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2

1901 '말모이', 어디까지가 사실일까...국어사학자에게 직접 물었다

'말모이', 어디까지가 사실일까...국어사학자에게 직접 물었다 - 오마이스타


영화
'말모이', 어디까지가 사실일까...국어사학자에게 직접 물었다

배우 윤계상의 외골수 연기, 정인승 선생 실제 성품과 닮아"
신상미(hippiedream)
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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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어사전 편찬 과정 혹은 한글 운동도 영화 소재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그런 것도 영화 소재가 될 수 있나 고개를 갸웃거릴 법하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일제로부터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국어학자들의 실화를 감동적으로 녹여내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26일 기준, 전국에서 258만 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이 영화를 봤다. 우리말과 글의 역사를 연구해온 '국어사학자'들은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영화 줄거리가 어떻게 실제와 같고 다른지도 영화를 본 관객의 관심거리다. <말모이>를 본 국어사학자들의 '남다른' 소회를 들어봤다.



▲<말모이>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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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운동은 민족운동= 소강춘 국립국어원 원장은 지난 22일 "작가가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각본을 잘 썼다"면서 "사실이 아닌 것도 영화 속에 많이 있지만 당시에 그런 일을 했던 대표적 인물상을 끌여들여서 기술을 잘했고 감정에 호소를 많이 했다. 아주 감동적이고, 참 잘 만든 영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 원장은 또 "개화기 때 조선에 들어온 러시아·영국·프랑스인들이 한러·한영·한불사전을 만드는 걸 보고 선진국들은 다 사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당대 학자들은 사전이 없는 민족은 문화 민족이 아니라는 의식이 강했다. 결국 민족운동이었다. (사전 편찬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힘듦을 겪었다"고 덧붙였다. 

조선어학회 주필을 지낸 건재 정인승 연구자인 이태영 전북대 교수는 23일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일제 때 한글로 민족운동을 한 것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까웠다"며 "한글이란 것을 우리가 당연하게 인식하는데 민족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단어 하나, 각 지역의 방언 조사 과정을 통해 이런 식으로 사전이 편찬됐다는 것,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사전이 만들어지는 절실하고 절절한 과정을 보여줘서 제작진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소회를 전했다. 

반면 국내 첫 개별 품사사전인 <부사사전>(2014)을 편찬한 손남익 강릉원주대 교수(한국어의미학회 회장)는 23일 "시작과 끝에 (사실을 담은) 자막이 나와서 픽션이 섞인 중간 부분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오해를 사면 역사 인식에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손 교수는 "영화를 보면서 원고를 잃어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면서 "본인도 <부사사전>을 만들 때 외장 하드 4개에 따로 저장을 해뒀다. 일제강점기엔 컴퓨터도 없었고 3만 2000매의 원고와 20만장의 어휘 카드를 따로 저장할 수 없어서 많이 어려웠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판수가 정환과 다투고 나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류정환은 건재 정인승=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로 나온 류정환(윤계상)의 실제 모델은 누구일까. 1942년 일제에 피체됐던 조선어학회 회원 33인이 모두 모델일 수 있다. 이태영 교수는 이에 대해 1942년 당시 조선어학회 내 사전편찬실의 주필(총책임자)을 맡은 정인승 선생이 류정환의 모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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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건재 정인승과 가깝다. 외솔 최현배는 전체 학회의 책임자였고, 고루 이극로는 상임 집필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정인승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5년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영어 교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국어를 못 가르치게 돼 있음에도 정인승은 방과후 따로 시간을 내 과외로 국어를 가르쳤다. 일제 경찰이 이에 대해 사납게 다그치자 맞서서 호통칠 정도로 강인하고 대쪽 같은 풍모를 지녔다. 

정인승은 자신을 탄압하는 경찰을 피해 1935년에 고창고보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와 <조선말큰사전> 편찬에 합류했다. 최현배가 "정 선생이 사양하면 사전을 못 만든다"며 주필을 맡긴 것. 이 교수는 "배우 윤계상의 외골수 연기가 정인승 선생의 실제 성품과 닮았다"며 웃었다. 

