽃이 꺼지기 전에 가장 밝듯이 국가는 소멸하기 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가장 무자비한 형태를 거친다.” “당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위한 역사적 도구이므로 항상 옳고 누구도 당에 대항해서 옳을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상황과 문맥을 보더라도 명백히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와 대치되는 이 주장들은 실천으로 이어졌다노동자 자주관리는 파괴됐고 1인경영이 도입됐다반대당만 금지한 것이 아니라 볼셰비키당 안에서도 지도부에 이견을 제시하는 분파는 금지됐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는 해고되고 배급권이 몰수됐고멘셰비키 당원은 파업의 배후로 몰려 체포됐다. 1921년에 수도에서 식량 공급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와 파업이 벌어지자 시위를 금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병역을 거부한 톨스토이 지지자들은 총살됐다.

말년에 레닌이 이런 당 독재와 관료주의에 문제의식을 느껴 개혁을 시도했다는 주장도 과장이다왜냐하면 레닌은 인물의 교체나 또다른 관료기구(노농감찰부)를 만들어서 관료들을 감찰하자는 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자신이 추진한 반대파의 금지, 1인경영민주적 선거와 권리 제한 등에 대해 레닌의 생각이 변화했다는 기록은 없다.

레닌주의와 오늘날의 좌파

이처럼 레닌주의에 대한 정성진 교수의 비판적 재평가는 상당 부분 타당하다정성진 교수는 레닌의 말과 글을 주로 검토했다그리고 이것은 필요한 작업이었다왜냐하면 레닌과 트로츠키 등이 1918년부터 1920년대 초까지 내놓은 저작과 글들은 급진좌파들 속에서 이상하게 주목받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급진좌파들이 레닌이 짜르 정부의 탄압을 피해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며 활동하던 시기나 1917년 혁명 과정에서 쓴 글을 중심으로 레닌의 사상을 평가해 왔다물론 이 시기에 레닌의 글과 실천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그것은 레닌이 너무나 위대해서라기보다는 그 글들에 러시아 민중들의 투쟁의 경험과 교훈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가들이 자신들을 탄압하는 기성권력을 비판하며 아래로부터 투쟁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말과 글을 내놓는 것은 그렇게 놀랍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정말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잡고 책임을 지게 됐을 때그 이상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기존 권력자들에게 적용했던 잣대를 자기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다권력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대중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하지만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이 시기에 남겨놓은 글들은 이들의 태도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이 시기 저작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큰 실질적 권한과 위상을 가지고 있을 때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마치 노무현의 민주화 투사 시절이나 퇴임 이후에 내놓은 좋은 말들이 아니라 집권 시기에 한 말과 행동이 중요하듯이 말이다나는 정성진 교수의 작업에 덧붙여 이 시기의 레닌의 말을 실천과 연결시켜 보고자 했다.

물론 일부 급진좌파들은 이러한 실천이 엄혹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후퇴였다고 레닌을 변호해 왔다안으로 반혁명 세력이 노동자 국가를 위협하고밖으로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논리가 소련중국북한 등에서 스탈린주의를 정당화한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데 있다. 30년대의 스탈린 정권처럼 엄혹한 상황을 핑계대기 좋은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대개 좌파들은 이를 거부하고 스탈린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해 왔다힘겨운 상황에서 노동자 국가를 비판하거나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파업하는 것은 곧 반혁명을 돕는 것이라는 논리는 부당한 비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닌과 볼셰비키가 비슷한 논리로 반대파와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고 권력을 독점해 나간 것에 대해서 엄혹하고 불가피한 상황을 말하며 다른 잣대를 적용한다면그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더 급진적 대안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이다.

왜 엄혹한 상황일수록 다수 대중의 집단적 지혜와 민주적 자치에 문제를 맡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는가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대중 스스로의 자주관리와 생산의 민주적 통제가 더 나은 답을 찾는 방법이 될 수 없는가?결국 올바른 노선을 가진 혁명정당이 피억압 대중 스스로의 행동과 자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엘리트적 전제의 수용이 아닌가?

러시아 혁명 당시 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한 것은 볼셰비키가 불가피한 후퇴라며 채택한 징병제와 상명하복탈영병 총살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라는 스티브 스미스의 지적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볼셰비키 정부에도 불만이 많지만적어도 짜르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혁명적 열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게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레닌주의에 대한 변호론이 더 문제인 것은 그것이 오늘날 일부 좌파의 사상과 실천에도 그림자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즉 100년전 러시아 혁명에서 나타난 특정 모델을 레닌주의라고 정식화해서 반복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사실 그것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일관되게 유지한 노선이기보다 1917년 이후의 구체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레닌주의라고 보면서 그것을 고스란히 계승하자는 좌파들이 존재한다.

그런 좌파들은 1917년 혁명도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낳은 위대한 성과로 보기보다는레닌이 얼마나 놀랍도록 뛰어나고 현명하게 시의적절한 전략전술을 펼쳤는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레닌이 없었다면 혁명은 승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임무를 레닌주의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라 여기고여기서 이탈하는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또 레닌주의’ 혁명조직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비정통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을 계속 솎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조직은 갈수록 경직되고 열린 토론도 어려워진다그것은 사회와 현실의 변화에 따라 구체적인 분석을 하며 새로운 혁신을 시도하기 어렵게 만든다그런데도 스스로는 이것이 사회민주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종류의 레닌주의 당의 참모습이라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권력 장악 이후에 길을 잃었던 레닌과 볼셰비키를 그대로 쫓아가는 셈이 된다그 길은 인류해방에 대한 꿈과는 어긋나는 비극을 낳았다러시아 혁명의 아래로부터 요소를 환영했지만볼셰비키의 집권을 직접 경험하고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된 반전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이렇게 돌아본다.

