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4

ホームズ恵子 元英兵捕虜の支援者  :あの人に迫る:中日新聞(CHUNICHI Web)



ホームズ恵子 元英兵捕虜の支援者  :あの人に迫る:中日新聞(CHUNICHI Web)




ホームズ恵子 元英兵捕虜の支援者  
写真・阿部伸哉


◆憎むべきは戦争 和解を深めたい//


 戦後処理の問題といえばアジアとの関係に目が向きがち。しかし映画「戦場にかける橋」(一九五七年)に代表されるように、旧日本軍による東南アジアでの英兵捕虜の強制労働は英国民に「虐待」として記憶に刻まれている。まだ反日感情が強かった三十年前、英国在住のホームズ恵子さん(70)は元捕虜らを日本に招く活動を開始。日英の戦後に正面からぶつかってきた思いを聞いた。//


 -英国との最初のつながりを教えてください。//


 高校卒業まで三重県の熊野。外国人はほとんど見たことがなかったです。高校卒業後、父にお願いして東京の語学学校に通いました。そのころに知り合った英国人男性と結婚し、英国に移り住むことになりました。一九七九年のことです。//


 しかしその五年後、夫が飛行機事故で亡くなりました。それまで夫に頼り切りの生活でしたから、絶望でしたよ。長男が十三歳、次男が十歳で、私だけでは宿題の手伝いもできない。子どもを寄宿舎制の学校に入れ、私は八八年に一時、熊野に帰ったんです。//


 -なぜ元英兵捕虜に関心を持つように。//


 実は熊野の入鹿(いるか)という地区に元英兵捕虜の慰霊碑があり、戦時中は銅山で捕虜を働かせていました。英国に移り住む前、母と行ったことがありました。夫が亡くなり、「あそこに行きたい」と無性に思うようになったんです。//


 久々に訪ねると、昔は石積みと十字架の素朴な碑だったのが、新しく立派な慰霊碑に替わっていました。過疎の集落ですが、お年寄りがきれいに清掃しています。碑文には、入鹿で亡くなった英兵十六人の名前と、強制労働の経緯が書いてあり、それを見てとっさに「この人たちの母親を捜さなくては」と思いました。大切に葬られていると伝えたかったんです。//


 入鹿には、過酷な労働で知られるタイ・ビルマ(現ミャンマー)国境の「泰緬(たいめん)鉄道」建設を経験した英兵三百人が来ていたようです。勤労動員の日本人の若者たちは、捕虜なのに胸を張って銅山に行進して入っていく英兵に敬意を抱き、英語と日本語を教え合ったり、蒸しパンを分け合ったりしていたそうです。//


 -遺族とはすぐに連絡が取れましたか。//


 一年ぐらいたって、母が市役所を通し、入鹿にいた元捕虜の連絡先を見つけてくれました。ジョー・カミングスさんという方で、手紙を送ったら「こんなにすばらしい慰霊碑を造ってくれてありがとう」と返事が来ました。ジョーを通じて、当時、英国に七十三カ所あった元捕虜の組織に連絡を取ってもらったが、みんな「残酷な日本人がこんなことするわけがない」という拒否反応です。結論を言うと、入鹿で亡くなった十六人の母親には一人も会えませんでした。//


 -しかし最終的には和解の旅を計画し、元捕虜や家族を日本に招くことになります。どうやって説得したのですか。//


 九一年十月五日のことです。ジョーからロンドンで旧日本軍による捕虜経験者の全国大会があると聞き、私は一人で行くことにしました。知人からは「絶対に行くな」と止められました。「They will eat you alive.(生きたまま餌食にされるぞ)」と。//


 -どうなりましたか。//


 中に入り、元捕虜の人たちに「あなたたちの思いを日本人に伝えたい」と話しかけました。もう憎しみのるつぼでしたね。//


 「何しに来た」「日本人は大嫌いだ、出て行け」「だれが日本人に会うか」「日本人は戦時中のことを何も学校で教えていない」//


 キリスト教徒の私は、罵声を浴びながらひたすら祈り、自分に言い聞かせました。「神は憎しみを持った人たちを非常に大切にしている」と。「今の日本を見てもらうことが、彼らのいやしになる」と決心が強まりました。個別に会うと、かたくなな人ばかりではないんです。ジョーの紹介で、入鹿にいた元捕虜五人ほどを訪ねましたが、最初は「会わない」と言っていた人が「カム・イン」と歓迎してくれたりします。//


 本人より、息子や娘が日本に厳しいこともよくあります。「父が戦争で別人になってしまった」「理不尽に殺された」という理由です。本人は日本軍に殴る、蹴るの仕打ちを受けながらも、日本人とのいい思い出もあったりするんです。//