◇간도에서 시베리아까지 걸어간 이극로=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영화 속 류정환의 대사다. 이는 조선어학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극로가 남긴 말이다. 손남익 교수는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선생 등 많은 인물이 있지만, 류정환 역할에 대해 딱히 누구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다만 류정환의 대사는 이극로가 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극로의 생애와 관련해 놀라운 에피소드가 한가지 전해진다. 시베리아 치타에서 소설가 이광수가 젊은 이극로를 우연히 만났다. "자네 여기 어떻게 왔나?" "걸어서요. 간도에서부터 걸어 왔어요." 이극로가 태연히 답했다. "그 거리를 걸어서 왔다고?" 이광수가 놀라 묻자 다시 답했다. "여비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걸었어요."

이렇게 보면, 실제의 이극로는 부유한 친일파 아버지를 둔 영화 속 류정환보다 <운수 좋은 날>에 펑펑 울면서 공감하는 김판수(유해진)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이극로는 '거지 박사' '짚신 박사'로 불릴 만큼 소박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극로는 1893년 경남 의령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3년 동안 머슴으로 일하기도 하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했다. 이후 1916년 봄 상하이에 도착해 독일계 퉁치 대학에 입학했다. 4년 뒤 동향인의 후원으로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 <중국의 생사공업>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궁핍 및 배고픔과 싸우면서 얻은 결과물이었다. 1929년 귀국 뒤 그는 곧장 조선어학회에 가입해 사전 편찬에 합류했다.



▲판수가 정환에게 한글을 배우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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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들은 만 3년간 옥고= <말모이> 속 일련의 사건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먼저 일제가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며 탄압한 것은 사실이다. 이 교수는 "일본 순사들이 편찬실에 자주 와서 뒤지는 장면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민우철(민진웅)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아내를 살리기 위해 일제에 협조, 탄압의 발단을 제공하는 장면은 사실이 아니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듯 통학 전차 안에서 여학생들의 대화를 엿들은 일본 경찰이 이들을 연행, 고문해 정태진이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했다는 자백을 받아낸 것이 일명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후 33인의 학회 관련자가 검거됐고 일제에 의해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로 날조됐다. 학자들은 1942년 10월께 체포당해 1945년 8월 17일까지 만 3년간 갇혀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속엔 조 선생(김홍파)만 고문으로 희생되고, 나머지 회원들은 전국의 사투리를 수집하고 공청회를 여는 등 활동을 계속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밥알 단추 만들어 옷 여민 일석 이희승= 이와 관련해 기자가 접한 국어사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영화에서 '감옥서 고생하는 장면'이 적은 것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이태영 교수는 "함흥형무소에 있을 때 어려운 과정에서도 학회 회원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대목들이 회고록에 많이 나온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영화엔 나오지 않는 실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이희승 선생이 감방에서 주는 밥을 조금 남겨놨다가 단추를 만들었다. 밥으로 단추 모양을 만들어 말린 뒤 옷에서 뺀 실로 밥알 단추를 바느질했다. 감옥에서 얼마나 절실했으면 옷을 여밀 게 없으니까 밥알을 갖고 단추를 만들었다고 하면 지금 사람들이 믿을까 싶다. 고문받고 오면 서로 위로하는 내용도 많이 나온다. 고문 종류도 다 기록돼 있다." 

검거에서 기소, 예심 종결까지 2년에 걸쳐 경찰은 손발을 등 뒤로 돌려 봉으로 묶고 천장에 매다는 공전, 콧속에 고춧가루 물을 부어 넣는 해전, 나무총이나 죽도로 때리는 육전 등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이윤재와 한징이 옥사했다.