"공산주의 정당은 정부 실권을 충분히 잡았다고 느끼자마자대중 운동의 범위들을 제한해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독재 전부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모든 정당과 모임은 사라져야 했다아나키스트들과 좌파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첫 번째 대상이었고그 다음은 멘셰비키와 우파에 속한 다른 정적들이었다마지막으로는 자신만의 의견을 갖고자 갈망했던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되었다모든 독립적인 단체들의 운명도 비슷했다.그들은 새로운 국가의 욕구에 복종하던지 아니면 다 같이 파괴되었다소비에트가 그랬고 노동조합들과 협동조합들이 그랬다이 세 가지는 혁명의 희망을 실현할 위대한 요소였다.”(<나의 러시아 2>)

따라서 분명한 것은 그 길을 그대로 쫓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1917년 혁명에서 등장했던 아래로부터의 요인들을 더욱 강화·발전시키는 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피억압 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만들고그들 자신의 자치기구에 권력이 쥐어져야 한다생산과 사회의 민주적이고 자주적 관리는 어떤 이유로도 가로막히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린 토론도 가로막히지 말아야 한다엄혹하고 힘든 상황일수록 이런 방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왜냐하면 그래야 투쟁하는 대중들 속에서 듣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혁명적 대안이 진정으로 대중적 설득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아무리 위대한’ 혁명가나 혁명조직도 정답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친정부 인사와 집권당을 위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어떤 당도 현명함을 독점할 수 없고답을 서랍 속에 가지고 있을 수 없다끝없는 실험과 시행착오토론 속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로자 룩셈부르크)

레닌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었고얼마든지 틀리고 길을 잃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짜 토론이 가능해지고 시작된다그 점에서 어떤 성역도 없이 과감한 이론적 혁신을 시도하는 정성진 교수의 시도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비난받을 게 아니라 발전된 토론을 위한 커다란 기여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모쪼록 이 글이 딱지붙이기나 비난인신공격이 아니라 생산적 토론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기사 등록 2017.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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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나누고 함께 행동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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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최근 정성진 교수의 발표에 대한 이정구 동지의 반박 기사를 읽고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게 됩니다제가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고민과 공부가 부족하다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부족하지만 이번 논쟁에 대한 현재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이번 논쟁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레닌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굵직한 주제입니다저는 아직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고민과 공부가 충분치 못하니 현재 참가하고 있는 관련 세미나 등을 통해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고민하여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뒤에 소박한 글을 써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으로이번 논쟁에서 부차적인 부분인 이정구 동지의 서론과 결론에서 보이는 대화와 토론의 태도와 방법입니다저는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정구 동지가 정성진 교수의 그 동안의 이론적 기여와 실천 활동에 대하여 폄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진 교수가 비록 집회와 투쟁 현장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좌파 단체들의 각종 행사와 토론회에 참여하고 기여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또한 정성진 교수는 교수노조 조합원으로서민교협 회원으로서 여러 쟁점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우리 운동을 지지해 왔습니다.

더욱 중요하게도 정성진 교수는 그 동안 외국의 변혁 이론과 관련된 여러 책들을 번역하여 우리들이 쉽게 외국의 변혁 이론을 접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트로츠키주의나 국가자본주의론 등 다양한 논문과 책들을 써서 변혁 이론에 대한 고민을 확장하고 논의를 풍부하게 해 주었습니다.

정성진 교수는 그 동안 변혁 운동에서 이론적으로 큰 역할을 해주었고 실천적으로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해 주었습니다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화와 토론에 대한 방법론과 관련하여 저의 짧은 견해를 말씀드리자면저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려고 노력합니다.

첫 번째누군가와 대화와 토론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을 공유하여 행동을 함께하고자 하는 협력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이 협력 과정은 대화 주제의 깊이와 상대방과의 사전 공감대 정도에 따라 때로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현재 생각을 절대로 옳다고 여겨 상대방을 단지 일방적 설득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몇 번의 대화로 설득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배척한다면 함께 행동하기 위한 생산적 대화와 토론이 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물론 상대방과 함께 행동하기 위한 대화와 토론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만약 홍준표 같은 사람과 대화와 토론을 한다면 생산적 대화와 토론은 애초부터 불가능할 것입니다홍준표 같은 사람과 대화와 토론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설득하여 함께 행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 사람의 대화와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각을 공유하고 행동을 함께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성진 교수의 레닌주의 관련 발표에 대한 이정구 동지의 글을 읽으면서 이정구 동지는 함께 행동하기 위한 생산적 협력 과정으로서의 대화와 토론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이정구 동지는 자신의 생각이 절대로 옳다고 여기며 정성진 교수를 배척하며 더 이상 토론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아 보입니다게다가 정성진 교수와의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그래서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관련기사) 

길을 잃고 헤매던 레닌의 뒤를 그대로 쫓을 것인가 http://www.anotherworld.kr/438

의미있는 레닌 비판을 위하여 http://www.anotherworld.kr/436

‘레닌주의’는 신주단지인가? http://www.anotherworld.kr/435

(기사 등록 2017.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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