 -九二年に元捕虜が最初に日本に行くことになりますね。//


 最初は五人ぐらい参加者があるかな、と思っていたのですが、希望者は予想を超えて四十人ほどにもなりました。最終的な参加者は二十六人でしたが、それでも予想外に多かった。慌てて企業を回り、ぎりぎりまで支援をお願いしました。//


 元英兵には手記や詩を寄せてもらい、日本語訳を付けた冊子をワープロで手打ちして作りました。詩には「通訳のサトウ」「炭鉱仲間のオオクボさん」と個人名も出てきます。「ジャップ(日本人への蔑称)はニンジン全部食べ、おれたちゃ葉っぱをいただいた」など、彼らは当時をはっきりと覚えているんです。企業には冊子を見てもらって趣旨を伝えました。積極的な企業もありましたが、尻込みする会社も多かったです。//


 いい反応ばかりじゃなかったです。駐英大使経験者の一人からは「すぐやめなさい」ときつく言われました。歴史問題は腫れ物に触るような対応で「過去を蒸し返してどうする」という感じでした。元捕虜の間では「ケイコはキリスト教徒を装って和解を持ち掛けてくる日本政府のスパイだ」という手紙が回りました。//


 -日本政府の反応はどうでしたか。//


 九五年から十二年間、政府が支援してくれました。きっかけは九五年が終戦五十年で、英国では元捕虜たちが大規模な行進を計画し、反日ムードが高まっていたことです。日本人の駐在員の家族は、外に出るのを怖がっていたほどです。//


 九四年、私たちの活動に、当時の藤井宏明・駐英大使から「個人としてできるだけのことをしたい」と言っていただけました。直後に、ロンドンの大使館員有志から寄付の小切手がたくさん届いたことを覚えています。翌九五年にロンドンの日本大使館から「日英和解」活動として正式な支援の申し出がありました。//


 -活動で印象深いことは何でしょう。//


 憎しみって体を硬くするんです。逆に赦(ゆる)すと体が軽くなる。車いすの元捕虜で、日本に行ったら車いすがいらなくなり、立って歩けるようになった人もいるんです。//


 九八年の天皇陛下訪英のとき、沿道で日章旗に火を付けて抗議し有名になった元捕虜のジャック・カプランさんという方がいました。たびたび英地方紙に登場して日本批判の発言を繰り返し、「反日」の象徴のような方でした。//


 二〇〇二年に私たちの招きに応じて訪日してもらい、すっかり変わってくれました。「日本人は人間味があって誠実な人たちだった。敵は人間でなく、戦争そのものなんだ」と。数年後、彼は八十八歳で亡くなりますが「日本も許せたし、安心してあの世に旅立てる」と言い残してくれたそうです。和解の力を感じます。//


 <ほーむず・けいこ> 第2次大戦中、旧日本軍の捕虜となった元英兵や遺族らを日本に招き、和解を進める支援団体「アガペ・ワールド」を主宰。1948年2月、三重県熊野市紀和町生まれ。79年からロンドン在住。92年の活動開始以来、英国を中心にオーストラリア、カナダ、米国の元捕虜ら約1000人と面会し、日本に計500人以上を招いている。日本での訪問先は元捕虜の慰霊碑がある熊野市のほか、被爆地の広島、長崎など。元捕虜が高齢化し、日本政府の支援が途絶えた2007年以降も遺族らの自費の日本訪問を手助けする。1998年に英エリザベス女王から大英帝国第4級勲功章、2018年4月に旭日双光章を受章。//

◆あなたに伝えたい//


 憎しみって体を硬くするんです。逆に赦すと体が軽くなる。車いすの元捕虜で、日本に行ったら車いすがいらなくなり、立って歩けるようになった人もいるんです。//

◆インタビューを終えて//


 和食ブーム、アニメ人気と、英国でも最近の日本の評価は高い。日本人としての居心地はよく、その昔、日英が交戦国だったことはほぼ忘れかけていた。//


 そんな折、六月にロンドンの日本大使館から「日英和解レセプション」という案内が届いた。一九九七年から続くという行事。今回、参加した元捕虜は百六歳の方一人だけになってしまったが、旧日本軍による英兵捕虜は五万七千人、民間人抑留者も二万人に及んだという。//


 ホームズさんもこの行事の出席者。「昔は息子たちもいじめに遭った」と、少し前までむき出しだった英国の反日感情を伝えてくれた。親善を支える不断の努力を忘れてはならない。//