▲1945년 촬영된 조선어학회 해방 기념 사진.ⓒ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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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창고서 발견된 2만 6500장 원고는 사실= <말모이>에서 조 선생은 퇴근 뒤 그날 작업의 필사를 따로 해두고 이것을 숨겨놓는다. 정환은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어학회 지부로 위장해 일제에 협력하는 척한다. 또 정환과 판수는 한밤중에 찾아온 우편배달부에 이끌려 간 체신국 창고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우편물을 발견한다. 이 우편들은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사투리들이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잡지 <한글> 속 '전국의 사투리를 보내달라'는 광고와 이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사투리를 보낸 것, 표준어 확정을 위해 전국의 국어교사가 모여 공청회를 연 것은 사실이다. 조선어학회는 이를 통해 1936년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했다. 일제 말기로 그려진 영화 속 설정보다 한참 빠른 시기다. 소강춘 원장은 "전국적으로 5000여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줬다"며 "표준말 사정을 한 것은 맞지만, 영화에서처럼 극장에서 한 것은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또 "해방 뒤 서울역 창고에서 원고를 찾는 등 굵직한 사건은 실제 사실과 잘 맞는다"고 말했다. 2만장이 넘는 사전 원고는 함흥지방법원에서 경성고등법원으로 보낸 상고심 재판 관련 서류에 포함돼 있었으나, 해방을 맞으면서 경성역 조선통운(현 CJ대한통운) 창고에 방치돼 있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이 석방되자마자 서울로 달려와 애타게 원고를 찾았고 1945년 9월 8일 기적적으로 원고가 발견됐다. 

손 교수는 "사전 집필의 어려움과 지난함, 표제어 선정·어휘 풀이의 어려움, 인간적 고뇌, 집필진 간의 갈등 등이 약하게 표현된 것은 아쉽다"면서도 "문맹자의 한글 학습 과정,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 민족 독립, 방언의 소중함이 잘 표현됐다"고 밝혔다. 

1936~1957년까지 21년간의 편찬사 중 영화는 일부만을 극화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최현배가 <조선말큰사전>의 원고(4·5·6권에 해당)를 땅에 묻고 피란을 갔다. 서울 수복 이후 회원들이 다시 모여 편찬을 재개, 유네스코로부터 종이와 인쇄비를 지원받아 1957년에 비로소 총 6권이 완간됐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영화 못지않게 극적이다. 현재 남북한은 <조선말큰사전>을 계승하는 <겨레말큰사전>의 남북공동편찬사업을 올해 안으로 재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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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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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출생1893년 8월 28일
대한제국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사망197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사인병사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호는 고루, 물불
학력중국 동제대학, 독일 훔볼트대학교
직업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종교대종교
부모이근주
배우자김공순
자녀이억세, 이대세
이극로(李克魯, 문화어: 리극로1893년 8월 28일 ~ 1978년)는 전의예안이씨 대종중 전서공파 28대세손 울산 화수회 문중 예조참판 함장파 15대세 후손으로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 호는 "고루"이며,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선어학회 회장이자 한글학자로, 복역하다 해방과 함께 출소하셨고 당 간사자격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대동한 바 있으며 전란속에 잔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초대 내각의 무임소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20년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거쳐 1927년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 한글 연구에 참여,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전임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에도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 광복 후 석방되었다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이 되고,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으며, 공화국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수학[편집]

이극로는 1893년 8월 28일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서당에서 공부한 뒤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에 독립군이 되고자 서간도에 망명했다.
1912년 회인현 동창학교에서 후일 대종교의 제3세 교주가 된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에 귀의하였고, 교사로서 박은식 등 저명한 민족주의자들과 활약하였다. 동창학교 폐교 후 1915년 무송현 백산학교에서 다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동제대학에 입학하여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유학생활 및 독립운동 활동[편집]

1920년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가 고려공산당 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데에 이동휘와 동행하였다가,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에 유학하게 되고 여기에서 1921년~1927년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어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강좌를 개설하여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1]
1927년 제1회 세계 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김법린, 이의경(이미륵), 황우일 등과 출석하여 '조선 독립 실행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조선에 있어서 총독정치를 중지시킬 것','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 세 항목의 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당시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던 허헌을 만나 조우하기도 했다. 졸업 후 영국에 유학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미국에 들러 서재필과 이승만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한글 연구 활동[편집]

국내 독립운동 활동 및 한글연구[편집]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국, 일본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을 구상했던 이극로는 1929년 1월 귀국했다. 이후 한글학자와 교육자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글 연구단체인 한글학회의 전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 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그밖에 1930년 신간회 대표로 동포구제의 목적을 띠고 만주지방을 돌아보다가 귀국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편집]