 (阿部伸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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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 케이코 전 영국 병 포로 지원자 : 그 사람에 육박 : 주니치 신문 (CHUNICHI Web) 주택 케이코 전 영국 병 포로 지원자 사진 아베 伸哉 ◆ 역겨운 전쟁 화해를 도모하고자 // 전후 처리 문제 라고하면 아시아와의 관계에 눈이 방향 경향이있다. 그러나 영화 '콰이 강의 다리'(1951 칠년)로 대표되는 것처럼 일본군에 의한 동남아시아에서의 영국 병사 포로의 강제 노동은 영국 국민들에게 "학대"로 기억에 새겨 져있다. 아직도 반일 감정이 강했다 서른 년 전 영국에 거주하는 주택 케이코 씨 (70)는 원래 포로들을 일본에 초대 활동을 시작했다. 일영 전후에 정면으로 부딪쳐 온 생각을 들었다. //

 - 영국과 첫 관계를 가르쳐주세요. // 

고등학교 졸업까지 미에현 구마. 외국인은 거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도쿄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무렵에 알게 된 영국 남성과 결혼하여 영국으로 이주하게되었습니다. 1979 년의 것입니다. // 그러나 그 다섯 년 후,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의지 썬 생활 이었기 때문에 절망 했어요. 장남이 열 세 살 둘째 아들이 열 살, 난 그냥 숙제 돕기도 할 수 없다. 아이를 기숙사 제 학교에 넣어 나는 1988 년에 임시 구마로 돌아간 것입니다. // 

- 왜 전 영국 병 포로에 관심을 갖게. // 

실 구마 入鹿 (돌고래)라는 지역에 전 영국 병 포로의 위령비가 있고 전시는 구리 광산에서 포로를 일하고있었습니다. 영국으로 이주 전에 어머니와 간 적이있었습니다. 남편이 사망 "저기 가고 싶다"고 공연히 생각하게 되었죠. // 오래간만에 찾아 가면 옛날에는 벽돌과 십자가의 소박한 비였던 것이 새로 훌륭한 위령비에 바뀌어있었습니다. 과소 마을이지만, 어르신들이 깨끗이 청소하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입 사슴으로 사망 한 영국 병사 열 여섯 명의 이름과 강제 노동의 경위가 써있어, 그것을보고 순간에 "이 사람들의 어머니를 찾지 않으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중히 묻혀 있다고 전했다 싶었습니다. // 入鹿에는 가혹한 노동으로 알려진 태국 버마 (현 미얀마) 국경 "泰緬 (체면) 철도 '건설을 경험 한 영국 병사 삼백 명이 와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로 동원 일본의 젊은이들은 포로인데 가슴을 펴고 구리 광산으로 행진 해 들어가는 영국 병사에게 경의를 품고, 영어와 일본어를 가르치거나 찐 빵을 나눠도 있었다고합니다 . // 

- 유족에게 즉시 연락을 취할 수 있었습니까? // 

일년 정도지나 어머니가 시청을 통해 入鹿에 있던 원래 포로의 연락처를 찾아주었습니다. 조 커밍스 씨라는 분으로, 편지를 보냈 더니 "이렇게 훌륭한 위령비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장이 왔습니다. 조를 통해 당시 영국에 七十 세 곳이었다 원래 포로의 조직에 연락을 받았지만 모두 "잔인한 일본인이 이런 일 리가 없다"는 거부 반응입니다. 결론을 말하면, 입 사슴으로 숨진 열 여섯 명의 어머니는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결국 화해의 여행을 계획하고 원래 포로와 가족을 일본에 초래하게됩니다. 어떻게 설득 했습니까. // 

구일 년 십 월 닷새 것입니다. 조에서 런던에서 구 일본군 포로 경험자의 전국 대회가 있다고 듣고 난 혼자 가기로했습니다. 지인은 "절대로 가지 마라"고 거침했습니다. "They will eat you alive (산채 밥이 될거야)」라고. //

 - 어떻게 되었습니까. // 

중에 들어 원래 포로들에게 "당신들의 생각을 일본인에게 전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증오의 도가니 였지요. // "무엇하러 온」 「일본인은 싫어, 나가라" "누가 일본인 보는가?" "일본인은 전시중인 것을 아무것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 기독교 나는 욕설을 받으면서 오로지기도하고 혼잣말을했습니다. "하나님은 증오를 가진 사람들을 매우 중요시하고있다"고. "지금의 일본을 보고받을 수 그들의 치유된다"고 결심이 강해졌습니다. 개별적으로 만나, 완고한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조의 소개로 入鹿에 있던 원래 포로 다섯 명 정도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이 「캠 인 "환영 해 주거나 합니다. // 본인보다 아들이나 딸이 일본에 힘든 일도 자주 있습니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다른 사람이되어 버렸다" "불합리하게 살해됐다"는 이유입니다. 본인은 일본군에 때리고 발로 처사를 받으면서도 일본인과의 좋은 추억도 있기도합니다. // 

- 92 년 전 포로가 처음에 일본에 가게 되는군요. // 

처음에는 다섯 명 정도 참가자가 있는지,라고 생각 했습니다만, 희망자는 기대 이상으로 사십 여명이되기도했습니다. 최종 참가자는 26 명 이었지만, 그래도 예상외로 많았다. 당황해서 기업을 돌고 직전까지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 원래 영국 병사는 수기 나시를 보내달라고 일본어 번역본을 붙인 책자를 워드 프로세서 수타하여 만들었습니다. 시는 "통역 사탕」 「탄광 동료 오오쿠보 씨」라고 개인 이름도 나옵니다. "잽 (일본인의 멸칭) 당근 전부 먹고 오레 타짜 잎을받은 '등 그들은 당시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업에는 책자를보고 받고 취지를 전했습니다. 적극적인 기업도있었습니다 만, 주저하는 회사도 많았습니다. // 좋은 반응서야 않았습니다. 주영 대사 경험자 중 하나에서 "즉시 중단하라"고 바짝 들었다. 역사 문제는 종기에 손대는 같은 대응 "과거를 蒸し返し 어떻게 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원래 포로들 사이에서는 "케이코는 기독교를 가장하여 화해를 계속하면서 오는 일본 정부의 스파이하다 '는 편지가 돌았습니다. // 

- 일본 정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 

95 년부터 십이 년 정부가 지원하여주었습니다. 계기는 95 년이 종전 오십 년에 영국에서 원래 포로들이 대규모 행진을 계획하고 반일 무드가 높아지고 있었다 것입니다. 일본인 주재원의 가족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 1994 년 우리의 활동에 당시 후지이 히로아키 · 주영 대사에서 "개인적으로 최대한의 것을하고 싶다"고 말했다받을 수있었습니다. 바로 런던 무관 유지에서 기부 수표를 많이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듬해 95 년에 런던의 일본 대사관에서 "일영 화해 '활동으로 공식적인 지원 의사가있었습니다. // 

- 활동에서 인상 깊은 것은 무엇일까요? // 

증오라고 몸을 딱딱하게하는 거죠. 반대로 용서 파업 몸이 가벼워진다. 휠체어 원래 포로로 일본에 가면 휠체어가 필요 없게 서서 걸을 수있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 1980 년 일본 왕 訪英 때 길가에서 일장기에 불을 붙여 항의 유명해진 전 포로 잭 카플란 씨라는 분이있었습니다. 종종 영국 지역 신문에 등장 해 일본 비판 발언을 반복 '반일'의 상징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 2002 년에 우리의 초청으로 방일 해달라고 완전히 변했다주었습니다. "일본인은 인간미가 있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원수는 인간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고. 몇 년 후, 그는 여든 여덟 살에 사망하지만 "일본도 허락했고, 안심하고 저 세상으로 旅立てる"라고 말을 남겨 주었다고합니다. 화해의 힘을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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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 케이코> 제 2 차 대전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된 전 영국 병사와 유족들을 일본에 초청하여 화해를 추진 지원 단체 '아가페 월드」를 주재. 
1948 년 2 월 미에현 구마시 키와 마을에서 태어났다. 79 년부터 런던 거주. 92 년의 활동 개시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호주, 캐나다, 미국의 전 포로 등 약 1000 명을 만나 일본에 총 500 명 이상을 초래하고있다. 

일본 방문은 원래 포로의 위령비가있는 구마 시외 피폭 지 히로시마, 나가사키 등. 원래 포로가 고령화하고 일본 정부의 지원이 끊긴 2007 년 이후에도 유족들의 자비의 일본 방문을 도와 준다. 1998 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제 4 급 공로 장, 2018 년 4 월 욱일 쌍 光章을 수상. // 

◆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 증오라고 몸을 딱딱하게하는 거죠. 반대로 용서하면 몸이 가벼워진다. 휠체어 원래 포로로 일본에 가면 휠체어가 필요 없게 서서 걸을 수있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 

◆ 인터뷰를 마치며 // 일식 붐, 애니메이션 인기와 영국에서도 최근 일본의 평가는 높다. 일본인으로서의 기분은 좋고, 그 옛날 일영이 교전국이었던 것은 거의 잊고 있었다. // 그런 때, 6 월에 런던의 일본 대사관에서 "일영 화해 리셉션"라는 안내가 닿았 다. 1997 년부터 계속하는 행사. 이번에 참가한 전 포로는 161 세 분 혼자만이되어 버렸지 만, 일본군에 의한 영국 병사 포로는 오만 칠천 명 민간인 억류자도 두 만명에 이르렀다 고한다. // 홈즈 씨도이 행사의 참석자. "예전에는 아들들도 왕따를 당했다"고 얼마 전까지 맨발이었다 영국의 반일 감정을 전해 주었다. 친선을 지원 부단한 노력을 잊어서는 안된다. // (아베 伸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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