1942년 7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이윤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했다. 10월 1일 함흥재판소에서 그는 징역 6년형 선고받았고, 같은 한글학자로 조선어학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근엽 교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7일 내가 15살 때인데 조선어학회 회원인 모기윤 선생이 교회 청년 30여 명을 함흥형무소 앞으로 모이게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었다. 모기윤 선생이 조선인 검사에게 광복이 되었는데 왜 독립운동가들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서 네 분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이극로, 최현배정인승이희승님인 것을 그 뒤 알게 되었다. 그 때 한 분(이극로 선생으로 보임)은 들것에 들려나오고 세 분은 부축해 나오는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틀이 지났지만 일제가 무서워 태극기를 들고 환영도 못했다. (하략)[2]
이후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1945년 광복 이틀 후 8월 17일 출소했다.[3] 이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지내는 이근엽 교수가 당시 출옥당시를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 직후[편집]

1945년 8월 광복 후 석방되었다. 해방정국 이극로는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붉어져,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4] 이후 부활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선출되고,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에 위촉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에 입당, 그해 건민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봄부터 미군정 주도로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자, 그는 좌우합작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입법기관(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서는 좌우합작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편집]

1947년 초에는 조봉암과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재개 조짐이 보이자, 좌우합작위원회에 가담해 '시국대책협의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되었다. 그 해 12월 20일김규식이 주도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5]
1948년 4월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 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하지만, 이극로는 북한에 잔류하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한편 월북 전 주요논저로 《조선어 임자씨의 토》(1935)·《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1936)·《짓말에 대하여》(1937) 등과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7)·《고투 40년》(1947)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편집]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사진의 리극로(무임소상, 제3열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1953년 12월까지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에 발탁되었으며[6] 이후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공화국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등을 지냈으나,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에서 숙청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61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이후 본격화된 북한 언어 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주도하였고,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 등을 남겼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에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 있다. 1978년 사망했다.

사후[편집]

일제강점기때부터 시작해서 오랜 기간의 교수 및 연구활동을 통하여 한국어 발전과 과학적 해명에 큰 공을 세웠다.[1] 이런 공로로 살아생전 1973년 북한 정부로부터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의 원사(1973년)이며 박사학위(1970년)를 받았다. 사후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1]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 관심이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이극로가 1920년대 외국(독일)에서 유학했을 시절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아 주목받고 있다.[7]

일화[편집]

대한민국의 안과의사인 공병우의 세벌식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이극로가 눈병으로 공병우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병우는 한글학자 이극로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공병우는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8]

기타[편집]

이극로는 '좌익'계열 인물이 아닌 중도우파 성향의 노선을 견지했던 한글학자였다.[9] 는 시각도 있다.

논문 및 저서[편집]

논문[편집]

  • 〈조선어 어음의 된소리 음리에 대한 과학적 천명〉(1928)
  • 〈훈민정음의 독특한 음성 관찰〉(1932)
  • 〈'·'의 음가에 대하여〉(1937)
  • 〈조선말 역점연구〉(1957)

저서[편집]

  • 〈국어학 논총〉(1948)
  •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9)
  • 〈조선말 조(調) 연구〉(1966)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이동:가 이극로 - Daum 백과사전
  2. 이근엽 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어학회 사건 증언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 송건호전집》,송건호 저.
  4.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5.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p593
  6.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7. 조준희, <1920>, 《한민족연구》5, 한민족학회, 2008.
  8. 공병우 타자기, 1949
  9.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p346

관련 서적[편집]

  • 이극로/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아라, 2014)
  • 동서문제연구소, 《북한인명사전》(중앙일보사부설 동서문제연구소편저, 1981)
  • 한글학회, 《한글학회 예순돌 기념 국어학 도서전시회 목록》(한글학회, 1981)
  • 한글학회, 《한글학회 50년사》(한글학회, 1971)
전임
(없음)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임소장관
김두봉과 공동
1948년 9월 9일 - 1953년 12월
후임
리극로
전임
김두봉
리극로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임소장관
1953년 12월 - 1957년 9월 20일
후임
김달현
홍기황
전임
홍명희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홍명희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후임
김원봉
전임
김원봉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홍명희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후임
홍명희
박금철
전임
홍명희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홍명희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후임
김원봉
전임
김원봉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홍명희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후임
홍명희
박금철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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